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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바람직한 식사는 채식과 육식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인간은 초식동물이 아닌 잡식동물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고기 좋아하는 원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인류의 고기 섭취 비율은 장소와 계절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20∼40%였다. 인간의 고기 섭취 비율을 20%로 낮게 잡아도, 이 비율은 235종의 영장류 가운데 가장 높다. 진화의 레이스에서 최근 인간과 갈라져 나간 침팬지도 고기 섭취 비율이 4%에 불과하다. 육식 위한 과잉 사냥으로 동물 멸종 인간의 진화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으로 '사냥 학설'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냥과 육식을 통해 언어와 사회적 협동 관계가 발달하고, 영양 상태가 좋아져 뇌가 커졌다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원시 사회의 표본으로 삼고 장기간 연구를 해온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쿵족은 하루 일과의 40%를 사냥을 하거나 또는 사냥 얘기로 보낸다. 이들 사회에는 '고기 고프다'는 단어도 있다. 인간이 고기 좋아하는 원숭이로 진화하면서 지구에서는 매머드 등 대형 포유류들이 대량 멸종했다. 그 원인도 사실은 워낙 인간이 사냥과 육식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동안 과학계에서는 동물의 멸종 원인을 놓고 빙하기 때문이라는 가설과 인간 때문이란 가설이 팽팽히 대립돼 왔다. 2001년 과학 잡지 에는 신대륙인 호주와 아메리카에 인간이 침입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숫자의 동물이 멸종됐다는 논문이 두 편 실렸다. 호주에서는 마지막 빙하기 때 무서운 발톱을 지닌 캥거루 등 무게 45㎏ 이상의 대형동물 24속 가운데 23속이 멸종했다. 멜버른 대학 지질학자 리처드 로버츠가 이끄는 연구팀은 대형동물의 뼈가 무더기로 나온 호주 지층들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이들이 묻힌 시기는 약 4만 6400년 전이었다. 호주에 인간이 발을 들인 시기는 5만 6000년 전. 불과 1만 년 만에 인간은 사냥을 통해 대형동물의 씨를 말린 것이다. 호주보다 훨씬 늦게 인간이 침입한 북미 대륙에서는 약 1만 년 전 41종의 초식동물 가운데 30종이 멸종했다. 들소, 매머드 등이 그것이다. 산타 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존 앨로이 교수팀은 수렵 채취인이 늘면서 동물이 한꺼번에 멸종했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과 초식동물 41종의 개체수 변동 관계를 모형으로 만들어 컴퓨터로 모의실험을 했다. 이 실험은 전체 41종의 초식동물 가운데 32종의 운명을 비교적 정확히 맞추어 '인간에 의한 과잉 살육 가설'을 입증했다. 이 모의실험에서 30종의 동물이 멸종하는 데 걸린 평균 시간은 1229년. 이는 1만 3400년 전 무렵부터 북미 대륙에서 살았던 최초의 인류 거주 흔적과 1만 2260년 전 동물의 잇따른 멸종을 알려주는 화석 기록과도 거의 일치했다. 1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다른 대륙으로 진출한 호모 사피엔스는 다름 아닌 '킬러 사냥꾼'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음식으로 단백질 섭취해야 인류가 수백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로 살 때는 숲 속의 과일과 견과류를 주로 먹는 원숭이였다. 그러나 빙하기가 엄습해 아프리카의 숲이 건조한 사바나 초원으로 바뀌고 사냥과 육식에 오랫동안 적응하면서 육식에 적합한 신체 구조를 갖게 됐다. 즉, 인간은 생선이나 고기에서 풍부한 필수 아미노산과 지방산, 철, 아연, 비타민 B6, 비타민 B12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의 몸은 단백질이란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카락, 피부, 눈, 심장, 뇌, 근육이 대부분 단백질이다. 뿐만 아니라 산소를 실어 나르는 헤모글로빈, 적혈구와 인체의 대사를 조절하는 호르몬과 효소도 단백질이다. 식물이나 미생물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단백질을 스스로 합성할 수 있으나, 동물은 그런 능력이 없으므로 단백질 또는 아미노산을 음식물로 섭취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동물성 단백질은 식물성 단백질보다 영양가가 높다. 또 단위 중량당 단백질의 함유량도 동물이 식물보다 많다. 단백질의 종류에 따라 아미노산의 종류와 양도 다르므로 여러 가지 단백질을 고루 섭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단백질을 먹으면 아미노산으로 잘게 부서져 혈액 속에 공급된다. 그러면 세포가 이들 아미노산 가운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골라 항체, 호르몬, 효소, 혈액을 만든다. 이때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면 세포와 효소를 만들지 못해 몸에 이상이 온다. 다양한 살코기는 완벽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설사 채식주의자라 하더라도 계란과 우유를 먹으면 필수 아미노산을 얻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채식주의자가 필수 아미노산 부족에 걸리지 않으려면 콩, 과일, 호두, 식물 씨를 적절히 먹어야 한다. 그래야 채식만을 할 때 부족해지기 쉬운 리신, 트립토판, 메치오닌 같은 필수 아미노산을 공급받을 수 있다. 채식과 육식의 적절한 조화 필요해 채식만을 할 경우 부족해지기 쉬운 또 다른 영양분은 붉은 색 고기에 특히 많은 철과 아연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도 가장 흔한 영양실조가 바로 고기를 섭취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철 결핍성 빈혈이다. 혈액이나 살코기가 붉은 색을 띠는 것은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이 철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은 체내의 산소 운반을 맡는 헤모글로빈이 산소와 결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철분이 부족하면 헤모글로빈을 만들 수 없어서 안색이 창백해지고, 쉽게 피로해지며, 저녁이 되면 발이 붓는다. 철 성분은 붉은 색 살코기나 간에 많지만 시금치, 해조류, 참깨, 콩에도 꽤 들어 있다. 하지만 식물에 들어 있는 철은 체내에 잘 흡수되지 않는다. 고기에 들어 있는 헴철은 식물에 들어 있는 철보다 인체가 이용하기가 훨씬 쉬워 체내 흡수율이 4배나 높다. 식물 속에 들어 있는 철분은 무기 화합물 형태의 철이고, 육류에 들어 있는 철은 인체가 흡수해 이용하기 쉬운 유기 화합물 형태의 헴철이다. 현재 유럽에서는 철 결핍 때문에 정부의 지도 아래 주식에 철을 첨가하는 방법이 실시되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밀가루에 철을 첨가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 덴마크, 영국, 일본에서도 철의 함량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철의 결핍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낮아서 효과적인 대책은 아직도 세워지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유아의 아연 부족도 심각한 문제다. 아연이 부족하면 인지 능력과 생리 발달이 저해되고 면역력도 약화된다. 한국의 어린이에게도 아연 부족은 성장 장애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경희대 식품영양학과 박현서 교수가 2003년 유아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열 명 중 아홉 명이 아연 부족증에 빠진 상태였다. 어린이들의 체내에 아연이 부족할 경우 입맛이 없고 키도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는다. 어린이들에게는 아연이 풍부한 살코기, 굴, 조개 등 아연 성분이 많은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는 직업인이 아닌 '선생'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적잖은 도전과 위로를 주는 영화이다. 박준용 | 한양대 강사, 문화평론가 불가능한 완성에 맞서 투쟁하는 삶 흔히 사용하는 속담에 말을 물가에 까지 이끌 수는 있으나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말이 목이 마른지 어떤지를 분간하여 물가로 인도하는 사람조차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예로부터 교사에게 기대되는 여러 가지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아이들의 잠재적 가능성을 찾아내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교육현실에서 교사가 학생 개개인의 특별한 재능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발전하도록 돕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지나치게 많은 학생 수는 물론, 교사로 하여금 아이들에게만 집중할 수 없게 하는 과중한 업무와 입시 위주의 실용주의적 교육환경 등등은 교사를 인생을 먼저 살고 경험한 '선생(先生)'의 삶이 아닌 단순한 직업인의 길로 전락시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삶, 곧 그네들의 생각과 태도를 바람직한 방향성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충만한 관계가 곧 교사와 학생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어찌 보면 이 땅에서 교사의 길이란 불가능한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나아가는 삶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감상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는 그런 스승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적잖은 도전과 위로를 주는 영화이다. 외로운 가능성을 희망으로 이끌어 소년 빌리(제이미 벨)의 환경은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 그 자체이다. 자상했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쇠락해 가는 탄광의 광부인 아버지(게리 루이스)와 형은 가망 없는 파업으로 정부와 투쟁 중이며, 빌리가 돌봐야 할 할머니는 치매로 동네를 떠돌아다닌다. 사람들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 모습이다. 하나는 고통으로 인한 절망 속에서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고통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승화시켜 이를 극복해 내는 것이다. 후자의 표현이 좀 더 멋있어 보일런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조건에서 이런 승화는 대단히 드물 뿐만 아니라, 대개 반항적인 일탈의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기 쉬워 쓸데없는 객기로 오해받기 쉽다. 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느 사내아이들처럼 권투도장에서 원하지도 않는 권투를 배우던 빌리는 장소상의 문제로 같은 공간을 나누어 쓰게 된 여자아이들의 발레레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춤'이란 꽉 막혀있는 현실을 잊고 자유로운 비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요,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열악한 경제상황에 처해 있던 보수적인 아버지와 형,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눈에 사내아이가 권투를 하지 않지 않고 발레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객기요 일탈이며 반항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빌리의 도전은 제약을 받는다. 그런 빌리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었던 것은 발레 레슨을 맡고 있던 윌킨슨 부인(줄리 월터스)이었다. 아이들을 레슨 할 때조차 담배를 손에 놓는 법이 없는 윌킨슨 선생은 쇠락한 탄광마을처럼 지친 삶의 일상에 찌든 채 평범한 소녀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권투 글러브를 낀 채 호기심어린 눈으로 춤추는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던 빌리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의 만남이었지만 윌킨슨은 빌리가 가진 가능성의 가냘픈 빛을 '탈선'이 아닌 가능성으로 발견한다. 부모의 기대와 충돌하는 교사의 발견 하지만 그녀가 빌리를 대하는 방식은 혹자가 상상하듯 자상함과 배려로 가득 찬 이상적인 어떤 교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가난한 빌리에게 꼬박꼬박 레슨비를 독촉해 받아내는 냉정한 모습에서 볼 수 있듯, 그녀는 일방적인 도움을 주기 보다는 빌리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스스로 깨닫고 따라올 수 있도록 자극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말을 물가로 이끌 수는 있지만 결국 물을 먹어야 하는 말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빌리가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와 형이 이를 막으려 하자 가족들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단호한 어조로 빌리의 재능과 가능성을 주장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학부모와 교사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받는 오늘날, 아이를 사이에 두고 가정에서의 기대와 이와는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 교사의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은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다. 더욱이 가정이 교육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현실에서 교사가 거기에 개입해 방향과 진로를 바꾸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긴장과 갈등을 감수해야 한다. 또 설령 이렇게 된다한들 교사에게 돌아오는 것은 잘못되면 욕설이요, 잘되 봐야 그것은 오늘의 일이 아닌 먼 훗날의 어떤 것이기 십상이다. 한 마디로 지금 당장 교사에게 득 될 것이 없는 개입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긴밀해야 할 가정과 교사 사이의 간극은 현실 속에서 멀어지기만 한다. 예정된 실패임에도 불구하고 빌리의 미래를 위해 윌킨슨 부인은 어떻게든 이 간극을 뛰어 넘으려 애써본다. 그리고 기다린다. 최선을 다해 빌리의 가능성을 가정에 알리고 그것이 당장 거부되었을지라도 잠잠히 시간을 두고 가족들이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교사의 몫은 바로 여기까지이다. 완고하기 그지없던 빌리의 아버지는 윌킨슨 선생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내아이가 발레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방연료가 없어 죽은 아내가 소중히 여기던 피아노를 땔감으로 쓸 수밖에 없던 어느 암울한 크리스마스 저녁, 권투도장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빌리의 비상을 목격하고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아버지는 빌리를 위해 모든 것, 곧 자신의 존재감을 유지시켜 주던 유일한 힘이었던 자존심마저 내 던지는 결심을 한다. 멀리 윌킨슨 부인의 집에 찾아가 그녀가 옳았음을 인정하고 빌리를 부탁하는 것은 물론 파업 중인 동료들의 비난을 감수한 채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돌아가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선생'의 역할 가능성으로 가득 찬 아이가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있어야 하는 이상적인 조건을 영화 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아이의 원함과 행함, 그리고 이를 발견해 이끌어주는 교사와 희생적인 가족들의 헌신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적어도 영화 속에서 그것은 윌킨슨 부인으로 상징되는 교사의 역할이다. 그녀는 빌리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것이 온전히 발현되도록 자극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었던 가족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 안도록 설득했다. 이를 통해 교육의 세 주체라 할 수 있는 가정과 학교 그리고 학생이 같은 목표를 향해 걸어갈 수 있게 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최고의 무용수로 성장해 빌리의 공연장을 찾은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 속에 뜻밖에 윌킨슨 부인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생을 변화 시킬 만큼의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선생님과의 만남을 가졌던 이들은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 분이 어디에 계시는 지 알 수는 없지만 바로 우리 가슴 속에 선생님의 가르침이 생생한 감동으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무대 위 어둠을 가르며 비상하는 백조로 분한 빌리의 날갯짓 속에 윌킨슨 선생은 살아 있었다.
플라나리아 실험이란 걸 아세요? 2cm도 안 되는 뇌도 없을 것 같은 원시적 동물인 플라나리아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실험은 이런 겁니다. 그 녀석을 용기에 넣고 들어있던 물을 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곳에만 물을 붓고 그곳에 불빛을 비춥니다. 그러면 녀석은 물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한 거죠. 이 실험을 반복하면 플라나리아는 불빛이 비치는 장소로 물이 없어도 이동을 합니다. 학습을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실험을 반복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느 순간 녀석은 불빛이 아무리 비쳐도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물을 못 만나 죽고 만다는 게 실험의 요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플라나리아는 왜 꼼짝도 하지 않았을까요? 반복에 싫증이 난 건 아닐까요? 용기 내부의 재질을 바꾸거나 상황을 바꾸면 녀석이 다시 학습을 시작한다는 걸 보면 이 원시적 동물도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걸 지겨워한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이사카고타로의 책 ‘러시 라이프(Lush Life)’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몇십 년이나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똑같은 일을 계속하며 사는 인간은, 원시동물조차 질려버리는 그런 반복을 “인생이란 다 그런 거지 뭐”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버린다고 말입니다. 인생에 대해 뭘 안다고,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고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인생이란 다 그런 거지 뭐”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합니다. “사람의 하루는 다 그게 그거야. 우리들의 어제도, 자네 집사람의 오늘도, 또 다른 누군가의 내일도 한꺼번에 바라보면 다 똑같아 보여”라고 말이지요. 설사 인생이 릴레이처럼 연결이 돼서 오늘은 내가, 내일은 당신이, 그다음은 또 다른 인간이 주인공 역을 맡아 릴레이를 벌여도 결국은 다 똑같은 거니까. “인생이란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말입니다. 플라나리아보다 인간이 더 열등해서?, 아니면 너무나 고등생물이기에 그만큼 선견지명이 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왜 에셔(Escher)의 작품 중에 ‘그림 그리는 손’이라고 있잖아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손과 손이 얽혀있는…. 왼쪽 손이 오른쪽 손에게 “이봐 내가 지금 널 그리고 있어.” 그럼 오른쪽 손이 왼쪽 손에게 “멍청하긴, 너야말로 지금 내가 그리고 있잖아”라고 말하고, 거기에 화가 에셔의 손이 “그놈들 참, 계속 그렇게 다툰들 끝이 없을 것을. 잘들 해보라고. 난 갈 테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그 그림. 내가 삶을 사는 건가요. 아니면 삶이 나를 사는 건가요. 나를 그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인가요. 어쩌면 지금 나는 아직 불빛을 잃지도 않았고 열심히 살아가기 위한 물을 찾고 있는데, 지금 나를 읽고 있는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며, 아직 반도 안 읽었으면서, 이내 덮어버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이미 결론을 뻔히 알고 있다는 듯 “인생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말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저는, 아직은, 이사카고타로처럼, 그렇게 단정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까요. | 한국교육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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