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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겪었던 일이다. 어떤 기관에서 부진아 문제의 교육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전문가 협의회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연구하려 할 때, 관련 전문가들의 아이디어를 빌린다는 취지로, 이런 종류의 협의회가 활용된다. 미리 회의 자료를 보내 주면서 잘 검토를 하고 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주최 측의 자세가 진지하고 성실하여 나는 이 회의에 호감과 기대를 가지고 참석하기로 했다. 문제는 협의회가 시작되면서 발생했다. 참석한 인사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특정의 견해를 밝히면서, 학습부진아 문제의 발생을 당국의 정책 부재 탓으로 나무라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비분강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분강개는 계속 다른 국면으로 전이되었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이 기회균등의 교육철학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는 공격적 발언으로 불특정의 여러 학자 전문가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비분강개의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이러저러한 힘과 경력의 소유자임을 빠트리지 않고 끼워 넣었다. “고정하시지요”하는 말을 꺼내기도 무색할 정도로, 그는 분기탱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언성을 높였다. 다른 참석자들은 마치 문제의식도 없고, 정의감도 없는 부류의 인간들로 순식간에 내몰리는 분위기이었다. 그가 비분강개하는 동안, 어정쩡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흘렀다. 협의회에서 의미 있는 대안들을 생산하려던 개방적 소통의 분위기가 금방 유실되는 듯했다. 속된 말로 김새는 분위기이었다. 이런 성격의 회의에서는 자유로운 소통이 생명이다. 그 사람의 비분강개의 정도가 하도 심하여 나는 이런 의심도 해 보았다. 혹시 저 양반이 다른 무슨 이유로 이미 화가 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회의를 주재하는 사회자가 몇 번씩 사과 아닌 사과를 해서 겨우 진정시켰다. 사실 생각해 보면 사회자가 그 사람에게 사과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심리적으로는 마치 폭력에 휘둘리는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가당치 않은 억압의 분위기이었다.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나중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진 회의는 부자연스러웠다. 그 사람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분들은 극심한 마음의 부자유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사람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러웠다. 그날 회의는 총체적으로 실패한 회의이었다. 다음 회의 날짜를 기약했지만, 유쾌하고 의욕적인 약속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나는 그날 ‘소통의 적’을 보았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것이다. 자기가 소통 파괴의 주역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뒤에라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을까. 그걸 깨달을 수 있다면 애당초 그런 행동 패턴을 보일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오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불러 일으켜 준 데 대해서 스스로 만족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장소에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용담처럼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오늘 회의에서 교육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정신 번쩍 나게 해주었지.” 자기중심의 소통으로 일관하는 자위적(自慰的) 소통의 전형이다. 이처럼 일방성의 극치를 보이는 소통은 형식상 대화를 가장할 뿐, 내용상으로는 폭력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조직폭력배 사회의 담화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소통의 자질에서 보면 가히 ‘소통의 적’이라 할 수 있겠고, 정신건강의 차원에서 보면 일종의 정서불안에 연결된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존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감정의 안개가 바로 비분강개라는 점이다. 비분강개 현상에 대한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비분강개에 대해서 우리의 잘못된 사회적·문화적 고정관념이 잘못된 소통 패턴을 유발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비분강개(悲憤慷慨)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침’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말 자체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비분강개는 그런 감정 현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이 실제로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단순히 감정 노출 현상을 넘어서서, 더 확장된 가치 개념이 은연중에 작동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비분강개는 그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 지닌 의로운 태도나 의지까지도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부연한다면, 비겁하고 소심하고 옹졸한 사람이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칠 경우에 ‘그가 비분강개했다’라고 쓰면 왠지 잘 어울리지 않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고정관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비분강개를 용기나 정의감에서 슬픔·분노를 토로할 때만 사용해야 하는 표현으로 인식한다.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근현대사가 일제에 의한 식민지 고난으로 점철되고, 다시 전쟁과 궁핍과 민주화의 역정을 거쳐 오면서,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탄스러운 정서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했던가.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탄스러운 정서를 토로하는 장면 자체가 독립과 자유와 해방과 생존을 갈구하여 저항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따라서 슬프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탄스러운 정서를 사회·문화적 가치로 축적하는 사이에 비분강개는 긍정적 가치의 감정으로 수용되고 발현될 수 있었으리라 본다. 이런 인식은 비분강개를 연출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비분강개의 감정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쪽에서도 이 비분강개의 내용이 일종의 정의감과 협기(俠氣)에서 연유되는 것임을 알게 모르게 내어 비친다. 자신이 얼마나 용감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아는지를 비분강개와 더불어 토해 내는 것이다. 우국충정(?)의 울분을 가득 담아내는 선거 유세 등에서 보여주는 정치인들의 비분강개 스타일의 연설도 실은 비분강개의 사회적 문화적 전통에 기대는 것으로서, 비분강개는 일종의 언어적 문화형(文化型)으로 자리 잡아 정치인들의 스피치 기법으로 자동화되는 국면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와 근대화가 조화롭게 이루어졌다는 세계적 평가를 받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개방적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민주화와 근대화를 관류하는 핵심어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자세히 말하면 ‘개방적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때의 소통이란 문화적 가치의 수준에서 일컬어지는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비분강개라는 말(또는 현상)은 현 시점에서 재개념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비분강개는 소통을 방해할 수 있다. 개방적 마인드를 가두어 버릴 수 있다. 상투화 된 비분강개는 대화를 돕지 못한다. 비분강개는 쌍방적 대화와는 무관한 말이다. 비분강개를 감정의 작용으로 본다면, 비분강개의 감정이 가 닿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적실하다. 그러니까 비분강개를 통해서 일종의 감정의 카타르시스[淨化]를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분강개의 순기능이 있기도 하다. 만약 일상적 대화에서 비분강개의 구체적 대상이 있다면, 그 비분강개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 적개심의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서로 대립되는 관점을 가진 양측이 나와서 토론을 전개하다가, 한쪽 패널이 상대 패널을 향하여 날이 선 목소리로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하고 일갈하는 장면을 보았다. 고도의 개방된 공적 공간에서의 대화와 소통 토론 장면, 이를테면 텔레비전 토론 등에서는 비분강개는 금물이다, 소통의 양식과 태도를 존중해 주는 데서 토론의 참 기능이 살아나는 것이다. 무슨 자격으로 상대를 그렇게 비분강개하여 나무랄 수 있는가. 상대방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시청자들로 하여금 ‘아 저 사람이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구나’하고 판단하게 하는 데에 이르도록 해 주는 것이 개방적 토론 문화 속의 패널이 갖추어야 할 소통 자질이다. 내 감정으로 상대를 모두 주관화하여 야단치고 개탄하고 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 하는 것이다. 국민 대중이 환시하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쌍방의 대화적 소통 형식을 무시하고, ‘부끄러운 줄 아시오’하고 내 감정만으로 상대를 재단하려 한다면, 그 발언의 동기가 아무리 진정하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국민으로부터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는 소리를 되돌려 듣기에 꼭 알맞다. 국권상실의 비통함을 안으로 깊이 아프게 새기며 ‘절명시(絶命詩)’ 56자에 그 비분강개의 소회를 묵시록처럼 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梅泉) 선생의 비분강개에 새삼 숙연해 진다. 속인(俗人)들의 얄팍하고 요란하고 감정 배설적인 비분강개를 우리도 이제는 비판할 수 있는 수준에 왔다. | 경인교대 교수
"와! 교과서가 너무 얇다. 옛날에는 배우는 게 별로 없었나봐." "저것 봐라. 아빠가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란다." 경기 파주초등학교(교장 황덕순)에 마련된 파주교육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의 반응이다. 교육 변천 과정 한자리에 지난 4월 파주초에서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파주교육박물관(이하 박물관)을 개관했다.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개관한 박물관은 '파주초등학교 100년 사관', '교육역사관', '파주교육관', '옛날 교실 체험관', '야외 전통놀이 학습장 및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민속자료관'도 준비 중이다. 또 실물 전시자료 1900여점과 터치스크린, 3D 입체 영상자료 45점이 확보되어 있어 다른 박물관에 손색이 없다. 그동안 박물관에는 10여개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했고 일반인들도 400여명이 넘게 찾았다. 그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파주초등학교 100년 사관과 교육역사관. 100년 사관은 파주초가 설립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주요 연혁을 중심으로 100년사를 한 눈에 체험할 수 있도록 파노라마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을 졸업한 동문들이 내 놓은 자료들이다. 이 학교 동문인 김순희 씨는 초등학교 시절 6년간 쓴 일기를 기증하기도 했고, 상장과 통지표 이외에 육성회비 납입통지서 등 지금은 보기 힘든 자료들이 모였다. 100년 전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또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졸업 앨범(51~97회)과 바닥 유리를 통해 볼 수 있는 각종 메달 및 우승컵은 동문들에게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육역사관은 삼국시대부터 7차 교육과정이 시행되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1차 교육과정부터 7차 교육과정까지 실제 교과서, 교육자료 등이 전시되어 근대 우리 교육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또한 실제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근대 이전의 교육 자료는 모형과 홀로그램을 통한 영상자료로 보충하여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校·民·官의 합작으로 탄생 12학급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교육박물관을 만들게 된 것은 100주년 기념관을 계획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때 40학급이 넘는 학교였지만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생긴 학교 내 빈 공간을 활용하고 100년의 역사를 기념하고자 준비된 사업이었다. 그러나 100년간의 역사 자료를 수집하던 중 박물관의 교육적 가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파주시청과 파주교육청을 비롯한 파주지역주민들의 관심이 모아졌고, 경기교육청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아 박물관으로 탄생했다. 지역단위에서 교육역사를 정리·보존하여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박물관을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교무부장 박미영 교사(45)는 "우리 박물관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교육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학교가 방문해 주길 바란다"며 "앞으로 학예연구사가 파견 배치되어 상주 근무하면서 전문적인 관리 체계를 마련해 진정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 9월에 이 학교로 발령을 받은 황덕순 교장(52)은 "전임 교장 선생님(김기풍 현 칠봉초 교장)을 비롯한 많은 선생님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박물관이니 만큼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전국적인 박물관으로 발전시킬 것"이라며 "우리의 교육 노하우를 후손들에게 전수하고 교육지표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니만큼 계속해서 가치 있는 자료를 발굴, 보존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파주초는 앞으로도 실물 교육자료 및 민속자료를 계속해서 확보하여 박물관을 파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만들고 '파주향교'나 '수리홀 통일체험 학습장'과 연계한 체험 학습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도록 할 계획이다. 박물관의 단체 관람을 원하는 학교나 단체는 홈페이지(www.paju.es.kr)에서 신청 양식을 다운 받아 관람 15일 전까지 접수하면 된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날(10:00~17:00)에 개방을 하고, 개인 방문도 가능하다. 관람 문의 : 파주초 교무실 031-952-4216 | 엄성용 esy@kfta.or.kr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보물 제414호)* 최효찬 | 저자, 비교문학 박사 위기 때 빛난 '절충의 리더십' "류성룡이 활약한 시대는 당쟁이 시작되고 당쟁으로 인해 최초로 사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성혼, 송강 정철, 이산해, 이덕형, 이항복, 윤두수, 이원익 등 기라성 같은 문신들이 있는가 하면, 이순신, 원균, 권율, 김시민, 곽재우, 사명당 등 조선시대에 가장 출중했던 인물들이 그와 함께 활약했다. 류성룡은 이들과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화합을 하면서 정치력을 발휘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동인의 계열에 있으면서도 서인인 정철을 변호하여 절충과 상생의 리더십을 실천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을 바탕으로 쓴 〈우국의 향기〉에서 저자 이수광은 서애에 대해 묘사하면서 그가 '절충의 리더십'을 가졌다고 말한다. 절충의 리더십은 때로 현실 영합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사관이 쓴 인물평가〉에 따르면 서애는 30여년 관직에 있었지만 임금에게 직간(直諫)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성정이 오히려 임진왜란 전후 위기의 시대에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온 국토가 왜군에 짓밟혀 있는 상황에서 정쟁의 단서가 될 만한 발언을 하거나 시비를 하는 것은 고위공직자로서의 올바른 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요즘 우리 사회를 봐도 알 수 있다. 혼란한 시대일수록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해 세상을 어지럽게 하기보다 말 한마디로 세상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그런 리더십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서애는 인재를 키우는 데도 누구보다 탁월한 안목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알려진 대로 당시 좌의정이던 서애는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을 적극 천거했고, 선조는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7품계나 올려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요즘으로 보면 중대장급에서 사단장급으로 진급한 셈이다. 당연히 파격 인사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있었지만 서애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서애의 인재를 키우는 안목이 왜구로부터 조선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애는 이순신뿐만 아니라 종5품 판관 권율 장군도 5품계 특진시켜 정3품인 의주목사에 기용했다. 이순신과 권율의 인사는 조선왕조 500년 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서애는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 절충의 리더십을 발휘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고 또 인재를 키우는 데도 소신껏 임했다. 자녀 교육에도 관심 갖은 '총리' 뿐만 아니라 그는 가정에서는 아버지로서 솔선수범하며 언제나 집안을 독서하는 분위기로 이끌었다. 임진왜란 전후의 혼란기에 영의정 등 최고위 공직을 지낸 서애였지만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학문을 점검하고 독려하는 한편으로 따끔하게 질책하고 조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서애는 공부하기 위해 절에 들어간 두 아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최고 권력을 누리는 총리로서의 준엄한 모습 대신 자식들이 공부에 더욱 매진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히 담겨 있는 편지였다. "며칠 동안 너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다. 산사는 조용하고 편안하니 독서를 하는 데 아늑하고 평온하지 않겠느냐. 퇴계 선생이 손자에게 주신 이 시를 너희들도 본받기 바란다. '나이 어린 때는 산속 절에서의 즐거움을 가장 사랑하였기에 / 벽사를 드리운 창 깊은 곳에 등 하나 밝혀놓았구나 / 평생 동안 이뤄낸 많은 사업들은 모두가 / 이 한 등 아래서 나온 것이었네'." 서애는 산사에 들어간 자녀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자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 산사의 적막한 등불아래 읽은 책들이 평생 동안의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는 퇴계의 시를 들려주며 공부에 매진하기를 당부했던 것이다. 요즘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과연 자녀들이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조언을 하는 이들이 있을까? 더욱이 그가 일국의 총리라면 다섯 명이나 되는 아들의 공부에 신경을 쓸 수 있을까? 과연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국무총리가 아니라 대부분 직장인들도 '바쁘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자녀 교육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기 예사이다. 아버지는 자녀 교육에 필요한 돈만 벌어다주면 제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퇴계 이황이나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같은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녀 교육에 열성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심지어 독서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게을리 하면 질책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리더의 한 가지 공통점은 독서 미국 교육과학연구소가 2002년에 발표한 '미국의 리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보고서를 보면 미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은 초등학교 시절에 좋은 책을 많이 읽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반면 범죄자들은 대부분 거의 책을 읽지 않았거나 교육적인 가치가 없는 책을 읽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보고서에는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책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발표한 보고서에도 고등학교 1, 2학년 중 성적이 상위 10% 이내인 학생들의 첫 번째 특징으로 독서량을 꼽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분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특징이 대부분 독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공부는 스스로 자기 주도적으로 한다 ▲학원보다는 도서관이나 집에서 혼자 조용히 공부한다 ▲공부하는 것이 매우 즐겁다 ▲문학작품이나 신문을 즐겨 읽는다 등이다. 서애는 이러한 독서의 중요성을 400여 년 전에 꿰뚫고 있었다. 서애는 틈틈이 자녀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는 형식으로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를 점검했다. 편지를 보고 아이들의 글이 별로 진전이 없을 때에는 심지어 "젖비린내가 난다"면서 단호히 꾸짖으며 학문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모범만큼 더 훌륭한 교육은 없다. 서애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위기의 시대를 살았지만 항상 독서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 항상 책을 읽으며 다섯 아이들에게 솔선수범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으로부터 "그는 하늘이 내린 인물이다"는 평가를 받았던 서애는 네 살 때부터 붓을 잡기 시작해 66세로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서애는 열여덟 살 때 관악산으로 들어가 절에서 몇 달 동안 〈맹자〉를 스무 번 읽어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고향인 하회에서 〈춘추〉를 서른 번도 넘게 읽었는데, 이때부터 문장 짓는 방법을 조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서애는 처음부터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맹자〉와 〈춘추〉 등을 공부했는데, 이게 큰 도움이 되어 과거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점수 따기'식 공부 대신, 학문하는 자세로 공부를 한 결과 과거에도 합격하고 학문도 깊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 공부를 하는 데 합격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살핀 일이 없다. 다만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은 비록 얻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평생토록 아끼며 귀중하게 여기고 있으니, 너희들도 부질없는 과거 공부를 잠시 접어두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가져다가 정밀하게 사색하고 익숙하게 읽어서 자기의 것이 되도록 한다면, 안목은 저절로 높아지고 마음도 저절로 넓어질 것이니 기타의 보잘것없는 것들이야 힘들이지 않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태산에 오르고 나면 모든 산들이 언덕과 개미둑처럼 작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부디 노력하기 바란다." 서애는 자신의 독서 경험을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 한번은 독서를 게을리 하는 자식들에게 서애는 편지로 준엄하게 꾸짖기도 했다. 독서를 하면 모르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또 궁금한 것이 생겨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위인이나 성공한 사람, 학자들의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독서광이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집안이 몰락해도 자신과 가문을 일으키는 방법은 오직 독서밖에 없다. 오직 독서만이 살 길이다"라고 호소했다. 책 읽는 집안에서 인재가 난다 요즘은 대부분 학생들이 입시준비 위주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보지도 못하고 청소년기를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의 신문 보도를 보면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국어 시험에서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영어와 수학은 평소에 과외나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해둔 덕에 좋은 성적을 얻는 반면, 국어는 문학과 비문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독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은 학생들은 그야말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당장의 성적을 의식한 나머지 한가하게 소설책이나 읽고 있을 여유가 없다. 반면 평소에 책을 많이 읽어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은 학생들은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해 국어 시험에서 다른 학생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적이 높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점수 따기'식 공부와 '정도(正道) 공부'의 차이다. 결국에는 점수 따기식 공부를 하는 학생보다 정도 공부를 하는 학생이 막판 뒤집기에 성공해 더 높은 성적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자녀의 교육을 직접 챙기는 부모들은 여기서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점수 따기식 공부를 하게 할 것이냐, 아니면 다양한 양서(良書)를 읽게 해 이해력과 사고력을 높이는 정도(正道) 공부를 택할 것이냐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점수 따기식 공부를 외면할 수 없어 전 과목 과외를 시키는 경우도 있다. 필자 역시 아이가 전 과목 과외를 시켜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기초를 중시하는 정도 공부 방식을 고수했다. 결국에는 책을 많이 읽은 아이, 즉 기초가 튼튼한 아이가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고 사회성이 높은 아이로 자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 교육과학연구소의 보고서를 보더라도 독서가 평생을 좌우한다고 했고, 퇴계는 평생의 등불이 된 것이 바로 어린 시절 등을 밝히며 읽은 책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책 읽는 집안에서 인재가 난다는 옛말이 있다. 서애의 다섯 형제 가운데 장남은 벼슬이 장수도찰방에 이르렀고, 차남과 삼남은 각각 세자익위사 세마와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그리고 서애에서 시작해 내리 9대 직계손들이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물론 음직(국가에 공을 세웠을 경우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도 있었고, 과거에 급제한 경우도 있었지만 노론이 득세한 조선 후기의 상황을 감안하면 9대째 공직에 나아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노론계와 달리 영남의 남인 집안은 대부분 당쟁에서 밀려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일찌감치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과 후학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들을 '백두(白頭)'라고 불렀는데, 이들 중에는 몰락양반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대로 벼슬길에 오른 서애의 후손들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파보를 만들었다. 하회마을에 있는 풍산 류씨 대종가는 서애의 친형인 겸암 류운용이 살던 '양진당'이다. 서애는 대종가에서 분리된 소종가로 '충효당'이라고 불린다. 하회에 정착한 풍산 류씨는 서애의 부친 류중영이 문과에 급제해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그의 아들인 겸암과 서애에 이르러 명문가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공직자로서 청렴한 생활 실천해 서애는 평생 청렴결백하게 살아 66세로 세상을 떠날 때에는 장례 비용조차 없었다고 한다. 서애의 제자였던 우복 정경세는 "어찌 10년 동안이나 재상을 지내고도 제갈량이 남겼다는 뽕나무 800그루도 없단 말인가"라며 그의 청렴한 기백을 기렸다.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는 충효당은 서애의 제자들이 그의 정신을 기려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는 중앙조정의 관직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집이 없었고 전세를 얻어 생활하였다. 당시 지방에서 올라온 벼슬아치들은 한양에 첩을 두었는데 이를 '경첩(京妾)'이라고 불렀다. 경첩은 유행이었는데, 백의정승으로 이름난 황희도 첩을 두기도 했다(서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궁중의 물건을 훔치다 들통나 가문에서 쫓겨났으며 성을 조씨로 바꿔 살았다고 한다). 물론 서애는 경첩을 두지 않았다. 서애는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을 해 5형제를 두었다. 서애는 25세에 벼슬에 올라 영의정을 지냈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중국의 선비들이 '서애선생'이라고 칭할 정도로 학문에 밝았다. 청백리로 산 그는 고향에서도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풍산 서미동(西美洞)의 깊은 산중에 초가를 짓고 칩거했다. 여기서 그는 임진왜란을 후세의 교훈으로 전하기 위해 〈징비록〉을 썼다고 한다. 서애는 국난에 처한 위기의 시대에 리더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자녀 교육에 열정적인 부모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긴 유시(遺詩)에서 후손들에게 "충효만큼 더 중요한 사업은 없다(忠孝之外無事業)"는 교훈을 내리며 후손들에게 삶의 지표를 제시한다. 후손들은 이처럼 서애의 정신을 본받아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방위산업체로 이름난 풍산그룹은 바로 서애의 후손이 창업한 회사이다. 서애는 한 가문의 가장으로서 귀감을 보여주었다. 이는 요즘 비유하자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같은 면모를 보인 것이다. 무엇보다 서애는 공직자로서 청렴한 생활을 앞장서 실천했다. 또 최고경영자가 기업에 꼭 필요한 인재를 키우듯이 이순신 등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천거했고,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교육에 헌신했다. 서애의 청렴한 삶은 오늘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처신이나 입시위주의 공부, 자녀이기주의가 팽배한 현실을 반추해보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최남선은 1908년 11월 한국 최초의 잡지인 을 창간하고, 그 권두시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썼다. “따린다, 부슨다, 문허 바린다,/ 텨……ㄹ썩, 텨……ㄹ썩, , 튜르릉, 콱.” 거대한 산과 집채만 한 바위를 때려 부수는 것은 이제 천둥과 번개가 아니다. 바다의 거친 파도였다. 이 파도는 서구문명을 상징한다. 서구문명의 상징인 파도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거세게 밀려드는 파도는 한국 사람들에게 호통친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아, 우리의 힘을 보았느냐! 그렇다면 어서 잠에서 깨어나라, 야만에서 탈출하라, 우리의 힘을 믿어라! 거센 바다를 헤치고 외국으로 떠나라! 바다가 밀려왔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천둥과 번개보다 더 두려운 문명제국의 해일. 바다를 점령하는 국가, 바로 문명제국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 태평양을 지배하는 미국, 동아시아의 길목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 바다를 지배하지 않고서는 문명제국이 될 수 없었다. 윤치호도, 서재필도, 유길준도,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옥균도 모두 바다를 건너 문명제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바다를 건넜던 이유는 조기유학의 붐에 편승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한국이 싫어 도피성 유학을 떠났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이 왜 하필이면 바다를 건너야 했을까? 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지 않았을까? 청나라는 쇠약해 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일본이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가열차게 추진하고 있을 때, 청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한국 사람들이 바라본 19세기 후반의 청나라는 더럽고 불결한, 아편에 찌들어 사는 야만국이었다. 서재필이 을 창간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을 때, 그리고 많은 한국의 계몽지식인들이 ‘독립’, ‘독립’ 또 ‘독립’을 부르짖었을 때, 그 독립은 다름 아닌 중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이었다. 일본과 미국이 문명의 표본으로 다가왔을 무렵, 청나라는 절대 닮아서는 안 될 후진국가의 모델로 전락해 있었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참패한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 당연히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과 미국을 선호했고, 국가에서는 일본과 미국으로 관비유학생들을 파견하게 된다. 사비 유학생이 등장하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망갔고,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개화파의 실패로 일본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던 학생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정부가 학비지급을 중단한 것이다. 따라서 국비유학생들은 한국으로 강제 귀국해야만 했다. 이후 한국정부의 유학생 파견은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1894년 일본의 거센 입김이 작용한 갑오경장이 단행된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혁이 단행되었고, 그동안 주춤했던 유학생 파견이 다시 추진되었다.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반포 후 해외 유학생 파견 사업은 다시 탄력을 받았다. 정부의 주요 인사들의 자제들 중에서 선발된 113명이 1895년에 일본으로 떠난다. 이들 또한 일본의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하여 근대 학문을 배운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고 연이어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이로써 한국은 친러세력의 지배하에 놓인다. 격변하는 정세에 따라 유학생들의 활동 또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국비유학생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이었다. 그들의 몸은 국가에 얽매여 있었다. 정부는 일본유학생들에게 학비지급을 중단하고 그들을 한국으로 소환한다. 잠시 중단되었던 정부의 일본유학생 파견은 1897년 후반에 들어 재개되었다. 그렇지만 1903년 한국정부는 또다시 일본유학생 전원에게 귀국훈령을 내렸다. 이유는 경비부족이었다. 정부의 소환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에 있던 유학생들은 국가의 명령에 반발하며 단지(斷指)를 결행한다. 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린다. ‘공부하고 싶다. 우리는 한국의 문명개화를 위해 이 한 몸 받친 사람들이다. 우리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돈을 보내달라’. 유학생들이 피를 흘리자 한국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위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유학생들을 돕기 위해 정부가 아닌 시민사회가 나선 것이다. 더 이상 정부가 유학생들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학생들의 단지동맹이 있은 후 한국정부의 유학생 파견은 주춤했고, 드디어 사비 유학생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1905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08년 10월 11일 오후 1시, 도쿄 시내에 있는 어떤 건물에 백여 명의 청년들이 운집했다. 그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학생들을 헤치고 한 사내가 연단 위로 올라갔다. 그의 이름은 윤태진(尹台鎭)이었다. 연단 위로 올라간 윤태진은 가슴 벅찬 표정으로 일장 연설을 한다. “실로 가슴이 벅찹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한 이후 이렇게 많은 수가 당도하기는 처음입니다. 어찌 축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일은 한국유학생사에 남을 미증유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조국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옵니다. 우리나라는 밖으로는 열강의 보호를 받고, 안으로는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된 상황은 국민의 단결심이 없는데서 연유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열강과 일본이 독립국이 된 것은 국민의 단결심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천만 동포가 이천만 개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국가가 독립할 수 있겠습니까. 유학생 여러분!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단결하는 일뿐입니다.” 윤태진의 축하연설이 끝나자 신입 유학생 대표인 윤우식(尹宇植)이 답사를 했다. “선배 여러분!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조국을 떠나 만리타국에 왔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장래의 희망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 희망은 다름 아니라 고통받는 국가를 위해 이 한 몸 받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유학생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이후 여기저기서 연설이 빗발쳤다. 환영회 자리는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갔다. 유학생들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일본에 왔다. 그 미래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또한 한국보다 몇 십 년의 미래를 이미 앞당겨 살고 있는 일본에서 그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미래로 돌아가다 모든 것이 낯설고 놀랍기만 했다. 도쿄는 유학생들에게 미래의 도시였다. 거미줄처럼 뻗은 전선줄, 눈앞을 휙 하며 달아나는 자동차, 굉음을 울리며 전진하는 기차, 3~4층 높이의 건물. 모든 풍경이 낯설었다. 근대화된 도쿄의 문물은 유학생들 전체를 삼켜버릴 듯이 포효했다.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서구의 학문을 습득해 갔다. 근대의 과학과 기술을 배웠고, 언어를 배웠고, 철학을 배웠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을 현실 사회와 접목한 ‘사회진화론’은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강한 자만 살아남고 약한 자는 멸망한다. 힘센 놈이 세상을 지배한다. 근대화된 일본에서 그들은 생존경쟁의 치열함을 배워나갔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은 철저하게 힘을 기르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힘으로, 이를 먼저 배운 일본을 모범으로 하여. 유학생들은 빡빡한 일본 학교의 교과과정을 이수했다. 일본 학교는 한국의 서당과 달랐다. 학생들은 군인처럼 훈련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면 10분간 쉬는 시간이다. 10분 후 다시 수업을 하는데 수학과 물리학과 지리 등을 오전 중에 배운다.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울리면 30분간 점심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서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한다. 오후 수업 종이 울리면 모두 운동장에 집합한다. 운동장에 모여 병식체조(兵式體操)를 훈련하고 오후 2시가 되면 수업은 끝난다. 일본이라는 미래사회에서 유학생들은 ‘문명인’으로 훈련받았다. 일본과 서양제국들은 한국을 야만국으로 취급했다. 일본으로 떠난 유학생들은 야만국에서 문명국으로 시간대를 이동한 셈이다. 일본에서 한번 굴절된 서구문명이었지만 학생들의 열광은 거의 절대적인 숭배에 가까웠다. 유학생들에게 문명이란 지고지선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배워온 모든 사유체계를 전복시킬 만큼 그 위력은 컸다. 유학생들은 몸은 하나이지만 정신은 두 방향으로 가지를 뻗었다. 한 몸으로 두 삶을 살아가는 것.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살아야 하는 숙명이었다. 유학생들은 전근대 사회라 불리는 한국에서 태어나 근대 사회로 추앙받는 일본에서 생활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그들은 한국에 대한 일정한 거리감을 느꼈다. 유학생들은 서구의 문명을 다른 누구보다 재빠르게 받아들이고 이를 한국 사회로 전파하였다. 우선 그들은 유학생 단체를 만들었다. 유학생 단체는 유학생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함께 공유하는 역할을 겸했다. 또한 그들은 잡지를 만들어 자신들이 학습한 문명을 전파한다. 최초의 유학생 잡지인 를 비롯하여 , , 등이 연달아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신문과 더불어 잡지라는 새로운 근대적 미디어는 인민들을 계몽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던 최남선은 일본에서 를 편집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고국으로 돌아와 1908년 한국 최초의 잡지인 을 창간했던 것이다.[PAGE BREAK]박람회, 문명제국의 실상을 파악하다 1903년 오사카 박람회[大阪博覽會]를 시작으로 일본은 박람회장 내에 식민지관을 설치하여 다른 나라의 인종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오사카 박람회 측은 한국인을 비롯한 32명의 이민족을 ‘학술인류관’에 보란 듯이 전시했다. ‘학술인류관’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에도 불구하고 이는 유럽의 ‘식민지관’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1907년 3월 도쿄 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우에노 공원에서 1903년과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한국인 유학생 일부가 도교 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 우에노 공원에 들어섰다. 학생들은 관람료 10전을 내고 제 5호 조선관 부속 수정관에 입장하였다. 눈부시게 화려한 수정관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하던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품’이 있었다. 복장은 매우 초라했다. 얼굴은 하얗게 화장을 했고, 볼 주위에는 진흙처럼 뒤범벅된 붉은 연지 기름이 금방이라도 흘러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통역관이 서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람자들에게 괴상망측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전시품은 다름 아닌 한국인 여자였다. 학생들은 조선관에 전시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남자는 부산 출신이었고, 여자는 대구 출신이었다. 이들은 도쿄 박람회에 가면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일본 상인의 꼬임에 빠져 따라왔다. 그들은 박람회에서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일본인들이 시키는 대로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은 돈을 미끼로 이들을 전시했다. 일본인들은 돈을 벌 목적으로 한국인을 전시했다고는 하지만, 그 행위 안에 잠복하고 있는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감을 몰랐을 리 없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은 밀림에 사는 동물과 같았다. 미개하고 열등한 인종, 그렇기에 유리창 뒤에 전시해 놓고 관람료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국 여자(인종)를, 특히 초라하고 꿈틀거리는 동물처럼 전시함으로써 한국이 ‘야만국’임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문명제국 일본, 구원자인가 침략자인가? 대다수의 유학생들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문명제국으로 편입하려는 욕망이었다. 특정한 어느 나라를 닮는 것이 아니라 ‘문명’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권력에 편입하고 싶은 욕망.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문명제국의 문화와 풍속을 모방하려는 관성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일종의 문명제국에 대한 콤플렉스지만, 그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문명제국은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와 같다. 근대 초기 유학생들은 몰랐을지 모른다. 문명제국이 자신들의 구원자가 아니라 결국 침략자라는 사실을. 초기 유학생들에게 문명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고, 자신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무기였다. 그들은 문명국의 힘을 빌어서 한국 또한 문명제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인천대 강사·한국문학
박경민 | 역사 컬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교회가 중세인의 모든 것을 제어하던 유럽사회도 도시의 발달과 함께 근대를 향한 허물벗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봉건군주들이 교황권을 배제하는 왕령국가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4세기 이후 중세 유럽사회를 받쳐주고 있었던 양대 지주인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봉건제가 무너지고 농민반란이 이어졌다. 거듭된 수난으로 약해져가는 교황 성직임명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카노사의 항복'을 받아내고 교회개혁에 앞장을 섰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불행한 최후를 마친 후(1085년), 2세기만에 교황권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황권 쇠퇴는 유럽의 단일성 파괴의 신호탄이었다. 소위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 유럽연합의 붕괴가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1294~1303)의 재임 시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보니파시우스 8세는 교황 우월적 내정간섭 문제로 영국과 프랑스 왕과 갈등을 빚다가 1303년 프랑스 왕 필립에게 체포되어 연금을 당하는 수모를 당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들이 약 70여 년 동안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로서 아비뇽에 강제로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시인 단테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 등을 비롯한 이탈리아 지성인들은 아비뇽의 교황들을 프랑스 왕의 포로라 비판하면서 '교황의 바빌론 유수(幽囚)'라 비꼬아 표현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비뇽 교황청의 과세확대와 징수방법은 유럽 전체에 걸쳐 교회에 대한 원성을 샀고 점입가경으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와 대립하니, 이에 대한 강한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즉, 성직계급에 대한 불만과 교황권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70여 년의 아비뇽 교황 시대는 일단 그레고리우스 11세에 막을 내렸지만,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로마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후 후임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로마 군중들의 폭력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후임 교황은 나폴리 출신 우르바누스 6세(1378~ 1389)였다. 그러나 선출 이후 그가 도움을 준 프랑스 추기경단을 푸대접하자, 프랑스 추기경단은 로마에서 철수하여 클레멘스 7세(1378~1394)를 따로 선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교회에 두 명의 교황이 생긴 것이다. 이 시기가 교황권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상처를 주게 된 대립교황시대이다. 이때부터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따로 분립되는 상태가 약 40년 간(1378~1417) 지속되었다. 이때 유럽 국가들은 이해득실의 눈치작전으로 어느 한 쪽에 가담해야만 했다. 이탈리아(로마)와 프랑스(아비뇽)가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이라면 나머지 국가는 국가 간의 역학관계, 즉 우호관계나 적대관계를 고려해서 어느 한 쪽에 가담하는 복잡한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프랑스에 우호적인 스페인과 스코틀랜드 및 독일의 일부 제후들은 아비뇽 측을, 그와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로마 측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참담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409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공의회, 1414년에는 콘스탄스 공의회가 개최되어 우여곡절 끝에 오랜 교황의 분립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교황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 수많은 비판가들 가운데 윌리엄 오캄이 있었다. 그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마르시글리오(Marsiglio of Padua)와 존(John of Jandun)은 〈평화의 옹호자〉라는 책을 저술하여 교황권의 한계를 꼬집었다. 봉건제 붕괴 가속화한 흑사병 유행 중세 서양의 정신적 지주였던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대한 회의가 일자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두려움에서 종교가 시작되었다 전제한다면, 이러한 조짐은 당시 유럽인들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혼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상업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활성화, 십자군 운동의 실패, 교황권의 추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데, 유럽인의 정신적 공황을 불러 일으켜 정신보다는 물적 욕구를 자극하여 '돈을 벌자'는 경제욕구 팽배로 이어졌다. 한편 봉건영주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화폐가 많이 필요해짐에 따라 부역 대신에 생산물과 화폐를 거두었다. 다시 말해서 봉건국가에서 왕령국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절실해진 것이 돈(화폐)이었다는 말이다. 농민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둔 소출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돈을 벌었고 일정한 지대(地代), 또는 세금을 낸 나머지는 저축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농노의 신분에서 차츰 벗어나 경제적인 향상을 누릴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무렵 유럽 전체를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간 대사건이 발생하였는데, 1347년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페스트(흑사병)의 유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모르는 상황에서 페스트라는 괴질은 전 유럽으로 파급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무려 유럽의 인구를 삼분의 일로 감축시키고 말았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의 위안을 주어야 할 가톨릭교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중들에게 스트레스만 주었다. 페스트는 창궐하고 민심이 흉흉하니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했겠는가.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자 각 지방의 영주들은 농촌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농민의 처우를 개선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페스트가 사라지자 생활이 곤란한 영주들은 다시 농민들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358년 프랑스에서는 '자크리 반란'이 일어났는데, 여기서 '자크(Jaques)'는 흔해빠진 프랑스 남자를 일컫는 말이며 '자크리(Jacquerie)'는 당시의 농민폭동 그 자체를 가리킨다. 쉽게 '김 서방의 난'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 난은 노르망디·피카르디·샹파뉴 지방의 농민들의 폭동이었으며 많은 귀족들이 살해되고 방화가 벌어졌다. 이를 왕은 무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한편 1381년 6월 10일 영국의 켄트 주에서는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영주에게 저항하여 와트 타일러가 주도한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반란이었다. 반란군이 캔터베리 시와 런던을 점령하자, 위기감을 느낀 왕실이 유화적 태도로 타일러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였다. 타일러는 국왕 리처드 2세와의 면담을 통해서 농노제 폐지, 시장독점 배제, 지대율의 인하 등을 약속 받고 두 번째의 면담에서 교회재산 몰수, 농민에 대한 토지분배를 관철시키려 하였지만 런던 시장 월워스의 계략에 빠져 살해되고 지도자를 잃은 농민군도 진압되었다. 비록 농민반란은 결과적으로 영주와 국왕에 의해서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농민의 신분해방 운동, 즉 '봉건체제의 붕괴'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고 말았다. 신도들로부터 외면 받는 가톨릭 12세기에 마케도니아로부터 카타리(순수파)의 사상이 여행 상인과 십자군에 참전한 군인들에 의해 유럽에 도입되었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경건한 군인(일반 신도)들은 직접 성지 예루살렘에서 가난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는데, 목수였던 가난한 예수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교회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더불어 가난했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미 12세기에 성장한 도시들은 더 이상 주교들의 교권 하에 있지 않아 도시에서는 민중들의 발언권이 확대되었고 이에 일반 신도들도 자각하여 교회와 종교문제를 성서에 입각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타리파는 12세기 중반 독일의 쾰른에서 처음 시작되어 차츰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특히 남 프랑스의 카타리파를 '알비주아(Albigeois)'라 불렀으므로 일명 '알비파'라고도 하였다. 알비파는 가톨릭교회의 정통적 교의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는데, 악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육식과 성(性), 결혼, 재산을 완전히 부정하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철저한 반정부 노선을 걸었는데, '황제는 사탄의 수괴, 제후들은 사탄의 협조자'라 비난하였고 남 프랑스, 특히 알비 지방의 카타리파는 프랑스 왕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제후들과 제휴하여 '알비 전쟁(1209~ 1229)'을 일으켰다. 한편 1173년 프랑스 리용의 상인이었던 왈도는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일종의 사회구제단체를 창설하였다.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청빈의 고귀함에 대해서 설교하였다. 왈도파가 가톨릭교회를 긴장시킨 이유는 성직자들을 무시하였고 진실한 크리스천의 길이란 오로지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성직자 무용론, 다시 말해서 성직자의 역할과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교의를 부정하였다. 1184년 교황 루치우스 3세가 왈도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나 그는 이에 반발하였고 결국 파문을 당했다. 오히려 종교개혁 앞당긴 마녀사냥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가와 교회가 공통적 위기감을 느끼고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그들이 정치·사회·종교의 기반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1183년 교황 루치우스 3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회가 파문한 이단을 즉시 제국이 체포하여 국가법정에 세우는 종교재판 설정에 합의하였다. 당시 유럽사회는 정치와 종교를 공동 운명체적인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의 절차는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 시대에 완성되었다. 국가는 이단자가 고발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능동적으로 색출하며 이단 용의자에 대한 공소를 제기하기 위해 종교 심문관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1252년에는 이단자가 이실직고하도록 종교 재판관들에게 고문까지 허용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시의 신학자들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폭력을 배격하였지만 일반대중들은 종교적 이단자를 곧 정치적 반란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고문허용이라는 불행한 결과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속칭 '마녀사냥'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종교재판은 원래 이단자를 색출하고 단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교회의 시책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나 정치적인 반대파의 숙청에도 교묘히 이용되었다. 국가는 이단자가 고발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들을 적극 색출하여 공소를 제기해야하는 상황에서 익명의 제보만 있어도 '체포 → 구금 → 기소 처형'의 정해진 코스를 진행하였다. 게다가 당시는 개인별 검거건수가 저조하면 바로 무능 아니면 직무유기로 이어지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1517년 마르틴 루터 이전부터 여러 가지 개혁운동이 있었다. 일반인 청빈운동으로 일컬어지는 가톨릭 내부의 개혁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12세기의 카타리파와 왈도파의 이단운동에 이어 13세기에는 교회개혁은 탁발 수도회, 즉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에 의해서 자극을 받았다.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자를 무조건 비난하거나 재산 그 자체를 악이라 매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탁발 수도회가 중세 그리스도교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은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두 수도회는 포교 사업을 확장하여 중국까지 파고 들어갔다.
신아연 | 호주 칼럼니스트 한국의 대학 입시가 가까워 올 때나 학년 말경이면 호주 유학에 관해 물어오는 주변 사람들을 자주 접한다. 중고생들은 물론이고 초등학생조차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둬야 하는 한국 실정에서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면 뭔가 미진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의 학업 상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이나 돌파구를 찾고 싶은 심정에서 일 것이다. ‘머리 회전 빠르고 두뇌 기능 말랑말랑할 때 영어가 쏙쏙 들어가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초등학교 저학년인 자식을 1, 2년 정도 단기 유학을 시키고 싶다는 학부형들을 비롯해서, 자녀가 중학생만 돼도 내처 호주에서 대학까지 보내는 게 어떨지를 진지하게 상의해 오는 부모들도 있다. 부모와 자녀들이 머리를 맞댄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유학을 간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이와 더불어 기왕 가는 것, 제대로 해 보자는 의욕 또한 하늘을 찌르게 마련이다. 유학생활의 이점은 생활공간과 일상 자체가 바로 영어 습득 체험 기회로 하루 24시간을 영어를 하며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원컨대 꿈조차 영어로 꾸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고스란히 ‘영어의, 영어에 의한, 영어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의욕이 이 정도로 넘치다 보면 학교생활뿐 아니라 먹고 자는 곳도 기왕이면 호주 사람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타진해 온다. 자녀가 유학 기간 중에는 되도록 한국 사람과 접촉을 안 했으면 하는 것이다. 부모 동반 유학이 아닌 경우 현지에 친척이나 지인 등 자녀를 돌봐 줄 사람이 있다 해도 다만 얼마간은 자녀 혼자 독립적으로 영어권의 생활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하고 싶다는 욕심에서이다. 호주 현지인들과 생활하려면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호주인 집에서 하숙(홈스테이)을 해야 하는데 원한다면 학교에서 외국 유학생들과 홈스테이 가정을 체계적으로 연계해 주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호주 가정에서 유학 짐을 풀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한다. ‘이제부터 내 아이가 호주 사람들과 밤낮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겠지…’ 한다면 대부분 착각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호주인 홈스테이를 경험한 한국 학생들 대부분이 제대로 적응을 못 하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일쑤이며, 심지어 다시는 호주 사람 집에 안 가겠다며 공포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말하기 좋게는 이질적 언어와 환경에 어린 학생들이 적응을 못한 탓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고 듣게 되면 단순히 문화 차이와 언어 불 소통에서 원인을 찾을 일만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한국 학생들에 대한 호주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한 마디로 ‘기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고 난 후 침대나 책상 정돈, 옷가지 개기, 욕실 사용 후 뒤처리 등 개인의 위생과 신변 정리 습관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물론 한국 학생들 처지에서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에 따라 지나치게 부실하고 빈약한 식단을 제공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사사건건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거나 학생들의 행동에 지나친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심하다 싶은 쪽은 역시 한국 학생들이다. 호주 하숙집 아줌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눈치를 살피려 해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어질러도 뒤치다꺼리는 당연히 엄마의 몫이며 그저 공부만 잘하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호주에 왔다고 해서 갑자기 자기 주변을 척척 정리 정돈하기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탓이다. 더욱이 깔끔한 집에 걸렸다가는(?) 영어 회화보다는 묵묵히 입 다물고 청소하는데 시간을 죄다 보내야 하는 설움조차 겪을 판이다. 특히나 호주 사람들은 욕실 사용 후에 물기 한 점 남김없이 깨끗하게 닦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바닥에 머리카락을 흘린다거나 세면기 주변이 젖어 있을 경우 질색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왔다. 우리나라 부모들이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식의 응석받이로 자식들을 키우고 있다면 호주 부모들의 자녀 양육 관은 사람 사는 일의 기본을 철저히 가르치는 것을 우선시한다. 내가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내 주변은 내가 정리하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몸에 배도록 훈련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최소한의 책임이자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를 익히는 첫걸음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가까이 지내는 호주 청년 하나가 잠시 한국의 한 가정에 머물면서 어릴 적부터 습관화된 매너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경탄 어린 칭찬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청년은 기상 후 반듯하게 이부자리를 개키고 샤워를 하고 난 후에도 몸을 닦은 타월로 말끔하게 물기를 훔쳐내는 등 지나간 곳마다 두 번 손 갈 일이 없도록 자기 단속을 철저히 하더라고 했다. 자기 자식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남의 자녀들에게도 같은 가정교육을 기대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추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제멋대로 살아온 한국 학생들로서는 호주 가정의 엄격한(?) 규칙을 지킨다는 것이 고역스런 일이 아닐 수 없고, 그러다 보면 밉살스레 보이게 되어 말 한마디라도 퉁명스레 주고받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대개는 한 달, 길어야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보따리를 꾸려 다시 한국 가정으로 거처를 옮기는 학생들을 볼 때면 씁쓸함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어린 아이들을 탓할 게 아니라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가르친 부모 탓이라는 생각 때문에서이다. 귀한 내 자식이 남의 나라에 공부하러 가서 집에서도 생전 해 보지 않은 방 청소나 목욕탕 청소를 하고 있다면 펄쩍 뛸 부모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말을 통하기 위해서는 피차간에 마음을 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함께 있는 공간이 즐겁게 느껴져야 비로소 대화가 오고 갈 수 있는 법이다. 기본 예의가 없는 이방의 어린 학생들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받아 줄 수 있는 호주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14년을 호주에서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겪어온 경험자로서 이 기회에 한마디 충고하고 싶다. 혹 호주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면 원어민을 통해 자식에게 영어를 가르치겠다는 섣부른 욕심만 가지고는 십중팔구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것을….
김정호 | 서울 양화초 교사 우리나라에서도 대학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시험에서 부정행위의 유혹을 받았거나,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시도한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험에서의 부정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지라도 어떤 식으로 소위 ‘커닝’이라고 부르는 시험 부정행위가 이루어지는지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시대가 변하여 이러한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나 그 행위의 방법들이 다양하게 변하고 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바뀌었을지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보통 한두 번 시도하는 추억거리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행위도 심하면 학생의 학적을 박탈할 수 있다는 논리에 대한 논쟁이 현재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신학기가 시작되던 지난 9월 초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한 대학에서는 기말고사에 있어서의 부정행위 학생들에 대한 학교 측의 제명조치가 부당하다는 베이징시 교육위원회의 결정문을 받고 이에 승복할지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베이징대 시험부정행위자에 일벌백계 사건의 발단은 지난 1월 학기말고사를 치르던 이 학교 학생 10여 명이 시험부정행위로 학교 측에 적발되면서 시작되었다. 학교 측은 이들이 시험에 나올 내용을 요약한 쪽지 및 자[尺]를 몸에 지닌 채 시험장에 들어간 행위에 대해 엄중한 시험부정행위로 간주하고, 이들에게 일괄적으로 퇴학조치를 내렸다. 학교 측의 입장은 대학생들의 관리를 위해 중앙정부에서 정한 ‘일반대학교 학생관리규정(普通高等學校學生管理規程)’에 명시된 ‘시험에서 타인이 대신 시험을 본 행위, 타인을 대신해 시험을 본 행위, 부정행위를 한 행위, 통신설비를 이용한 시험부정행위 등 기타 시험부정행위가 엄중할 경우 학교는 학생의 학적을 박탈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퇴학을 당한 10명의 학생은 모두 이러한 엄중한 시험부정행위를 저질렀고 학교 측에서는 앞의 교육부 명령에 따라 이들에게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이는 정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교 측의 조치에 대하여 몇 명의 학생들은 불복하였고, 베이징 시교육위원회에 이의를 신청하였다. 학생들의 주장은 이 학교에서 교육부의 명에 따라 자체적으로 마련한 ‘시험에 있어서의 부정행위에 관한 결정’이 시험에서의 사소한 부정행위도 용납하지 않고, 이를 저지른 학생들에게 일괄적으로 퇴학조치를 내리도록 해 학교의 권한 남용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참가한 시험에서 휴대한 쪽지 등이 직접 시험부정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시험부정으로 간주되어 퇴학처분을 받는 것은 너무 심하기 때문에 학교 측의 퇴학조치에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교위 ‘커닝 대학생’에 복학 판결 8개월 동안 베이징시 교육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학생 측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됐다. 시교육위원회는 대학 측에 이들 4명에 대한 퇴학처분을 취소하라는 결정문을 내려보냈다. 시교육위원회가 수긍한 이들의 주장은 학교는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기관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이 있으면 마땅히 이들을 교화시키는 교육을 다시 할 필요가 있는바, 이러한 학생들에 대한 재교육의 기회를 활용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손쉬운 조치인 퇴학을 결정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특히 학생들의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학교는 퇴학이라는 강경조치를 취한 것은 학생 개인과 가정에 매우 큰 영향을 가져오게 될 것이므로 학교 측은 이러한 강경조치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이번 시험부정행위자에 대한 조치가 지나치게 강경했다는 시교육위원회의 지적에 대해 아직도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학교 측은 선량한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습 분위기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벌백계로 다스려 타인에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항변한다. 이러한 학교 측의 주장은 현재 중국에서 치러지고 있는 모든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사회문제가 되는 것에 대한 교육기관으로서의 엄정한 조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날이 갈수록 지능화되고, 대범해지는 온갖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는 이제 중국 전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강경한 조치로 따끔하게 본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각종 시험에서의 부정행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의 대학시험에 해당하는 까오카오[高考]에서는 물론이고, 각종 자격증 시험, 심지어는 어학능력시험에서조차 빈번하게 대리 시험 및 첨단 장비를 이용한 부정행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를 퇴치하기 위해 각 시험담당 부서들에서는 대안 마련에 분주한 가운데 중국 교육부는 지난해 9월 1일부터 실시하게 된 ‘일반대학교 학생관리규정’의 54조 4항을 통하여 시험에서의 엄중한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학적을 박탈할 수 있도록 규정한 바 있다. 中 각종 시험 부정행위로 골머리 교육부의 이러한 규정에 근거하여 현재 각 대학은 자체적인 학교 규칙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의 경우 학생이 시험 중에 부정행위를 위한 종이 등의 물건을 휴대할 경우 그것을 보았건 안 보았건 간에, 이는 시험부정행위 혹은 엄중한 학술규범 위반행위로 규정하여 시험 성적을 영점으로 처리하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리도록 되어 있다. 또한 런민대학[人民大學], 중국정법대학(中國政法大學) 등 기타 대학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시험부정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하도록 되어 있다. 시험에서의 부정행위는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게 현재 중국 대학의 학생 및 학교 측에게 형성된 공감대이지만 이를 퇴학으로까지 결부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학생 측의 의견과 이를 통해 선량한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교의 기강을 유지해야 한다는 학교 측의 의견 갈등 속에서 이번 베이징 시교육위원회의 ‘퇴학처분 철회’ 건의가 향후 각 대학의 시험부정행위자에 대한 처벌과 관련하여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관심거리이다.
ADHD는 자기 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나 학습 전체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으므로 왕따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ADHD는 선천적인 전두엽의 기능 이상이 원인이지만 선천적인 원인인 만큼 환경적인 조절이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약간의 환경적인 변화에도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ADHD 아동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발달을 시키면서 학교에서 혼란을 겪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담임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ADHD 아동을 잘 다룰 수 있는 이상적인 교사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ADHD에 대한 사전 지식을 익히고 ADHD 아동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보이는 행동의 정당성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ADHD 아동의 남들과 다른 행동들을 정상적인 아동들의 반항적인 일탈 행위로 본다면 교사가 오히려 학생을 왕따를 시키는 중심에 서게 된다. 즉,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문제 속에서 건져내 주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먼저 ADHD에 대한 지식이 바탕에 풍부하게 깔려 있어야 한다. 둘째, 규칙을 정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하는 데는 일관성이 있고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야단을 칠 때는 감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일관성이 없는 것이 특징인 ADHD에게 일관성 없는 규칙을 적용시키면 ADHD는 어떤 것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서 금방 혼란이 일어난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야단을 치더라도 교사의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잘못된 행위에만 국한을 해야지 인격 전체를 모독하게 되면 자존심 손상으로 이어져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게 되고, 오히려 항상 자신만 야단맞는다는 피해 의식이 싹트게 된다. 셋째, ADHD 학생의 학습 수준이나 스타일에 맞게 개별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느리고, 미루고, 끝마치지 못하는 문제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 실패하는 사람으로서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게 된다. 하루하루의 작은 실패가 계속되면 궁극적으로 실패하는 인생의 기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ADHD 아동들은 보통 아이들보다 집중하는 시간이 짧고, 쉽게 지루해하고, 지루해지면 딴 짓을 하든지, 남을 집적거리거나 수업 시간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으므로 수업 시간 중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흥미감을 가질 수 있도록 중간에 질문을 하거나 학습에 필요한 어떤 것을 시키거나, 아니면 시선 접촉을 자주하고, 가볍게 몸을 건드려 신호를 보내는 행동 등을 통해 지루함이 부적절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학급에 ADHD가 있다면 하루 수업 중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미리 세워두고 실천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섯째, 지시는 명료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해야 한다. ADHD는 그 자체가 명료하지 않고 대충대충 하려는 특징이 있으므로 정확하고 구체적인 지시가 아니면 혼란스러워진다. 규칙을 읽거나 듣고도 실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지시를 못 따르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그리고 지시를 이해했는지 거꾸로 되물어 보아서 확인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여섯째, ADHD 아동과 의사소통을 할 때는 반드시 눈을 보고 앞에서 해야 한다. 주의가 쉽게 흐트러지고 선택적인 집중을 못 하는 것이 ADHD 아동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ADHD 아동도 담임교사와 대화할 때 정면으로 바로 보고 얘기하도록 권고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자세를 습관화시키는 것이 좋다. 일곱째, ADHD 아동들은 시간 개념이 없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반드시 시간표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다음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확인하게 하고 전 시간이 끝나기 전에 다음 시간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여덟째, 잘못된 행동이 있으면 미루지 말고 그 자리에서 즉각적이고 일관성 있는 지도를 해야 한다. 이럴 때 교사가 섬세하지 못하면 자칫 반 아이들 앞에서 창피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어떤 학생도 지적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일반화시켜주어야 하고, 또 잘한 행동도 즉각 칭찬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아동들에 비해 부정적 지적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정적인 자아 이미지가 생기기 쉽다. 아홉째, ADHD 아동들은 환경적인 자극에 과민하고 크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같은 성향을 가진 아동들이 서로 자극하지 않도록 하고 자극이 적고, 교사와의 시건 접촉을 가능한한 많이 할 수 있는 자리 선택이 필요하다. 열 번째, ADHD의 비생산적 과잉활동을 생산적인 활동으로 전환시켜 칭찬을 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ADHD 아동들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들이 학급에서 드러날 수 있게 이끌고 유도해 주어야 한다. 열한 번째, 작은 실수는 될 수 있는 대로 무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 아이들이 해야 할 행동 기준을 100으로 잡는다면 ADHD는 80~90% 정도로 기준을 낮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지적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숙제양도 해올 수 있을 만큼으로 조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열두 번째, ADHD 아동들이 있으면 다른 학생들의 부모들이 싫어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아이가 눈치 보게 되고 따돌림을 받게 되는 데 이런 상황을 교사가 막아줄 수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말한 12가지 방법들은 굉장히 복잡하고 교사가 해내기에 어려울 것 같지만 ADHD 아동에 대해 미리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현해보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ADHD인 한 아동을 성공적으로 다룬다면 나머지 아동들의 행동 문제도 쉽게 다룰 수 있다. 골치 아프다는 생각보다 ADHD 아동들을 성공적으로 지도한다면 집 안에서 자녀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 문제를 가진 아동들을 잘 다룰 수 있는 중요한 임상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귀찮을 수 있지만 아이에게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중요한 갈림길 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 정신과 전문의·마인드메디 클리닉 원장 ------------------------------------------------------------------------------------- 연재와 관련해 궁금한 사항은 마인드메디클리닉 인터넷 홈페이지(www.mindmedi.com), 전화 02)3412-7300로 문의해 주십시오.
박준용 | 한양대 강사, 문화평론가 중국의 어느 시골, 쇠락한 초등학교에 한 달 임기의 임시 교사가 도착한다. 고작 나이 열세 살의 완전 초짜 선생 웨이 민치가 그 장본인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달간 자리를 비워야 하는 가오 선생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작 노래 몇 곡, 그것도 제대로 부를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는 웨이에게 스무 명이 넘는 학생들을 맡길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웨이에게 "한 사람도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남기고 길을 떠난다. 교사가 된 열세 살 소녀 웨이 정식 교사도 아니면서 임시 교사직을 자청한 웨이의 관심사는 사실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것 외에 없다. 말 그대로 직장 개념만 있는 직업 교사인 셈이다. 적어도 학교의 대표 말썽꾸러기 장휘거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린 휘거가 빈곤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났다는 소식를 접한 웨이는 그를 찾기 위해 머나먼 도시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돈. 수중에 한 푼도 지니지 못한 그녀에게 도시까지 왕복 버스비는 엄청난 장벽이었다. 웨이는 먼저 아이들에게 돈을 걷는다. 너무나 당당하고 당연한 태도로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 휘거의 부재는 남은 아이들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공동의 숙제였기 때문이다.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아홉 명의 아이들과 계산을 거듭하고 계획을 짜면서 아이들과 웨이 그리고 학교의 모습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산 교육'의 장으로 변화해 간다. 학교를 떠나기 전 가오 선생은 웨이에게 노래나 가르치고 칠판 가득 아이들이 옮겨 적어야 할 글들을 매일 적어 놓으라고 한다. 그냥 아이들을 붙잡아 놓으라는 지시나 다름 없다. 이에 따라 웨이는 자신에게 지시된 일, 곧 잔뜩 글을 적어 놓는 것 외에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기본만 해도 다행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 했던가. 뜻하지 않은 휘거의 실종을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웨이는 아이들의 의견을 묻고, 아이들은 서로 어떻게 하는 것이 휘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를 토론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버스비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산술계산이 빠질 리 없다. 책에 적힌 산수가 아니라 사라진 친구를 찾으러 가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돈을 계산하는 일에 아이들 모두는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이 와중에 누구보다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웨이 선생이다. 처음에 아이들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던 그녀는 직면한 문제해결을 위해 아이들의 의견을 듣고 해야 할 일들을 선택하고 지시하고 무엇보다 이를 솔선수범하면서 점차 어엿한 선생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 기적 만들어낸 교육적 헌신 부족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모두 합심하여 벽돌공장에서 종일 돌을 나르고, 받은 일당을 모아 보지만 여전히 목표치에는 턱없이 모자랄 뿐이다. 결국 웨이는 아이들의 의견에 따라 무임승차를 감행해 보지만, 얼마가지 않아 들통이 나는 바람에 버스에게 쫓겨나게 된다. 이 정도 했으면 포기할 만하다. 누가 봐도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웨이는 걷기 시작한다. 끝없는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그리고 도시에 도착한다. 산 넘어 산 이랬던가. 분주함, 무관심, 돈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 등 도시의 벽은 더욱 높기만 하다. 웨이의 불굴의 등반은 또다시 계속된다. 온 도시를 돌며 휘거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니고, 손으로 수십 장의 벽보를 만들어 붙이며, 마지막에는 방송국 앞에서 이틀을 버티며 광고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무모한 투쟁을 계속한다. 이런 웨이 선생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한다. 완전히 가망 없는 일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쉽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라 말하고 중도 포기를 설득한다. 웨이에게 있어 지극히 현실적인 마을 촌장이 그러하고, 도시에서 만난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웨이 선생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달린 일이기에, 한 인생이 달린 일이기에 그랬다. 열세 살의 어린 선생 웨이가 교육이 무엇인지, 바른 선생의 길이 무엇인지 알 리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학생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말 그대로 '헌신'하는 웨이의 모습에서 교육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근본적인 자질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황은 중요하다. 여건도 무시할 수 없다. 환경은 변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불비(不備)하다고 학생을, 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럴 때 요구되는 것이 바로 불굴의 의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걸어가고, 찾고 또 찾고, 구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런 의지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의지만이 종국에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다. 방송국 문 앞에서 이틀을 지센 웨이 선생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방송 담당자가 그녀의 이야기를 취재해 방영하기로 한 것이다. 만남을 전제로 한 참된 교육 이 일로 인해 웨이는 휘거를 찾게 된 것은 물론 낙후된 시골학교를 위한 각계각층의 넉넉한 후원까지 받아, 글자 그대로 금의환향하게 된다. 발명가 에디슨은 천재는 99%의 땀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기적도 마찬가지 아닐까? 언뜻 허황해 보일 수 있는 영화의 결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까닭은 그런 기적을 이루는 웨이의 땀과 노력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웨이는 휘거를 포함한 아이들과 감격스런 해후를 맞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그간 부족함으로 인해 아이들이 감히 만져 볼 수 없었던 분필, 그것도 여러 색깔로 마련된 새 분필을 하나씩 집어 자신들이 적고 싶은 글을 하나씩 적게 한다.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가? 아이들은 조심스레 원하는 색의 분필을 집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글을 적기 시작한다. '하늘', '행복', '물', '성실'. 이제 휘거의 순서다. 시골학교 최고의 말썽꾸러기 휘거가 칠판에 쓴 글은 바로 '웨이 민치 선생님'이였다. 아이들은 이제 알고 있었다. 비록 웨이 선생이 자신들의 글쓰기를 지도할 수도, 노래 한 곡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 교육의 위기에 대한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교육이 경시되고 사교육이 비정상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가는 우리의 교육현실은 점점 더 효과와 효용성이 우상시되는 기능주의의 메마른 각축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중국영화의 거장 장이모 감독은 척박한 시골학교의 초짜 교사 웨이 민치를 통해 인간 상호간의 진실한 만남을 전제로 하는 참된 교육의 가치와 의미를 그 나름의 소박한 화법으로 우리에게 반문한다. 기능보다는 사랑의 관계, 잘 하는 여러 명보다 그에 미치지 못하는 한 명의 문제아가 더욱 소중히 여겨지는 말 그대로의 '교육'의 가치를 말이다. 영화를 위해 장이모 감독은 실제 시골학교를 배경으로 모든 배우를 현지에서 캐스팅했다. 그런 이유로 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전문배우들이 결코 줄 수 없는 실생활의 모습과 정서를 잘 전달한다. 대리 선생 역에는 13살 소녀인 웨이 민치가 맡았고, 문제아 학생은 실제로 대단한 장난꾸러기였던 장휘거가, 그리고 가오 선생과 촌장, 방송국 국장도 다 실제 인물들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99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가족들과 모일 기회가 잦은 가을,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산채나물 정식 같은 영화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