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처가에서 죽순을 가지고 왔다. 그것도 삶아서 껍질을 벗겨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해서 말이다. 해마다 이렇게 잊지 않고 보내주니 항상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오늘 아침 죽순을 맛있게 먹으면서 어릴 적 그 향수를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나는 외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외가 큰 대밭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대나무에 대한 추억과 애정이 많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비가 내린 후 아침에 대밭에 들어가 보면 온통 땅을 헤집고 올라온 죽순이 물기와 이슬방울을 머금은 채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우후죽순이란 말처럼 아침에 머리만 조금 내밀고 있다가도 저녁에 들어가 보면 몰라보게 자라있다. 이렇게 빨리 자랄 수 있는 것은 죽순이 4년 동안 땅속에서 가만히 속을 채워 작지만 대나무의 형질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5년째가 되면 잠에서 깬 듯 일어나 성장에 최적의 조건이 주어지면 그 순간 갑작스럽게 엄청난 속도로 자란다고 한다.
이렇게 자연은 말이 없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자신들이 해야 할 일과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외삼촌과 함께 대밭에 들어가 먹기에 좋은 통통한 죽순만을 골라 지게에 가득 꺾어와 사랑채 큰 쇠죽솥에 삶아 이웃 외가 친족들이 모여 함께 요리를 해 먹었던 기억들이 지금의 죽순 맛처럼 아련하다.
그렇게 큰 대밭이 대나무 마른 병에 걸려 죽거나 개발에 밀려 잘려나간 걸 보면 안타깝다. 그러나 그 추억들은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남아있어 행복하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답답할 때면 기억속의 그 길을 조용히 눈을 감고 걸어본다. 그 길이 내 마음속의 쉼터이다. 그리고 내 삶의 정서적 깨달음이 그 숲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렇게 조용한 시간이면 대밭속의 추억들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난다. 친구들과 대밭 속에서 먹이를 찾아 쫒고 있는 닭을 잡으러 뛰어 다니다 넘어져 다친 일이며, 한겨울 밤중에 대나무 숲에 들어가 손으로 밑에 떨어져 있는 까마귀의 말랑말랑한 배설물이 확인되면 그 대나무를 힘껏 흔들어 아래로 떨어지는 까마귀를 큰 빗자루로 덮어 잡아 무와 파를 넣고 까마귀온밥을 끓여 야식으로 맛있게 먹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쌀이 부족해서 나라에서 술을 집에서 담가 먹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조사가 나오면 집에 담근 술을 숨기기 위해 외할머니를 따라 대밭 깊숙이 그 무거운 술독을 들고 들어가 숨겨놓고 혹시나 들키지 않을까하고 애태우던 기억들 하나하나가 다 나의 소중한 추억이다.
사시사철 바래지 않는 대나무의 그 푸르름은 너무도 좋다. 세찬 바람 불어도 꺾일 듯 꺾일 듯,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함부로 꺾이거나 쓰러지지 않는다. 욕심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지 않고 자신의 속을 비우고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침없는 대나무의 꿋꿋한 기품은 군자의 상징이다. 녹색이 주는 안정감과 사각 사각 쏴- 하며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 자연의 이 소릴 들으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 진다. 나의 삶속에 그들이 있어서 즐겁고 덜 외로운지 모르겠다.
이렇듯 식물 하나하나 마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독특한 의미를 알고 나면 자연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신사임당 주위에 자라고 있는 오죽들아, 아프지 말고 잘 자라 우리 백합인 모두의 가슴속에 사시사철 바래지 않는 푸르름과 절개를 그리고 파란 하늘을 향한 꿈을 꽃피워주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