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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일본에서 여유있는 교육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모든 학교에 주 5일제 수업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막상 산간 등 교육,문화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는 학생들의 기초 학력 정착을 위해서 학교가 휴일인 토요일을 활용하여 희망자를 대상으로 보충수업을 하는 이른바「토요학교」가 운영되고 있다.그만큼 각 지역은 학생들의 학력 향상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년부터 산골지역 4개촌에서 이를 실시한 바「수업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습습관이 붙었다」 등 어린이들의 기뻐하는 목소리가들려오고 있다. 작년 5월, 현내에서 처음으로 「토요학교」를 시작하였다. 격주 실시로 출석률은 초중등학교 양쪽 모두 전체의 3할이다. 오전 중 약 3시간, 숙제나 문제집을 푸는 어린이가 많지만, 수업을 이해 못하는 어린이는 교사가 맨투맨으로 지도를 한다. 3일 토요일 힌 초등학교에는 5.6학년 40명이 모여서 각자 자기 수준에 맞춰 학습에 힘썼다. 6학년으로는 필리핀 출신의 카노메 맥 캐빈군은 담임 선생과 이인삼각으로 국어 독해 문제에 도전하였다. 2년 전에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는 일본어를 전혀 할 수 없었던 카노메군이였는데 토요학교에 지속적으로 다닌 성과로 지금은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한자를 읽고 쓸 수 있다. 그 결과 「수업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토요학교는 재미있다」라고 눈을 반짝거렸다. 이를 지도하는 담임 선생님은 「평일은 개별적으로 지도할 시간이 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꼼꼼하게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라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수업이 이해 안 되는 어린이를 한 명이라도 구해주고 싶다」라고 말하면서 촌교육위원회는 토요학교의 설치 의의를 강조하였다. 오오미즈마치도 지난 가을부터 초,중등 7개 학교에서 매월 1.3주 토요일에 「토요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현재의 학년보다 1학년 낮은 학년의 한자와 계산에 대해서 검정시험을 실시하는 등, 토요학교에서 학력향상을 지원한다. 어린이들에게「하면 된다」라는 달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출석률은 초등학교에서 5할 정도, 중학교는 25%정도이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토요학교에 대한 의문점도 있다. 「평일의 수업이 기본」「어린이는 토요일. 일요일도 행사나 클럽활동으로 바쁘다」,「학교 측이 와주기를 바라는 어린이가 오지 않는다」등등.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관계자는 골치가 아프다고 한다. 어느 교장은 「토요 출근 교원에게는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 반드시 대신 휴가를 내주어서 될 수 있는 대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라고 관리 면에 신경을 쓰고 있다. 또한, 한 지역에선 토요일만이 아니고 방학을 이용한 보충수업도 검토 중이다. 이 지역의 교육위원회는 중학생의 서투른 분야를 해소할 수 있는 토요학교의 모습도 모색하고 있다. 정부의 교육재생회의는 기초학력 향상을 위해서 토요학교나 방과 후를 활용한 보충학습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현교육위원회는「토요학교는 기초학력 정착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이것을 포함하여 지역의 실정에 맞춘 여러가지 대처방안이 나올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학습 시간 확보와 각 학생에 맞는 지도의 필요성 등의 문제도 드러나고 있어서, 바람직한 토요학교의 모습을 찾기 위한 시행착오가 계속될 것 같다.
6월 1일, 자녀의 학업성취를 돕기 위한 학부모 연수회가 송파수련관에서 있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이날 연수에서 김기찬 교장은 "진정으로 자녀를 위하는 길은 자녀가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며 가정에서 어머니의 현명한 역할을 강조했다. 이어 교무부장의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설명과 1학년부장의 2008학년도 이후 대입제도에 관한 안내 및 진로지도부장의 통합논술에 관한 강연이 있었다.
요즘 이곳 필리핀 바기오엔 장마시즌(6월~8월) 징후 탓인지 연일 비가 내리고 있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3개월간의 긴 방학에 들어간 상태이고 일부 대학에서만 여름방학 특강을 운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방학이 되면 학원으로 내몰리는 우리나라 아이들과는 달리 이곳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원이라는 개념보다는 가정에서 휴식을 갖는다든지 아니면 가까운 친척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그들의 방학을 보낸다. 특히 가계가 힘든 아이들의 경우, 소일거리를 찾아 돈을 버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3월부터 6월까지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강생을 모집하는 필리핀 바기오 내 대부분의 어학원은 거의 수강생이 없을 정도로 한산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6월에 접어들면서 이곳 어학원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여름방학기간에 필리핀으로의 단기어학 연수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을 맞이하려는 준비 기간이 바로 6월이다. 무엇보다 우수한 강사를 확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만큼 이를 위해 어학원마다 경쟁이 치열한 것도 사실이다. 필리핀 어학연수가 다른 선진국가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이곳 필리핀 현지인의 발음을 믿지 못하는 학부모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를 위해 필리핀 현지 어학원은 발음교정을 위한 원어민 강사 1~2명 정도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도 사실이다. 거의 대부분의 학부모가 저렴한 비용으로 단기간 내 큰 효과를 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부모는 자녀의 영어 실력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스파르타식의 기숙학원으로 아이들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어느 정도의 영어실력이 있는 자녀의 경우, 기숙학원에서 다소 효과를 볼 수 있으나 반면에 기초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녀를 기숙학원에 보낼 경우, 스파르타식의 꽉 짜여진 일정에 따라 가지 못해 결국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사실 이곳에 상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어학원들이 한국에 있는 유학 원과 연계하여 운영되고 있는 만큼 방학 때가 되면 무작정 수강생을 많이 모집하여 돈을 벌겠다는 요량으로 사실과 다른 과대광고로 학부모를 현혹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에 학부모는 방학기간 동안 어학연수생을 모집하는 각종 매체의 광고를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끔 광고 내용이 실질과 달라 이것으로 피해를 보는 학부모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무엇보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어학연수지를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기존에 자녀의 어학연수를 보낸 경험이 있는 학부모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다. 따라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 온 자녀의 후유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학부모는 정확한 정보와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겨울방학에 비해 여름방학의 기간이 짧은 것을 고려해볼 때 단기간 내 큰 효과를 보기 위해서라도 학부모들의 세심한 관심이 요구된다. 필리핀 어학연수 시 주의해야 할 사항 - 연수비용이 적절하게 책정되었는가? - 커리큘럼은 어떻게 구성되어져 있는가? - 발음교정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 교외활동으로 무엇이 있는가? - 수준별 수업을 하고 있는가? - 하루의 일과표가 잘 지켜지고 있는가? - 생활지도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 식단표가 잘 짜여져 있는가? - 1:1수업이 얼마나 자주 이루어지고 있는가?
학교 선생님들이나 일반 직장인을 대상으로 개최되는 각종 연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 둘째는 휴식 목적으로 온 사람, 셋째는 친교 목적으로 온 사람, 마지막으로 적극적 참여를 하고자 온 사람이 그것이다. 부연 설명할 것도 없이, 첫 번째 사람은 상사의 지시나 공문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경우로 연수 장소에 앉아 있는 일 자체가 지옥처럼 괴로울 것이다. 따라서 강의는 뒷전이고 뒷좌석에 앉아 잠이나 자게 마련이다. 둘째 목적으로 온 사람 역시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이용해 격무를 잠시라도 잊고 쉬어볼까 해서 연수를 갔으니 연수를 귀담아 들을 리 없다. 세 번째 친교목적으로 온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는 옛 동료와 잠시나마 서로간의 정리를 나눌 수 있어 좋겠지만 목적이 다른 데 있는 만큼 연수 끝나고 나서 친구와 나눌 대포 한잔에 더 생각이 미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강의를 듣는 일에 열심일 수 없다. 가장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경우는, 무언가를 배워가겠다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참여한 네 번째 경우인데 어느 연수를 가 봐도 전체인원의 20%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강사 중에서 명강사는 어떤 사람일까? 수강생들이야 듣든 말든 마이크 볼륨 높여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할 얘기만 늘어놓은 강사일까? 아니면 기왕 80% 이상의 다수가 연수의 취지와는 멀게 자리만 채우고 앉아 있으니,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봐주지도 않는 1인극 집어치우고 함께 농담이나 주고받다 시간 채우고 강사료나 챙겨가는 사람일까? 둘 다 아니다. 진정한 명강사는 연수 본래의 목적과는 동떨어진 이유로 온 사람들까지도 귀가 솔깃해서 주목하게 만들고 강의 속에서 무언가 얻어가지고 갈 수 있도록 고민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추구하는 강사가 바로 명강사인 것이다. 아, 생각하면 이것이 어디 어른들의 연수의 경우에만 적용될 이야기인가. 교육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라. 아이들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각오로 교실에서 선생님을 기다려 준다면 얼마나 신바람날 것인가! 가르치는 일이 하나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눈망울 초롱초롱한 아이들 앞에 두고 준비한 내용을 가르치기만 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그런가? 학생들 가운데는 공부는 죽어도 하기 싫은데 부모 등쌀에 억지로 학습의 포로가 되어 학교에 나와 있는 아이가 한둘 아니며, 이 학원 저 학원 과외 받느라 밤잠설치는 일과 속에서 학습 에너지를 충전할 겸 잠자기 위해서 학교에 나오는 아이도 적지 않다. 또 일부 학생은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 만나서 사귀고 그들과 노는 재미로 학교에 나오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아이들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선생님의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는다 해서 불평만 하다가 수업을 때려치우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공부 잘하는 몇몇 아이들만 데리고 수업시간 채우다 종치면 교실 문을 나서야 한단 말인가. 진정한 교육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보다 오히려 공부에 관심 없는 아이, 학습동기가 부족하고 의지가 결여된 아이들을 더 배려하고 감싸주면서 온갖 열정과 헌신으로 하나의 지식, 한 가지 지혜라도 더 깨우치게끔 만들어가는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공교육이 사회적 불신의 대상이 되고, 학교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것으로 비난받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교육을 살리는 길은 결코 어려운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 선생님들 모두가 설레는 가슴으로 처음으로 교단에 서던 날의 각오를 되새기며 그 순수한 초심으로 돌아가, 아이들 하나하나를 제 자식 돌보듯 사랑과 정성으로 가르쳐 나간다면 학교는 다시 예전 같은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의 현직 영어교사들 가운데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는 능력이 가장 빼어난 '영어수업 왕중왕'이 가려진다. 외대가 주최하는 제3회 영어수업경연대회에 참여한 전국의 영어교사 100여명중 최고로 평가받는 교사가 2일 오전 탄생한다. 이 대회에는 해외체류 기간이 5년 미만인 전국의 영어교사에게 참가 자격이 주어지며 지난 달 24일 본선을 거친 10명이 최종 결선을 남겨두고 있다. 결선은 외국어대 영어교육과 재학생 20여명이 모의학생으로 참여하고 현직 교사, 학원강사, 학생, 학부모 등도 참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실제 수업처럼 진행된다. 심사위원들은 영어로 영어를 가르치는 능력(Teaching English through EnglishㆍTETC)과 최근 효과적인 교수법으로 각광받고 있는 의사소통 교수법(CLT) 등을 잣대로 참가자들을 평가한다. 결선 진출자는 반포고 노경진씨, 하남중학교 정혜리씨, 상인천중학교 강혜정씨, 수원 효원고 송경선씨, 광명 진성고 전민호씨, 고양외고 이은영씨, 대전 유성고 배철웅씨, 전북 원광고 김은미씨, 인천 간재울중 김민전씨, 전남 영흥고 이순철씨다. 대학 관계자는 이번 대회가 전국 최상위 교사들의 무대라고 자평하면서 "서울 지역과 외국어고 교사들의 강세가 뚜렷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결과는 딴 판이었다"며 "지역과 학교 특성을 떠나 실력자들이 전국 곳곳에 숨어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대상 수상자에게는 방학 중 샌디에이고주립대에서 3주 동안 교사연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항공권, 수업료, 숙식비 등이 제공되고 금상 2명과 은상 3명에게도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진다.
디지털 세상이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며 사람들의 패턴을 바꿔 놨다. 차에 네비게이션을 장착하면 GPS 위성이 목적지를 정확히 찾아주는 세상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건만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여행지를 결정하고, 목적지를 찾아가는데 지도보다 좋은 자료가 없다. 지도가 나타내고 있는 기호나 내용을 알아보는 게 독도법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학창시절에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열심히 독도법을 배운 게 도움이 된다. 어쩌면 지도에서 목적지를 직접 찾아보며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를 즐기는지도 모른다. 작년 4월이었다. 몇 개 시ㆍ도의 관광 지도를 펴놓고 여행지를 물색하다가 지도마다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엉터리였지만 바쁜 세상에 이런 것까지 관심을 두라고 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신임도가 높은 시ㆍ도청에서 발행한 지도이므로 당연히 오류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가 독이 된다는 것을 그들이라고 모를 리 없다. 모두 관심부족이 불러온 결과다. 충북과 이웃하고 있는 **도청에서 발행한 지도에도 오류가 많았다. 다른 도에서 만든 지도에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엉터리로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은근히 화가 났다. 그래서 잘못된 부분을 글로 알리고,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첫 번째 지도의 문제점 - 아예 그곳에는 ‘금인’이라는 지명과 철도역이 없다. 두 번째 지도의 문제점 - 증평군 밑에 'Chojeong-gun'이라고 씌어있는 영문을 'Jeungpyeong-gun'으로 바꿔야 한다. 세 번째 지도의 문제점 - ‘미천면’이라고 씌어있는 곳은 문의면 미천리가 위치한 곳이므로 ‘미천리’로 바꿔야 한다. 네 번째 지도의 문제점 - ‘북면’은 없다. 그곳은 보은군 회북면이다. ‘북면’을 ‘회북면’으로 바꿔야 한다. 그때 담당자가 ‘바로 수정을 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며칠 전 우연히 **도청에서 최근에 발행한 관광 지도를 보게 되었다. 옛 생각을 떠올리며 수정을 요구했던 부분부터 살펴봤다. 내가 요구했던 대로 모두 수정이 되었다. 일상적인 답변을 하거나, 확인여부에만 관심을 두면 민원인의 옳은 의견도 듣기 싫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약속대로 지도를 수정해준 담당자가 고마웠다. 그런데 **도청의 관광 지도에 오류가 있는 것을 또 발견했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고 했다. 잘못된 것을 알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칭찬하다 말고 누구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 발전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잘못을 빨리 고쳐나가자는 것이다. 내가 본 지도는 분명 발행일이 2007년 2월로 나와 있다. 그런데 올 1월 1일 읍으로 승격해 현재는 시 승격을 꿈꾸고 있는 ‘오창읍’이 ‘오창면’으로 되어 있다. 지난 번 지도에 표기가 잘 되었던 ‘낭성면’이 무슨 이유인지 ‘랑성면’으로 바뀌어 있다. 민원사항은 고생을 하며 요구대로 수정을 해놓고 왜 또 오류를 범했을까? 각 시ㆍ도나 시ㆍ군에서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 분명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좀더 책임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꼼꼼히 살펴보고 문제점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오류가 없는, 정확한 정보만 제공하는 관광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왜 관광 지도만 그렇겠는가? 지금 이 순간 교육계 현장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본다.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작다고 무관심하거나하찮은 것이라고 방치할 게 어디 있는가?관심을 두는 만큼 아이들이 밝게 자란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광주시교육청이 과락제도를 도입해 모집 정원에 미달해 특수교사를 선발한 것은 합법이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1일 광주시교육청에 따르면 광주지방법원 행정부는 시교육청 특수학교 임용시험에 응시했다가 탈락한 수험생 11명이 시교육청을 상대로 제기한 불합격처분 취소 소송과 관련해 지난달 25일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들은 교육청이 과락제도를 도입해 모집 정원에 미달해 신규교사를 뽑은 것은 위법이라는 등의 이유로 불합격 취소를 요구하고 있으나 국가 등의 시험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과락제도 등 합격자의 선정에 대한 방법의 채택은 법률에 위반하지 않는 한 시험시행자의 고유권한이다"고 밝혔다. 원고들은 시교육청이 지난해 1월 공.사립 중등 특수학교 교사 27명을 선발하기로 한 방침과 달리 최종 17명을 선발하자 "시교육청이 당초 특수교사 모집정원을 과다하게 산정했다가 예산부족 등을 감안해 과락을 무리하게 적용해 정원에 미달해 선발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었다.
충북도교육청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공동으로 1일 보은군 수정초등학교(교장 조철호)를 시작으로 '외국인과 함께 하는 문화교실(CCAP)' 운영에 들어갔다. 지난 11일 이기용 교육감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이삼열 사무총장이 '외국인과 함께 하는 문화교실 지방협력기관 인증 및 활동에 관한 협약'에 따라 3일까지 실시되는 이번 문화교실에는 미국과 몽골, 카메룬 출신의 외국인 자원봉사자 3명이 각각 자국의 문화를 학생들에게 소개하게 된다. 또 학생들은 이들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친교의 시간을 마련하게 되며 외국인들은 이틀 저녁을 홈스테이를 통해 농촌 가정에서 머물며 한국의 농촌문화를 접하는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 이 문화교실 수업은 외국인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시골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큰 관심 속에 앞으로 세계화 시대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다양한 문화권에 대한 이해의 기회가 될 전망이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맞는 지역인재 육성을 위해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의 협약을 바탕으로 다양한 외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천시교육청으로부터 ICT 활용 미래형 선도학교로 지정(2005.3 ~ 2006.12)되었던 인천용현남초등학교(교장 허근남)는 학생들의 학력향상 및 학력관리를 위해 U-school 학력관리센터(http://uschool.or.kr)를 구축하여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U-school 학력관리센터는 인천 남부교육청 특색사업인 엑셀을 활용한 통지표에 착안하여 마련한 것으로. 학업성취도 결과 분석표에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각 교과영역별로 성취기준에 얼마나 도달했는지 그래프와 자세한 문장으로 제시해주고 있으며 어떤 문항이 가장 많이 틀렸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또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가장 많은 틀린 문항에 대한 문제풀이를 EBS 방송국의 강의처럼 자세하게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인테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성취도 평가 전에는 기출문제 및 예상문제 풀이를 동영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시행결과 2007학년도 1학기 첫 시험을 치른 학생들 중 동영상 강의를 청취한 학생들은 학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연했던 시험 준비에 대한 불안감을 U-school 학력관리센터를 통하여 덜어낼 수 있었다며 밝은 표정이었다. 한편 U-school 학력관리센터 강의를 담당하는 오진환 교사는 인천교육청 정보실업과의 자문을 받아 2014년 인천에서 거행되는 아시안 게임을 위해 생활영어 동영상 자료도 수집하여 서비스함은 물론 앞으로는 강의를 교사만이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직접 출연하여 생동감있는 U-school 학력관리센터의 학습 컨텐츠를 제작하여 서비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천마장초등학교(교장 강혁희)는 5.31일 지난 4.20일~5.30일까지 1천67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랑의 동전 모으기 100원의 기적’캠페인으로 모금한 성금 5,915,580원을 굿네이버스 인천지부에 전달했다. 사랑의 성금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케냐·르완다 등 제3세계와 북한 등 지구촌 어린이를 살리고 국내에서는 인천지역 난치병 아동들에게 치료비 지원과 독거노인·결식아동들에게 무료 도시락을 제공하는데 사용토록 해 지역사회의 잔잔한 감동을 주고있다. 소중한 나눔의 기회를 실천한 마장 어린이들, 우리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는 동시에 지구촌 이웃의 삶을 알고,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성숙한 시민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산에서 멧돼지로부터 피해를 예방하려면?" "가급적 2명 이상 함께 등산하고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을 때 대처요령은? ▲뛰거나 소리지르지 말고 침착하게 멧돼지의 눈을 쳐다볼 것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 말 것 ▲멧돼지 새끼를 만지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절대 하지 말 것 ▲멧돼지가 흥분했을 때는 주위 나무나 바위 등 은폐물에 몸을 신속하게 숨길 것 수원시 장안구청은 최근 구청 및 시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수원 광교산(光敎山. 528m)을 찾는 등산객과 시민의 안전을 위해 '멧돼지 발견 시 대처 요령' 이라는 제목의 알림 글을 올렸다.지난해 10월 30일 새벽 광교산과 인접한 장안구 조원동 한일타운 아파트에 멧돼지 3마리가 출현했다 광교산으로 도망간 일이 있은 후 장안구는 광교산으로 올라가는 주요 등산로 15곳에 '멧돼지 발견시 대처요령'을 알리는 현수막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후 멧돼지가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최근 광교산에서 멧돼지 발자국을 봤다는 제보가 잇따르고 있어 광교산을 찾는 등산객과 시민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지난 3월 7일 수원.성남.의왕.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의 용인시 관내에서 멧돼지 포획작전이 벌어져 이틀간 멧돼지 5마리가 포획되기도 하는 등 정확한 개체수는 알 수 없지만 광교산에 멧돼지가 서식중인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교산은 주말이면 수원과 인근 지역에서 산행을 즐기기 위해 찾는 등산객이 2만5천명에서 3만명에 달한다.
화장실 청소라면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 무엇을 잘 못하거나, 가져오라는 물건을 잊고 온 경우에 벌로 주어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화장실 청소가 학교에서 어렵고 힘들다고 용역을 주어야한다느니, 그래도 교육적으로 아이들이 직접 실시해야한다느니 등 논쟁의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큐슈 오이타현에서는 화장실 청소를 통해서 마음을 닦자는 취지에서 학교나 공원 등의 화장실을 청소하는「오이타 청소로 배우는 회」(야노대표)의 활동이 5월 18일, 100번째를 맞이하였다는 것이다. 이 활동은 자동차부품판매회사「옐로우 핫」(본사 토쿄)의 창시자로 현 상담역인 가기야마씨가 제창하였다. 「겸허한 마음이 되고, 감사의 마음이 생겨난다」라고 기업의 리더들이 솔선하여 시도해 국내외로 확산되고 있다. 오이타의 회는 1997년 다케다시 공원의 화장실을 22명이 청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매월 제 3일요일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매회 20-30명이 모였다. 10년간 연 참가 인원은 6천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활동이 알려져 현지 중학교나 자치단체 등으로부터「화장실 청소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요청이 늘어나 학생과 직원이 일체가 되어 청소하는 등 현 내에서도 이같은 활동이 퍼져 나가고 있다. 100번째 장소가 된 곳은 오이타시 도지중학교이다. 이학교 1.2학년과 교사, 보호자 등 약 110며명이 참가하였다. 학생들은 맨발로 팔을 걷어 부치고 수세미나 스폰지, 사포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변기에 낀 때를 벗겨내었다. 「맨 발을 벗는 것도 맨손을 변기에 집어넣는 것도 처음에는 저항감이 있었지만 청소를 하는 중에 ‘더욱 더 깨끗이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어 점점 변기의 깊은 곳까지 손이 들어 갔어요」라고 참가한 여학생(14세.2년)은 말하였다. 또 한 남학생(14세.2년)은「깨끗해지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의욕이 생겼어요. 집에서도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하였다. 야노 대표는「화장실 청소는 사람의 마음을 키웁니다. 더욱 회를 거듭하여 활동의 범위를 넓혀가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화장실 청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5월 30일 본교 세미나실에서 교직원 연수가 있었다. 1교시에는 서산여고 김숙영(영어) 선생님의 '2007개정교육과정 및 학업성적관리'에 관한 설명이 있었고, 이어 2교시에는 윤기수 서산고등학교장의 '수업혁신방안'에 관한 강연이 있었다. 강연에서 윤기수 교장은 '변화하는 여건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는다.'는 찰스 다윈의 말을 인용하며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 지식의 발생은 12초마다 변화하므로 이에 적응하려면 혁신만이 살길임을 강조했다.
자식 키우기가 예전 같지 않고 갈수록 어렵다는 염려와 한숨은 호주 부모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특히 10대 자녀를 둔 부모들 가운데는 요즘처럼 험한 세상에서 딸자식을 제대로 기르기란 정말로 힘든 일이라며, 아들보다 딸에 대한 걱정을 앞세우는 것도 여느 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터넷과 매스컴의 영향으로 미성년 자녀들이 성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접할 수 있고,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이성과의 만남이 쉽게 이루어지며 미성숙한 시기에 호기심에 이끌려 성관계까지 가는 상황들로부터 특히나 딸 가진 부모들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우려인 것이다. 지난 4월 호주 시드니에서는 17세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하고 그 장면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그 여학생이 다니는 학교에 유포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피해자인 여학생과 같은 나이인 가해자 남학생 5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가해 남학생 들 중 한 명과 친구사이인 그 여학생은 다른 남학생들과도 별생각 없이 어울리며 함께 술을 마시다 그 같은 변을 당했는데, 이후 피해 여학생이 성폭행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자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카메라에 들어있는 내용을 학교에 뿌렸다는 것이다. 10대 청소년들의 그 같은 끔찍한 행위에 대해 그 사건을 담당한 경찰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딸 가진 부모들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더군다나 다 큰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며 감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10대들의 성범죄가 드러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또 한 가지 부모들의 걱정은 주변의 성폭력에 의해, 혹은 한때의 호기심으로 저지르게 되는 불장난이 자신의 딸을 언제 미혼모로 전락케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수년 전 시드니 인근의 한 고등학교는 재학 중인 여학생이 임신을 하거나 출산을 할 경우를 대비해 학교에 탁아시설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대책 없이 늘어만 가는 ‘10대 엄마’들이 육아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일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젖먹이를 데리고 등교한 후 수업 중에는 학내 육아실에 아기를 맡겨놓고 쉬는 시간 틈틈이 수유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학생 엄마’는 수업 중에도 아기가 보챈다는 연락을 받으면 언제든 탁아실로 달려갔고, 등·하교 때도 책가방과 기저귀 가방, 유모차를 함께 끌고 다녔다. 숙제나 과제물 제출, 시험 등도 육아로 인해 피치 못할 경우 집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학교 측이 특별배려를 했다. 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 학교에 다니는 10대 미혼모들의 대부분은 같은 학교 남학생들과 성관계를 가졌음에도 이를 시인하는 남학생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피해와 책임은 여자들의 몫이라는 점에서 딸 가진 부모들은 다시 한 번 가슴을 쓰러내려야 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는 말처럼 여자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염려가 전에 없이 커지다보니 최근에는 좀 심하다 싶은 일이 한 초등학교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서부 호주에 위치한 도시 퍼스에서 초등학교 1학년 남자 어린이가 ‘여자 짝꿍’을 이른바 성희롱한 혐의(?)로 전학을 하게 된 사연이다. 올해 6세에 불과한 햇병아리 신입생 남녀 어린이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사자들조차 어리둥절한 가운데 여자 어린이의 부모가 학교장에게 거세게 항의한 후 그 같은 조치가 내려졌다고 신문들은 전했다. 여학생의 부모는 짝이 된 남자 어린이가 자기 딸을 부적절하게 만졌고 성적 행동과 암시를 했으며 가위로 위협하기도 했다고 주장한 반면, 남자 어린이의 부모는 이 모든 주장들이 터무니없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남자 어린이의 부모는 이제 겨우 6살인 자기 아들은 ‘성희롱’의 개념조차 모른다며, 지금까지 텔레비전의 성인프로그램도 못 보게 했는데 섹스에 대해서 뭘 알겠냐며 철없는 아이의 말만 듣고 학급을 바꾸라고 한 학교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한 불만을 표했다. 남자 아이의 부모는 아들이 다른 반에 간다고 해도 이 일로 받은 상처와 충격이 씻어질리 없다며 결국 전학을 시켰는데, 이 일의 파장은 생각보다 커서 사회에 적잖은 후유증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딸 가진 부모들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과 대응을 함으로 인해 또래 남아들 특유의 짓궂은 장난마저 성희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분리되는 사회가 어찌 정상이라 할 수 있느냐는 우려가 그 중 하나이다. 성희롱을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사례도 없이 단순히 어린 여아의 진술만을 토대로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학교생활을 막 시작한 남자 어린이가 받았을 충격과 죄의식, 수치심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짝꿍을 성추행한 것으로 ‘찍힌’ 남자 어린이는 그 날 이후 등교를 거부하고 있으며, 이 같은 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아이의 장래와 인생에 적지 않은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도 있다. 10대들의 성폭력 범죄가 도를 지나치면서 급기야는 초등학교에서조차 남학생과 여학생 간의 ‘접촉’을 둘러싼 신경전이 심각한 와중에 빅토리아 주 내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재학생들 가운데 남녀 학생들은 무조건 최소 벽돌 2개를 붙여놓은 거리만큼 떨어지라는 규정을 엄격히 시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벽돌 2개 사이는 약 30㎝로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함께 점심을 먹거나 대화를 할 때, 교정을 산책할 때에도 이 거리를 반드시 유지할 것을 교칙으로 정한 것이다. 언뜻 듣기엔 우습기 짝이 없는 학칙처럼 들리지만, 학교 측은 결국 남녀 간의 신체적 접촉을 금지하는 규정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기 쉽도록 가시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즉, 남녀 학생 간의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막기 위해서는 무조건 서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아예 학칙으로 못 박았다는 것인데, 말썽 많은 10대 성범죄 예방을 위해서는 애정이건 분노건 남의 몸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도자기전쟁 규슈 답사 마지막은 조선도공 이야기입니다. 주지하시다시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 땅으로 많이 잡혀갔습니다. 왜 수많은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을까요? 마침 그때 일본에서는 다도(茶道)가 한창 유행했습니다. 16세기 후반 센노리큐라는 사람이 일본의 차문화를 다도로 발전시켰던 것이죠.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제대로 된 찻잔 하나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인기 절정이었습니다. 특히,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조선의 찻사발은 평범한듯하면서도 오묘한 멋으로 인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습니다. 도자기는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영주들에게도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자기를 팔아 이익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도공들을 잡아가는 데 더더욱 혈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도공들을 집단적으로 거주시키며 감사와 함께 파격적인 대우까지도 보장하면서까지 하이테크 기술의 응집인 도자기를 만들도록 했던 것이죠. 7년여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의 도자기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던 반면, 일본은 조선도공들로 인해 도자기산업이 싹트게 되었고 이후 국제적 정세를 잘 이용하여 중국을 대신하여 유럽에까지 수출함으로써 일본 도자기의 명성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7년여의 전쟁을 일컬어 ‘도자기전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규슈 곳곳에도 조선도공들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오늘은 사가현의 대표적인 조선도공이었던 이삼평과 가고시마현의 대표적인 조선도공이었던 심당길의 궤적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삼평에 대한 논란 사가현 아리타나 이마리 마을에 들어서면 길거리에서 쉽게 도자기를 볼 수 있습니다. 도자기를 만들고 판매하는 가게는 물론이고 다리 위 난간도 도자기로 꾸며 두었습니다. 이렇게 사가현이 도자기의 고장이 된 데는 이삼평의 공이 크다 하겠습니다.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의 시조[陶祖]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알려진 자료는 극히 미미합니다. 이삼평이라는 이름부터가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그의 성이 원래부터 이씨 성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조선도공의 대표자로 예우하는 차원에서 조선 왕실의 성을 따 이씨 성을 붙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출신지를 놓고도 이견이 있습니다. 잠깐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삼평 관련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포로로 끌려간 기술자들 중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상도에서 끌려간 후 일본 규슈에 정착하게 된 도공 이삼평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6학년 1학기 사회과탐구 60쪽 살펴본 바와 같이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이삼평의 출신지를 경상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출병 때 일본에 온 충청도 금강(金江) 출신의 삼평’이라는 일본 측 기록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금강을 김해로 추정하는 시각에서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금강을 금강(錦江)의 착오로 추측하고 그의 출신지를 충청도로 보는 경향이 더 우세합니다. 아리타와 공주에 각각 세워진 이삼평 기념비문에는 모두 충청도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삼평과 관련한 논란은 또 있습니다. 일본으로 ‘강제적으로 끌려갔느냐’, ‘자발적으로 넘어갔느냐’는 문구 때문입니다. 논란이 되는 문구를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리타에 있는 이삼평기념비로 오르는 계단 옆에 안내된 문구입니다. 2005년 이삼평공헌장위원회 명의로 세웠습니다. 아리타도자기의 시조인 이삼평공은 조선국(현재의 대한민국) 충청도 금강 출신으로 전해지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했을 때 나베시마군에 붙잡혀 길 안내 등의 협력을 명령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삼평공은 사가번의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귀국할 때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 그 후 귀화하여 출신지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을 가나가에(金江)라고 지었다… 다음은 공주 동학사 가는 길 박정자삼거리에 조성된 이삼평기념비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지난 1990년에 세워진 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 명의의 안내문입니다. 이삼평공은 임진정유의 난에 일본에 건너가 여러 도공들과 역경을 같이한 끝에 1616년 규슈 아리타 이즈미산에서 도석의 활용으로 일본 최초의 백자기 생산에 성공하여 일본자기산업 융성의 원조가 되었고… 공주 이삼평기념비의 안내문 앞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하나 더 서 있습니다. 지난 2001년 각 단체 명의로 세워둔 것입니다. …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두 군데 비문 일부분에 역사적 왜곡이 있다는 점이다… (중략)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 근 십만 명에 이르는 도예공, 부녀자, 농민들을 강제로 끌어갔다. 이삼평님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렇듯 이삼평에 대한 시각은 그의 위상에 맞게 다양한 시각으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일본 도자기의 시조라고 칭송받는 조선도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리타 도조 이삼평비에서 아리타에는 이즈미 광산, 도산신사, 도조이삼평비, 이삼평의 묘와 그가 도자기를 만들었던 텐구다니 요터, 아리타역사민속자료관, 큐슈 도자기 문화관, 또 다른 조선도공이었던 백파선의 묘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삼평은 1616년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를 이즈미 광산에서 처음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못 구해 이리저리 찾아 헤맨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일본에서 백자가 만들어지는 전환기가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지요. 처음에는 거대한 산이었다지만 현재는 흙을 파헤친 흔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웃한 산으로 동굴을 파헤치듯 백토를 찾아간 흔적이 역력합니다. 아직도 고급도자기를 만들 때는 이곳의 흙을 아직도 활용하고 있다고 하네요. 아리타역사민속자료관에 가면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이 보급했던 오름가마 모형이나 도자기의 원료, 아리타 도자기의 변천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가마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었습니다. 도산신사는 도조 이삼평을 도자기의 신으로 모신 곳입니다. 철길을 건너 신사로 오르는 입구에는 이삼평과 함께 응신천황, 그를 잡아간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배향되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도리이나 고마이누 모두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마이누는 신사 양쪽에 서 있는 개를 말합니다. 도산신사에서 만난 이삼평의 14대 후손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신사에 모셔진 분이 이삼평”이라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 백제왕족을 모신 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인물을 신으로 모신 곳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신사 뒷길로 5분 정도 오르면 도산 정상에 이삼평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삼평기념비에 서면 아리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첩첩산중 좁은 골짜기를 뚫고 곳곳에 도자기를 만드는 공방이 들어서 있습니다.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더라면 이런 오지에 저렇게 빼곡하게 집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요? 매년 도자기축제를 할 때면 몇 ㎞에 이를 만큼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하는데…. 14대 후손의 말대로 이삼평은 죽어서도 아리타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치 남해 다랭이 마을처럼 다닥다닥 지붕을 붙이고 들어선 발밑의 도자기마을이 모두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의 노력이 아니었던들 불가능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삼평가가 계속해서 도공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도예가의 맥이 끊어졌다가 13대부터 다시 도예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현재 14대 역시 도자기를 만들고 있고 우리나라 이천에서 1년 정도 도자기 공부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서 그 이후 계속 도예가문으로 지속될는지는 의문입니다. 14대 역시 그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듯했습니다. 심당길과 심수관 규슈 최남단의 가고시마현에는 심수관이 있습니다. 심수관이라는 이름은 세습명입니다. 그러니까 정유재란 당시 초대 심당길이 시마즈 영주의 군대에 의해 남원에서 잡혀 가고시마에 도착한 이래 줄곧 도자기를 만들어 오다가 12대부터 심수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현재는 15대 심수관이 가업을 잇고 있습니다. 처음 남원성에서 잡혀온 조선인들은 모두 16개 성씨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는 본능적으로 가마를 만들고 그곳에서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는데 일본사람들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이 살던 고향 산천과 너무 닮은 곳에서 정착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일본사람들도 살지 않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이들이 정착했을 때는 일본의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워서 시마즈 영주가 이지메 당하는 조선도공들을 안중에 둘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정세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영주가 나서서 심당길 일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이 도자기 제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겠노라고 직접 챙겼습니다. 자신의 직접적인 보호 아래 도자기를 만들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영주의 이러한 주문에도 이들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고 합니다. 첫째 이유는 고향을 닮은 산천을 떠나기 싫었고, 둘째 이유는 가고시마에 같이 온 조선인 중에서 일본인의 앞잡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영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조선인자치를 허용했다고 합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조선말을 그대로 쓰고 8월 15일 추석날이 되면 한복을 차려입고 단군왕검을 모시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조선말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데 걸상을 ‘앉을 통’이라 하고, 막대기를 ‘찔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밖에 ‘가마’ ‘바닥’이라는 말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심당길을 시작으로 대를 이어 400년이 넘게 도자기를 계속 만들어온 이 가문은 제12대 심수관에 이르러 각종 세계 도자기 대회에서 큰 상을 받게 되면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심수관도예촌 안에 있는 전시관에는 초대 심당길부터 15대까지 심당길 가문의 역사가 한눈에 펼쳐집니다. 특히, 12대 심수관의 작품이 많이 보이지요. 도예촌에 들어서면 입구에 조선 갓이 내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심당길이 썼던 망건 조각을 가보로 아주 귀하게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오름가마를 보면 우리나라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고향을 잊지 않고, 조선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며 400년 넘게 조상이 물려준 성을 그대로 쓰고 조상이 물려준 물건을 아끼고 조상이 했던 일을 계속 지켜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 또한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00여 년 전 일본에 정착한 이삼평과 심당길. 그들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이 있었기에 일본은 세계적인 도자기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도공들을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고려청자, 청화백자, 백자와 같이 찬란했던 우리네 도자기산업은 내외부적으로 수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겨 다시금 새로운 도자기역사의 한 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에 참가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니면 9월 강진청자문화제도 괜찮을 듯합니다만….
“재택 장애아도 찾는 함·울·터 만들고 싶다” 유치원 특수반, 온돌 시설을 갖춘 장애 아동을 위한 생활체험적응실, 특수교육 종일반, 특수교육 보조원 지원, 장애아동을 위한 방과 후 교실…. 장애아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솔깃할 만한 조건을 갖춘 학교가 있다. 경기도내 최고의 장애아 학습시설을 갖춘 남양주 진건초(교장 박명숙)가 바로 그곳. 진건초가 통합교육의 산실이 된 것은 특수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온 이 학교 황승택 교감의 노력이 있었다. “아이를 위한 마음은 어떤 교사나 같습니다” “일반 교사라고 특수교육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 똑같이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죠.” 황 교감이 특수교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86년도에 3년 동안 특수학급을 맡으면서. “전공분야도 아니어서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들에게 ‘졌다’고 손을 들었죠. 장애아동은 자기 나름의 목표가 있어서 시도해보지 않고 ‘이거 이상은 못해요’라고 선을 긋죠. 그런 아이들을 달래서 한발 더 나아가게 해야 하는데 저는 아이들과의 기 싸움에서 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헌신적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황 교감은 2005년 3월 진건초에 부임하면서 그때 아쉬웠던 일들을 실천해나갔다. 학교 뒤쪽에 있던 특수반을 양지바른 본관 1층 교실로 이전했고, 교실 두 개를 터서 장애학생들이 편리하도록 온돌을 설치했으며 화장실을 교실 안으로 들여왔다. 또 교실 중앙에 교사의 자리를 배치해 아이들을 더 잘 보살필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나 둘씩 생각했던 바를 행동에 옮기면서 장애아동들만을 위한 치료·놀이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지난 4월 13일 개관한 생활적응 체험실 ‘함·울·터’는 황 교감이 1년여의 노력 끝에 이루어 낸 것이다. ‘함께 어울려 희망을 가꾸는 터전’라는 이름도 직접 지었다.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자신 있게 살아가는 사회가 되는데 학교가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함·울·터는 구리·남양주 교육청이 8600만원의 예산을 지원해 설립됐다. 장애학생들에게 다양한 치료교육과 생활적응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인공 암벽 타기, 전면의 거울을 이용한 신체 놀이, 음악·미술 치료를 통한 감각 표현, 이불개기, 빨래 등의 일상 생활체험, 의생활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 진건초의 장애아동은 모두 16명(저학년 8명, 고학년 8명). 평소에는 각 학급에서 다른 일반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주지 교과 시간에 특수학급에서 수업 받거나 함·울·터에서 생활한다. 특수교사 - 담임 간의 긴밀한 협의가 중요해 일반 교사인 황 교감의 눈에 비친 통합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처음 학교의 시스템을 보니 장애학생들이 원적학급에서 한 달 동안 적응 교육을 받더라고요. 특수학급 교사는 아이를 보내면 그만이고, 원적학급 교사는 갑자기 맡게 된 아이 때문에 당황하고, 아이는 한 달 동안 불편한 원적학급에서 기가 다 죽죠. 선생님들께 물었습니다.‘선생님이 먼저 아이에게 적응하는 게 맞는 순서 아닌가요?’하고요.” ''함·울·터''에서 신체놀이를 하고 있는 학생들.그는 장애 아동의 누적자료를 만들게 했다. 이 아이의 증상은 무엇이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학습적으로는 어떤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등을 상세히 적은 자료다. 진건초에서 이 자료는 통합·원적학급 교사는 물론이고 장애아동을 돕는 ‘또래 도우미’ 학생까지 숙지해야 하는 내용이다. 그런 후 자료를 토대로 특수학급에 원적학급 교사와 특수학급 교사가 모여 회의를 열게 했다. “누적자료를 만듦으로써 교사가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게 됐고, 특수교사와의 협의를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죠. 그러다 보니 더 긴밀한 협의가 이루어지고, 아이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이 밖에도 진건초 장애아동들은 누구나 컵스카웃, 걸스카웃, 해양소년단, 우주소년단 등의 청소년 단체에 가입해 이들과 함께 다양한 사회 활동을 체험하고 있다. “처음에는 담당 선생님, 학생과 학부모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소년단체의 본래 목적이 봉사와 나눔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 아니냐고 열심히 설득했습니다. 지금은 장애·비장애 학생들이 다 함께 운동회를 할 정도로 인식이 많이 개선됐습니다.” 황 교감은 앞으로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다. “학교도 못다닐 만큼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인근의 학생들도 함·울·터를 체험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 학생들도 함·울·터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학교, 친구들을 체험했으면 해요.”
BC 490년. 아테네의 밀티아데스는 아테네 북방의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 1만과 플라테이아군 1천을 이끌고 2만 5천여 페르시아군에 맞섰다. 페르시아의 기병이 주력군과 떨어져 있음을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측면을 공격한 후 포위하는 데 성공했으나 결국은 참담한 패배로 마라톤전을 끝냈다. BC 480년. 아테네해군은 8일 전 아테네를 정복하고 약탈한 페르시아군과 살라미스 해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역시 대패했고, 그로 인해 최초의 동양과 서양의 전쟁으로 운위(云謂)되기도 하는 페르시아전쟁도 10여 년 만에 막을 내렸다. 물론 사실은 그 반대였다. 그리스는 마라톤전과 살라미스해전을 값진 승리로 장식했다. 하지만 만약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에 패했더라면 고대 그리스의 역사, 아니 서양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서양문화의 뿌리, 고대 그리스 1820년대에 그리스인들이 400여 년에 이르는 오스만 제국(현 터키)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일으켰을 때 영국 시인 셸리는 “우리의 법률, 우리의 문학, 우리의 종교, 우리의 예술, 그 모든 것의 뿌리는 그리스에 있다. 그리스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직까지도 야만인과 우상숭배자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문화가 중국권 동양문화의 토대였다면 고대 그리스문화는 문자 그대로 서양문화의 뿌리였다. 영어 ‘music(음악)’과 ‘museum(박물관)’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Muse(뮤즈 : 제우스의 딸로서 시·음악·무용 등을 관장한 아홉 여신 중의 하나)에서, ‘January(1월)’가 Janus(야누스 : 두 얼굴을 가진 문의 수호신)에서 파생됐고 ‘uranium(우라늄)’이 Urania(우라니아 : 천문학을 관장하는 여신), ‘gas(가스)’가 Chaos(카오스)에서 유래한 것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징하는 철학, 호메로스의 서사시, 아이스킬루스와 소포클레스 등의 비극,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학,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제우스·아폴로·포세이돈·니케 신전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신전들, 비너스·니케·엘긴 마블스 조각들 등 이 모두가 후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BC 490년의 마라톤전과 480년의 살라미스해전에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가 패했을 경우 그 모든 것들이 존재했을까? 그 무렵 이란에서 발흥한 페르시아는 소아시아까지 진출했다. 페르시아의 서진(西進)은 영토 확장은 물론 지중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지중해는 오늘날도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지중해를 장악하는 세력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마라톤 신화 탄생시킨 마라톤전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가던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지중해 연안)의 그리스계(系) 폴리스들을 짓밟았고 BC 492년에 결국 발칸 반도에 침공했다. 하지만 태풍이 페르시아의 그리스 정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기원전 490년에 두 번째 원정을 단행했다. 페르시아는 에게 해를 건너 유베아 섬을 거점으로 삼고 한때 아테네를 통치했던 반역자 히피아스의 안내를 받으며 아티카 반도로 달려들었다. 아테네의 밀티아데스는 민회를 설득해 마라톤 평원에서 자웅을 겨루기로 했다. 9월 12일 마라톤 평원에 진을 친 아테네는 1만 명의 중무장 보병과 폴리테이아의 원군 1천명 등 1만 1천 명으로 2만 5천의 페르시아군을 맞아 사력을 다해 싸웠다. 대담하고 용의주도한 밀티아데스를 비롯한 10명의 장군이 그리스군을 지휘했다. 12일 새벽에 페르시아 주력군에 기병이 없음을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양 날개를 보강한 다음 적을 그리스군의 중심부로 밀어붙였고 결국은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당해 맹공을 받던 1만 5천 페르시아군은 급기야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아테네·폴리테이아군은 문자 그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역사학의 할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테네군은 192명이 전사한데 반해 페르시아측은 6400명이나 전사했다. 다리우스는 군대를 철수시켰고 더불어 2차 페르시아전쟁도 막을 내렸다. 마라톤전의 신화는 그로서 끝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때 전령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2.195㎞를 한숨에 달려 “기뻐하시오. 우리가 이겼소!”라고 말한 다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라톤전을 앞두고 페이디피데스가 원군요청서를 들고 스파르타까지 240㎞를 이틀 만에 달려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어쨌든 아테네인들은 마라톤전의 승리와 그 전령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의 올림픽경기에 ‘마라톤 경주’를 포함시켰다. 마라톤 경주는 근대 올림픽에도 채택되어 대미를 장식하는 꽃이 되었다. 아테네 해군, 그리스를 지켜내다 그러나 그리스 세계의 비극은 종결되지 않았다. 다리우스를 이어 페르시아의 황제가 된 크세르크세스가 36만여 대군-헤로도토스에 따르면 5백만이 넘었다-을 동원해 수륙양면으로 침공했다(BC 480). 200여 개의 폴리스(polis)로 구성된 그리스 세계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처지였다. 10년 전의 마라톤전 때까지도 뭉치지 못했던(당시 종교적 축제 중이던 스파르타는 축제도 축제지만 아테네가 승리해 그리스 세계의 패자가 되는 것도, 페르시아가 이겨 스파르타를 포함한 전체 그리스를 지배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어 아테네의 원군요청 수용을 주저했고 그 사이 아테네는 고군분투해 승리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힘을 합쳐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네만이 아니라 전체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상전은 그리스연합군의 완패로 끝났다. 스파르타의 팔랑크스(密集步兵)가 주력군이던 그리스연합군은 기원전 480년 8월 스파르타 국왕 레오니다스의 지휘 하에 테살리아 남쪽 테르모필레에서 적군과 혈전을 벌였다. 7천여 그리스연합군은 6일 동안 분투하며 버텼으나 결국 참패했다. 레오니다스와 그를 옹위하던 1천여 전사는 최후의 1인까지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서 말하라. 여기 누워있는 우리 스파르타인들은 적의 칼에 쓰러져 여기 잠들었노라고.” 후일 그곳에 세워진 비석의 한 구절이다. 해전은 아테네 몫이었다. 스파르타가 보수적 농업국이며 육군국이었다면 아테네는 개방적 교역국이며 해군국이었다. 지상전에 완패했으므로 아테네가 맡은 해전만이 그리스세계의 남은 한 가닥 희망이었다. “나무벽 안으로 피신하라”는 신탁(神託)을 쫓아 해전에 운명을 걸자고 주장한 인물은 테미스토클레스였다. 페르시아의 대형 겔리선 800여 척을 370여 척의 소형 3단 노(擄)겔리선으로 대적해야 했던 그는 큰 배에 유리한 대해를 피해 좁고 물살이 빠른 살라미스 해협으로 적선을 유인했다. 그리스의 운명이 걸린 기원전 480년 9월 29일. 소형이라 기동력에서 앞선 아테네해군은 11시간에 걸친 해전에서 완승했다. 아테네의 소규모 함선들이 단단한 뱃머리로 페르시아함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파괴하고 수병들은 적선에 뛰어올라 장창을 휘둘렀다. 페르시아는 300여 척의 전선을 잃은 데다 나머지 전선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아테네는 40여 척을 잃었을 뿐이었다. 12척으로 133척의 왜적을 좁고 물살이 빠른 울돌목으로 유인해 대승한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비교된다. 그리스연합군은 이어 벌어진 육전에서도 테르모필레에서의 패전을 되갚았다. 당시 페르시아육군은 테살리아의 동북부에서 아테네 부근의 플라테이아로 옮겨와 있었다. 스파르타군을 포함한 그리스연합군은 페르시아와 그 동맹국 테베의 군대를 꺾었다. 그때 테베 등 그리스의 일부 폴리스는 대국 페르시아에 붙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때 10만의 그리스연합군이 페르시아군과 싸웠는데, 아테네의 보병이 페르시아군을 패퇴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쟁 승리 후 찬란한 문명 꽃피워 살라미스해전에 이어 플라테이아에서도 패한 크세르크세스는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고, 10여 년에 걸친 페르시아전쟁도 끝났다. 전쟁을 주도한 아테네는 전후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크게 발전했다.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의 도전을 일축하고 지중해 제해권을 확고히 장악했으므로 아테네를 비롯한 폴리스들의 지중해 해상활동은 더욱 왕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후 최대의 번영기를 맞이한 아테네에서는 민주제가 확립되고 파르테논 신전이 재건되는 등 활기가 넘쳐흘렀다. 철학을 비롯한 학문과 예술이 만개한 것도 페르시아전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페르시아전쟁 50여 년 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전쟁 이후에, 즉 페르시아전 후의 번영기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세계가 몰락의 길에 들어섰을 무렵에 활동했지만 말이다. 페르시아전 후의 번영기 아테네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그때 아테네를 ‘그리스의 학교’라고 자랑했지만, 그리스 고전문화를 주도적으로 창조한 것도 아테네였다. 그리스 세계는 페르시아전쟁 후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해 결성한 델로스 동맹(BC 478)-아테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맹국의 동맹 탈퇴를 불허하고 동맹회비를 마음대로 사용하는가 하면 자국의 화폐를 동맹국 공용의 화폐로 만들고 동맹국들의 재판권마저 장악하는 등 동맹국들 위에 군림했는데, 사가들은 그것을 아테네의 제국화(帝國化)로 규정한다-과 스파르타가 주도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분열해 대립하다 결국 30년에 걸친 내전인 펠로폰네소스전쟁(BC 431~404)으로 무너지고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에게 병합되었다(BC 339). 그리고 20세에 마케도니아의 통치자가 된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그리스 세계를 괴롭힌 페르시아에 대한 응징이기도 한 동방원정에 나서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이르는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역사를 이룩하였다. 야만적 후진지역에서 벗어나 페리클레스의 말대로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학교였다. 아테네와 더불어 패권을 겨루던 군국체제의 스파르타는 그리스 고전문화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지만 민주체제의 아테네는 빛나는 고전문화를 창조했다. 그리스 문화하면 아테네고 아테네하면 그리스 문화를 생각하지 않는가. 하지만 마라톤전이나 살라미스해전에서 패했더라면 그리스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전쟁을 그리스인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전쟁으로 평했지만 패했을 경우 아테네는 자유를 자랑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기는커녕 생존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헬레니즘세계-로마’로 이어지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역사는 물론 고대 이후의 지중해 세계 역사도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은 세계사의 주역이 아니라 셸리의 말처럼 야만적 후진지역으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20년 이상 교육재정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문민정부 때 교육개혁위원회 전문위원으로서 교육재원 GNP 5% 확보과정에 참여한 일이며, 다른 하나는 국민의 정부 때 ‘교육재정 GNP 6% 확보를 위한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여 2000년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을 이끌어낸 일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마음속에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교육재원 확충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해왔지만 앞으로도 교육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교육재원 규모의 변화를 보면, 교육재원 GNP 5% 확보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1996년 이후 교육재원이 대폭 확충되었고,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1998년에 크게 삭감되었다가, 2000년 1월의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으로 2001년부터 다시 큰 폭으로 교육재원이 확충되었다. 2001년만 해도 2000년보다 무려 3조원 이상의 교육재원이 순증되었다. 교원정년 단축 때 발행했던 지방채의 상환과 7·20 교육여건 개선사업 추진, 중학교 의무교육 완성 등으로 교육재원의 수요도 늘었고, 2004년 이후 내국세 수입 감소로 교부금 증가율이 둔화되었고 교육세 결손이 누적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교육재원의 증가액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다. 최근 모 일간신문에서 ‘학교는 가난하다’는 특집기사를 연재한 후, 이어서 스쿨업그레이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기사를 읽으면서 ‘설마 이런 학교가 아직도 있겠는가, 아마도 기자가 특수한 몇몇 학교를 편견을 가지고 취재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가 본 후 마음이 달라졌다. 그 학교는 1993년에 ‘학교시설 현대화 시범학교’로 개교했던 학교였다. 불과 14년이 지났지만 학교 곳곳이 노후화되어 있음을 보고 20년 이상 지난 학교들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게 되었다. 학교에 정수기가 없어서 아이들이 매일매일 먹을 물을 집에서 가지고 간다. 학급에 그 흔한 청소기조차 없어서 교실 곳곳에 먼지 덩어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모노륨이 깔려 있는 교실 바닥은 얼룩으로 더럽혀진 채로 방치되어 있고, 책걸상은 긁히고 모서리가 닳아진 채로 놓여 있어서 도저히 21세기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학교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학교환경의 낙후성에 대한 문제와는 별도로 교육재원이 확충되어도 학교교육은 변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자주 듣는다. 학급당 인원이 60명에서 30명으로 감축되었어도 교사들의 교육방법은 별로 바뀌지 않았으며, 중등학교 교사들의 주당 수업시수가 24시간에서 18시간 내지 20시간으로 줄었어도 수업의 질이 높아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재원 확충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필자에게는 매우 당혹스런 비판임에 틀림없다. 교육재원은 계속 늘어나도 학교는 여전히 가난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육재원 규모와 학교교육의 질은 무관한 것인가?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아낼 시간적 여유는 아직 없었다. 다만, 교육재원 확충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여전히 가난하고, 교육은 변하지 않는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재원이 증액될 경우 증액분이 학교운영비에 반영되기보다는 교육청 차원의 목적사업비에 우선 반영되기 때문인 듯하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목적경비 비율을 낮추기 위해 이를 시·도교육청 평가지표에 반영하고 있지만 좀처럼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목적사업 대신 권장사업 등의 명목으로 학교운영비를 목적경비화시키는 관행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교육재원 증액으로 사업이 늘어나면 행정직원이 늘어나고 행정직원이 늘어나면 다시 사업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둘째, 학교예산 편성과정에서 교수·학습활동 예산에 대한 우선 순위가 뒤지기 때문이다. 가시적 효과가 적은 교수·학습활동에 예산을 많이 배정할 경우 사업성 예산이 줄어들어 달가워하지 않는 풍토가 아직 학교에 남아 있고, 교수·학습활동 예산이 많아져 예산 집행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바라지 않는 교사들도 있는 듯하다. 학교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연간 초등학생 1인당 학습준비물 예산은 5천원에서 1만 원 정도다. 학습준비물 예산이 교수·학습활동을 위한 예산의 전부는 아니지만, 학습준비물 예산 규모와 교수·학습활동의 범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교육재원이 아무리 늘어도 교수·학습활동을 위한 예산이 늘지 않으니 교육의 질이 높아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학교예산편성 관행이 바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청에서든 학교에서든 예산을 편성할 때 교육청이나 학교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예산에 반영된 사업이나 활동이 교육청과 학교의 존재 목적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한 번 더 고민해본다면 학교교육은 보다 빨리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교육재원의 확충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보다 당당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인간문화재 판소리 명창으로 유명했던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1907~1974)옹의 일화이다. 그가 만년에 병고와 외로움으로 시달릴 때, 몇몇 제자들이 찾아와 스승의 형편을 어렵사리 보살폈다. 그런데 지난 날 김연수 선생의 총애를 크게 입어 출세한 제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스승의 어려움과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찾아오기는커녕 도대체 안부 인사 한번 없었다. 주변에서 그 제자의 그릇됨을 탓하며, 선생에게 그를 불러 한번 호되게 나무랄 것을 재촉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동초 선생이 하셨다는 말씀이 걸작이다. “내 그 녀석을 불러 욕을 바가지로 해 주려다가, (혹시라도 내 욕을 듣고 뉘우쳐서) 그 놈 사람 될까 싶어서 그만 두었네.” 이쯤 되면 욕의 기술과 품격이 경지를 넘어선다. 직접 욕설을 건네지 않았으면서도, 훨씬 더 짜릿한 울림을 전한다. 판소리 명인다운 말의 경륜이 묻어 있다. 말[言語]이 주인을 제대로 만나, 그 장면에 마땅한 의미의 울림을 기막히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김연수 선생의 욕이 짜릿한 설득력과 지적 운치를 획득하고 있는 것은 그가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미 욕 자체로부터 저만치 벗어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수준의 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인상을 긁어대면서 거세고 할퀴고 질펀하게 내뱉는다고 해서 일품의 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욕이야말로 잘해서 본전이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욕은, 궁극에는 욕한 자신이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팔 걷고 거센 욕설로 해 붙일 때는, 내 입에서 나온 욕이 일견 상대를 향해서 통렬하게 날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욕이 고스란히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독하고 독한 욕설로 악다구니처럼 몰아붙여 상대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희열에 가득 찬 승리감을 맛보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내 안에서 나오는 스스로의 쓴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고약한 것은 자식 야단치면서 감정에 휘둘려 욕설을 퍼붓는 경우이다. “아! 나는 고작 이런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욕으로 얼룩지는 싸움에는 절대로 이기는 사람이 없다. 물론 얻는 것도 없다. ‘상처뿐인 영광’이라도 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오욕뿐인 상처’를 면하기 어렵다. 옆에서 구경하는 제삼자의 자리에서 보면 이 점은 더 명료해진다. 백이면 백, 다음과 같은 모욕적 평가를 피해 가지 못한다. “에이! 그 사람 욕하는 것 보니 못 쓰겠더라.” “두 놈 모두 다 똑같다 똑같아!” 그러고 보니 욕이란 망가지는 과정의 시발점을 제공한다. 흉하게 망가지지 않으려는 생각을 한다면, 욕에도 품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욕쟁이할머니들의 경우(특색 있고 맛있는 음식으로 식당을 하시며, 손님들에게 질박한 욕을 잘해서 유명해진 할머니들)에도 그 나름의 욕 철학은 있다는데,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될성부른 놈들에게만 욕을 한다’고 한다. 욕은 어디서 생겨나오는 것일까. 전혀 다듬지 않고 길들이지 않은 인간 본성의 언어가 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욕은 보기에 따라서는 질박(質朴)함의 매력을 준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張吉山)’에 나오는 그 푸짐하고도 조야함 그대로인 욕들은 원초적 자연으로서의 인간 본성을 읽게 해 준다. 교육이니 교양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으로부터 문화적 가공을 전혀 받지 아니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 문학적 의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리얼리즘 문학예술의 영역이고, 막상 구체적 교실에서 구체적 학생을 교육시키는 장면에서는 욕이 미화될 수 없다. 욕을 몰아내어야 한다. 욕은 분명 사람의 나쁜 본성과 결부된 것이고, 사람의 나쁜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바로 교육이기 때문이다. 욕은 원시적 욕구와 깊은 상관을 가진다. 욕구의 좌절이 욕을 부른다. 나는 만약 ‘욕의 나라’가 있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나라는 ‘교육의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욕의 사용은 문맹률과도 높은 관계를 갖고 있다. 문자(쓰기) 문화가 취약한 곳에 욕설이 기승을 부린다. 또 욕은 부정적인 면에서 가정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긍정적인 면에서 학교교육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교육적으로 상당한 진화를 해 온 셈이다. 치유 상담 전문가인 정태기 교수는 말한다. 사람의 모든 내적 상처의 근원과 불행의식 속에는 언젠가 그 사람을 할퀴고 갔던 누군가의 욕설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자랐던 50년 전 섬마을 가난한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어른이나 아이나 일상의 생활언어 자체가 거의 욕이었다고 말한다. 5학년 때, 의식 있는 젊은 선생님이 오셔서 일체의 욕설을 금지하는 강력한 지도를 하셨단다. 늘 생활언어처럼 사용하던 욕을 하지 말라니, 그 욕 안하기가 얼마나 불편하고 낯설었는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욕을 일체 쓰지 말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주고받는 말을 무조건 영어로 하라는 것처럼 어렵고 힘들고 낯설었습니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50여 년 전, 우리 농어촌 아이들이 겪는 언어생활의 평균적 모습이 이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아이들의 언어생활에서도 욕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정태기 교수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교육이 역할을 해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교육의 진화를 엿볼 수 있는 여실한 대목이다. 또 그만큼 우리 교육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욕하는 사회’를 조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욕먹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이다. ‘욕이 배따고 들어오나’하는 사회 심리의 풍조가 바로 그것이다. 스트레스 안 받고 살겠다는 전략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왠지 ‘자존(自尊)’의 가치를 스스로 팽개치는 것 같아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심리에는 ‘욕먹어도 돈만 많이 벌면 됐지’하는 천박한 물질 만능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까짓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 우리 모두 함께 천박해지자는 뻔뻔스러움이 끼어들어 있는 것이다. 철판같이 두꺼운 뻔뻔스러움이라 제법 강할 것 같지만, 의외로 약하다. 돈이 부리는 대로 온갖 망가지는 곤욕을 다 겪으면서도 막상 본인만 그것을 모르니 불쌍하기까지 하다. 근자 청소년의 욕 습관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영화를 꼽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영화에 조직 폭력을 다룬 영화가 약 10여 년 이상 일정한 흐름을 형성했는데, 그 중에는 학교와 조폭의 결합을 다룬 것들이 적지 않았다. 영화에서 욕들은 충동적 기제를 극대화 한다. 그리고 감정 배설의 도구로 쓰인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나쁜 본성’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욕은 모방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또 쉽게 상투적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지혜가 필요하다. 욕은 폭력이기 때문이다. 아니 욕은 폭력 이상이기 때문이다.
한국미의 특질에 대한 이해를 위해 폭넓게 다루어지는 대상은 바로 우리 멋의 세계이다. 우리의 멋은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무용 등 모든 예술 분야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멋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의 전통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 장점이나 특징을 제대로 느끼고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문제는 전통이나 한국적인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등을 모방하여 열심히 만드는 것이나 단청, 전통문양, 색동옷 등을 그리는 것이 곧 한국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미의 미학적 개념 규정한 혜곡 최준우 한국적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한국미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양식이 깊이 우러나는 것으로서 한국인다운 체취가 짙게 표현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유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한국미의 정체성(正體性)과 전통성을 일깨워 줘야 한다. 이러한 우리 아름다움을 연구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학문을 배운 미술사학자이며 미학자였던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1944)과 그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 미술사에 뜻을 두고 평생을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외길 인생을 살았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배흘림 기둥에 서서〉 저자)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일본 강점기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젊은 시절부터 조선예술에 남다른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노년까지 부단히 노력하며 조선미술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다. 고유섭과 야나기 무네요시는 같은 시대 사람으로 한국미술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도 동일대상을 두고 이해하는 미적 관점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를테면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공예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연구했는데 그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조선인에 대한 감상적인 동정론으로 한국미의 특질을 ‘비애의 미’로 판단했다. 그러나 고유섭은 우리 고유의 미의식을 탐구하기 위해 야나기 무네요시의 정신사적 미술사학에 관한 이론은 수용하고 적용하면서 조선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다만 유종열의 이론인 식민지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의 미를 비애의 미로 판단한 이론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최순우는 고유섭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지만 우리 문화의 특색과 장점을 현장체험 위주로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함 없이 미학적 개념들을 정리하고 또 그 개념들을 통해 한국미적 특질을 규명했다. 최순우의 학문이 우리 곁에 정답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한국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이려니와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쓴 필치와 아름다움의 특질을 분명하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태도에 가장 알맞은 형질미 한국미적 특질로는 백색의 아름다움, 곡선의 아름다움, 해학적 아름다움, 추상의 아름다움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미의 특질을 형성하는 배경에는 지리적 환경이나 역사적 환경 등 여러 요소가 있겠으나 우선 순리의 아름다움을 형성하는 요소로 자연환경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총면적의 75% 이상이 산악지대지만 산의 형상은 그다지 높지 않고 둥글며 평안하다. 이러한 아름다운 산과 맑은 하늘, 구비구비 이어지는 산과 조화를 이루는 강, 비옥한 농토 등 아름다운 강산을 지닌 자연환경은 한국인의 자연에 대한 애호나 순응성을 기르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담담하면서도 욕심 없는 선천적 성정을 지니게 했고, 그러한 성정은 곧 한국미의 특질을 만드는 근간이 되었다. 즉, 없으면 없는 대로의 재료, 있으면 있는 대로의 솜씨로 자연 속에 순응하는 순리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순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최순우는 ‘억지가 없는 아름다운 사물의 이치나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 아름다움’ 또는 ‘자연환경이나 자연의 태도에 가장 알맞은 형질미를 가늠할 줄 아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이것은 과분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했다. 또한 고유섭은 ‘무관심성’을 자연에 대한 순응의 논리로 입증했다. 이를테면 ‘무관심성’이란 건축의 경우 목재의 모양이나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적 굴곡을 그대로 사용하여 목재 본형을 그대로 양식에 구성해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옥의 추녀를 형성할 때 기교를 부리거나 계획적으로 깎아내지 않고 자연 그대로 구부러지면 구부러진 대로 굴곡이 있는 목재를 그대로 얹어 만들어내는 일, 자연 속에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잡아 자연과 건축을 일심동체로 만드는 일, 자연의 형질을 변화시키지 않고 생긴 모양대로 터전을 일구었던 논두렁 밭두렁의 모양 등은 원래 재료가 갖고 있는 자연성이나 자연환경과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무관심성’은 자연에 순응하는 섭리로 변화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람들처럼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모든 생활 성정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미술제작에 대한 순리적 자세는 작품의 착상이나 제작의 기발함에 무리함 없이 재료의 속성을 존중할 줄 알며 작품이 놓일 환경에 자연스럽게 순종하는 마음의 자세에서 이뤄진 것이다. 세계인에게 조화미 인정받은 ‘화성’ 한국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이나 외경(畏敬)은 주로 한국의 건축에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순리의 아름다움이란 건축이 이루는 조형미가 주위 환경과 얼마나 알맞고 적절한 조화를 갖느냐에 그 척도를 삼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건축은 경상북도 내동면 토함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석굴암과 불국사 굴원, 창덕궁 비원(秘院)의 부용당(芙蓉堂), 수원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나 화홍문(華虹門),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남강 촉석루(矗石樓)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의 건축은 인공의 자연스러움이 자연의 풍광을 도운 좋은 예들로서 자연에 관한 공경과 조심스러움까지 느낄 수 있는 표징(標徵)이기도 하다. 원래 한국 사람들은 집 한 채를 짓더라도 자연과 하나가 되게 세울 줄 아는 형안(炯眼)을 지닌 민족이었다. 조그만 정자 한 채는 물론 큰 누대(樓臺)나 주택에 이르기까지 뒷산의 높이와 앞, 뒷벌의 넓이 그리고 거기에 알맞은 지붕의 높이와 크기 등 자연과 인위의 조화미에 대한 특별한 안목으로 멋진 조형미를 나타냈던 것이다. 요사이는 집을 지으려면 대개 자연의 지형을 마구 헐어내고 깎고 돋우고 해서 자연 풍광을 훼손하고 학대하는 일이 예사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과거의 우리 민족은 결코 자연을 훼손하거나 거역하는 무모한 짓은 삼가는 슬기로움과 인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이 자연과 하나된 것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을 둘러보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성곽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건축물이 있다. 7개의 수문 아래로 옥수가 흘러내리고 수문 위에 놓인 다리 위에는 누각과 성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는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옥수의 흐름과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는 성곽의 기묘한 조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화성의 화려함은 화홍문과 어울린 방화수류정에 이르러 극치를 이룬다. 덤벙주초의 조형성 대표하는 농월정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한국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진주의 촉석루와 의암(義巖)은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품에 안고 자리 잡고 있으면서 자연과 충성이 하나되게 한 논개의 충절이 돋보이는 곳이다. 남강 속에 묻힌 의암과 그 강을 굽어보며 도도하게 벼랑 끝에 우뚝 솟은 촉석루는 자연과 하나가 된 건축물로서 천년 고도를 지킨 그 위상이 가히 으뜸이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보아도 야트막한 언덕이나 작고 낮은 시냇물 그리고 궁원(宮苑)을 돌아볼 수 있는 오솔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조화시킨 순리의 아름다움으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외에도 생긴 그대로의 절벽을 손상시키지 않고 바위 둔덕 위에 높고 낮은 자연 암석들을 적당히 의지해서 주초(柱礎)로 삼고, 꼭 필요한 곳에만 자연석을 옮겨 놓아 주초의 수를 채워 기둥의 길이를 여기에 맞추어 길게 또는 짧게 마름질한 ‘덤벙주초’는 실로 우리 민족이 분수에 맞추어 표현한 순리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자연 미감이라 할 수 있다. 경남 함양의 농월정(弄月亭)은 덤벙주초의 조형성을 잘 느낄 수 있는 대표적 누각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는 수려한 경관을 이룬 화림동 계곡이 덕유산 자락까지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5개의 정자가 그림같이 지어져 있는데, 특히 농월정은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옛날 우리 선조들의 풍류사상이 깃든 곳으로 함양을 찾은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필히 거쳐 간 곳이기도 하다. 맑은 물이 급한 굴곡을 이루는 곳에 커다랗고 평평한 바위, 즉 반석들이 편안함을 주며 자리 잡고 있다. 반석 위를 흐르는 물이 달빛을 받아 금물결을 이루는 이곳에 높고 낮은 반석을 있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세운 농월정은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화림동 계곡에 멋있는 정자가 많은 것은 예전부터 이곳에 자연을 사랑하는 선비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또 하나 이 계곡의 거연정도 주위 경관이 아름답고 흐르는 계곡물과 우거진 숲, 가설해 놓은 구름다리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 아름다운 풍광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게 하는 곳으로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