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대왕, BC 323년에 3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할 뻔해 세계가 숨을 죽이다.” 사실은 잘 알고 있듯이 ‘요절할 뻔해’가 아니라 요절했다. 인도에서 바빌론으로 귀환한 후 각국 사절들의 축하를 받거나 축제를 베푸는 등 휴식을 취하던 그는 BC 323년 6월 13일 잠자리에서 열병에 걸렸다. 발칸반도·이집트·인더스강에 이르는 동지중해-중동 지역을 손에 넣고 천하를 호령하던 그도 10여 일의 투병 끝에 결국 열병에 굴복했다. 정적에 의한 독살설도 있었으나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시신은 이동신전의 황금관에 안치되어 그리스로 향하던 중 그의 부장 프톨레마이오스가 시리아에서 탈취해 알렉산드리아 부근 어디에 매장했다고 하나 고고학자들은 아직도 무덤의 소재지를 다투어 찾고 있다.
22세의 나이로 세계 정복에 나서
그리스의 폴리스 세계를 제패한 부왕 필리포스 2세가 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피살된(BC 336년) 후 20세에 마케도니아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반대세력과 내외의 경쟁자들을 타도한 후 부왕이 이루지 못한 동방원정에 나섰다. 그리스 동맹회의에서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정된 데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神託)까지 받은(액일이라 신탁 절차 밟기를 거절한 무녀들을 윽박질러 받은 신탁은 “나의 아들이여. 너는 어떻게 할 수 없구나!”였다고 한다) 그는 즉위 2년 후인 기원전 334년에 3만여 보병과 5천여 기병 등 생각보다는 소규모의 정예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응징이기도 한 동방원정에 나섰다.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꺾은(이수스 전투) 알렉산드로스는 팔레스타인을 거처 이집트로 진격했다(BC 332년). 이집트 고(古)왕국의 수도 멤피스까지 진격한 그는 나일 강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후 시리아로 귀환했다. 영웅에겐 걸맞은 영웅담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다음은 알렉산드로스의 소아시아정복과 관련한 전설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3년 봄에 서아시아해변을 따라 남진할 때 갑자기 해수면이 낮아졌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신의 은총이라 말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프리지아에서는 아시아를 통치할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고르디우스 매듭’을 알렉산드로스가 칼로 끊고 풀어 자신의 명성을 한층 더 높였다고 한다.
시리아에서 이라크 쪽으로 진로를 잡은 알렉산드로스는 티그리스 강 북부(현재의 이라크 북부 아르빌라)에서 역사적 전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가우가멜라 전투를 승리로 장식해 페르시아를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었다. 기원전 331년 10월 1일. 원정 중에 늘어난 알렉산드로스의 4만여 보병과 7천여 기병은 수적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절대적 우위에 있던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군과 맞섰다. 알렉산드로스는 측면의 예비보병으로 페르시아 기병의 측면공격을 막으면서 궁수·투창수·기병으로 공격진을 짰다. 다리우스의 기병이 알렉산드로스 진의 좌측을 수차례 공격하던 중 전선 중앙부의 보병이 알렉산드로스군에 노출되었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근위기병들은 즉각 그 틈새로 쳐들어가 페르시아군의 측면과 후미를 공격했다. 다리우스는 그를 따르는 일부 병사들과 함께 도망치고 흩어진 그의 군대는 후퇴의 길로 들어섰다.
쉼 없는 동진으로 인도까지 진출
가우가멜라 전투 후 동진(東進)을 계속한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를 점령했다. 그는 다리우스 3세의 가족을 보호하고 지방 제사장들을 회유하는 한편 금화 4만 탈렌트와 여타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동진해 페르세폴리스와 파사르가데를 함락시킨 후 3회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세폴리스궁을 불태웠다. 그는 한 아테네 출신 창녀의 요청에 응해 이란 남부의 페르세폴리스궁을 불태웠다고 한다.
다시 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는 카스피해 남단과 중앙아시아를 석권한 후 아프가니스탄의 쿤두즈를 지나 동쪽으로 진격했다. 마라칸다(현재의 사마르칸드)를 경유해 시르다리야 강 상류에 도달한 알렉산드로스는 스키타이족의 저항을 일축한 다음 코젠트(현재의 레니나바드)에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가장 먼 알렉산드리아란 뜻)를 건설했다. 험준한 산악, 물살이 빠르고 깊은 강, 원주민의 완강한 저항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즐기기나 하듯이 원정을 멈추지 않은 알렉산드로스는 현재의 타지키스탄에서 옥시아르테스의 저항군을 타도한 다음 회유책의 일환으로 그의 딸 록산나와 결혼했다.
기원전 327년 여름에 군대를 재편성한 알렉산드로스는 문자 그대로 험준하기 짝이 없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따르면 12만 병력이었다고 하지만 3만 5천 전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원정대는 간다라 지방을 지나 난공불락의 산정요새 아오르노스(현재의 피르-사르)를 점령한 후 인더스 강을 건너 탁실라에 입성했다(BC 326년). 탁실라에서 일단의 전투코끼리를 얻고 병력을 보충한 그는 그해 6월 히다스페스 강 유역에 알렉산드리아 니케아와 알렉산드리아 부케팔라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거기서 진격을 멈추었다. 부장들의 건의를 수용해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한 그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12신에 바치는 12개의 제단을 만들어 제사지낸 후 인더스 강을 따라 하류로 향했다. 인더스 강 하구에 도착한 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육로와 해로로 바빌론에 귀환케 했다. 육로 귀환부대를 이끈 그는 진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험준한 산악지대와 사막을 지나 기원전 324년 봄에 수사에 도착했다. 수사에서 승리의 축제를 열고 부하들과 페르시아 여인들의 결혼식을 주선한 다음 최후를 맞이하게 될 바빌론에 귀환했다.
동·서양의 문화 융합에도 노력해간략히 살펴보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은 사실 죽음의 원정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원정대는 곳곳에서 적군은 물론 험준한 지세나 풍토병 등과 싸워야 했다. 말 그대로 악전고투였지만 11년이란 짧은 기간에 그것도 그리 대단치 않은 군세로 소아시아와 이집트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했다. 26세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는 “남아 이십 미평국(未平國)이면 후세 수칭 남아리오”라며 사자후를 토했지만 20∼30대의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원정에 성공해 대제국을 세운 것은 실로 전설적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단순한 정복자는 아니었다. 그는 동·서양을 참다운 하나의 세계로 만들려 했다. 군사적, 정치적 정복과 지배가 아니라 인종, 종교, 문화, 관습 등 모든 것이 융합된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려 했다. 스스로 중앙아시아(박트리아) 출신 록산나 및 다리우스 3세의 공주 바르시네(스타테이라)와 결혼한 그는 부장들에게도 페르시아 여인과 결혼할 것을 권고했다. 수사에서는 1만여 명의 병사와 원주민의 결혼을 주선하고 축복해주었는가 하면 페르시아인을 궁중의 집사나 고위 관리로 채용하기도 했다.
물론 동서양의 상이한 문화도 융합하려 했다. 그는 나일 강 하구의 알렉산드리아와 인더스 강 유역의 알렉산드리아 니케아를 포함해 정복지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70여 개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현재의 알렉산드리아에 동서양의 석학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게 했다. 그 모두가 인종이나 문화의 벽을 헐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 넘나들어
모든 것이 융합된 하나의 세계를 위한 알렉산드로스의 노력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지만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간다라미술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의 원정대가 거처 간 서북부 인도의 간다라에서 불교미술과 그리스의 조각예술이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조잡한데다 외설적이기도 했던 불상은 ‘미로의 비너스’를 만든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우아하고 세련된 불상으로 바뀌었다. 높은 코, 깊숙한 눈, 곱슬머리 등도 간다라불상의 한 특징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생존 시에는 물론 사후에도 전설의 주인공이었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중달을 패주시켰다(死孔明 走生仲達)’고 하지만 죽은 알렉산드로스 또한 산 카산드로를 전율케 했다고 한다. 즉, 알렉산드로스의 충직한 신하로 동방원정에 나선 그를 대리해 마케도니아를 통치한 안티파테르의 아들 카산드로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수년 후 델포이에 있던 알렉산드로스의 조상(彫像) 옆을 지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떨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서양사회의 개인숭배 뿌리를 신이 되려 한 알렉산드로스에서 찾지만 -심지어 예수를 메시아로 숭앙하는 것도 그의 개인숭배와 연결짓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으로, 적어도 신적 존재로 숭앙해주기를 바랐다. 원정 중에 점차 동방적 전제군주의 절대적 권위를 즐긴 그는 신하들에게 페르시아적 궁중의례와 부복(俯伏)을 강요했다. 때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그은 그리스인들은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신으로 숭배했던 것 같다. “알렉산드로스가 신이 되기를 원하니 그를 신으로 삼도록 하자.” 당시 스파르타가 내린 한 포고령 내용이다.
세계 역사 바꾼 대왕의 이른 죽음
알렉산드로스는 탁월한 장군이되 진취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자랑했다. 그는 뛰어난 설계자였고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적을 포용하고 회유한 현군이었는가 하면 신임하던 부하도 단칼에 처형하는 냉혹한 폭군이었다. 그리고 군사적 정복을 넘어 인종과 문화가 융합된 진정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요절하지 않고 30, 40년 더 헬레니즘 세계(대체로 그가 통합한 지역은 헬레니즘 세계로, 그로부터 번성한 문화는 헬레니즘 문화로 불린다)를 통치했을 경우 지중해 세계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인류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동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유대인과 아랍인,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대립을 넘어 섬멸적 혈투를 벌여왔다. 혹자는 문명충돌로 규정하지만 기독교권과 이슬람교권의 불신과 대립은 세월과 더불어 그 강도를 더해오고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열병에 굴해 요절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유대인이니 아랍인이니 하는 인종들이나 기독교니 이슬람교니 하는 종교들이 존재하기나 할까.
유대교의 역사는 알렉산드로스에 앞서지만 1세기에 유대교를 모태로 창시된 기독교나 7세기 초엽에 창시된 이슬람교는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인종·종교·문화를 초월하는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 세계가 굳건히 뿌리내렸을 경우 멀게는 로마제국이나 십자군원정도, 가깝게는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인종적·종교적 혈투나 1, 2차 이라크 전쟁도 없었거나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