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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어떤 휴가 :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영화나 책도, 미안하게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모든 욕망이 갑자기 증발해버렸다. 어차피 환골탈퇴 할 것도 아닌데 머리는 해서 뭐 해. 벗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옷은 사서 뭐 해. 밥은 굶지만 않으면 되지 뭘 맛난 걸 찾아다녀. 맛 집 목록을 보면서 혼자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거나 공연 일정 같은 걸 살펴보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에서 다운받는 영화나 드라마면 되지, 뭘 더 바래…. 하며 집에서 매일매일 뒹굴었습니다. 그래,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지. 내 마음이 그 동안,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괴로운 건 다 욕망 때문이었어. 물욕, 육욕, 식욕, 뭐가 되었든 다 버려야지. 그러면 좀 더 편안하고 조용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한 지 일주일. 욕망하지 않고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해 버렸습니다. 머리는 부스스해지고, 제대로 먹지 않아 퀭한 눈에 늘어진 트레이닝을 걸친 ‘낯선’ 여자의 모습은, 욕망을 버린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는 평화로운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욕망하지 않았더니 평화가 찾아온 게 아니라 삶의 혼란이 닥쳐온 것이지요. 매일매일 욕망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은 더 괴롭기만 했습니다. 두 개의 ‘나’가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욕망을 버려야 해. 시간이 지나면 편안해지지 않을까?”, “니가 무슨 스님이냐? 어울리지 않게 욕망을 버리겠다고? 너 같은 속인이 무슨. 헛소리 집어치워라”라고. 그리고 결국 ‘스님’은 ‘속인’에게 일주일 만에 두 손을 들고야 말았습니다. 마음속의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면, 참는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자기 삶을 가꾸어가는 욕망은, ‘생활인’이라면 가져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건, 적어도 제게는 ‘게으름’의 다른 표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삶을 살기 위해서 욕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는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뭐,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어제 제가 지름신이 내려와 인터넷으로 물건을 마구 사들인 행위의 심리적 배경을 설명하고자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현대를 살아가는 사회인으로서, 물욕이 없는 보살처럼 살 수는 없지 않은가를 피력하고자 한 것뿐(?)입니다. 소비와 사회는 태아와 탯줄처럼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 끈을 놓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쇼핑의 약발이 아무리 짧다고 해도, 오늘도 홈쇼핑 마감 임박의 불이 깜빡일 때면 수화기를 들까말까 망설이게 되고 마는, ‘욕망 덩어리’인 자신을 사랑하려면, 이렇게라도 합리화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알렉산드로스대왕, BC 323년에 3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할 뻔해 세계가 숨을 죽이다.” 사실은 잘 알고 있듯이 ‘요절할 뻔해’가 아니라 요절했다. 인도에서 바빌론으로 귀환한 후 각국 사절들의 축하를 받거나 축제를 베푸는 등 휴식을 취하던 그는 BC 323년 6월 13일 잠자리에서 열병에 걸렸다. 발칸반도·이집트·인더스강에 이르는 동지중해-중동 지역을 손에 넣고 천하를 호령하던 그도 10여 일의 투병 끝에 결국 열병에 굴복했다. 정적에 의한 독살설도 있었으나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시신은 이동신전의 황금관에 안치되어 그리스로 향하던 중 그의 부장 프톨레마이오스가 시리아에서 탈취해 알렉산드리아 부근 어디에 매장했다고 하나 고고학자들은 아직도 무덤의 소재지를 다투어 찾고 있다. 22세의 나이로 세계 정복에 나서 그리스의 폴리스 세계를 제패한 부왕 필리포스 2세가 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피살된(BC 336년) 후 20세에 마케도니아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반대세력과 내외의 경쟁자들을 타도한 후 부왕이 이루지 못한 동방원정에 나섰다. 그리스 동맹회의에서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정된 데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神託)까지 받은(액일이라 신탁 절차 밟기를 거절한 무녀들을 윽박질러 받은 신탁은 “나의 아들이여. 너는 어떻게 할 수 없구나!”였다고 한다) 그는 즉위 2년 후인 기원전 334년에 3만여 보병과 5천여 기병 등 생각보다는 소규모의 정예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응징이기도 한 동방원정에 나섰다.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꺾은(이수스 전투) 알렉산드로스는 팔레스타인을 거처 이집트로 진격했다(BC 332년). 이집트 고(古)왕국의 수도 멤피스까지 진격한 그는 나일 강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후 시리아로 귀환했다. 영웅에겐 걸맞은 영웅담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다음은 알렉산드로스의 소아시아정복과 관련한 전설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3년 봄에 서아시아해변을 따라 남진할 때 갑자기 해수면이 낮아졌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신의 은총이라 말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프리지아에서는 아시아를 통치할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고르디우스 매듭’을 알렉산드로스가 칼로 끊고 풀어 자신의 명성을 한층 더 높였다고 한다. 시리아에서 이라크 쪽으로 진로를 잡은 알렉산드로스는 티그리스 강 북부(현재의 이라크 북부 아르빌라)에서 역사적 전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가우가멜라 전투를 승리로 장식해 페르시아를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었다. 기원전 331년 10월 1일. 원정 중에 늘어난 알렉산드로스의 4만여 보병과 7천여 기병은 수적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절대적 우위에 있던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군과 맞섰다. 알렉산드로스는 측면의 예비보병으로 페르시아 기병의 측면공격을 막으면서 궁수·투창수·기병으로 공격진을 짰다. 다리우스의 기병이 알렉산드로스 진의 좌측을 수차례 공격하던 중 전선 중앙부의 보병이 알렉산드로스군에 노출되었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근위기병들은 즉각 그 틈새로 쳐들어가 페르시아군의 측면과 후미를 공격했다. 다리우스는 그를 따르는 일부 병사들과 함께 도망치고 흩어진 그의 군대는 후퇴의 길로 들어섰다. 쉼 없는 동진으로 인도까지 진출 가우가멜라 전투 후 동진(東進)을 계속한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를 점령했다. 그는 다리우스 3세의 가족을 보호하고 지방 제사장들을 회유하는 한편 금화 4만 탈렌트와 여타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동진해 페르세폴리스와 파사르가데를 함락시킨 후 3회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세폴리스궁을 불태웠다. 그는 한 아테네 출신 창녀의 요청에 응해 이란 남부의 페르세폴리스궁을 불태웠다고 한다. 다시 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는 카스피해 남단과 중앙아시아를 석권한 후 아프가니스탄의 쿤두즈를 지나 동쪽으로 진격했다. 마라칸다(현재의 사마르칸드)를 경유해 시르다리야 강 상류에 도달한 알렉산드로스는 스키타이족의 저항을 일축한 다음 코젠트(현재의 레니나바드)에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가장 먼 알렉산드리아란 뜻)를 건설했다. 험준한 산악, 물살이 빠르고 깊은 강, 원주민의 완강한 저항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즐기기나 하듯이 원정을 멈추지 않은 알렉산드로스는 현재의 타지키스탄에서 옥시아르테스의 저항군을 타도한 다음 회유책의 일환으로 그의 딸 록산나와 결혼했다. 기원전 327년 여름에 군대를 재편성한 알렉산드로스는 문자 그대로 험준하기 짝이 없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따르면 12만 병력이었다고 하지만 3만 5천 전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원정대는 간다라 지방을 지나 난공불락의 산정요새 아오르노스(현재의 피르-사르)를 점령한 후 인더스 강을 건너 탁실라에 입성했다(BC 326년). 탁실라에서 일단의 전투코끼리를 얻고 병력을 보충한 그는 그해 6월 히다스페스 강 유역에 알렉산드리아 니케아와 알렉산드리아 부케팔라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거기서 진격을 멈추었다. 부장들의 건의를 수용해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한 그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12신에 바치는 12개의 제단을 만들어 제사지낸 후 인더스 강을 따라 하류로 향했다. 인더스 강 하구에 도착한 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육로와 해로로 바빌론에 귀환케 했다. 육로 귀환부대를 이끈 그는 진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험준한 산악지대와 사막을 지나 기원전 324년 봄에 수사에 도착했다. 수사에서 승리의 축제를 열고 부하들과 페르시아 여인들의 결혼식을 주선한 다음 최후를 맞이하게 될 바빌론에 귀환했다. 동·서양의 문화 융합에도 노력해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은 사실 죽음의 원정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원정대는 곳곳에서 적군은 물론 험준한 지세나 풍토병 등과 싸워야 했다. 말 그대로 악전고투였지만 11년이란 짧은 기간에 그것도 그리 대단치 않은 군세로 소아시아와 이집트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했다. 26세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는 “남아 이십 미평국(未平國)이면 후세 수칭 남아리오”라며 사자후를 토했지만 20∼30대의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원정에 성공해 대제국을 세운 것은 실로 전설적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단순한 정복자는 아니었다. 그는 동·서양을 참다운 하나의 세계로 만들려 했다. 군사적, 정치적 정복과 지배가 아니라 인종, 종교, 문화, 관습 등 모든 것이 융합된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려 했다. 스스로 중앙아시아(박트리아) 출신 록산나 및 다리우스 3세의 공주 바르시네(스타테이라)와 결혼한 그는 부장들에게도 페르시아 여인과 결혼할 것을 권고했다. 수사에서는 1만여 명의 병사와 원주민의 결혼을 주선하고 축복해주었는가 하면 페르시아인을 궁중의 집사나 고위 관리로 채용하기도 했다. 물론 동서양의 상이한 문화도 융합하려 했다. 그는 나일 강 하구의 알렉산드리아와 인더스 강 유역의 알렉산드리아 니케아를 포함해 정복지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70여 개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현재의 알렉산드리아에 동서양의 석학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게 했다. 그 모두가 인종이나 문화의 벽을 헐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 넘나들어 모든 것이 융합된 하나의 세계를 위한 알렉산드로스의 노력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지만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간다라미술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의 원정대가 거처 간 서북부 인도의 간다라에서 불교미술과 그리스의 조각예술이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조잡한데다 외설적이기도 했던 불상은 ‘미로의 비너스’를 만든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우아하고 세련된 불상으로 바뀌었다. 높은 코, 깊숙한 눈, 곱슬머리 등도 간다라불상의 한 특징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생존 시에는 물론 사후에도 전설의 주인공이었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중달을 패주시켰다(死孔明 走生仲達)’고 하지만 죽은 알렉산드로스 또한 산 카산드로를 전율케 했다고 한다. 즉, 알렉산드로스의 충직한 신하로 동방원정에 나선 그를 대리해 마케도니아를 통치한 안티파테르의 아들 카산드로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수년 후 델포이에 있던 알렉산드로스의 조상(彫像) 옆을 지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떨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서양사회의 개인숭배 뿌리를 신이 되려 한 알렉산드로스에서 찾지만 -심지어 예수를 메시아로 숭앙하는 것도 그의 개인숭배와 연결짓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으로, 적어도 신적 존재로 숭앙해주기를 바랐다. 원정 중에 점차 동방적 전제군주의 절대적 권위를 즐긴 그는 신하들에게 페르시아적 궁중의례와 부복(俯伏)을 강요했다. 때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그은 그리스인들은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신으로 숭배했던 것 같다. “알렉산드로스가 신이 되기를 원하니 그를 신으로 삼도록 하자.” 당시 스파르타가 내린 한 포고령 내용이다. 세계 역사 바꾼 대왕의 이른 죽음 알렉산드로스는 탁월한 장군이되 진취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자랑했다. 그는 뛰어난 설계자였고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적을 포용하고 회유한 현군이었는가 하면 신임하던 부하도 단칼에 처형하는 냉혹한 폭군이었다. 그리고 군사적 정복을 넘어 인종과 문화가 융합된 진정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요절하지 않고 30, 40년 더 헬레니즘 세계(대체로 그가 통합한 지역은 헬레니즘 세계로, 그로부터 번성한 문화는 헬레니즘 문화로 불린다)를 통치했을 경우 지중해 세계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인류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동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유대인과 아랍인,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대립을 넘어 섬멸적 혈투를 벌여왔다. 혹자는 문명충돌로 규정하지만 기독교권과 이슬람교권의 불신과 대립은 세월과 더불어 그 강도를 더해오고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열병에 굴해 요절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유대인이니 아랍인이니 하는 인종들이나 기독교니 이슬람교니 하는 종교들이 존재하기나 할까. 유대교의 역사는 알렉산드로스에 앞서지만 1세기에 유대교를 모태로 창시된 기독교나 7세기 초엽에 창시된 이슬람교는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인종·종교·문화를 초월하는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 세계가 굳건히 뿌리내렸을 경우 멀게는 로마제국이나 십자군원정도, 가깝게는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인종적·종교적 혈투나 1, 2차 이라크 전쟁도 없었거나 없지 않을까.
지난 6.27일~ 28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SK 텔레콤이 공동 주최한 ‘2007장애 청소년 IT챌린지’ 경진대회에서 인천혜광학교의 3학년 천동국학생이 정보검색부문에서 1등을 차지 지역사회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대회는 전국 14개 지역에서 IT전문가로의 꿈을 키우고 있는 장애 청소년 1,500여명을 대상으로 지난 5월부터 전국적으로 예선대회를 거쳐 지역별 선수를 선발하였고 선발된 350명의 장애청소년이 이번 본선대회에 참가하여 열띤 경쟁을 펼쳤었다. 한편 이번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천동국학생과 지도교사인 채태병선생님께서는 부상으로 여름방학에 7박 8일의 미국의 장애인시설 및 특수교육기관을 견학할 수 있는 해외연수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장마기간이어서 강마을은 온통 물냄새로 가득합니다. 흐린 하늘엔 무수한 잠자리가 날아오르고 주황색 원추리꽃이 화단 기슭에 피어났습니다. 원추리는 제가 좋아하는 여름꽃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옛 여인들은 규방 가까이 원추리를 심었다고 합니다. 원추리는 여인의 꽃으로봄철 연두빛새싹은 나물로 무쳐먹거나 된장국에 넣으면 맛있는 반찬이 됩니다.그리고 여름철 주황과 노랑의 어여쁜 꽃이 피면 그 꽃을 따서 밥과 같이 지어 먹었다고합니다. 그러면 밥색깔이 노랗게 변해서 참 곱다고 합니다. 원추리는 우리 말로 근심을 풀어주는꽃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은 꽃입니다.원추리는 한자로는 훤초(萱草)입니다. 원추리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편에 나온다. “어디서 훤초(훤草)를 얻어다 뒤꼍에 심을까[焉得훤草, 言樹之背]”라고 했다. 여기 보이는 훤초(훤草)가 바로 훤초(萱草) 즉 원추리이다. ‘훤(훤)’은 잊는다는 뜻이다. 원추리의 다른 이름은 망우초(忘憂草)다. 근심을 잊게 해 준대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술이기(述異記)』라는 책에는 오(吳) 지역에서는 이 꽃을 근심을 치료해 준다는 뜻으로 요수화(療愁花)라고 부른다고도 적혀 있다. 정민/문화와 나 2004.여름호 강마을 흐린 하늘 사이로 언뜻언뜻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검은 구름 사이로 보이는 보이는 하늘 빛이 더 곱고 푸릅니다. 저는 저 푸른 하늘빛이 참 좋습니다. 제가 장마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한용운님의 시 때문입니다. 한용운님의 시는 모두 좋지만, 그 중에서 한여름철이면 꼭 이 시를 꺼내 중얼중얼 소리내어 읽습니다. 그리고 고단하고 평이한제 일상 속에 작을 푸른 하늘빛인양 그렇게제 꿈을 생각합니다. 어쩌다 덥고 비오는 장마철제 마음처럼 되어주지 않는 일들이 쌓여서 지치고 힘들 때면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그 하늘 사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조각 하나에 힘을 내는 것입니다. 강마을은 장마기간 중이어서 하늘빛은 무겁고 이따금 비를 뿌릴 것 같습니다. 저는묵은 시집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끝이없는 어둠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가슴에 품고 꼿꼿하게 나아가셨던 한용운님의 위대한 삶을 기억하면서 다시 시를 읽습니다. 원추리꽃 무성히 핀강마을에서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搭)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 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틀 동안의 연휴, 마음이 들뜬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거리마다 차량들이 넘쳐났다. 기상청에서는 전국적으로 강풍을 동반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라고 예고하며 나들이 나온 사람들을 훼방 놨다. 그래서였을까? 푸른 바다가 넘실대며 유혹하고 있는데도 동해안으로 달려온 사람들이 적었다. 6월 23일 정동진 바닷가도 한적했다. 하늘의 구름이 아름다워 백사장에 앉아 황국산 시인의 ‘정동진에서’를 음미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정동진에 왔다 정동진에서, 바다 앞에 서서 바다를 보았다 꿈틀거리는 바다, 거대한 몸짓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저 바다, 마치 그녀의 가슴처럼 솟아오른 젖봉오리처럼 거칠게 숨쉬는 저 바다, 나는 바다 앞에서 그녀를 본다 내 모든 것 다 감싸안고 영원을 노래하던 그녀의 아름다움과 만난다 바람이 몹시 불고 간간히 눈발이 날리는 날 나는 정동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인천 만수여자중학교(교장 정남숙)에서는 일반적으로 많은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운동장 조회를 탈피하여 학생들의 다양한 관심과 필요를 고려해 주제를 정하고 각 학년별로 ‘테마가 있는 학년 조회’의 날을 운영 학생들의 반응이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학교의 조회가 훈화 위주의 전달식 조회였다면 이 학교는 학년별 방송조회를 통해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때로는 학생들의 관심 분야의 강의를 마련하여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채워주는 학생 중심의 조회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 6.2일 토요일 4교시에는 3학년이 먼저 테마가 있는 학년 조회로 학생들의 필요와 관심을 반영해 ‘성(性)’을 주제로 인천성폭력 상담센터 주순옥 강사를 초청 성교육을 실시했으며, 6.30일 3,4교시에는 1,2학년이 각각 테마가 있는 학년 조회를 가졌다. 특히 1학년의 테마 조회는 가정의 달 행사로 실시한 ‘가족 신문 만들기’ 수상자 3명이 나와서 신문을 만든 과정, 부모님과의 인터뷰, 만든 후의 소감 등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그 내용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분기별로 칭찬 인물을 뽑는 ‘칭찬합시다’의 주인공들의 칭찬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또한 동부교육청에서 열린 나의 주장 발표대회에서 수상한 3학년 김정은 학생이 ‘남북을 이어줄 다리’라는 제목의 주장 발표회 시간도 가졌으며, 마지막으로 이 학교 학생의 택견 시범을 보여 주었으며. 4교시 2학년의 테마 조회는 ‘효행기사 찾기’ 수상자들의 기사내용 발표가 있었다. 한편 정남숙 교장은 “학년별로 테마를 정하여 운영되는 학년별 조회가 전체 훈화 조회에서는 보여 줄 수 없는 학생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심을 가져왔으며, 딱딱하고 지루한 조회에 대한 편견을 깨주었다.”며 “이후에도 다양한 테마를 선정해서 학생들에게 더욱 즐겁고 유익한 조회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요즈음의 세상을 ‘명품’이 판치는 세상이라고 한다. 상품의 선전을 하는 데에도 ‘명품’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소비자들에게 통한다. 기업의 CEO에게는 물론이고 신랑감, 신부감에도 ‘명품’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현상으로 모두가 ‘명품’이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가 명품이 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한 자기 성찰을 통해서 거듭나기를 반복해야 한다. 물론 나 자신도 반성문을 쓰는 마음으로 새로운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6월 25일 경향신문에는 “명품 CEO가 되기 위한 여덟 가지 조언”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덟 가지 조건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 다니면서 배운 내용이었고, 직장과 사회에서 만난 선후배들이 늘 되뇌었던 말이었다. 그것은 선견지명, 창의성, 용병술, 인간미, 배려, 칭찬, 신뢰, 겸손이었다. 이런 덕목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말로 반드시 CEO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어쩌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우리 선생님들에게 더욱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들어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글을 쓰게 되었다. 첫째, 선생님은 선견지명이 있어야 한다. 선견지명이란 닥쳐올 일을 미리 아는 슬기로움이다. 선생님은 오늘의 현실에만 안주해서는 안 된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하고 변화를 감지하고 이에 맞는 대응력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또한 학생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읽어내고 이에 계발 방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즉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고 동시에, 아이의 소질과 적성을 발견하여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창의성을 일깨우는 교육에 앞장서야 한다. 창의성이란 새로운 착상이나 의견을 생각해내는 능력을 의미하는데 이는 늘 변화와 개선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변화와 개선을 가져오는 데 있다. 단순한 전수가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키우는 교육을 하여야 한다. 교사의 부단한 자기 연찬과 교수 학습 연구로 학생들의 지적 성장을 키워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셋째, 탁월한 용병술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전쟁터의 장수들만이 갖추어야 할 리더십이 아니다. 교육 관료는 물론이고 학교의 선생님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리더십의 요건이다. 장수가 병사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감화를 주지 못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교사가 학생의 마음을 붙들지 못한다면 그 교육 성과는 미미하게 되고 만다. 이러기 위해서는 선생님은 자기가 배웠던 그리고 익혀 왔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몸을 낮춰 아이들과 눈 맞추기를 하여 특유의 용병술을 개발해야 한다. 공감하고 이해하는 리더십으로 무장해야 한다. 넷째, 따뜻한 인간미를 지녀야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그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학생의 입장을 배려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설사 학생들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빗나가는 경우라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진실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배려해주고 칭찬해 주면 학생들은 따라오게 마련이니까. 다섯째, 믿음을 주어야 한다. 우리 선생님은 정말 우리를 위하여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해야 한다. 선생님의 열정적인 학습지도는 물론 생활지도가 진정으로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야 한다. 위로부터의 신뢰가 아닌 학생과 학부모로부터의 신뢰를 얻는 데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명품교육’ 이는 어쩌면 새로운 트랜드로서 우리들이 절실히 원하는 바 아닌가. 우리 선생님은 교실현장의 CEO로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물론 교육청이나 교육부의 공무원들도 학교 현장을 도와주는 감성 CEO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