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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9 일 맑음 아침 식사 대용으로 바나나를 샀다. 10루피 (260원 정도)에 5개는 주니 배가 부르도록 먹을 수있다. Tram(전철)을 탔는데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정류장 이름도 없고 안내 표시도 없어 난감했다. 시내 구경도 할 겸 무작정 끝까지 갔다. 차장이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 것 같은 데 힌두어로 물으니 알 수 가 없다. 영어를 못하는사람도 많아 의사소통이 안 될 때도 자주 있다. 종점에 내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호텔 근처의 중국음식점 howhua에서 mixed noodle soup(짬뽕)을 먹었다. 56루피였는데 맛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여기저기 LSD라는 간판이 붙은 집으로 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분당 20루피(520원)란다. 아내가 무척 궁금했었나보다. 162초에 54루피(1400원)를 지불했다. 다시 인터넷 카페에 들러 집으로 메일을 보냈다. 시간당 15루피(390원). 캘커타에서의 인터넷 요금은 싼 편인다. 한글이 지원되어 편리하다. 다만 자판을 외우지 못해 그를 입력하기가 좀 어려워 메일을 영어로 써야 했다. 카페를 나와 길을 걷는다. 거대한 인도인의 행렬에 나는 이방의 나그네, 그러나 미국에서보다는 낯선 느낌이 덜 드는 것 같았다. 비용에 대한 걱정이 덜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005.1.10월 맑음 아침 열시쯤에는 Al-Gaus Hotel에서 Continental Guest House로 옮겼다. Continental이 150루피로 50루피가 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고르 하우스를 다시 방문하였으나 사진은 찍지 못했다. 건물 내에서는 일체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 밖에서 찍으려 하나 사진을 찍을만한 장소가 없었다. 타고르의 집과 한데 붙어있는 Barahati University로 들어가니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여기저기 등교하는 학생들로 교정이 활기에 넘친다. 건물은 몹시 낡았지만 학생들의 발랄한 모습을 보니 인도의 희망을, 인도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보는 것 같다. 타고르 하우스를 다시 방문하고 나오는데 디지털 카메라에 용량이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뜬다. 할 수 없이 다시 Park Street에 돌아와 걷고 있는 데 어디서 왔는지 또 한 사람이 따라오며 말을 건다. 카메라 가게가 어디 있는냐고 묻자 그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카메라 수리점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메모리 카드가 없었다. 그는 다시 카메라 판매점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런 안내인을 자꾸 만나니 걱정이 된다. 나중에는 꼭 돈을 요구하고 자기네 가게를 소개하는 등 관광객을 난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돈을 안 받는다면서 그냥 friendly guide(우정의 안내) 혹은 인도에 온 guest(소님)니까 안내한다고 말은 하지만 속셈은 그게 아닌 것이다. 직업삼아 하는 것이다. 얼마동안 함께 다니며 이것저것 소개하고 나중엔 몇 분 동안 도와줬다며 돈을 요구한다. 가게 주인들 하고 계약을 맺고 얼마의 수당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공식절차를 밟아 안내인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외국인이면 누구에게나 접근하여 즉흥적으로 상가 안내 등을 한다. 안내인이 카메라 가게까지 안내해 주었다. 카메라점 점원은 메모리 카드를 새로 구입해야 한다며 가장 싼 것이 3,650루피짜리와 1,900루피 짜리가 있다고 한다. 사긴 사야하지만 비용이 문제다. 나중에 사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안내를 해준 사람에겐 그냥 고맙다고만 하고 헤어졌다. 헤어지니 너무 많이 걸어서 그런가. 피로감이 몰려왔다. 20루피에 릭샤를 타고 Free School Street에 돌아와 Hong Kong Chinese Restaurant에서 44루피에 chicken soup를 먹었다. 닭죽이었다. 식사 후 오후엔 봉사활동 신청을 위해 마더 하우스로 갔다. 월, 수, 금 3시부터 신청을 받는데 도착하니 2시쯤 되었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테레사 수녀님의 무덤도 보고 성당 내부도 둘러보았다. 수녀님이 세운 이 봉사단체 건물을 캘커타 시민들은 마더 하우스라고 부른다. 수녀님의 동상과 사진엔 성스러운 빛이 감돌고 자비로움이 흘러넘쳤다. 2층 성당에선 수녀님들 여럿이 기도하고 있었다. 1층의 수도가에서는 선교회 복장을 한 여러 수녀님들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1층 한 쪽에 테레사 수녀님 동상이 있었는데 자비롭게 손을 앞으로 내밀고 계신 모습이다. 수녀님들은 이 동상 앞을 지나갈 때면 수녀님의 손을 한 번씩 잡아보고는 지나가는 것이다. 복도에서 성당 앞을 지나갈 때도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몸을 숙여 절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키도 작고 몸집이 작은 인도의 수녀들이 제일 많은데 벽안의 수녀님들도 상당수 있었고 동아시아 수녀님들도 있었는데 한국 수녀님들 같았다. Volunteer(봉사자) 담당 수녀님은 서양 수녀님이었다. 3시가 되니까 담당 수녀님이 앞장서서 150m 정도 떨어진 House of charity(자선의 집) 건물로 옮겨 그곳에 마련된 여러 개의 간이 벤취에 앉았는데 자연스럽게 서양인은 서양인끼리 동양인은 동양인끼리 앉게 되었다. 곧 담당봉사자가 와서 여러 가지 봉사활동에 대한 안내를 해 주었다. 2005년 1월 10일 오늘 한국인 신청자는 5명이었다. 여자 대학생 2명 젊은 부부 한 쌍 그리고 나였다. 서양인까지 포함하면 오늘 15명 정도가 봉사활동을 새로 신청했다. 아까부터 수녀님과 의논을 하며 직원처럼 열심히 일하는 동양인이 있었는데 저 분은 뭐하는 분일까 하고 궁금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분은 1년 동안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이이었다. 이 분이 우리 5명에게 자세한 안내를 해주었다. 먼저 손바닥만한 신청서에 이름, 한국 주소, 캘커타 도착일, 캘커타 출발 예정일을 적어서 제출했다. 다음 자세한 안내가 이어졌다. 인도에서는 물을 조심하라. 길거리에 쓸어져 있는 사람이나 아이들에게 돈을 주지 마라. 아기들도 자기 아기들이 아닐뿐더러 기업적으로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엔 씁쓰레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들이 그대로 방치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안도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안내는 계속 이어졌다. 6시에 아침 미사가 있다. 7시쯤 빵과 바나나 커피로 간단한 아침 식사 7시 30분 쯤 각 봉사활동 장소로 출발 8시부터 12시까지 오전 봉사활동 저녁에는 6시 30분에 묵상의 시간이 있는데 목, 토, 일요일엔 6시에 있다. 목요일엔 봉사활동을 하지 않는다. 봉사는 오전과 오후 구분해서 하는데 오후에도 하겠다고 하면 할 수 있는데 여행임을 감안하여 오전만 하는 것도 괜찮다. 봉사장소는 일곱 군데가 있는데 오전 오후 모두 하는 곳이 있고 오전만 하는 곳이 있다. 여자 봉사자만 필요한 곳이 있고 남녀 봉사자 모두 필요한 곳이 있다. 각자 식사하고 각자 호텔에서 자고 아침 6시 전까지 Mother House로 오면 된다. 일곱 군데가 다 따로 떨어져 있는데 같이 가는 사람들끼리 가는 것이 좋다. 끝나면 각자 자기 숙소로 돌아간다. 이것 저것 시키는 사람이 있거나 일과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하는 것을 보면서 알아서 열심히 하면 된다. 사진 촬영은 봉사 마지막 날 수녀님의 허락을 받고 찍을 수 있다. 일곱 군데 봉사기관은 다음과 같다. 1.쉬쉬바반(신청서 받던 건물) : 오전 오후 봉사 가능. 여자 봉사자만 필요. 갓난아기 돌보는 곳. 장애아 비장애아 다 있다. 5세 이하의 갓난아기들을 돌본다. 2.쉬쉬바반 하우라 : 남녀봉사자 모두필요. 오전봉사만 가능. 유치원이나 학교 같은 분위기에서 조금 큰 아이들을 돌보는 곳. 3.다야단 : 장애 어린이를 돌보는 곳. 남녀봉사자 모두필요. 오전 오후 봉사 가능. 4프렘담 : 장애 있는 어른들 씻기고 청소하고 면도, 시트 까는 일 등을 한다. 남녀봉사자 모두 필요. 5.깔리 가트 : 임종의 집. 중환자 보호. 남녀 봉사자 모두 필요. 오전 오후 봉사 가능 6.싼티간 : 학대받는 여성들 보호. 파키스탄에서 넘어온 불법 난민 여성들 심신의 안정을 목표로 함. 여자 봉사자만 필요. 오전봉사만 가능. 7.니보디보 : 남자수사가 관리. 장애 남자 아이들, 길거리의 아이들을 돌봄. 일요일엔 많은 봉사자 필요. 거리가 좀 먼 편이며 점심식사 제공. 이와 같은 설명을 듣고 나서 수녀님 면담이 있었다. 어디서 하고 싶으냐고 해서 깔리 가트라고 했다. 수녀님은 조그만 메달과 영수증을 주었다. 메달에는 성모님의 모습이 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라 날짜도 적혀 있지 않았다. 기간은 임의로 하면 되는가보다. 하루도 좋고 한 달도 좋고 1년도 좋을 것이다.
마더하우스를 나와서 기차표 예매소로 갔다. Shantiniketan 가는 오전 11시 10분 기차표를 예매했다. 130루피. 30루피는 수수료였다. 하우라역 출발이다. 하우라역까지는 택시로 70루피 정도란다. 3루피면 버스로 갈 수도있다. 내일(화요일) 쌴티네케탄에 갔다가 모래(수요일)에 와야겠다. 샨티네케탄엔 타고르가 세운 대학이 있기 때문에 꼭 가고 싶었다. 그 다음 목요일 하루 쉬고 금요일부터 봉사활동을 하자. 아침에 일찍 미사에 참여하려면 alarm clock(자명시계)이 있어야 할 거 같다. 시계점에 들렀더니 작은 것은 70루피(1800원정도), 조금 큰 것은 110(2800원정도)루피란다. 봉사를 신청한 두 여대생 중 하나는 인하대 경영학과 3학년 마치고 휴학중이라 했고, 또 한 학생은 한양대학교 중국어과 3학년이라고 했다. 서인천고등학교 1년 선후배 사이며 인하대 학생은 만수 3동 성당 신자라고 했다. 지금은 옮겼지만 나도 전에 만수3동 성당에 적을 두기도 했었다. 나의 집도 만수동인데 인도에서 동네 학생들을 만난 것이다. 40여일 전 델리로 들어와 여러 곳을 들르며 캘커타 까지 왔다고 한다. 1월 19일 켈커타공항을 떠나 태국으로 가서 열흘 정도 있을 예정이란다. 그들은 내 숙소에서 30여 m 떨어진 Ashok G.H에 머문다고 했다. 봉사활동 신청을 마치고 Mother House에서 Shudder St.까지 같이 걸어 왔다. Shantiniketan에 다녀와서 한번 숙소로 들리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내 숙소 내 방 옆에 온갖 것이 마구 버려진 헛간 같은 곳이 있어서 살펴보니 별 것이 다 있었다. 찟어진 배낭, Train at a glance라는 인도 철도국이 발행한 낡은 기차 시간 안내 책자, 중앙 M.B에서 발행한 반 쪽 짜리 ‘인도 백배로 즐기기’, 영문으로 된 농업관련 서적 ‘Agriculture`, 독일어 소설 나부랭이 등등이 어지럽게 쳐박혀 있는데 Charles Dickens의 Oliver Twist와 L.M Montgomery의 `Emily of New Moon`이 있었다. Oliver Twist는 기차나 비행기에서 읽으면 심심풀이가 될 것 같아서 낡아서 바스러질 것 같은 책을 쓰레기통에서 건져놓았다. 디킨스의 문체가 무척 끌렸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쉬다가 밤 10시는 되어서 밖으로 나와 Internet Cafe에 들러 메일을 확인하고 인천 남동구 문인회인 남동문학 카페를 방문했다. 내가 어제 보낸 메일은 아내는 아직도 확인하지 않고있었다. 남동문학에 내가 지금 인도 여행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김묘진 회장이 연재하는 인도 여행기에 꼬리글을 달았다. 1시간 쯤 인터넷을 했는데, 마감시간이란다. 요금은 10루피였다. 밖으로 나오니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점점 강해진다. 겨울철엔 비가 많이 오지 않는다는데 제법 많은 양이다. 이젠 먼지가 좀 씻겨내려갔을까. 먼지와 소음의 도시라고 느꼈던 캘커타. 저 빗줄기가 나뭇잎, 지붕, 공기 중의 먼지를 깨끗하게 씻어내렸으면 좋겠다. 숙소로 다시 돌아오는데 밤 거리의 개들이 열심히 쓰레기통을 뒤져 부지런히 먹을 것을 찾는다. 낮에는 죽은 듯이 길바닥에 누워있다가 밤이 되면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나보다. 인도의 최대 청소부가 저 개와 까마귀와 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아무데나 마구 버린다. 그러면 까마귀, 개, 쥐가 웬만한 것은 다 먹이로 취하는것 같다. 이를테면 생태적인 도시인지도 모른다. 캘커타에 소는 그리 많지 않다. 바라나시 같이 길거리에 소와 양이 많은 도시는 소와 양이 거리의 청소부 역할을 다 할 터이다. 농작물의 무농약 재배처럼 캘커타가 친환경적으로 돌아가는 지도 모를 일이다. 썩기도 전에 모든 찌꺼기가 다 먹이로 취해질 테니까. 밤 12시가 임박한 지금도 까마귀 소리가 계속 들린다. 비가 오기 때문일까. 비가 오기 때문에 까마귀들도 잠이 들지 못하는 것일까.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담요한 장 뒤집어 쓰고 자던 집 없는 사람들은 갑자기 내리는 비에 어디로 피신했을까. 죽은 쥐를 까마귀가 열심히 뜯어먹는 것을 보았다. 캘커타의 저 더러운 거리가 그래도 위생적으로 별로 문제가 없는 것은 까마귀와 개와 쥐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심의 작은 공원이나 건물 옆의 공터를 잘 보면 수십 개의 구멍속으로 쉴새 없이 쥐들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볼 수있다. 삐죽삐죽 대가리를 내밀고 있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구멍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쥐들. 이 대도시에 거대한 쥐의 군단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썩기 전에 모든 음식 찌꺼기를 거두어가면서. 개들은 또 누가 기르는 것 같지도 않다. 주인도 없이 길거리에서 자고 길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길거리를 집 삼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이 따로 있어 챙겨주거나 돌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불룩하게 새끼를 밴 개도 있고 주렁주렁 새끼를 달고 있는 개도 있다. 길거리에서 살며 발정기가 되면 저희들끼리 야생개처럼 교미하고 새끼낳고 거리에서 새끼를 키우며 또 그렇게 세대를 이어가며 살고 있는가보다. 전통과 현대, 과거와 미래가 한통 속으로 뭉퉁그려져 있는 도시, 새와 개와 쥐가 어울어져 살아가는 도시. 그래서 타고르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나온 것이 아닐까. 또 Mother Teresa 같은 성인이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아직은 인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다만 과일도 꽃도 우리나라의 것과 많이 닮았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길거리에서 파는 꽈리, 무우, 오이까지도 우리나라와 너무 닮았다.
11시 10분 기차를 예약해놓았기 때문에 8시 30분 G,H 를 나왔다. 밤새도록 비는 내리고 까마귀는 밤에도 계속 울어대 잠을 한 숨도 못잤다. 호텔 옆에 큰 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그것이 까마귀들의 잠자리라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아마 어제밤은 비가 내려서 까마귀들도 잠자리가 뒤숭숭했었던 것 같다. 담요가 다른 호텔보다 얇아서 그런지 추워서 밤새 뒤척이다가 잠 한 숨 제대로 못자고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 하고 소설 Oliver Twist를 읽다가 8시 30분 여관을 나왔다. Park Street로 가서 하우라역 가는 버스를 탔다. 3루피면 금방 오는 걸 택시를 탔으면 70루피는 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9시 정도 되었다. 두 시간을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인터넷 카페에나 가려고 해도 근처에는 없는 것 같았다. 예매한 열차시간표를 확인하고 이리저리 역내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일도 지루하다. 까마귀는 역 구내까지 들어와 이리저리 천장 주변을 날아다닌다. 귤 3개를 18루피에(470원) 사서 아침 식사 대용으로 먹었다. 귤과 포도는 인도에서 비교적 비싼 과일에 속한다. 대기실 한 쪽에 있는 안내소에 예매표를 보여주고 플래트홈 번호를 물어보니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만 7번 Platform이란다. 다시 대기실 벤치로 와서 기다리기를 1시간. 배낭을 메고 천천히 7번 플래트홈으로 가니 마침 211번 기차가 구내로 들어왔다. 예매표의 coach(객차)번호는 S1(sleeper)이었는데 sleeper라고 써있는 객차가 있어서 곧 탈수 있었다. seat no(좌석번호) 13번. 안내책자엔 캘카타에서 샨티네케탄까지 2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했으나 그것은 express train(급행열차)다. 내가 탄 차는 local train(완행열차)이어서 역마다 다 서면서 오느라고 뽈뿌르역까지 오는데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샨티네케탄으로 가려면 뽈뿌르역에 내려 릭샤로 20분정도 가면 된다. 내가 굳이 샨티네케탄에 가고 싶었던 것은 그곳이 타고르가 세운 대학이 있는 대학도시이기 때문이다. 그 대학 내에 있는 타고르 박물관을꼭 보고 싶었다. 뿔뿌르역에 내려서 싸이클 릭샤왈라가 안내해주는 대로 갔는데 첫 번째 여관엔 빈 방이 없다고 했다. 다시 찾은 곳이 샨티네케탄 호텔이었다. 250루피에 방을 예약했다. 250루피래야 우리돈으로 6500원으로 큰돈이 아니지만 인도에서 생활을 하다보니까 인도의 생활습성에 젖어서 그런지 그 돈도 큰돈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호텔에 배낭을 두고 거리로 나와 걸어다니는데 한적한 시골 분위기가 느껴지는 고요하고 아늑한 도시였다. 거대한 규모의 캠퍼스가 있었는데 캠퍼스 구경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길가에 늘어선 가게집을 살펴보았다. 각종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는데 가방, 옷, 수건, 기타 공에품 등이 다채로웠다. 역시 흙으로 구워낸 타고르의 인물상이 가게마다 있고 타고르의 사진도 많았다. 역시 타고르가 이 지역에서 어떤 존재인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여기저기 거리 구경하다가 인터넷 카폐에 들러 메일을 확인하고 승현, 승우에게 메일을 썼다. 날은 이미 어두어져 있었다. 11루피에 egg toast로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구슬 목걸이 3개를 30루피에 사고 타고르가 세운 대학으로 갔다. Vishwa Bharati University대학이었다. 나는 캠퍼스를 둘러봤는데 밤늦게까지 노래하며 신입생 환영회를 하고 있는 학과도 있었다. 또 여기저기 어두어진 교정에서 데이트하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다시 여관으로 오는데 한 시간 이상 헤매도 여관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그 대학 의과 대학생이라는 학생을 만나 친절하게 호텔까지 안내를 받았다. 친절한 학생이었다. 우리는 이메일 주소를 주고 받았다. 캘커타에서 뽈뿌르까지 오는 동안 계속 밖을 내다보며 왔다. 소떼, 염소떼가 많이 보였고 벼를 벤 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 새로 모를 심기 위해 조성해놓은 못자리도 보였다. 또 모를 심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일렬로 줄을 서서 모를 심는 모습이 우리의 모내기 모습과 똑 같았다. 그러나 못줄을 옮겨가며 심지는 않았다. 여기 저기 주택가나 길가에 돼지의 모습이 보였는데 주둥이가 긴 멧돼지 모습이었다. 저 돼지들의 주인이 있는 것인지 지금도 궁금하다. 전기줄에 제비와 흡사한 새가 앉아 있어서 제비인 줄 알았는데 덩치가 더 크고 온몸이 까만 것이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제비와는 모습이 달랐다. 꼬리가 V자 모양으로 갈라진 것이 흡사하기는 했다. 2005.1.12 수 8시 30분에 기상. 세수하고 check out. 밖으로 나와서 걷는데 자전거를 세우고 서 있는 여학생이 꼭 우리나라 사람같이 생겼다. 서로 바라보다가 Hello, Korean? 하고 물으니 아니란다. 분명하게 Indian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마도 인도 북부 네팔이나 티벳 근처 출신일 거라고 짐작을 했는데 무척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주는 것이다. 안도사람도 무척 친절하다. 이 여자 대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Kollkata에서 만난 안내인들은 가게를 소개하고 구경이나 하자고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대학생은 그런 것 없이 순수하게 안내를 해주는 것이다. 자전거를 끌기도 하고 내가 앞에 타며 여학생을 태워주기도 하며 한 시간 정도 함께 하였다. 내가 중국 사람을 닮았다고 하니까 조상이 중국에서 왔을지도 모른다며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자기는 그냥 인도사람이라는 반응이다. computer science를 전공하는 학생으로 대학원 석사과정 일년 차란다. 자기도 온지 얼마 안 되어 이곳을 잘 모른다며 black tea를 시켜주고 인도의 전통식사인 뿌리를 시켜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자기는 인도의 동북부 시킴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그리고 기숙사를 알려주며 이곳에 한국유학생들도 있다고 곁들였다. 똑똑해보이는 학생이었다. 자전거포에서 20루피에 자전거를 빌려1시간 이상을 이리저리 타고 다녔다. 대학구내도 다 돌아보았다. 中國學院(중국학원)이라는 한자가 걸려있는 커다란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이 학교의 중국학부는 유명하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학교 구내에 있는 타고르 박물관은 꼭 보고 싶었는데 그날이 마침 휴관일이란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대학 캠퍼스가 무척 넓기는 한데 현대적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나도 여기에 와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년 퇴직후 일이년 기간으로 이곳에 와서 타고르 연구라도 했으면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샨티네케탄은 자동차는 붐비지 않는데 자전거는 매우 많은 도시다. 말하자면 공해가 없는 청정도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국제적으로 키우려면 이런 곳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쉬운대로 샨티네케탄은 대충 둘러보았다. 피상적이나마 대학 캠퍼스도 다 보았고 자전거가 중요 교통수단인 한적한 대학도시의 쾌적한 분위기에도 젖어보았다. 하루 더 묵을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특별하게 더 볼 것도 없을 거 같아 다시 캘커타로 돌아가기로 했다. 뽈뿌르에서 오후 1시10분 기차를 탔는데 샨티네케탄으로 갈 때는 4시간이 걸렸는데 올 때는 3시간이 걸렸다. 표도 갈 때는 여행사 수수료 포함 130루피를 주었는데 올 때는 48루피였다. 예매도 필요 없었다. 역으로 와서 바로 표를 사서 그냥 타면 되었다. 나라마다 관습이 다르고 모든 체제가 다르기 때문에 자꾸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다. 비교적 단거리라 그런지 기차내에서도 표 검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후에 기차를 탔을 때는 엄격하게 표검사를 하는 승무원들을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 어마어마한 국토의 모든 기차에서 검표를 할 수는 없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구간에서 검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구간에서만 검표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저녁 무렵 캘커타에 도착하여 ATM(현금자동인출기)을 시험적으로 사용해보았다. 달라가 나올 줄 알았는데 루피가 인출된다. 3천루피를 인출하여 Camera memory card를 2000루피에 사고 선글라스를 125루피에 샀다. 노점에서 소형 탁상시계도 하나 샀다. 35루피였다. Mother House에서 봉사활동을 하려면 5시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100장까지 촬영 저장할 수 있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이 카드로 해상도를 조절하여 500장을 찍어가지고 귀국할 수 있었다. 다시 continental Guest House에 1일 150루피에 예약을 하고 나오니 바로 옆 건물에 JoJo Restaurant이 있었다. 인도 안내책자에 소개된 바로 그 식당이라 호기심 반 식사도 할 겸해서 가 보았더니 동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식사도 하고 음료수도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도 메뉴를 한참 보다가 양이 적은 닭도리탕 정도겠지 하고 clear chicken soup를 시켰더니 밥공기 만한 그릇에 말간 닭국물이 나오지 않는가. 국물만 나와서 clear(맑은)라는 말이 들어간 것 같다. 우리의 삼계탕 국물 비슷한데 양이 하도 적어서 당황할 정도였다. 맛은 삼계탕 국물맛인데 양이 너무 작았다. 다른 것을 하나 더 시킬까 하다가 그냥 35루피를 지불하고 나와버렸다. 이제 어제 Mother House에서 만난 인천 만수동에 산다는 대학생에게 가봐야지. 샨티니케탄에 다녀와서 들른다고 했는데.... Ashok G.H 4층으로 올라가서 한국에서 온 여학생을 찾아왔다고 하니 She is sick.이란다. 방으로 가봤더니 선배라는 학생이 토하고 난리다. 약봉지를 여러 개 들고 의사가 와 있었다. 물과 음식과 날씨(전날밤 비도 오고 해서) 때문에 몸살이 난 것 같았다. 결국 왕진온 의사의 의견에 따라 Royd Nursery Home and Health Care(종합병원)으로 모두 함께 가서 linger주사를 맞는 걸 보고서야 여관으로 돌아왔다. 주사 맞는데만 12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잠은 거기서 자야 할 것이다. 나는 여행자 보험에 가입했으면 영수증을 챙겨놓아보라고 얘기했다. 내가 병이 났다면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배낭여행의 기본은 저렴하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여행효과를 보려는 것 아닌가. 생각하지도 않던 경비가 들어간다면 속상할 터.... 그래 “ 병원비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않는가. Mother House에서 하루 봉사활동을 하고 오늘은 못했다고 했다. 빨리 건강해져서 같이 봉사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인도의 과일을 맛보고 싶어서 포도 1Kg을 샀다. 검은 포도와 청포도를 섞어서 샀다. 우리나라 포도와는 생김새도 맛도 다르다. 모양은 타원형이고 맛이 더 좋다. 청포도보다는 검은 색 포도가 맛도 더 좋고 가격도 조금 더 비쌌다. 우리 나라 포도처럼 알맹이가 쏙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감처럼 껍질과 속살이 붙어있어서 껍질 채 그대로 먹어야 한다. 속살이 팍팍하고 새콤달콤하여 입맛에 맞았다. 독특한 맛으로 우리나라 어떤 과일보다 맛이 잇었다. 1Kg에 60루피로 다른 과일에 비해 비싼편이다. 인도에서 가장 싼 과일은 바나나다. 작은 것은 1루피 큰것은 1개에 2루피 52원정도다. 100원어치만 먹으면 시장기를 면하기에 충분하다. 그 다음이 찌꾸라는 과일인데 옛날 시골에서 먹던 돼지감자와 비슷하다. 혹시 그 찌꾸라는 과일이 돼지감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값도 싸 1kg에 6루피(156원)다. 이것도 150원 어치만 먹어도 시장기를 달랠 수 있다. * 타고르가 세운 대학건물과 샨티네케탄 도시 사진이 모두 분실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2005.1.13 목 맑음 비가 온 다음이라 그럴까, 오늘은 햇빛이 제일 밝게 빛나는 날이다. 11시쯤 외출하여 길을 알아놓을 겸 Mother House까지 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면 두번 타야 하는 등 오히려 번거롭다. 걸어서 가는 것이 더 편하다. 내일부터 새벽마다 가야되는데 걸어다니기로 했다. Mother House에서 깔리가트 임종의 집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내일 아침 5시 30분까지 Mother Hose에 가 아침 미사에 참석하고 다시 임종의 집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신청해 놓은 상태. 모든 것이 처음이라 조금 걱정도 되었다. 봉사활동을 잘 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다시 Sudder St.에 와서 점심식사를 했다. 유명식당이 아니더라도 여행자거리 골목골목에는 간이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값도 저렴하여 일반 식당의 3분지 2수준인데 양도 맛도 손색이 없다. 경비를 아끼는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Mixed noodle Soup은 짬뽕보다 더 잔맛이 있는 것 같았다. Chicken Soup도 맛이 있었다. 돼지고기 음식도 한번 맛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이 났던 여학생이 궁금했다. 몸이 나아 병원에서 나왔을까. 빨리 나아서 나머지 여행 일정을 잘 소화해야 할텐데. 학생들이 착해보이고 모범학생들 같았다. 이제 나의 관심사는 내일 새벽부터 시작되는 봉사활동. 다섯 시에 일어나서 준비해야 한다. 자명종 시계도 준비했으니 걱정 없겠지. 그 여학생들은 내일 봉사활동에 갈 수 있을까. 저녁 6시쯤 들렀더니 둘다 외출중. 다행이다. 몸은 다시 회복되었나보다. 2005. 1. 14. 금 맑음 어제 밤에는 잠을 자지 못했다. 8시에 잠을 청했으나 잠은 오지 않고 엎치락 뒤치락거리다가 시간을 보니 11시 30분쯤 되었다.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Oliver Twist를 두 시까지 읽다가 잠자리에 다시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침에 늦잠자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서 그런지 어제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서 그런지 모르겠다. 얼마쯤 뒤척이다가 잠깐 잠이 든 사이 꿈을 꾸었다. 막내딸 승우가 어떤 시합에서 두 번을 우승하고 세 번째의 결과를 기다리는 꿈을 꾸다가 따르릉따르릉 자명종 울리는 소리가 울려 잠을 깼다. 4시 20분 쯤 되었다. 자명시계가 20분쯤 빨리 울린 것 같았다. 40분에 울리도록 맞춰놓았었다.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 옷을 차려 입고 났는데도 시간은 5시도 안되었다. Oliver Twist를 조금 더 읽다가 5시 10분 쯤 Mother House를 향해 출발했다. 걸어가기로 했다. Kolkata의 새벽거리가 상쾌하다. 청소하는 사람,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이 벌써부터 분주하다. 여기저기 쭈그려 앉아 소변을 보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띈다. 남자들도 발뒤굼치를 들고 쪼그려 앉아 소변을 본다. 사람들에게 Mother House를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Mother House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Continental G.H에서 Algaus Hotel 쪽으로 걸어가다가 첫번째 만나는 왼쪽 길로 계속 걸어가면 바로 Mother House였다. 길을 확실히 알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가는 길에 담요 한 장을 뒤집어 쓰고 여기저기 길가에 잠자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 바깥공기가 차가운데 말이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Mother House에서 보살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도착하니 나보다 조금 앞서 초로의 서양할머니와 젊은 동양인 남자가 출입문으로 들어간다. 5시 30분 쯤 되었다. 미사는 6시에 시작된다. 나는 낯설기만 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서성이는데 수녀님 한분이 뭐라고 묻기에 I came for Mass. (미사보러 왔는데요)했더니 2층으로 올라가라고 손으로 가리킨다. 신발을 벗어놓고 올라갔더니 성당 입구에서 왼쪽에 100여명의 수녀님들이 벌써 열을 맞춰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20여명의 volunteers(봉사자)들이 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20여분 지나자 자원봉사자들이 100여명으로 늘었다. 그 중에 50여명 정도는 일제히 하얀 유니폼을 입은 호주의 봉사단이었다. 6시 미사가 시작되었다. 5명의 사제단이 입장하여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나도 영성체를 모셨다. 미사가 끝나자 빵 한 쪽, 짜이 한잔, 바나나 하나씩이 아침 식사로 제공되었다. 그것을 먹고나서 깔리가트로 어떻게 가야할지 걱정이 되었다. 등록할 때 안내하던 한국 분이 있어 다시 물어봤더니 한국사람이 많이 있으니 같이 가라고 한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동양인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렇다며 저쪽의 한국 남자분이 그곳으로 갈 것이니 같이 가라고 한다. 그분이 인솔자가 되어 호주사람들 포함 20여명은 길 건너편에서 204번 버스르 타고 바로 깔리가트 임종의 집으로 갔다. 교통편을 알고 나니 이제 혼자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인솔하던 분에게 봉사활동 한 지 오래 되었느냐고 물으니 가톨릭대학교 학생인데 가톨릭 대학교 학생들이 계속해서 릴레이 식으로 봉사활동을 한다고 했다. 나중에 간식시간에 그분이 신학생인 걸 알았다. 등록 때 안내를 하시던 분도 신학생이라고 했다. 몇 분 더 있는 것 같았다. 깔리가트 임종의 집에 도착하니 `Mother teresa`s Home for the Sick and Dying Destitutes`(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마더 테레사의 집)이라는 영문 글귀가 입구 위쪽에 쓰여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앞치마 같은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사물함에 짐을 두고 곧바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봉사는 타올 담요 빨기, 환자복 베갯닛 빨기, 목욕시키기, 소변 받아내기, 식사나르기, 식사 시중들기, 약 타다 먹이기, 목욕 시키기, 설거지 하기, 빨래 널기. 마른 빨래 걷기, 목욕실에 더운물 나르기, 환자복을 일일이 점검하여 오물 묻은 빨래 가려내기, 욕창및 각종 상처 약바르고 거즈 붙이기 등 눈코 뜰 새가 없다. 약 처방하기와 욕창및 상처소독은 따로 맡아서 하는 분들이 있었다. 남자환자실엔 150여 분이 있었는데 임종의 집이라 해서 상태가 심한 분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몇몇 욕창과 상처가 심한 분이 있을 뿐 당장 임종을 앞둔 것 같은 의식불명환자는없었다. 나는 약을 타다 먹이고, 밥을 나르고, 목욕을 시키고,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더운 물을 받아다 목욕실로 옮기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손짓하는 환자에게 가면 물을 달라, 옷을 갈아 입혀 달라, 오줌통을 갖다달라던지 짜이를 더 달라는 등 여러 가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화장실로 데려가 달라고도 하고 목욕을 시켜달라고도 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11시쯤 간식을 먹고 다시 한 시간 쯤 더 활동을 하다보면 오전 봉사가 끝난다.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사물을 챙겨 임종의 집을 나왔다. 첫날의 일과가 끝난 것이다.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옷도 인도 사람처럼 차려 입고 세탁을 도맡아 하다시피 열심히 일을 했다. 간식시간에 대학생이냐고 하니까. 회사에 다니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4개월째 인도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머리를 짧게 깎아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는데 33살이라고 했다. 작년에도 6개월 인도 여행을 했다며 남인도가 북인도보다 좋다며 경험담을 풀어놓기도 했다. 이제 네팔을 거쳐서 귀국할 거라고 한다. 남인도가 음식도 맛있고 도시간 이동도 단거리고 비용도 북인도의 절반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해변가엔 겨울철에도 피서 인파가 있겠다는 나의 말에 “ 이번 해일로 쑥대밭이 됐지요 뭐.”해서 머쓱해지기도 했다. 서양인들도 정말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다. 임종의 집 벽에는 여러 곳에 수녀님의 사진과 함께 어록이 붙어있었다. 한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Let Every Action of Mine Be Something Beautiful for God Mother 1948 (내 모든 행동이 하느님을 위해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해주소서)
깔리 가트 임종의 집에서 오전 봉사활동을 마치고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웠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두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다. 아직도 햇볕이 쨍쨍한 한낮이다. 병이 났던 Ashok Hotel의 두 여대생은 지금 어떤가. 봉사활동에도 나오지 않았던데.... 저녁 때 한번 들러보아야겠다. 4시쯤 다시 외출하여 internet방에 갔다. 한글지원이 확실하게 된다. 좌판 외우지 못해서 좀 힘이 들긴하다. 오늘은 인터넷으로 National Geographic(영문잡지 이름)에 실린 서방 기자의 cast제도에 대한 장문의 글을 두시간 가까이 다 읽었다. 물론 번역본이다. 한 편의 완벽한 논문 분량이다. 기원전부터 존재했던 제도가 카스트 제도이며 2,000여개의 세분화된 신분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 제도에 억매어 있는 사람 3/4이 농촌에 살고 있는데 도시의 익명성과 여러 요소로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카스트 제도의 폐해가 심하다는 것을 여러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간디를 비롯해(간디는 바이샤 출신, 부처는 크샤트리아 출신))여러 탁월한 지도자가 나타나 카스트 제도의 폐해를 철폐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인구의 80%가 힌두교도인 인도에서 사회적 관습은 법률적 효력보다도 강하다. 법적으로 차별이 금지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직도 국민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이 카스트 제도다. 인도 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관심이 필요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인도의 저 역동적인 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있는 것이 카스트 제도라는 생각이다. 서방기자의 눈에 비친 저 적나라한 불가촉천민(untouchable)에 대한 차별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최고의 지도자가 불교로 개종하자 수십만 명이 따라갔던 일도 있었지만 힌두교도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인도 사회에서 그 개선책을 찾기란 그리 쉬워보이지 않는다. 카스트 제도로 인한 폐해는 엄청나며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다. 소설 Oliver Twist가 너무 재미 있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소설중의 하나, 어린이용 소설로도 나와 있었다. 인터넷 방을 나와 식사를 하려고 저번에 보았던 닭죽집을 찾다가 못 찾고 인도 음식점에 들어가 탄도리를 시켰더니 부풀어오른 빵 두 쪽과 beef 한 접시가 나오지 않는가. 탄도리를 인도의 인기있는 음식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15R였다. 내가 방금 먹은 것이 탄도리가 아닌게 분명했따. 식사가 시원찮아서 골목길의 소규모 식당 `모모식당`으로 찾아가 닭죽을 35R에 또 먹었다. 고향에서 먹던 닭죽과 거의 비슷해서 맛있게 먹었다. 거기에선 항공대 4학년 ROTC생 두 명을 만나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도 내가 권하자 닭죽을 시켜먹었다. 오늘 캘커타에 도착했는데 모래 중부지방으로 떠난다고. 그들은 졸업을 앞두고 짬을 내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바라나시엔 이미 다녀왔다고 한다. 바라나시에 한국식당이 있는데 라면이 130루피(3400원), 김치찌개가 180루피(5,700원) 등 비싸긴 해도 고향의 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번도 한국음식을먹어보지 못했다. 캘커타에 한국음식점은 없다. 바라나시에 가면 꼭 그 식당에 들러 라면도 먹고 김치찌개도 먹어야겠다. 소주도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소주는 또 얼마나 비쌀까. 전에 미국을 여행할 때 소주값이 꼭 한국의 10배였던 걸 기억한다. 그런데 내가 먹고 싶었던 음식이 탄도리가 아니라 탄도리 치킨인데 음식점에서 탄도리를 찾으니 엉뚱한 음식을 내 놓았던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내 발음을 잘못 들은 모양이다. 왠지 메뉴판에도 없었는데 그들은 있다고 했으니까. 다음에 탄도리 치킨을 다시 한번 먹어보자. 인도 안내책자엔 탄도릭 치킨이 인도가 자랑하는 세계적 음식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먹어봐야겠다. 디지털 카메라의 메모리가 왜 42장에서 멈춰섰는지 모르겠다. 새로 2.000루피를 주고 메모리 카드를 새로 끼웠지만 해상도를 조절하면 사진의 장 수를 더 늘릴 수 있다는 얘기는 또 무엇인지. 왜 150장 정도는 찍을 수 있다더니 42장에서 멈춰 서서는 계속 라는 message만 뜨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조작 미숙일 것이다. 출국할 때 카메라를 구입, 조작법을 제대로 익히지도 않고 왔으니 자꾸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다. 2005.1.15 토 맑음 비가 온 후라 그런가. 어제 오늘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다. 4시 20분 자명종이 울린다. 일어나 세수하고 화장실 다녀오고 옷을 차려 입으니 다섯 시가 다 되었다. 어제 오후 내내 설사 때문에 고생을 해서 아침에 걱정이 되었다.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화장실을 두 번씩이나 들렀다가 Mother House로 향한다. 새벽공기가 신선하다. 벌써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가다가 길거리에서 새벽 짜이 한 잔을 사 먹고 도착하니 voluteerㄴ(봉사자)는 3명이 와 있고 수녀님들은 모두 모여 미사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성당에 앉아 묵상하며 속으로 기도를 한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우리 가정에 평화가 오기를 기도한다. 테레사 수녀님 생존시부터 나는 인도에 한번 와서 마더하우스에 들르고 싶었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매스컴은 여러가지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표하고 기사화하곤 했다. 20세기에 가장 인기있었던 노래는 비틀즈의 Let It Be 라든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은 테레사 수녀님이라는 말도 들렸다. 테레사 수녀님은 1997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살아 있는 성녀로 추앙받은 분이고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성녀품에 올리려는 절차가 진행되어 현재 복자품에 올라계시지 않는가. 수녀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인천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 인천 분원에 찾아가 조문하고 헌금을 하고 온 일이 있다. 인도에 가도 수녀님을 뵐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늦은 감이 있지만 캘커타에 찾아가서 그분의 뜻에 따라 조금이라도 봉사할 수 있기를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것이다. 몇 분의 신부님이 와서 미사를 집전하고 갔다. 오늘도 영성체를 모셨다. 호주의 단체손님은 빠지고 오늘도 자원봉사자가 60여 명 정도 되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굶기로 했다. 어제 설사로 너무 고생을 해서 조심을 해야겠다. 미사가 끝나고 간단하게 아침 간식을 먹은 후 일행은 깔리가트 임종의 집으로 가려는데 어제 봤던 아기 안은 엄마들이 또 따라온다. FIVE 루피! FIVE루피를 계속 외쳐대며 따라오는 데 정말 떼어놓기 힘들었다. 어제 5루피를 주었기 때문에 오늘도 5루피를 요구하는 것이다. 기업적으로 구걸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나니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줄 수도 없고 안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매일 주면 매일 그럴 것이 뻔하다. 오늘은 결단코 주지 않기로 한다. 차도까지 따라 건너며 따라왔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의 필사적이다. 두세번 5루피씩을 줬더니 그걸 기억하고 나에게 특히 더 매달렸지만 거절했다. 깔리가트에 가자마자 바지를 갈아입고 웃옷과 간편 가방과 전대를 보관함에 넣고 활동에 들어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밥 나르고, 물 나르고, 화장실 데리고 가 똥 오줌 뉘고, 밥 먹이고, 빈 밥그릇 부엌으로 나르고, 빨래 빨래터로 나르고, 약타다 먹이고, 목욕시키며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또 12시가 다 되었다. 짜이 한 잔만 먹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매일 그렇게 누워서 지내는 150여 명의 환자들 방에서 환자 냄새 하나도 안 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매일 매일 세탁하고 목욕시키고 쓸고 닦으니 전혀 환자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하나도 안 나는 것이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임종의 집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어가는 데 골목에 여자들이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대로에까지 나와서 서성이며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알로! 알로!하며 다가서는 것이다. 대낮 길거리까지 나와 호객하는 윤락녀들이었다. 깔리가트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에 윤락촌이 있는 것 같았다. 이 낯선 풍경에 의아해 하며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게스트 하우스까지 걸어갔다.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서 다시 그 여학생들을 만났다. 선후배 사이라는 인하대생과 한양대 학생말이다. 우리는 음료수를 마시고 같이 쇼핑을 하러갔다. 이곳 저곳 둘러보다가 Himalaya 대리점으로 갔다. 그들은 이미 그 가게에 대한 정보를 이미 다 갖고 있는 듯했다. 곧장 가서 물건을 고르지 않는가. 히말라야는 화장품, 기능성 식품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인도의 유명 기업체란 걸 알았다. 그들은 1,200 ~1,300루피 어치 제품을 샀다. 나는 나중에 여행이 끝날 무렵 사기로 하고 조그만 샴푸 하나만 샀다. 우리는 함께 김치국밥을 판다는 곳으로 갔다. 노점 식당이었다. 나는 김치국밥, 선배언니는 김치볶음밥, 정옥이라는 후배는 라면을 시켜먹었다. 거리를 걷다보면 마더 하우스에서 같이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 뿐 만 아니라 외국사람도 만나게 된다. 외국분을 만날 때 하이! 하고 아는 체를 하면 그 사람도 미소를 보내며 반갑게 인사를 하곤 한다. 김치볶음밥 집에서 같이 봉사하던 사람을 만났다. 4개월 째 인도 여행을 한다는 젊은 사람인데 Mother House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젊은이다. 머리를 깎고 인도사람 처럼 복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나는 20대의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30대란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가끔 이렇게 인도 매니아들을 만나곤 한다. 또 Ashok 호텔에서 만낫던 부탄 학생 세 명도 이 길거리 식당에서 또 만났다. 그들은 오늘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인도로 유학하기 위해 대학 입학시험 때문에 왔었다고 한다. 둘은 부탄에 살고 하나는 시킴주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과 헤어져 Continental G.H로 돌아오면서 20루피에 화장지 하나를 샀다. 여관에서 일하는 영어를 곧잘 구사하는 아이가 초코릿을 사달라고 하여 10루피를 주고 사주었다. 그리고 저녁식사로는 한번 먹어보려고 했던 치킨 탄도리를 55루피에 먹었는데 안내책자의 소개보다는 그저 구운 치킨에 불과했다. 그리고 약국에 들러 설사약을 사가지고 왔다. 대충 하루에 화장실을 몇 번 다녀왔다, 잠을 제대로 못잤다 하고 설명하니 금방 알아차리고 약을 지어주었다. 놀랍게도 약값이 122루피였다. 3끼 식사값이었다. 약효는 즉시 나타났다. 설사가 나았다.
겨울방학을 15여일 앞둔 12월 22일(금) 서령중학교 체육관에서는 '자녀의 올바른 인터넷 사용 및 건강한 겨울방학 나기'를 주제로 특강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서령중·고등학교 학부모 30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다. 요즘 학생들은 과도한 인터넷게임으로 학업과 건강, 대인관계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게임 중독은 당사자인 본인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위의 세심한 관심만이 최고의 예방책이 된다고 한다. 특히 여가시간이 늘어나는 겨울방학 중에 이러한 게임 중독에 빠지는 학생들이 많으므로 학부모님들의 각별한 지도가 요청된다. 따라서 본교에서는 자녀들이 건강한 겨울방학을 보낼 수 있도록 학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전종천 인터넷 교육 전문강사를 초빙, 특강을 실시하였다. 강연을 다 듣고 난 한 학부모는 "앞으로는 아이들의 게임방출입을 자제시키겠으며, 인터넷을 게임보다는 다양한 지식을 접할 수 있는 보물창고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지도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교총이 20년간 제정을 추진해 온 ‘학교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에 관한 법’(수정안, 이하 안전사고보상법)이 지난달 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써 교육활동 중 학교안전사고를 당한 학생, 교직원 및 교육활동 참여자가 신속,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이에 따르면 교육감 산하에 시도학교안전공제회가 설립됨은 물론 장관 산하에 학교안전공제중앙회가 설치돼 시도 간 들쭉날쭉했던 보상범위, 대상, 금액 등이 통일된다. 공제회 의무가입 대상에 초중고는 물론 종전에 임의가입 대상이던 유치원과 평생교육시설이 포함됐다. 또 당초 공제급여를 제한했던 자해․자살에 대해서도 ‘학교안전사고’가 원인이 된 경우에는 전부를 지급하기로 했다. 아울러 학교급식 등으로 인한 질병, 등하교 시 발생한 사고 등도 공제대상에 포함시켰다. 공제기금은 국가와 지자체뿐만 아니라 학생, 학부모, 교직원도 일정 부분 부담토록 조항을 명시했다. 현재는 초중고교의 공제료를 국가가 부담하고 있다. 1987년부터 민법에 따라 16개 시도별로 비영리법인 단체로 운영하고 있는 학교안전공제회는 2005년 말 현재 1만 7000여 학교, 815만명의 학생이 피공제자로 가입돼 있고, 기금규모는 892억원이며 매년 160억원 정도가 지급되고 있다. 한편 국회는 이날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내국세분 교부금 교부율을 현행 19.4%에서 2008년부터 20%로 올리는 내용의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안(교육위 대안)도 통과시켰다. 2006년 내국세 규모 기준에서 보면 약 6430억원의 추가재정이 확보될 전망이다. 지자체의 교육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법안에는 지자체가 법정 전출금 외에 별도의 경비를 교육비 특별회계에 전출할 수 있는 근거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또 광역자치단체도 기초자치단체처럼 고교 이하 각급학교의 교육 경비를 직접 보조할 수 있는 근거를 뒀다. 이밖에 기준재정수입액을 종전처럼 지방세 수입액의 전액으로 산정하도록 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6일 오전 조선호텔에서 과학기술부와 공동 협약서를 체결하고 대학 경쟁력 및 기초연구 강화, 과학기술 인재 육성에 적극 협력키로 했다. 이에 따라 양 부처는 대학 기초연구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 총 예산 중 대학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예산 비중을 지난해 23%에서 2008년 25%로 늘리기로 했다. 또 과학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고등학교 과학 과목 수업시간을 주당 3시간에서 4시간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내년 2월 교육과정 개정 고시 때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양 부처는 이밖에 대학 연구비 효율적 관리를 위한 제도 개선, 양 기관 간 협동연구 실시, 인력교류 활성화, 연구장비 공동활용 등을 함께 추진키로 했다.
현재 중고교 사회과목 안에 포함돼 있는 국사와 세계사가 '역사'로 통합돼 별도 과목으로 독립된다. 또 고교 선택과목으로 '동아시아사'가 신설되고 고교 1학년의 역사 수업시간도 주당 2시간에서 3시간으로 확대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역사교육 강화 방안을 26일 발표했다. 교육부는 우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국사와 세계사를 합쳐 역사 과목으로 독립시키기로 했다. 현재 중ㆍ고교에서 배우는 국사와 세계사는 교과서는 따로 있지만 교육과정편제상으로는 사회 과목 안에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시험 성적표에 사회 과목으로 성적이 표기되고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교사가 국사, 세계사를 가르치는 경우도 많다. 평가도 사회과목 평가로 이뤄지다보니 역사교육에 대한 전문적 평가가 부족했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교육부는 역사 과목 독립과 함께 고교 2, 3학년의 선택과목에 동아시아사를 신설하고 고교 1학년의 역사 수업시간를 주당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리기로 했다. 동아시아사를 신설하는 것은 최근 한ㆍ중ㆍ일 등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역사갈등 사태를 극복하고 역사왜곡 문제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도록 교육하기 위한 취지라고 교육부는 설명했다. 이종서 교육차관은 "역사과목 독립으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역사 교육이 기대된다"며 "특히 주5일제로 수업시간이 줄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 수업시간을 늘리는 것은 획기적 조치"라고 말했다. 개정 교육과정은 내년 2월 고시될 예정이며 중학교 1학년은 2010년부터, 중학교 2학년과 고교 1학년은 2011년부터, 중학교 3학년과 고교 2, 3학년은 2012년부터 적용된다. 초등학생은 현재 6학년 1학기에 사회교과 안에서 국사 관련 내용을 배우지만 2009년부터 5학년 1,2학기에 배우게 된다. 교육부는 아울러 대입 등 각종 전형에서 국사 반영 비중을 늘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주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공무원 임용시험 등에 확대ㆍ적용하도록 관계기관과 협의할 방침이다. 또한 역사독서 매뉴얼 및 웹북(web-book) 개발, 역사탐구 교실 설치 등 역사교육 개선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학계, 교육계, 시민단체 관계자가 참여하는 '역사교육발전협의회'를 구성, 자문 및 정책연구 역할을 맡기기로 했다.
시 부문에 비해 동시 부문은 응모자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응모된 작품들 가운데서도 눈에 번쩍 띄는 작품이 별로 없었다. 실상, 동시는 시 보다 쓰기 어려운 장르이다. 맨 먼저 어려움은 성인이 어린 사람의 마음을 복원하여 시로 써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 다음으로는 일정 수준 시의 품격을 지닌 작품이어야 한다는 데에 그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대부분 동시를 쓰는 경우, 가성발성을 하기 쉬운데 이 또한 매우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까 어린이인 것처럼 가정해서 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당선작 없는 가작을 내기로 했다. 조윤주 씨의 ‘첫눈’. 아주 귀한 작품이다. 표현이 단순 명쾌하고 시적 사유 자체가 맑고 소박하며 천진하다. 바로 어린이다운 특성을 고루 갖췄음이다. 허나, 작품이 워낙 소품이라 당선의 자리를 드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장점을 십분 살리고 모자란 점을 보완하여 이 땅의 좋은 시인으로 서 주기를 빈다. 이가림 인하대 교수, 나태주 공주 장기초 교장
‘해바라기 도둑’을 당선작으로 합의하며, 두 심사위원은 흡족했다. 이 흡족함은 정성스레 쓴 동화 한 편은 만난 데서 오는 것이다. 동화를 대하는 작가의 자세가 진지함을 느낄 수 있는 동화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엄마가 중국 옌변의 외가에 가고 집을 비운 사이에 일어난 동희네 가족 이야기인데,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동희), 엄마·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의 캐릭터를 적절히 살려놓았고,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이뤄진 적확한 묘사와 살아 있는 대화가 돋보인다. 여기에다 엄마가 떠난 뒤의 집안 분위기와 가족들의 변화를 뚜렷이 보여 준 점도 좋다. 또 엄마가 남다른 감정으로 길렀던 해바라기, 엄마가 ‘이만큼 크면 온다.’고 했던 그 해바라기를 먹똘이의 해찰로 부러뜨리게 되고, 동희가 이웃집 해바라기를 훔치기까지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구성해낸 동화적인 반전에서 작가의 역량을 신뢰했다. 아쉽게 가작에 머문 ‘물고기 활’은 국궁 신동의 첫 좌절과 부활을 그린 작품으로, 전통의 우리 것에서 찾은 색다른 소재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빈틈없이 짜여진 구성이 좋고, 당겨진 활줄처럼 팽팽한 긴장이 끝까지 유지하고 있는 점도 뛰어났다. 그러나 철학적인 내용은 장점이자 어린이가 읽는 동화로서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으며, 스토리의 단순함도 흠이었다. 이 밖에 ‘여섯 살에 걸린 병’, ‘산등성이와 참새’, ‘마루타와 흰쥐’, ‘하늘 거꾸로 들기’, ‘뚱땡이 아저씨가 좋아요.’ 등이 최종심에 올랐다.
지난 해 여름 방학 때였다.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운동장을 나오며 맑은 하늘을 보았다. 문득 해바라기가 보고 싶었다. 나는 태백시 구와우 마을의 해바라기 밭으로 차를 몰았다. 평창을 지나는 국도에 접어들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7시간 가까이 차를 몰아 다다른 해바라기 밭은 참으로 넓었다. 3만평정도의 해바라기 밭이 안개 속에 그윽하게 묻혀 있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 먼 곳에 있는 해바라기는 보이지 않았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한참동안 해바라기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푸근했다. 나는 가슴 가득 해바라기를 품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두 시였다. 그 날 내 가슴으로 들어온 해바라기는 오랫동안 내 품 속에 있었다. 그 해바라기는 주인공 동희를 만나 동화로 태어났다. 난 동화속의 동희보다 엄마를 더 멀리 하늘나라로 보냈다. 동희가 엄마를 기다리듯 나도 엄마가 보고 싶고, 그립다. 해바라기 꽃이 활짝 피는 날,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부족한 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 정말 고맙고 사랑합니다. 공부를 도와주신 선생님 정말 사랑합니다. 또한 그 동안 함께 공부한 동기들, 옆에서 많은 것을 도와준 남편, 딸 혜원이 정말 사랑한다.
봄을 시샘하듯 꽃샘추위가 차가운 눈보라를 몰고 왔다. 껍질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고 뾰족뾰족 올라오던 해바라기 싹이 까맣게 얼어 죽었다. “우리 옌변 집 마당에는 해바라기가 참 많았는데.” 엄마가 죽은 해바라기 싹을 매만지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엄마가 해바라기 씨를 뿌리던 날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는 바보처럼 한참이 지난 뒤 식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장독대에 해바라기 싹 하나가 살아남았다. 한 달 가까이 비가 오지 않았다. 햇살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갑게 내리쬐었다. 장독대의 해바라기는 할머니처럼 허리가 꼬부라졌다. 엄마는 틈만 나면 물뿌리개를 들고 해바라기에게 물을 주었다. 물을 줄 때마다 엄마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옌변 마당가의 해바라기가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전화 소리에 화단에 물을 주던 엄마가 깜짝 놀랐다. “아흠, 엄마 전화! 중국인가봐요.” 동만이가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왔다. 엄마가 허겁지겁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이 덜 깬 동만이가 마루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방안에서는 중국말이 나직나직 들렸다. 엄마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푹 숙이고 방에서 나왔다. 엄마의 얼굴이 광에서 겨울을 지낸 찌그러진 감자 같았다. 엄마는 한동안 먼 산을 바라봤다. 나는 그런 엄마가 산처럼 멀리 느껴졌다. “엄마, 외갓집에 무슨 일이 있대요?” “저, 저어…….” 엄마가 대답을 하려는데 할머니와 아버지가 대문에 들어섰다. 돼지 똥이 덕지덕지 붙은 장화에서 구린내가 풀풀 날렸다. “어머니, 저 옌변에 좀 다녀와야겠어메.” 엄마는 머뭇머뭇 하며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뭐라쿠노? 옌변?”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울 친정어머니가 마이 편찮으시대요.” “그라모 시집온 사람한테 연락하면 우짜노? 그 짜게서 해결해야지!” 할머니가 버럭 화를 냈다. 집안 분위기가 불 안 땐 방처럼 썰렁해졌다. 한동안 집안에서는 동만이 숨소리만 새근새근 들렸다. 아버지가 엎드려 자는 동만이를 반듯하게 뒤집어 놓았다. 마룻바닥에 흘렸던 침이 찌익 늘어났다. “다녀 와!” 아버지는 장화를 벗어 마당으로 던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머니가 토라져 방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렸다. “중국은 맨손으로 가나? 돼지 열 마리는 더 팔아야 될끼다.” 방에서 할머니가 구시렁거렸다. “엄마, 가지마. 나도 갈래.” 잠에서 깬 동만이가 침을 닦으며 엄마의 치마폭에 매달렸다. “동만아, 누나 말 잘 듣고 있어. 엄마 금방 올게. 해바라기가 이만큼 크면 올게.” 엄마는 동만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닦았다. 나도 엄마 옆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가 중국에 간 뒤 동만이는 반찬투정, 잠투정에 떼가 늘었다. 할머니도 걸핏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냈다. 돼지가 새끼를 낳았다며 아버지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 가도 별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시무룩해 있자 아이들이 더 놀렸다. “야, 깡통, 너희 돼지 똥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 민식이가 돼지처럼 입과 코를 쑥 내밀고 콧바람을 핑핑 불었다. 우리 집 돼지우리에서 똥냄새가 교실까지 날아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돼지 같은 놈! 네 똥 냄새다. 난 깡통이 아니고 강동희야.” 나는 참다참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받아쓰기도 10점밖에 못 받는 게 무슨 우리나라 사람이야. 너희 나라로 가. 이 염병아.” 염병. 엄마가 옌변에서 시집을 왔다고 민식이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었다. 민식이 할아버지는 우리를 염병 딸, 염병 아들이라고 불렀다. “야, 뚱땡아. 옌변 사람도 우리나라 사람이야. 같은 동포란 말야.” 나는 소리치며 책상에 엎드렸다. 눈물과 콧물이 책상 위에 번들거렸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제자리를 잡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나는 공부 시간 내내 큰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을 기다려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뒤를 돌아 기어이 울음을 꺼억꺼억 터뜨렸다. “동희야, 울지마! 조금만 지나면 너희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잘 하실 거야.” 단짝 지혜가 뒤에서 꼭 껴안아 주었다. 지혜는 엄마가 중국에 간 줄 몰랐다. 엄마가 없는 하루하루는 정말 지루하고 길었다. 낮이 점점 길어지고 햇살도 더욱 뜨거워졌다. 논바닥이 거북이 등같이 버쩍 금이 갔다. 해바라기도 기운을 잃고 새들새들해졌다. 틈만 나면 나는 엄마처럼 해바라기에 물을 주었다. 학교가 끝나면 돼지우리에서 일을 하는 아버지에게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어느새 약속처럼 되었다. 돼지우리에서 돌아와 집 가까이 왔을 무렵이었다. 동만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나, 누나,……엉엉 어엉엉!” 동만이가 겁에 질려 기둥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마당에는 양동이, 대야, 호미, 괭이, 빗자루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장독대를 바라보았다. 해바라기와 봉숭아의 줄기가 뚝뚝 부러져 있고, 잎은 질근질근 씹혀 있었다. 헛간에 가둬 놓은 먹똘이 짓이었다. 그저께 아버지가 돼지우리에서 아픈 먹똘이를 헛간으로 옮겼다. 먹똘이는 힘없이 쭉 늘어져 눈만 멀뚱거렸다. 아버지는 먹똘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주사를 놓았다. “엉엉, 난 몰라. 어떡해? 어떡해?” 나는 부러진 해바라기를 주워들고 발을 동동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동만이도 다가와 함께 울었다. “야, 이놈의 자식들 네 에미라도 죽었나?” 대문을 들어서던 할머니가 쩌렁쩌렁 고함쳤다. “엉엉, 해바라기가 죽었어요. 이만큼 크면 엄마가 온다고 했는데.” “누나, 누나, 엉엉!” 동만이와 서로 얼싸 안았다. 그러나 자꾸만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뚝 그치지 못하노? 에미가 오고 싶어도 니들 뵈기 싫어 안 오겠다. 패앵.” 할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할머니가 코를 풀어 바지에 쓰윽 닦으며 돌아섰다. “엉엉! 누나, 엄마 언제 와?” 동만이가 칭얼거렸다. “꼬-올 꼬-올 꼬-올 꼴꼴.” 먹똘이는 주둥이에 지푸라기를 닥지닥지 묻히고 헛간을 뒤지고 있었다. “너 이놈! 가만두나보자.” 나는 눈에 보이는 작대기를 집어 들고 헛간 쪽으로 씩씩 대며 갔다. “꼬-올 꼬-올 꼬-올 꼴꼴.” 아무것도 모르는 먹똘이가 되똥되똥 다가오며 말갛게 눈을 맞추었다. 먹똘이의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동만이가 밤마다 베개를 안고 엄마를 찾아 할머니방과 아버지 방을 왔다갔다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작대기를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쯧쯧, 요것또 에미 찾는 갑따.” 할머니가 조심조심 먹똘이를 헛간으로 몰았다. 할머니의 어깨가 축 쳐지고 힘이 없어 보였다. 날씨가 점점 흐려지더니 밤이 되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갈수록 개구리 울음 소리도 커지고 빗방울도 굵어졌다. 마루에 켜 놓은 전깃불이 빗속을 뚫고 장독대를 비췄다. 그러나 해바라기가 자라고 있던 자리는 깊은 동굴처럼 캄캄했다. “엄마!” 나는 가만히 엄마를 불러 보았다. ‘해바라기가 이만큼 크면 올게.’ 어디선가 엄마 목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우르릉 꽝! 우르르 꽝! 우르르 꽝꽝.” 번쩍거리던 번개가 기어이 천둥소리를 몰고 와 집안을 흔들었다. 갑자기 캄캄하던 눈앞이 환해졌다. 민식이네 담장이 떠올랐다. 담장을 따라 바깥쪽에 해바라기가 줄지어 서 있었다. 해바라기는 민식이 할아버지가 거름을 주고 정성스럽게 길러 탐스러웠다. 나는 후드득거리는 굵은 빗방울을 뚫고 헛간으로 뛰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호미를 찾아 들었다. “쿵쿵쿵.”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민식이네 집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머리칼을 타고 입안으로 들어온 빗물이 찝찔했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 보이는 민식이의 방은 캄캄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해바라기 앞에 살그머니 앉았다. 그리고 뿌리 흙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해바라기를 캤다. 비에 젖은 흙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쿨럭 쿨럭 쿨럭.” 민식이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민식이네 마루에 불이 번쩍 들어 왔다. “어이, 그 놈 시원하게 온다.” 민식이 할아버지가 마루에 나와서 비 오는 마당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고양이처럼 웅크렸다. 뿌리를 두 손으로 보듬고 가슴에 해바라기를 꼭 껴안았다. 오리걸음으로 담장을 돌았습니다. 종아리가 뻐근해지고 숨이 가빴다. ‘도둑이야!’ 당장이라도 민식이 할아버지가 소리치며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쿵쿵쿵 북소리가 가슴을 쳤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해바라기가 있어야 우리 엄마가 돌아오실 거예요.” 나는 말을 하는데 자꾸만 목이 메었다. 해바라기 잎이 까슬까슬 볼에 스쳤다. 볼이 따가웠다. 빗물에 젖은 해바라기가 더 싱싱하게 살아났다.
예년에 비해 그다지 적지 않은 시편이 응모되어 현장교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 밥이나 명예도 되지 못하는 시 창작을 위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열성을 보이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아련한 그리움이 살아서 숨쉬기 때문일 것이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작품을 읽을 때 여러 편의 좋은 글을 발견할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었다. 가운데서도 박수호, 구민숙, 추영희 씨 등의 작품이 월등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위 세 분의 작품은 한결같이 좋은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어떤 작품을 앞세우고 어떤 것을 뒤세우기가 쉽지가 않았다. 박수호 씨의 ‘솔안말 찾아가는 길’은 힘이 실린 시적인 어조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정서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구민숙 씨의 ‘뒤란’은 현실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는 솜씨가 빛나 보였다. 그런가 하면 추영희 씨의 ‘사과가 부화하여’는 상상력의 전개와 확산이 화려하면서도 발랄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요구했다. 많은 논의 끝에 결국은 ‘사과가 부화하여’를 당선작으로, ‘뒤란’을 가작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장단점이 있어서 선후를 가리기가 아주 많이 어려웠음을 여기 밝힌다. 그리고 ‘솔안말 찾아가는 길’ 또한 가작을 드리기로 했다. 응모규정에는 시 부문에 가작이 한 사람으로 되어 있으나 동시 부문에서 당선작이 없고 가작 한 사람만 내기로 했으므로 거기서 남은 한 사람을 시 쪽으로 돌리기로 편집부 실무진과 협의해 결정하게 된 것이다. 세 분 모두 앞날에 좋은 시인으로 바로 서주기를 빌고 선에 오르지 못한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 바이다.
오전에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지역번호 02로 걸려오는 전화의 대부분이 광고성 안내이었던 기억으로 해서 무시하고 지났다. 오후의 빈 시간에 교무실 내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에서 진동음과 함께 다시 같은 번호가 떴다. 빨리 끊을 요령으로 폴더를 열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교육신문사의 기자라는 말에 순간 당선소식임을 감지했다. 생각보다 마음이 너무나 침착하고 담담해지는 게, 이 마음이 뭘까. 그건 아마도 나의 시에 대해 스스로 엄격하고자 하는 절제가 아닌지. 내가 이 땅에 오면서 부여받은 시의 길이 과연 나의 몫인가에 대해 고뇌하면서 절망할 때가 많았다. 겁도 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내가 이런 시를 다 쓰다니, 그리고 이렇게 외롭게 될 줄도 모르다니, 이런 반성과 갈망의 세월을 오래 데리고 살았다. 시로 인해 만난 시간과 삶과 사람들이 내게 위안이 되기도 했고 그로 인해 절망과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내 시가 엉터리가 아니라는 것에서 나의 시들에게 조금은 덜 미안할 것 같다. 변방에서 울던 내 외로운 시들이 따뜻한 방을 가지고 발을 녹였으면 한다. 뽑아주신 두 분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시와 그와 동시에 좋은 삶의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소식 전해주신 교육신문사 기자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나의 귀한 벗에게도 기쁨을 전합니다. 그리고 “추워도 이거 많이 팔아야 우리 아기 우유 값 벌지요” 하던 그날의 그 추운 겨울 노점 아저씨!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저씨의 그 젖먹이가 무럭무럭 아름답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겨울 노점에서 산 한 봉지 사과가 그날 저녁 그 사과 장수 아저씨 집 아기에게 따슨 우유를 물린다 불 지핀 방 몽글몽글 사과를 굴리는 아기가 아빠의 찬 사과만큼이나 아삭아삭 잘 자라서 그도 추운 겨울 노점에서 찬 사과 한 봉지 사서 집으로 가면 그날도 동그란 옹알이 이불위로 굴러다니고 따슨 우유살 밤사이 탱글탱글 사과같이 여물겠다 사과가 열리고 익어가는 동안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젖소를 키우고 집을 짓고 집으로 가는 겨울 노점에서 또 한 봉지 사과를 사면 사과가 사과에게 오물오물 젖을 물리는 저녁 노점 아저씨의 사과는 없어지지도 않고 날마다 주렁주렁 새끼친 사과가 사과를 물고 담마다 얼굴 내민 사과나무 웃음들 사과를 먹는 집마다 하얀 사과 꽃밭 되어서 멀지 않은 곳, 겨울저녁 아늑히 두르는 울타리가 돋아나고 온 세상이 사과 같이 둥근 저녁 맛있게 드세요
작품의 수준이 고르고 제재도 다양해 즐겁게 심사 했다. 문장을 다듬으려 노력하는 이들이 많은 점도 바람직한 현상이었는데, 사고의 밀도가 받쳐주지 않거나 수필이란 이런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참신성이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을 살펴본다. ‘심천역’은 사회비판적 주제가 자신의 정서적 체험과 어울린 점이 좋았다. 하지만 앞뒤가 괴리되며 좀 더 입체적인 사색이 필요해 보였다. ‘오렌지 데이스’는 대상을 보는 감각이 개성적이나 다소 감상적이고 내용이 단조로워 무게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호피석’은 제재를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는 열정이 느껴지는 글이다. 하지만 관념이 승하고 작위적이라 정서적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게 흠이다. ‘청학동 가는 길’은 필자의 필력이 돋보인다.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전체적인 것과 부분적인 것을 적절히 결합하여 리듬을 조성하면서, 일관된 흐름과 의미를 형성해내고 있다. 대상을 파고드는 힘이 엿보이고, 필자가 함께 낸 글들의 수준도 고르므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글은 혼자 쓰지만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자는, 자기의 글을 독자가 어떻게 읽을까, 어떻게 써야 독자에게 적절히 읽히고 바라는 감동을 일으킬 것인가에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독자를 고려해야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짐을 인식했다면 훨씬 좋아졌을 작품이 많았다. 참고 바란다.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낙엽은 도로를 가득 메우다가 이리저리 흩어진다. 하늘은 회색이고 바람은 스산하다. 안간힘을 다해 떨고 있는 남은 잎들, 가슴 깊은 곳에서 짙은 슬픔이 밴다. 가을을 지독히도 타는 탓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지 않고서는 온몸이 새까맣게 타버릴 것만 같다. 그 절박한 11월의 끝자락에서 주머니속의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을 한다. ‘교원문학상’ 당선소식이다. 청천벽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다. 내가 사랑하는 지리산. 그리하여 내 젊은 날의 대부분을 헤아릴 수도 없이 오르고 또 오른 그리운 지리산. 그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어 20여년의 밤을 지새워 가며 쓴 나 혼자만의 산행기. 제도권 문단은 나의 글에 별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나는 늘, 인문학이 죽고 문학이 죽어간다는 이 시대, 강력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 같은 글이 어쩌면 새로운 시대, 문학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기나긴 인고의 세월 끝에, 커다란 지면을 통하여 꿈에서도 상상해 보지 못한 당선이라는 분에 넘치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지리산은 나에게 참으로 소중한 선물과 과제를 동시에 주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고개를 숙이며, 한번만이라도 지리산을 함께 오르며 감사의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 늦게 눈뜬 문학의 길. 이 순간만은 오십을 넘겨버린 나이조차도 잊는다. 남은 세월, 황홀한 지리산의 설렘을 노래하고, 영원한 민족의 영산, 지리산을 지켜내며 그 정신을 세상에 전달할 수 있는 작가로 우뚝 서고 싶다. 그 꿈을 위해서는 삶의 진정성과 치열성이 전제되어야함도 잘 알고 있다. 감사해야 할 분들이 많다. 깊은 잠의 나락에 빠져있는 부족한 제자를 일깨워, 내 문학의 원형이 되어주신 고려대 최동호 교수님. 마산무학여고 모든 식구들과 국어시간을 같이한 학생들. 험한 인생길과 산길을 함께 걸어온 아내 김정숙 ‘티나’, 지혜, 승일, 부모형제.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좋아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 그분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한다.
13억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고 있는 중국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파견하는 유학 대국이다. 때문에 그동안 외국 대학의 유학 사업은 중국인을 주요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며, 중국은 중국 나름대로 해외유학을 통해 자국의 우수한 인재들을 교육하고 선진기술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국가의 발전을 꾀하는 전략을 펴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에서는 이 같은 유학과 관련한 현상에도 변화가 생겨 중국의 유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중국의 유학과 관련한 추세 중 하나는 최근 몇 년 사이 외국인들의 중국으로의 유학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 유학생들의 중국으로의 유학은 매년 20% 이상씩 증가하고 있는데, 통계에 따르면 2005년 중국에 유학한 외국 유학생의 수가 14만 명을 넘어서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중국에 유학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와 동시에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한 국가의 수 및 유학생을 받는 중국 대학의 수에서도 기존의 기록을 갱신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 이미 외국 유학의 새로운 장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2005년 한 해 동안 중국으로 유학한 외국인은 모두 141,087명으로 2004년에 비해 27.28% 증가하였다. 이에 반해 중국 학생들 중 해외로 유학을 나간 수는 11.85만 명으로 나타나 해외로 나간 중국 유학생들보다 중국으로 들어온 해외 유학생들의 수가 더 많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들의 중국 유학 증가라는 최근의 경향은 중국의 국력 신장과 외국 학생 유치를 위한 중국 대학들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최근 들어 중국의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게 되고, 국제무대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게 됨에 따라 외국인들의 중국 배우기 열풍이 생겨났다. 또한 이 같은 중국의 국력증가와 더불어 중국 대학들도 각자 대학교육의 질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 유학환경의 개선을 위한 노력 등을 통하여 외국 유학생들로 하여금 중국으로의 유학을 결정하게 하는 유인책을 제공하고 있다. 베이징 사범대학을 예로 들면 최근 10년간 중국정부의 장학금 수혜를 받는 외국 유학생 700여명을 포함한 장기 유학생 1,700명을 유치하였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베이징 사범대학은 현재 외국유학생의 수가 이미 본교 학생 총수의 9%를 차지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중국정부는 후진국의 유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제공을 늘리는 정책을 통하여 중국으로의 유학을 유인하고 있는데, 자료에 따르면 2004년 중국 정부의 장학금 수혜를 받고 중국으로 유학 온 학생은 6,715명이었으며, 2005년에는 7,218명으로 그 수가 매년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주로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 빈국의 재능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중 제공되는 중국정부의 장학금 혜택은 이들 나라의 유능한 학생들로 하여금 중국에서 자기나라에 비해 질 좋은 교육을 받으며, 친중파(親中派)로 성장하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나날이 증가하는 유학시장의 팽창에 고무된 중국 교육부는 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외국 유학생 끌어들이기에 힘을 쏟고 있는데, 그에 대한 한 가지 예로 중국 정부는 중국 유학시장 확대를 목표로 2008년 베이징에서만 10만 명의 유학생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중국의 유학과 관련한 또 다른 추세로는 해외로 나간 중국 유학생들의 복귀율이 점차 높아지는 현상을 꼽을 수 있다. 해외 유학 후 중국에 돌아와 직업을 찾는 사람들을 중국에서는 하이구에이파이(海歸派)라고 부르는데, 과거의 경우 해외로 나간 중국 유학생들 대부분은 해외에서 직업을 갖고 생활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해외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의 중국 국내로의 복귀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어 중국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1978년 이후 2005년까지 해외로 유학을 떠난 중국인은 93.34만 명으로, 그 중 국내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출국인원의 25%인 23.29만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30년간의 통계수치로, 2000년부터 2005년까지의 해외유학생 59.82만 명중 2003년 2만, 2004년 2.5만, 2005년 3.5만 명이 국내로 복귀를 하여 전체 유학생 중 최근 5년간의 국내 복귀율이 34.34%로 점차 상승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2004년과 2005년을 비교하였을 때 중국 학생들의 귀국비율은 39.4%로 최근 들어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하이구에이파이(海歸派)의 증가는 이들을 중용하는 중국의 국가시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처음에는 중국 내의 취업난으로 인해 해외 유학을 선택했던 학생들이 중국 정부의 유학생 우대정책에 따라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유학 후 복귀율이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례로 현재 진행 중인 "해외유학과 귀국인원 현상 대조사"에 나타난 통계에 따르면 해외에 유학 중인 90%가량의 유학생들이 중국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71.3%의 하이구에이파이(海歸派)는 귀국 후 6개월 이내에 직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들 중 32.7%는 외자기업에 취업하였으며, 다음으로는 민영기업 등에 취업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등 이들의 취업에 유학경험이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이들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 역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청학동(靑鶴洞) 가는 길은 그 어디쯤 열려있는 것일까. 왜 나는 지리산에 빠져버렸을까. 수많은 봉우리와 그 능선들을 왜 자꾸 오르려하는가. 깊은 내면, 이상향을 향한 원초적 그리움 때문일까. 이 불안과 혼돈의 시대에도 이상향은 존재하는 것일까. 그 커다란 지리산의 어디쯤에 이상향은 숨어있을까. 지리산에서 이상향을 찾으려했던 흔적은 기록 속에서도 보이는데 청학동이 그것이다. 청학동의 실존 여부는 아직도 확인된 바 없지만, 회자(膾炙)되는 무릉도원, 유토피아, 이상향과 같은 의미에서 인식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산수유 꽃과 만발한 개나리가 흔적을 감추고 연분홍 벚꽃이 천지에 흩날리면 지리산자락의 봄은 절정을 맞는다. 산벚나무의 마지막 꽃잎 하나 바람에 떨고 있는 사월 십일일, 청학동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지리산 ‘선유동천’을 찾아 나선다. 하동포구 모퉁이를 돌아 19번 국도로 들어서자 청정 섬진강이 은빛 물결 출렁이며 풋풋한 미소로 반긴다. 섬진강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 눈물이 난다. 고고히 흐르는 저 강물이 인간의 이기심으로 어느 날 문득, 멈추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 때문이다. “섬진강은 이대로 흐르고 싶다.” 라는 길섶의 외침이 화살 되어 가슴에 박힌다. 축복의 땅 ‘하동’에서 구례 쪽으로 가는 낭만의 도로에는 벚꽃이 떨어진 허허로움을 쌀쌀맞은 배꽃이 청아하게 피어서 새로운 생기를 일으킨다. 꽃피는 마을 ‘화개’에 도착하니 십리벚꽃 축제가 막 끝나서인지 다소 들떠있는 것 같으면서도 포근하고 편안하다. 영호남의 갈림길인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들어가는 길목은 이른 봄, 수 백 그루의 벚꽃이 흰 뭉게구름처럼 엉겨 붙어 일시에 피어오르는데, 그 모습은 남도춘경의 으뜸이 될 만큼 황홀하다. 숱한 예술작품의 무대가 되기도 하는 이 ‘화개동천’은 신선과 관련된 전설도 유달리 많아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모여든 곳이다. 이인로도 청학동을 찾아 나선 길에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들은 그 빼어남과 깊이를 서로 다투며, 대울타리에 초가들이 복숭아꽃 살구꽃 핀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어 거의 인간세상이 아닌 듯하다.”고 이곳의 선경을 예찬하지 않았던가. 화개동천속의 선유동은 ‘쌍계사’를 지나 ‘신흥마을’ 위, 오른쪽 계류를 따라 시작된다. 상큼한 풀냄새와 사월의 싱그러움이 출발의 설렘까지 부추긴다. 초입부터 초막으로 보이는 흔적도 간간이 보인다. 계곡 언저리를 메우고 있는 둥글 넙적 하며, 크고 작은 바위사이로는 투명한 물살이 경쾌하게 흐른다. 세수를 하고 양치도 해본다. 얼음처럼 차가운 사월 계류의 감촉이 짜릿하다. 푸른 소, 작고 예쁜 폭포, 반석 위로 구슬이 구르듯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주변의 붉디붉은 진달래 군락과 어우러져 신선들의 풍류를 그대로 재현하는듯하다. 반쯤 돋아난 여린 잎 새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 이미 지고 있는 산벚꽃, 조팝나무의 하얀 꽃망울들. 산과 물 사이로 무르익어 가는 봄날의 화음은 교향악이 되어 가슴속에 들어앉는다. 청학동의 모습은 어떠할까를 생각하며, ‘선유동천’ 속으로 쉬엄쉬엄 빠져든다. 두어 시간을 오르는 동안 언덕 곳곳에 집터와 전답들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유동은 어느 한 곳에 수 십 호가 모여 살았던 마을이 아니라, 길게 골짜기를 따라 늘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속세를 등지고 신선처럼 살다간 그 옛날의 주인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사리암’ 의 자리라고 전해지는 마당 앞에는 진분홍 산 복숭아꽃이 하도 애절하게 피어서 지나가는 산객의 마음을 휘청거리게 만든다. 평평한 바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뒤돌아보는 계곡의 모습은 더욱 영롱하다. 선유동의 봄이 무르익고 있다. 왕벚꽃, 산목련, 무성한 풀잎들이 계곡을 둘러싼 산허리로 너울너울 춤춘다. 나무들의 산, 꽃들의 산, 짐승들의 산이다. 그들이 베푸는 따뜻한 위안, 그것이 그리워 나 혼자만의 사랑으로 청학동을 찾아 나선 것이리라. 산 친구 송신근이 배낭 속을 뒤지더니 돌문어를 삶아 넣은 도시락과 소주 한 병을 꺼낸다. 한잔하고 가자한다. 신선이 머물다간 그 자리에서, 신선주를 마시고 신선이 되어 보잔다. 그 동안 술로 지친 몸이지만 선유동에서 신선주를 마다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한 잔의 술로 신선이 되어 세상의 숱한 시름들은 잊어본다. 삶의 아픔과 그리운 추억의 조각들, 마음깊이 꼭꼭 묻어둔 내 꿈의 씨앗까지도 스르르 날려버린다. 이렇게 가볍고 후련한 것을, 왜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다람쥐는 분주하고 놀란 까투리는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오른다. 봄기운을 이기지 못해 교태로운 소리로 울어대는 두견새는 산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흔든다. 돌아올 수 없는 심산유곡으로 한없이 이끌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솜털 같이 아늑하다. 청학동은 이렇게 처음도 없는 애상감으로 밀려와 마음속 끝도 없이 침잠하는 것일까. 갑자기 내 안의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이래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한 것인가. 노란색과 이 아득하고 아련한 봄날은 청학동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계곡이 끝나는 곳에서 ‘삼신봉 능선’으로 오르려 하는데 길이 애매하다. 표지 리본을 따라 우측능선으로 붙으니 희미한 길이 열린다. 나의 노란 표지기 ‘바람따라, 그리움따라’를 정성껏 달아준다. 뒤에 올 사람들에 대한 배려다. 그리고 코가 닿을 듯한 비탈길과 한바탕 씨름을 한다. 주변은 산수유 꽃과 흡사한 노란 생강나무 꽃이 화사하게 피어 수줍은 여고 일학년처럼 웃는다. 능선은 온통 노란색이다. 이 길을 따라 구슬땀을 흘리며 힘겹게 오르면 청학동에 도착하리란 믿음이 생긴다. 주능선이 다 보이는 산속의 봉우리에서 자리를 잡는다. ‘삼신봉’ 허리길이 감으로 잡히고, 전후좌우사방은 거침없는 조망으로 찬란하다. 지리산 남쪽, 최고의 전망대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계곡을 오를 때만 해도 봄으로 충만했던 계절이 이곳은 아직도 움을 틔울 준비만 하고 있는 회색 겨울이다. 지리산이 그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단 한 숨 돌리고 선경에 들기로 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광활한 푸른 바다의 물결처럼 출렁이는 백리 주능, 반야봉을 주봉으로 섬진강까지 현란하게 내리 뻗은 불무장등, 머리 위를 지나가는 지리산의 기둥격인 남부능선, 지리산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멀리서 아물거리기만 하던 호남 땅 백운산은 사천왕이 되어 눈앞에 우뚝하다. 이승의 영욕들이 바람처럼 스러지고, 새로운 피안의 세계로 녹아드는 듯하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이 풍광이야말로 청학동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주 능도 범속이 아니지만 삼신봉에서 상불재, 성제봉, 신선대로 이어지는 지능선도 산꾼들의 넋을 빼앗을 만큼 걸출하다. 감미로운 산상의 오찬을 마치는 대로 쌍계사 쪽으로 향한다. 호젓하다. 이런 산길이 좋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 이 같은 욕망이 늘 삶을 힘들게 하는데도 말이다. 동남쪽으로 조금 내려와서 ‘상불재’ 이정표와 마주한다. 상불재는 ‘진주암’이 있는 ‘청학동’으로 갈수도 있고, ‘성제봉’을 거쳐 ‘섬진강’으로 빠질 수 있는 남부능선의 지리적 요충지다. 불일폭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노각나무, 고로쇠나무 등의 연초록 잎들이 봄날의 서정을 돋운다. 사람이 조성한 굵은 돌길이라 조금은 피곤하지만 첫길의 설렘으로 불일폭포를 맞을 준비를 한다. 불일폭포 갈림길부터는 북적대는 유산객들과 함께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간다. ‘불일폭포’는 과연 지리 십 경에 들 만한 품격과 기상을 충분히 갖추었다.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의 좁은 계곡에서 쏟아지는 육십여 미터의 물줄기는 주변의 풍광과 조화되어 황홀하고 웅걸한 풍광을 만든다. 원통 같은 수직절벽 위로는 새 각시 얼굴만 한 하늘이 환하게 웃고 있다. 협곡 사이로 무더기를 이루며 여기 저기 피어있는 진달래꽃은 부서지는 하얀 물줄기와 기품 서린 동양화 한 폭을 그린다. 이런 것이 청학동의 모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쉬움에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발길을 돌린다. 이곳은 유달리 붉은 소나무가 늘려있다. 상처 없이 잘 자란 키 큰 적송 사이로 길은 이어진다. 좌측의 아련한 계곡 사이로는 봄기운이 산수화 속에서 무르익는다. 예사롭지 않은 산세다. 청학동을 찾아 나선 선현들이, 불일폭포 부근을 청학동으로 생각한 이유가 온몸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불일평전’을 지나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의 바위, ‘환학대’에 도착한다. 둥글고 큰 바위 앞에는 안내 입간판과 함께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서럽도록 붉은 꽃잎을 피워내며 힘겹게 서있다. 매우화난 표정이다. 그 옛날 신선들이 찾아다니던 청학동이 지금은 무참히 부서지고 있음을 질책이라도 하려는 듯하다. 대체 청학동은 그 어디쯤일까. 갈등으로 분열된 시대, 청학동은 이미 하늘로 날아오른 마을은 아닐까. 아둔한 나의 눈으로는 청학동 속에서도 청학동을 볼 수 없을 것만 같기도 하다. 이상세계가 현실 속에서 존재할 수는 있을까. 청학동은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된 영원한 안식처를 향한 원초적인 슬픔 같은 것은 아닐까.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영원 속에 청학동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내가 또다시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을 오르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따사로운 봄볕이 고적감으로 무르익은 늦은 오후, 신비의 땅 하동 ‘쌍계사’의 상춘인파 속으로 빨려든다. 인산인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솟아오른다. 청학동(靑鶴洞)가는 길은 4월의 봄날처럼 아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