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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국립 사대 윤리교육과 85학번인 선배 K씨의 꿈은 당연히 선생님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키워온 선생님의 꿈을 아직까지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임용대기 상태로 발령을 기다리던 그는, 1990년 ‘국립 사범대 졸업자 우선임용 위헌(違憲)’이라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몇 명 뽑지도 않는 임용시험에 매달릴 형편이 못된 그에게 그야말로 험난한 인생살이가 시작됐다. 가족들 볼 면목은 둘째 치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해 학원 강사, 학습지 선생님 등을 전전했다. 작은 보습학원을 운영하는 같은 처지의 남편과 결혼해 아이 낳고, 이럭저럭 살다보니 어릴 적 꿈은 그야말로 박제된 꿈이 돼 버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 란에 ‘선생님’을 적으며 좋은 선생님을 다짐했지만 이제는 정말 그 꿈을 접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러던 그에게 다시 한 번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해 정부가 국립 사범대 미임용자에게 교대 특별편입을 허용한 것이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대학 새내기가 된 기분으로, 그토록 꿈꾸던 선생님에 한 발 다가선 기쁨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교대의 수업 분위기는 일반 대학과 달라, 대충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다. 자연 생활은 남편의 몫이 됐다. 틈틈이 돕던 학원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아이들 학교 보내는 일은 시부모님이 맡았다. 그러기를 1년, 그의 꿈에 다시 암운이 드리웠다. 임용시험에서 교대 특별편입생만 별도의 정원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 교대생과 똑같이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한 것이다. 선발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K씨를 비롯한 전국의 특별편입생 500여명은 수업을 거부한 채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교육부가 2004년 1월 국립 사범대 졸업자 중 교원미임용자 임용 등에 관한 특별법을 통해 2006, 2007년에 각각 500명의 미발령 중등교원 특별정원을 확보했는데 교대 특별편입생만 별도 정원 없이 공개 경쟁하라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공개경쟁인 것을 알고 편입했는데 지금 와서 특별정원과 별도 시험을 요구하는 것은 억지”라고 반박했다. 수업거부는 장기화되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교육부와 교대 측은 특별편입생에게 특혜가 될 수 있는 어떤 계획도 마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정부종합청사 후문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시위를 하는 K씨는 많이 지쳐보였다. 중견교사가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K씨의 힘겨운 삶은 우리 교육계의 쓸쓸한 단면이다. 그는 “잘못된 교원정책이 나의 꿈을 앗아갔다”고 원망했다. 어느덧 2006년도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남겨놓고 있다. 꿈을 이루지 못한 K씨를 보며 꿈을 이룬 선생님들을 생각한다. 선생님들이여~. 이미 이룬 꿈에는 꿈이 없는가, 이미 이룬 꿈에 더 큰 꿈을 보태고 싶지는 않은가. / 이낙진 leenj@kfta.or.kr
우리 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과 우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도대체 대학입시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모르겠고, 대학을 나온다고 해도 직장을 찾을 수 있을지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불안은 소위 교육 엑소더스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금년 들어 매일 2000여명이 외국 유학을 떠났으며, 지난 여름방학 때는 한 학급 35명 중 10여명이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학교도 있다고 한다. 과연 우리 교육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우리 국민들을 이토록 불안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필자는 교육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교육부총리의 잦은 경질이 그 불안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 김진표, 김병준, 김신일 부총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모습은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부가 아무리 일관성 있는 교육정책을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교육의 수장이 바뀌는 현상 그 자체가 교육정책의 변화로 비치기 때문이다. 이해 당사자들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교육문제도 국민들을 불만스럽게 한다. 국민들은 학교교육만으로 대학입시 준비를 끝내려고 하지만 대학은 고교성적을 믿을 수 없다하고, 고교는 대학이 평어만 반영하니 쉽게 출제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교사들을 엄정히 평가하여 실력 없고 불성실한 부적격 교원을 가려내야 한다고 주장하나, 전교조는 교원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반발한다. 일반 공무원에게는 철저하게 시행되고 있는 성과급제도도 교원에게는 적용해서는 안 된다며 반납하는 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으로 논의되는 사학법 개정이나 고교평준화제도, 개방형 혁신학교와 자립형 사립학교, 외국어고 지역제한, 사교육에 의존하는 대입논술, 점점 커지는 계층간․지역간 교육격차, 식을 줄 모르는 사교육 열풍, 전교조의 편향교육, 성인 사회를 닮아가는 학교폭력, 부실한 대학교육과 국공립대 법인화 문제 등은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국가의 존망과 국가경쟁력 강화의 성패가 교육을 통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잘못된 관행은 과감히 혁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는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는 교육정책을 펼쳐야 한다.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부터 투명하고 신중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교육현장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정책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원들이 기꺼이 동참하게 된다. 교원들이 신명나게 동참할 때 그 정책은 성공한다. 그리고 일단 확정된 정책은 끈기를 가지고 빈틈없이 추진되고 환류 되어야 한다. 추진과정에서 다소의 문제점이 드러나도 보완해 가면서 일관성 있게 추진되어야 한다. 둘째, 교육에 있어서 선의의 경쟁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교원의 경쟁력, 교육의 경쟁력은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진다. 고교평준화 정책도 이제 대폭 손보아야 한다. 수월성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나라밖에선 경쟁이 일상화되어 있는데, 국내 교육에 있어서는 경쟁을 타부시하는 모순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지역특성을 살린 교육을 위해 주민직선에 의한 교육자치를 활성화하고, 단위학교에 자율재량권을 최대한 부여하여 학교 간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교원평가도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느슨해진 교직사회를 정비해야 한다. 셋째, 유․초․중․고․대학 간 긴밀히 연계된 교육정책이 필요하다. 유치원에서 영어교육이 시작되었는데 초등학교 1, 2학년에서는 교육과정에도 없다. 초․중등교육이 체험중심의 인성교육을 강조하고 있는데 상급학교 입시는 교과성적이 좌우한다. 의사소통중심 영어교육이 강조되고 있는데 대입수능시험은 독해중심이다. 학교 간 학력차가 큰데 학교 간 선의의 경쟁을 부추길 국가수준의 평가도 없다. 이런 문제점은 학교급간 연계체제가 미흡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넷째, 우리 사회를 이끌만한 건전한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러한 가치관은 학생들에게 항상적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불법적인 찬조금이 존재하는 한 학교에 대한 믿음은 없다. 학교현장이 특정 교원단체의 편향교육으로 점철되어서는 더더욱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이것이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을 바람직한 교육경쟁으로 유도하고 국가경쟁력으로 승화시켜 국가를 살리는 희망의 길이다.
좀처럼 베스트셀러가 나오기 힘든 인문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책이 있다. ‘국어에 관련된 책은 재미없다’는 상식을 깬 (유토피아·이하 국밥)가 바로 그것. 이 책은 두 명의 저자가 오랫동안 편집과 번역 일을 하면서 느꼈던 한국어의 ‘뉘앙스 차이’를 분석한 것이다. 다음 글을 읽기 전에 우선 당신의 국어 실력도 테스트 해보자. ‘엉덩이’와 ‘궁둥이’의 차이를 아는가? ‘가족’과 ‘식구’, ‘뜰’과 ‘마당’, ‘고맙다’와 ‘감사하다’는? 같은 의미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각각 달리 써야하는 말, 그것이 뉘앙스 차이다. 내달부터 본지에도 이 뉘앙스 차이에 관한 연재를 시작할 두 명의 저자를 만나 ‘한국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이 출간되자 마자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인기비결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김철호 “‘한국어 뉘앙스’라는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소재를 다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일방적으로 서술하고 가르치기 보다는 문제-풀이-답을 통한 구성으로 독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다른 국어 관련 책들과 차별화 한 것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책과 관련된 독자평을 보니 ‘국밥이라 그런지 술술 잘도 넘어 간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국밥 한 그릇’, ‘한 끼만 먹어도 든든한 국밥’ 등 제목과 관련해 재미있는 댓글들이 많았습니다. 제목은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김철호 “도서출판 느린 걸음에 있는 선배가 사석에서 제안해준 제목입니다. 제목을 듣는 순간 첫 느낌이 좋았고, 이름에서 뾰족한 주장, 혹은 상식을 뒤집는 효과가 느껴져서 주변의 반대도 불구하고 선택했습니다. 또 영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는 요즘 세상에서 국어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한국어의 뉘앙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김철호 “오랫동안 편집자, 번역자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는 한국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어느 경우에 이 표현이 맞을까?’, ‘이런 경우에는 저런 표현이 적용되는데 그 이유는 뭐지?’ 등 그동안 늘 품어왔던 의문들을 직감이 아니라 원리로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 한국어 낱말들의 뉘앙스 해설을 시도한 것을 보게 됐어요. 외국인을 위한 사전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뉘앙스 차이’라는 아이디어를 얻게 됐죠.” 김경원 “뉘앙스 차이에 대한 관심보다 평소에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번역가로서 글을 많이 쓰다 보니 언어에 대한 엄격함이 베인 것이었어요. 그런 노하우를 출판을 하거나 대중들에게 알린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좋은 기회를 만난 것 같습니다. 김철호 씨한테 한국어의 뉘앙스 차이에 대한 얘기를 듣고 금방 이 떠올랐어요. 홋카이도 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생활을 할 때 지인께 선물 받았는데 일어를 공부하면서 외국인이기 때문에 느낀 한계를 말끔히 해소해줬어요. 책의 첫 장부터 제가 너무 알고 싶었던 낱말의 차이를 서술해주고 있어서 굉장한 매력을 느꼈죠. 또 그 책이 2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보고 일본인들의 자국 언어에 대한 큰 관심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을 읽을 때, 쓸 때 항상 궁금해 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뉘앙스 차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모르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도 궁금증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김경원 “궁금했는데 설명을 찾기 어려운 것은 우리나라의 사전 문화가 다양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또 막상 사전을 찾아도 이 낱말은 저 낱말로, 저 낱말은 이 낱말로 풀이하는 식이 많아서 아쉬운 게 현실이죠. 우리나라는 국어대사전에 대한 문제제기도 많을 뿐 아니라, 문화수준에 비해 사전문화가 발달해 있지 않아요. 같은 ‘뉘앙스 사전’을 비롯해서 ‘거꾸로 찾는 사전’, ‘어미 조사 사전’, ‘어원사전’ 같은 여러 종류의 사전이 나와서 많이 알려졌으면 해요. 다양하게 발달할수록 말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지고, 그러다보면 말을 기초로 한 여러 가지 문화 콘텐츠들이 더욱 발전하게 되거든요.” -책에서 ‘국어’나 ‘우리말’보다는 ‘한국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하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경원 “‘국어’라는 말을 쓰는 나라는 한국, 일본 정도뿐입니다. ‘국어’는 식민지시대에 널리 쓰였던 말이에요. ‘나라의 말(國語)’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국 중심적이고 배타성을 지닌 단어입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죠. 모국어 사랑은 좋지만 지구촌시대가 된 지금, 외국인이나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어를 쓰지 않는 여러 타자를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는 ‘국어’보다 우리 언어를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단어죠.” -정말 국어가 밥 먹여주는 시대가 왔다고 보십니까? 김철호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은 신입사원의 가장 부족한 능력으로 ‘영어’보다 ‘국어’를 더 많이 꼽습니다. 영어 업무를 잘 하는 사람도 정작 국어로 보고서를 쓸 때는 표현력과 창의적 언어구사력, 논리력 부족을 드러낸다고 해요. 이런 현실 때문인지 최근 들어 인재 선발 기준으로 한국어 구사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늘고 있습니다. 국어 실력이 진학과 취업에서 중요한 시대가 온 것이죠. 국어를 올바로 이해하고 제대로 사용하는 능력은 어느 분야에서든 업무 능력의 기본이 되고 논리적 사고력의 기초가 됩니다.” -한국어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김철호 “우리가 항상 쓰고 있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은 ‘말’ 자체에 대해 의문을 많이 가지고 생각해보세요. 물고기는 자신이 물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숨을 쉬며 살지만 물을 의식하는 순간 강력한 충격을 받게 되겠죠. 그리고 나면 시야가 확 넓어질 거에요. ‘말’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 객관화 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경원 “무엇보다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해요. 그 중에서 부모가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죠. 요즘 맞벌이 부부들은 정말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데 아이들에게 그냥 읽는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책을 손에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 몸 가까이에 항상 책장을 두고, 서점에 많이 데려가고, 책과 친근하게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책에 대해 대화를 하십시오. 책을 읽는 것과 그것을 생각으로 만드는 것은 다르니까요.” -한국어를 잘 알기 위해 아직도 노력하는 일이 있다면. 김철원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동음이의어를 통한 말장난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너는 무슨 띠니?’라는 질문에 ‘나는 토끼띠’, ‘나는 파란 띠’라고 대답하는 말장난입니다. 이런 것은 말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게 돼서 언어감각을 기르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김경원 “모르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안 찾아보면 잠도 못잘 정도죠.” -논술은 중요해지고 있는데 학생들이 아주 기본적인 글쓰기 훈련도 안 돼 있어 고민이라는 교사들이 많습니다. 김경원 “아이들의 글쓰기 문제에서 인터넷을 빼놓을 수 없어요. 특히 요즘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이미지, 영상 문화 문제가 심각해요. 이미지로 한 번에 보니까 읽지도, 쓰지도, 생각하지도 않거든요. 그러니 출판문화는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어요. 아이들이 시각매체와 문자 매체를 어떻게 조화롭게 받아 들여야 하느냐에 대해 선생님들께서 평소에 문제의식을 가져주셨으면 해요” 김철호 “맞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언제나 접할 수 있는 시각매체는 무의식중에 빠져버리는 속성 때문에 상상력을 제한합니다. 또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무분별하고 엄청난 양의 정보들은, 좋은 정보를 조직화해서 쓸모 있게 만드는 사고력을 저해하죠. 문자, 글은 고도의 추상적이고 상징화된 기호라서 생각하는 힘이 중요한데 말이죠.” 김경원 “인터넷에 떠도는 글 자체가 제한적인 어휘만 사용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상력을 차단하기도 해요” 김철호 “인터넷에서 깊이 있는 글을 찾기 힘든 것도 그 때문이에요. 심도 있고 밀도 있는 활자 매체에 비해서 가볍고 짧고 단순하며 대중적이죠. 인터넷 폐해 중에서 게임이 가장 심각합니다. 게임 개발자들이 상상해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든요. 아이들 스스로 상상하고 생각하는 훈련을 어렵게 만들어요. 사고력을 통해서 아이들의 언어 능력이 정밀해 지는데 바로 이 생각하는 힘을 떨어지게 하죠. 심각한 문제입니다.” 김경원 “사고의 최종 목적지는 글이에요. 선진국에서 학생들의 에세이를 중요시하는 것을 봐도 글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느 나라나 공통된 인식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의 글쓰기 문제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김철호 “글쓰기 훈련을 위해서는 이태준 선생님의 책 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다상량, 많이 생각하는 것이 우선이죠. 언어자체가 사고의 도구이고, 사람들의 생각은 글을 통해 집적되고 전수되며 전파되거든요.” -일선의 교사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김철원 “학교 다닐 때부터 아쉬웠는데 국어를 비롯한 모든 과목을 지도할 때 단어, 낱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주셨으면 해요. 전치사에 대해 배운다면 ‘전치사’는 앞 전(前)자에 놓을 치(置)자를 써서 어떤 단어 앞에 놓인다는 말이고, 그래서 명사나 대명사 앞에 놓인다고 단어부터 개념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죠. 개념 명확히 알려주면 학생들의 언어 감각도 키워지거든요.” | 이상미 smlee24@kfta.or.kr --------------------------------------------------------------------------------------- 김경원, 김철호 저자는 서울대 국어국문과 동기로 학생시절 ‘인문대 문학회’ 동아리 활동을 같이 했다. 김경원 전임연구원은 여러 문예지에 문학평론가로 활동했고 일어 및 영어 번역가로서 , , 등을 한국어로 옮겼으며 현재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 김철호 교수는 민음사에서 편집자 생활을 시작, 정신세계사, 월간 작은이야기 편집장, 나무 심는 사람 주간 등을 거쳐 현재 도서출판 유토피아 대표와 한국출판인회의 부설 sbi 교정교열과정 교수를 맡고 있다.
또래 리더로 구성된 약물예방단 올 2월 충남도교육청으로부터 2년간 약물예방교육 시험학교로 지정된 전의중의 약물예방활동이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중학생들에게 약물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고 흡연, 음주를 하던 학생들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으로 예방교육을 하기 전에 비해 흡연율이 80% 감소했다. 전의중 약물예방활동의 특징은 또래 리더를 활용한 '여중생 약물예방단'을 구성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또래 집단(peer group)은 비슷한 나이의 어린이들이 주로 놀이를 중심으로 형성한 집단을 말한다. 이 집단의 특징은 같은 집단의 구성원 간에 서로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음주, 흡연을 하게 되는 동기는 대부분 호기심이나 친구의 유혹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또래 리더를 통해 약물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어 약물 오남용을 예방하는 데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전의중에서는 지난 4월 학급별로 여학생 2명씩을 선발하여 안승미(3학년) 양을 단장으로 '또래 리더 여중생 약물예방단'을 구성하여 발대식을 갖고 본격적인 또래 리더 양성에 나섰다. 학교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연기군 청소년지원 센터의 '찾아가는 상담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 총 14시간 동안 상담기법에 대한 교육을 하였다. 또 6월에는 2박 3일간 '또래 리더 여름 캠프'를 실시했고, 개인별 자료집 제작, 약물의 해독성 실험 등의 시간을 통해 약물예방 리더로서의 자질 향상에 힘쓰고 있다. 또래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장미지(3학년) 양은 "리더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다"며 "약물에 대한 피해를 친구들에게 알기 쉽게 말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가서도 약물예방에 대한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의욕을 불태웠다. 약물예방단의 상담기법 교육을 위해 학교를 방문한 연기군 청소년지원 센터 안철현 상담원은 "아이들이 대표성을 갖고 있어서인지 수업에 참여하는 열의가 대단해서 큰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참여 위한 다양한 행사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정기적으로 여는 '약물예방의 날 행사'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올해에는 총 5회에 걸쳐 실시되었다. 교과와 연계한 활동인 '약물예방 글짓기 백일장(산문, 시, 논술)', '약물예방 표어 만들기', '약물예방 4행시가 있는 예쁜 엽서 만들기'(국어교과), '약물예방 만화 및 이미지 공모전', '약물예방 포스터 공모전'(미술교과),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음악교과) 등과 '약물예방 정보사냥 대회', '약물예방 골든 벨' 등의 행사를 가졌다. 전학생이 직접 참여하고 수업 위주가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의 호응이 좋다. 특히 음주, 흡연 경험이 있는 학생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 글짓기 백일장에서 금상을 받아 학교 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금상을 받은 학생은 글을 통해 "흡연자가 금연을 한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의 태도와 눈빛을 보고 도와줘야 한다"며 "체벌이 아닌 대화와 상담이 금연의 비결이기 때문에 주변의 관심이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또 행사가 1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토요일의 독서방송 '운주골 메아리'를 통해 백일장에서 발표된 글을 소개하고 있다. 전문적인 지식 갖추는 것이 목표 불과 9학급에 불과한 면소재지의 작은 학교에서 이 같은 활동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 특히 행·재정적인 뒷받침이 적기 때문에 활동을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전의중의 교사들이 함께 힘을 모았고, 조금씩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표 교장은 "업무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담당 교과에 상관없이 학교일에 열심히 참가해주는 선생님들 덕분에 약물예방 교육이 효과를 보는 것 같다"며 "250여명 학생들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학생들에 대한 헌신도가 높다"고 자랑했다. 학생들의 금연을 위해 가정방문으로 학부모를 설득하여 직접 금연침을 맞도록 하고, 담배 판매점을 찾아다니며 업주들을 설득하는 강호구 학생부장은 시범학교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약물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어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미 경험이 있는 학생들에게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도와줘야 한다"며 "지난 1년간 약물예방교육을 한 후 이젠 아이들이 약물이라면 지겹다고 하소연을 하니 이것도 교육 효과 중 하나일 것"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전의중에서는 2007년에는 좀 더 심화된 예방교육을 계획하고 있다. 또래 리더가 준(準) 상담원으로서 역할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새로운 또래 리더에 대한 선발 및 교육에도 충실할 예정이다. 또 학교교육과정의 탄력적인 운영으로 다양한 약물예방 연수 및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교사와 학생들이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도록 준비 중이다. | 엄성용 esy@kfta.or.kr
2005년 말 황우석 박사의 '가짜 줄기세포 파동'으로 우리 사회는 한바탕 진통을 겪었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육계도 교원평가제 시범 실시 강행, 여당의 날치기로 개정된 사학법 등으로 먹구름이 낀 채 새해를 맞이했다. 사학법 개정 논란 해결 어려울 듯 지난해 12월 9일 열린우리당은 몸싸움과 욕설을 감수하면서 사립학교 이사와 감사 일부를 학교운영위원회나 대학평의원회가 추천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인 사학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법 개정을 막지 못한 한나라당은 국회 등원을 거부한 채 장외집회에 나섰고, 사립학교에서는 신입생 거부라는 초강경 대책을 마련했다. 올 1월초 제주도의 사립학교들이 실제 신입생 배정을 거부하였으며, 2월 23일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추기경으로 임명된 정진석 대주교도 사학법의 재개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표적감사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학비리를 척결한다며 전국의 모든 사립학교를 감사하겠다고 발표했고 신입생 배정 거부는 철회됐다. 또한 장외투쟁에 나섰던 한나라당도 사학법 재개정 논의를 전제조건으로 장외 투쟁을 풀고 2월 1일 국회 운영에 참가했다. 그러나 재개정 논의는 소위 '등(等)' 논란 등 여야의 양보 없는 대치로 끊임없이 공전만 거듭하다 7월 1일 개정 사학법이 시행됐다. 개정 사학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재개정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사립학교의 자율성을 해친다는 것과 사학 비리를 감시하는 데 최소한의 조치라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는 이 논란은 결국 해결되지 못한 채 새해에도 계속 쟁점이 될 전망이다. 교육혁신위의 무리한 혁신 2003년 7월 대통령 자문기구로 출발, 현재 2기가 활동 중인 교육혁신위원회(위원장 설동근, 이하 혁신위). 혁신위는 교육혁신에 관한 방향정립과 개혁방안을 마련해 우리나라가 지식 문화강국으로 도약하도록 하기 위한 목표로 설치됐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와는 반대로 혁신위에서 내놓는 방안들은 언제나 큰 논란을 가져왔고, 올해도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지난 8월 11일 혁신위는 교원양성-연수-교장임용제도 개선안을 골자로 한 교원정책개선방안을 발표했다. 교육력 제고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방안이 발표되기 이전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교육경력 15년 이상의 교원 및 교육공무원은 교장자격증 소지 여부에 상관없이 교장 공모에 참여할 수 있는 교장공모제의 도입은 교육계의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총은 교장 자격증 없는 교장은 학교 경영의 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며, 반면 전교조는 무리한 승진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찬성하고 있다. 또 동료 교사에 의한 다면평가 방안도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반발을 사고 있다. 혁식위의 이와 같은 행보는 혁신위의 능력을 의심하게 한다. 이미 6월 9일 교원정책개선특별위원회(교원특위)에서 '보직형 교장공모제'가 위원들의 투표 결과 반대로 인해 폐지된 상황에서 두 달 만에 다시 교장공모제를 발표함으로써 신뢰를 잃고 있다. '혁신을 위한 혁신'이 아닌 '목적에 맞는 혁신'을 이루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잇따르는 교육관련 단체 창립 올해는 교육관련 단체의 창립이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1월 23일 전국 초·중·고 교사 65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뉴라이트교사연합(상임대표 두영택 전국중등교사회 회장)이 창립대회를 가졌다. 뉴라이트교사연합은 '자유경쟁 교육'을 핵심 이념으로 내세우는 순수 교사연합회이다. 사학법 개정으로 진통을 겪고 있던 당시 상황에 맞춰 많은 정치인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뉴라이트교사연합 창립에 앞서 1월 9일에는 '자유교원조합(자유교조)'이 창립위원회를 조직했다. 자유교조(위원장 이평기 경기 한광여고 교사)는 준비과정을 거쳐 4월 22일 대전에서 전국조직 창립기념대회를 열어 전교조, 한교조에 이어 세 번째 교원노조단체로 탄생했다. 자유교조는 창립위원회 조직 당시부터 "전교조의 사상과 이념에 반대한다"고 밝혀 전교조로부터 "건강한 교원조합이 아니고 배후가 의심된다"는 발언을 들었고, 이에 대해 전교조와 한만중 전교조 대변인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또 좌파적 역사인식이 반영된 역사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달리 우파적 역사인식이 담겨 있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2월 출간되자 이 책을 현대사 교재로 삼겠다고 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교원단체 뿐만 아니라 학부모 단체도 만들어졌다. 지난 9월 22일 창립대회를 연 '뉴라이트학부모연합(상임대표 김종일)'은 통제 위주의 교육정책과 전교조의 편향성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이 주도하고 있다. 뉴라이트학부모연합은 서울, 부산 등 전국 16개 지부를 두고 있으며 회원은 1만 5000여 명으로 각 지역 대표의 대다수는 학교운영위원장협의 회장이다. 또한 7월 26일에는 '교육선진화운동본부'가 발기인 대회를 갖고 "교육정책의 역주행을 막겠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한편 지난 7월(울산, 제주 제외)과 8월(울산)에는 제5대 교육위원 선거를 통해 139명의 교육위원이 선출됐다. 9월 1일 개원을 통해 새롭게 출발한 교육위원들은 앞으로 4년간 활동을 하게 된다. 쓸쓸한 생일 올해로 25회를 맞이한 스승의 날. 이번 스승의 날 기념식은 8년 만에 정부와 교원단체가 공동으로 개최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하지만 5월만 되면 되풀이되는 촌지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전국 초·중·고 학교의 약 70%가 스승의 날을 재량휴업일로 정해 대부분의 학교가 문을 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지는 것이 교육이라고 하고, 그 중심에 교원들이 있다는 말로 한껏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에게 5월은 오히려 힘이 빠지는 시기가 되고 있다. 특히 스승의 날이 지나고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북 청주 시내 한 초등학교 여교사가 학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는 장면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면서 교육계는 큰 시름에 빠졌다. 비록 학부모가 사과를 했다고는 하지만, 교권이 무릎을 꿇었다는 한탄이 나오면서 교원들은 여러 가지로 힘든 5월을 보내야 했다. 점심 도시락의 추억(?) 지난 5월 발생한 '무릎 꿇은 여교사' 사건의 발단은 학교 내 부족한 급식시설이 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점심을 먹도록 하기 위해 급식지도를 하던 과정에서 일부 학부모들이 항의를 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대다수의 학교에서 급식을 하게 되면서 급식은 종종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6월 발생한 급식사고는 학교급식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CJ 푸드시스템이 급식을 납품하는 학교 중 서울과 수도권 지역 23개교에서 집단 식중독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고로 서울, 인천, 경기, 강원, 대전 지역의 초·중·고 68개교에서 학생 7만여 명에 대한 학교급식이 중단됐다. 이로 인해 해당 학교 학생들은 도시락이나 빵, 우유 등을 준비하는 등 큰 불편을 겪었다. 사고 이후 국회에서는 학교급식법 개정안을 통해 모든 학교에서 급식을 직영화 하도록 했다. 그러나 사고의 원인 규명은 끝내 실패했고, 무리한 법 개정으로 시설을 갖추지 못한 학교의 학생들은 여름방학이 끝나서도 도시락을 갖고 다녀야 했다. 도시락을 갖고 등교하는 것이 낯선 아이들에게 이번 사고가 어떻게 기억될까? 교원평가도 현재 진행형 2005년 11월 48개의 시범학교에서 시작한 교원평가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지난 3월과 9월에 교육부는 교원평가 시행 결과를 발표했지만 결과 발표가 졸속으로 진행되면서 많은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교육부는 올해 법제화를 추진하면서 67개 학교에서 시행한 교원평가 대상학교를 내년부터는 500개로 늘리고 2008년도부터는 모든 학교에서 교원평가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교총, 전교조를 비롯한 교원단체의 반대와 평가 결과를 인사에 반영해야 한다는 학부모 단체의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 교원평가에 대한 전반적인 찬성 여론이 우세하지만 불과 두 번의 시범 실시 이후 문제가 없다고 하는 교육부의 태도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9월에 교원자격이 박탈된 무자격 교사가 6년여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다 해임된 사건도 대책없이 정년 감축을 시행하여 나온 결과이다. 충분한 논의가 없으면 문제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 엄성용 esy@kfta.or.kr
*류복기가 1615년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기양서당* 최효찬 | 저자, 비교문학 박사 지식시대를 맞은 요즘 기업경영에서는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적 리더십이 퇴조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적 리더십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리더십의 권위자인 진 리프먼 블루먼은 인재를 중시하는 리더십으로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들고 있다. 관계 지향적 리더십은 다른 사람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돕는 데 보람을 찾는다. 특히 이 리더십은 사회가 경쟁 지향적으로 되면서 실종되다시피한 덕목인 상호의존성과 사회적 관계성을 중시한다. '엄마형 리더십' 실천한 선조들 관계 지향적 리더십에는 협력형, 헌신형 그리고 성원형 스타일이 있다. 협력형 스타일의 사람은 팀을 구성해 협력하며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헌신형 스타일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데서 만족을 얻는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데서 진정한 만족을 찾는 것이다. 성원형 스타일은 사실 다른 사람의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은 성취감을 북돋워 주거나 고무한다. 그들은 스승처럼 조언을 하거나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자신이 동일시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업적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는다. 기업에서도 이러한 유형의 리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고 고도의 조직 통합력을 이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 지향적 리더십은 특히 창업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성장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하겠다. 명문가의 초석을 닦고 자녀교육에 앞장선 가문의 기획자들은 바로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소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의성 김씨의 청계 김진이 바로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요즘 글로벌시대에 국가나 기업에서 기획형 인재가 필수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문 또한 청계와 같은 헌신적 리더의 존재여부에 따라 명문가로의 도약이 판가름 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글로벌 인재를 만들어내는데 보람과 진정한 만족을 찾는 교육자들 또한 관계 지향적 리더십의 소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교육현장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다른 요인들이 있지만, 교육현장에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가의 초석을 닦은 가문의 기획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남성적 리더십이라기보다 여성적 리더십에 가깝다. 퇴계 이황의 경우 자녀들이 공부를 게을리하면 고기를 보내는 등 조언과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섬세하게 보살폈다. 일찍 아내를 잃은 청계 또한 아내 역할을 손수 하면서 자녀들을 교육하며 뒷바라지 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선조들은 가부장적 권위와 질서가 공고하게 작동하고 있던 500년 전 신분사회에서 이미 여성적인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요즘 지식위주의 감성시대에 요구되는 '엄마형 리더십'을 이미 500년 전에 도입했던 것이다. 핵분열 하듯 폭넓은 인재 배출 진성 이씨의 퇴계 이황과 의성 김씨의 청계 김진에 이어 관계 지향적 리더십을 지닌 가문의 기획자에 의해 명문가문으로 부상한 경우로는 안동일대의 전주 류씨 수곡파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안동 일대 전주 류씨의 경우에는 좀 특이한 현상이 발견된다. 수곡파와 그 지파인 삼가정파 후손들은 퇴계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 여느 명문가들에 못지않게 수많은 인재들을 낳았고 문집 또한 많기로 유명하다. 전주 류씨는 조선시대에 의성 김씨, 안동 김씨, 진성 이씨, 반남 박씨와 함께 문집이 가장 많은 '빅5 가문'으로 꼽힌다. 전주 류씨 수곡파는 16세기 초 안동시 임곡면 수곡리 무실에서 시작돼 박실, 삼산 등으로 분가하면서 지손(支孫)들이 퍼져나갔다. 전주 류씨 가문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다름 아닌 청계이다. 전주 류씨가 안동에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강릉판관을 지낸 류식의 손자인 류성(1533~1560)이 청계의 사위가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청계는 8남매를 키워 5형제를 과거에 합격시키는 등 의성 김씨를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만든 자녀교육의 '원조 CEO'라고 할 수 있다. 대대로 서울에서 살던 전주 류씨 수곡파는 안동 무실에 살기 시작하면서 청계의 사위가 된 류성이 처가의 가풍을 흡수했다. 전주 류씨는 무실마을에 살면서 고개 너머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와 수백 년간 혈연과 학연을 이루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청계의 관계 지향적 리더십이 전주 류씨 가문에 접목된 것으로 청계의 영향력이 자신의 가문을 넘어 전주 류씨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청계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류성이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28세에 요절하자 부인은 친가의 예법에 따라 어린 아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남편의 3년 상을 마치고 자결했고 두 아들(류복기, 류복립 형제)은 외할아버지 청계가 데려가서 양육하였다. 또 외숙부 학봉 김성일은 외조카를 자기자식처럼 대하며 지극 정성으로 가르쳐 이들 형제는 문장과 덕행으로 존경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615년에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양서당'을 건립하였다. 기양서당은 한양에서 안동에 내려와 정착한 전주 류씨(수곡파)가 의성 김씨의 학문적 영향을 받고 학문토론과 교육을 담당하는 정신적 전당의 역할을 했다. 전주 류씨는 벼슬에 크게 나아가지 못했고 농사를 지으면서 가난하지만 학문에 힘쓰며 가학의 전통을 이어갔다. 또 집안마다 서당이나 초당을 지어 앞다퉈 후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전주 류씨는 다른 가문과 달리 인재가 마치 '다핵분열'하듯이 폭넓게 배출되었다. 수곡파는 다시 삼가정파로 분가를 거치면서 번성하게 된다. 삼가정파의 기획자로는 류봉시가 꼽힌다. 1674년에 류봉시는 승현과 관현 두 아들을 데리고 자신이 살던 무실 종가에서 분가해 인근의 위동이라는 한적한 곳에 터를 잡았다. 류봉시는 당장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서재를 지어 이를 '삼가정'이라 하고 세 그루의 가죽나무를 심었다. 자녀교육에 필요한 회초리로 삼기 위해서였다. 두 아들은 부친의 바람대로 과거에 합격했는데, 그때 류봉시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장남 류승현(1680∼1746)은 숙종 때 문과 급제해 종성부사 등에 올랐다. 동생 류관현(1692∼1764)도 문과에 급제해 형조참의에 올랐다. 그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그의 치적이 기록될 정도로 목민관 재임 때 선정을 베풀었다. 두 형제는 위동에서 다시 분가를 해 각각 지금의 박실과 한들에 자리를 잡아 삼가정파라는 새로운 지파를 이루었다. 특히 류승현의 가학은 류도원-류범휴-류정문 등으로 이어지면서 학문이 깊어져 '3대 도천(道薦)' 가문에 오를 수 있었다. 또 류관현은 4대만에 퇴계학통을 이은 정재 류치명(1777~1861)을 배출하게 된다. 도천이란 그 지방의 감사가 도내의 유능한 인물을 천거하는 것으로 그 지역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들이 주로 천거돼 자연히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조선시대에 벼슬길에 나가는 길은 크게 과거에 합격하거나 벼슬을 지낸 조상 덕에 관직에 나가거나(음직) 도천(道薦) 받는 3가지 방법이 있었다. 부모의 솔선수범 교육법 실천 현재 전주 류씨를 대표하는 재계인사인 류목기 (주)풍산 부회장은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 형수 등에 대한 각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류 회장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형수(정봉순)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인자하고 특히 이웃과 나눔의 정이 대단했다. 공부를 위해 안동읍(현재 안동시)에 살았는데 때마침 형님이 막 결혼을 한 신혼 때였다. 안동 단칸방에서 신혼 살이를 했는데, 그때 류목기는 형님의 단칸 신혼 방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정봉순 씨는 "풀을 뜯어먹더라도 시동생 교육을 시켜야 한다"면서 자신의 신혼 단칸방에 시동생을 기거하게 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형수는 교직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시동생을 뒷바라지했다. 요즘에는 단칸방에서 신접살이를 하려는 여성들도 별로 없겠지만 더욱이 한방에서 시동생과 함께 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형수의 이런 배려 덕분에 류목기는 안동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솔저축은행 대표이사를 거쳐 (주)풍산 부회장으로 6년째 재직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류목기를 있게 한 것은 자식도 아닌 시동생을 함께 재우며 등록금을 대주며 공부시켜준 형수님 덕분"이라고 말한다. 류 부회장의 친형은 김천교육장을 지낸 류직기로, 자녀교육을 성공시킨 대표적인 집안으로 꼽힌다. 4형제 가운데 3명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남 류영석은 종양내과 전문의로 현재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교수이다. 류영석은 경북대 의대를 나와 미국 앰디앤더슨 캔서 센터 등에서 오랫동안 암 연구를 해온 이 분야의 권위자로 통한다. 2남 류광석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외무고시(7회)에 합격해 현재 싱가포르 대사로 재임하고 있다. 3남 류화석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영정보학박사를 받았고 한솔텔레콤 대표이사로 있다. 또 4남은 프랑스에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4형제를 키운 자녀교육 방식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솔선수범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바쁜 와중에도 항상 책을 읽었는데, 늦은 밤 자녀들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 함께 책을 읽었다고 한다. 특히 류광석이 외무고시를 공부할 때에는 직접 일본어 책을 번역하며 아들의 고시를 뒷바라지 했다고 한다. 70년대 초에는 외무고시 시험과목인 외교사에 대한 책이 별로 없었고 일본어로 된 책이 필독서로 꼽혔는데, 일본어에 능통한 어머니가 직접 번역해주었다는 것이다. 류 부회장은 "옛말에 '아이들은 어른 등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어른들이 솔선수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자녀교육은 없다"고 말한다. "옛말에 '매끝에 효자난다'는 말이 있어요. 부모가 솔선수범을 보이는데도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행동이 바르지 않으면 회초리로 따끔하게 해야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됩니다. 요즘에는 너무 자식을 위한답시고 매를 안드는데, 사람을 만들기 위해선 필요하다면 체벌을 해야 합니다." 류 부회장은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너무 '방목'하는 교육을 해 자립심도 없고 책임감도 부족한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면서 "잘못을 반복하는 아이에게는 때로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적으로 자녀교육을 잘 한다는 유대인도 성경에 근거해 '채찍에서 지혜가 나온다'며 체벌을 용인하고 있다. 류 부회장은 "유대인들은 13세 이후에는 아이가 이미 성장한 상태여서 회초리를 들지 안는다"면서 우리도 유대인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고 말한다. 또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일부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면서 "자녀교육에 앞서 '어머니 교육'이 더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학교교육 못지않게 가정에서의 생활교육이 중요한데, 요즘에는 아예 부모들이 생활교육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계모임에 나가 아이에게 핸드폰으로 전화해서 돈을 두고 왔으니 자장면을 시켜 먹으라는 어머니들이 있어요. 또 자신은 TV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에게는 공부를 하라고 강요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대학교육을 받아 지식이 풍부해 직접 자녀를 지도할 능력이 있는데도 아이들을 학원이나 과외로 내몰고 있어요. 귀찮으니까 과외를 시키고 학원에 보내는 거죠. 어머니가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아이도 제대로 바로 설 수 없고 자녀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비결은 조상의 정신을 배우는 것 안동 일대의 전주 류씨들은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수재집안'으로 통한다. '주실에 한양 조씨가 있다면 무실에는 전주 류씨가 있다'는 말이 안동 일대에 회자될 정도로 인물이 많이 나는 집안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조선 후기에는 퇴계학의 정통 계보를 잇는 류치명(1777~1861)을 배출했으며 해방 후에는 약 20명의 대학교수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공보처장관을 지낸 류혁인을 비롯해 시인 류안진 서울대 교수 등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소설 〈영원한 제국〉의 작가인 이인화(본명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도 이곳 출신이다. 요즘 뉴라이트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류석춘(연세대 교수)과 류석진(서강대 교수) 형제는 류혁인의 아들이다. 시인인 류안진(서울대 교수)은 3자매가 대학교수로 동생인 류혜령과 류현숙은 각기 영남대, 미국 아이오아주립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들에게서 보듯이 오늘날 안동의 전주 류씨 후손들은 학자와 시인, 소설가 등을 많이 배출해 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 권오영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어려서부터 경학과 예학을 숭상했던 조상들의 문(文)과 행(行)을 직접 보고 들으며 조상들의 정신이 담긴 문헌을 통해 학습해왔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수곡파(삼가정파) 후손들은 문과 행, 충(忠)과 신(信)을 수백 년 동안 실천해 수많은 학자와 독립투사 등을 배출해왔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다른 사람을 돕고 인재로 만드는데 진정한 만족을 추구하는 관계 지향적 리더십의 정신이 수곡파 후손들에게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가풍과 그 구성원들의 품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도 숭고한 인생을 살 수 있으며, 떠날 제엔 시간의 모래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음을. 아마 먼 훗날 다른 누군가가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다 외로이 부서질 때를 만나면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 그 발자국을. 전주 류씨 가문의 내력을 보면 롱펠로의 시 '인생찬가'가 연상된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몽골 대초원을 통일하다 12세기 후반까지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은 여진족의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의 지배 하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의 초원에도 통일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몽골의 역사서인 〈몽골비사〉를 보면 고구려를 건국한 또 하나의 세력이 몽골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와 민족적 코드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징기스칸을 '성길사한(成吉思汗)'이라 표기하고 있다. 징기스칸의 'Khan(칸)'은 '왕'이라는 뜻이니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의 원 이름은 보르지기드 부족의 테무진[鐵木眞]이었다. 그는 부족 간의 싸움에서 아버지(애수가이)를 여의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냈으나 먼저 자신의 부족을 통합하고 나서 케레이트족의 왕칸, 자무카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주변의 부족들을 차례차례 복속시켜 나갔으나 1188년 테무진이 부족의 수장이 되자 왕칸과 자무카는 등을 돌리게 된다. 이에 테무진은 케레이트족을 치고 서쪽의 나이만을 복속시킴으로써 1204년에 전 몽골을 통일하였고, 1206년 몽골 부족연맹회의인 쿠릴타이에서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된 이후부터 '징기스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몽골 전체를 장악한 징기스칸은 전쟁 준비를 서둘러 전통적 부족조직과 연합체를 해체시키고 '천호제'라는 군사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다시 말해서 몽골 전체를 병영화 했다는 말이다. 대내외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징기스칸은 진군의 명을 내려 서쪽으로 나가서 티베트인이 세운 서하를 압박하여 조공 약속을 받아내는 한편, 금나라을 치고 아예 내친 김에 그들의 본거지인 만주를 공략하였다. 이때 금이 의외로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동반도의 거란족들이 대요수국을 세웠으나 징기스칸의 군대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 땅으로 도망쳐 들어왔다(1216년). 이렇게 고려 땅으로 도망쳐 들어온 거란족들은 한때 개경을 위협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고려의 김취려 장군 등에 의해서 강동성으로 내몰렸는데 그때 거란을 공격하던 몽골군이 고려에 합동 소탕작전을 제의함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1219년 고려와 몽골 사이에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궁금증이 낳은 서역 진출 징기스칸은 원래 서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금나라를 먼저 친 이유는 서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우선 지난날의 치욕도 갚고 후환도 없애 버린다는 일거양득의 속셈에서 나왔다. 징기스칸은 서역과의 교역을 원했으므로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여 동·서 무역의 본거지를 손에 넣고자 기회를 보고 있었다. 마침 징기스칸이 파견한 대상(隊商) 450여 명이 호라즘(Khorazm)에서 살해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징기스칸은 이 사건을 구실로 병력 20만을 이끌고 1219년 호라즘 정벌에 나서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였다. 호라즘은 중앙아시아 암 다리야 하류, 아랄 해 남방 지역으로 1077년부터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가 셀주크조를 대신하여 이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수도를 우르겐치에서 사마르칸트로 옮겼다.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호라즘을 정복한 징기스칸은 1225년 몽골로 귀환하여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다음, 계속 정복사업에 나섰지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서하 정복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원래 징기스칸은 영토 자체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정복사업을 벌인 것이 아니라 동·서 무역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이 컸다. 그런데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고 보니 서역보다 더 서쪽이 궁금해서 못 견딜 정도였다. 서하를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 일대를 지배하던 서하는 우선 인종적으로도 몽골인과 다르다. 분명히 서역 저편에는 흥미로운 사람들이 흥미로운 생활을 하면서 몽골인의 흥미를 끄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거란족, 여진족이나 송나라 사람들이나 고려인이나 얼굴 생김새가 비슷비슷하여 목욕탕에서 머리에 수건이라도 뒤집어쓰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지만 서역인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 초원 저편, 그것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유럽 정벌에 나선 오고타이 당시 몽골의 주변국은 징기스칸이 죽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무시무시한 정복자가 죽어 이제는 한 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징기스칸이 죽자 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정복사업을 계승하였는데, 그는 아버지보다 한 술 더 뜨는 정복 군주였다. 그는 부족연맹회의인 쿠릴타이를 열어 징기스칸의 정복사업 계승을 국시로 선언하였다. 우선 오고타이는 제국의 수도를 현재 몽골 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서쪽 카라코룸으로 정하고 도로망을 정비하는 등, 제국의 기초가 되는 여러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여건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한 그는 쿠릴타이의 공약(징기스칸의 정복사업 계승)에 따라 정복사업에 나섰다. 그런데 오고타이는 정복사업에 나서기에 앞서 고려를 침공하였다. 1219년 양국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바가 있었으나, 당시 오고타이가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는 바람에 고려는 난감한 입장에 빠져 있었다. 1231년(고종 18년) 오고타이는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최 씨 무신정권하의 고려를 침략하여 개경을 포위하였고 고려 조정은 화의를 청하였다. 이를 수락한 몽골군이 서북면에 무려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벼슬아치를 두고 철수하였다. 이는 몽골의 관리가 고려를 감독하겠다는 뜻이었다. 몽골이 먼저 고려를 친 이유는 그만큼 고려가 만만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려를 단속한 몽골은 본격적으로 금을 정벌하였다. 이 때 몽골의 요청으로 금나라 때문에 강남으로 쫓겨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남송(南宋)이 지난날의 복수를 한다고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이것은 남송의 명운이 다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만다. 1235년 오고타이는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자신의 야심을 추인해 줄 쿠릴타이를 소집하였다. 일찍이 징기스칸이 호라즘을 정복하였을 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심복 수부타이를 보내어 남 러시아를 정복케 한 바가 있었다. 오고타이는 유럽 원정을 위해서 전략에 뛰어난 조카 바투를 원정군의 총사령관, 수부타이를 부사령관으로 하는 몽골 대군단을 출정시켰다. 1236년 바투가 이끄는 유럽 원정군은 뛰어난 기동성을 최대로 발휘하여 볼가 강 상류의 킵차크, 러시아의 리아잔·블라디미르·로스토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카프카스와 키예프를 공략하였다. 무서운 몽골군을 피해서 킵차크와 러시아의 왕들이 헝가리로 도주하자 바투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북으로는 폴란드, 남으로는 헝가리로 향하여 폴란드의 수도 크라코프를 함락시키고 독일 접경 슐레지엔까지 밀고 들어갔다. 위기에 빠진 유럽은 슐레지엔의 하인리히 2세의 지휘 하에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군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무서운 정복군단과 대결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결국 연합군은 패배하고 하인리히마저 전사하고 말았으며 헝가리 방면으로 진군한 몽골군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여 쑥밭으로 만들고 바투 원정군은 1244년에 카라코룸으로 개선하였다. 이민족 최초의 중국 통일 당시 강남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남송에 대해서 몽골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몽골 제국이 오고타이 칸국·차가타이 칸국·킵차크 칸국으로 분열되어 각기 독립하였다. 그때 징기스칸의 막내아들이었던 툴루이 가문은 영토가 원래의 몽골지역으로 한정되자 남송을 노리게 되었다. 몽골의 상속법으로는 막내아들이 가문의 재산을 상속하고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몽골 제국의 제4대 군주인 몽케칸(Mo..ngke Khan, 1251~1259)은 오고타이의 유럽원정 총사령관 바투의 지휘 하에서 전공을 세운 바 있는 인물로 그는 동생인 쿠빌라이에게 운남(雲南)·대리(大理)·티베트 등 남송의 주변국을 정복케 하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세력인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다른 세력의 동진(東進)을 막기 위해 훌라구를 서역 페르시아 평정에 파견하여 일 칸국을 세웠다. 이후 몽케칸은 1258년 친히 남송을 치려했지만 1259년 진중에서 병으로 죽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쿠빌라이(Khubilai)가 대칸에 올랐다. 쿠빌라이는 이미 중국을 근거지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융합을 꾀하였다.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1270년 국호를 원(元)이라 하고 대도(북경)를 수도로 삼음으로써 원나라의 건국자가 되었고 중국풍의 나라를 건설하였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키고 나아가서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도 복속시켰다. 이로써 몽골 제국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는 서유럽 국가들과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인도·이집트·일본·동남아시아의 섬들 그리고 세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몽골의 직할령이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는 고려뿐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식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으나, 지방행정은 중국식 주현제(州縣制)를 따르지 않고 행성(行省)과 다루가치라는 몽골 특유의 제도를 시행하였다. 고려 삼별초의 대몽투쟁 한편 고려와 몽골의 강화로 몽골 황제의 입조(入朝) 요구에 따라 중국에 가 있었던 태자(나중에 원종이 됨)는 몽골 제국의 분열 이후 쿠빌라이를 택하여 조공을 바쳤다. 그 후 원종은 쿠빌라이와의 인연을 계기로 왕권강화를 위해 국왕이 직접 친조(親朝)하여 몽골과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당시 집권세력의 반발을 샀다. 당시의 실권자 임연(林衍, ?~1270)은 원종과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와의 결탁에 반대하고 몽골과의 결전 의지를 다지면서 원종을 폐위시켰으나 몽골이 출병하겠다고 위협하자 원종을 다시 복위시키는 해프닝을 벌였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열어 원종에 대해서 출두할 것을 요구하니, 두 번째로 원의 조정에 간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임연의 제거를 위한 병력파견을 요청하는 발언을 하였다. 원은 그와 함께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임연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원종은 강화도로 사신을 보내어 삼별초의 개경환도를 명했다. 그러나 원종과 개경환도를 반대한 삼별초는 반정부, 반원투쟁을 선언하고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삼별초의 지휘자인 배중손(裵仲孫, ?~1271)은 강화도에 새로운 군주와 정권을 출범시키고 강화에서 진도로 옮겨가면서 대몽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271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삼별초는 본부를 제주도로 옮겨 자주 본토를 공격하면서 몽골에 대항했으나 3년 만에 진압되었다.
김동석 | 한국교총 정책교섭국장 Ⅰ. 교원평가 추진 과정 1. 교원평가 시발점과 시범운영까지의 과정 “교원평가”라는 용어가 인구에 회자되자 가장 반긴 집단은 교육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교육 붕괴로 대변되는 교육현실에서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불만을 일거에 교원에게 전가시킬 수 있는 좋은 호재로 활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이후 교원평가는 학교교육력 제고에 이르는 최고선으로 포장되고 언론과 학부모단체의 절대적 지지 속에 교육부의 교원평가 시범실시 및 후속조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왔다. 이 가운데 교원평가 실시에 이르는 방법과 과정만 남아 있을 뿐 교육적 효과, 교원 전문성 신장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 지, 교원평가의 궁극적 목표가 수업효과성이나 수업만족도 향상인지, 학생의 학업성취도 향상인지 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사실 교원평가시스템 개선 논의는 1964년 교육공무원승진규정이 제정된 이래 계속되어 왔다. 1995년 문민정부의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회, 1998년 국민의 정부 대통령자문 교육인적자원정책위원회 등에서 논의되다가, 1999년 교육발전 5개년계획 시안, 2001년 교육부 교직발전종합방안에서 제안되었다. 물론 위의 방안 및 시안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학생, 학부모를 포함한 교원평가적 성격보다는 승진규정상의 개선․보완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후, 참여정부들어 2003년,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원인사정책혁신방안의 하나로 검토되었으나 교원단체의 반발로 합의에는 이루지 못하였다. 2004년 2월 당시 안병영 교육부총리는 사교육비경감대책의 일환으로 교원평가시스템을 도입하고 교원의 능력개발과 전문성 신장 지원을 위한 평가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육계 안팎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교육부는 새로운 교원평가시스템 모형개발연구를 한국교육학회, 한국교육행정학회, 한국교육평가학회에 의뢰, 3개 학회는 새로운 교원평가방안을 마련하여 교육부에 제출되었다. 이 평가방안을 토대로 교육부는 교원평가제도 개선방안 공청회(1차, 2005. 5. 3)를 개최하려다 전교조의 물리적 방해로 무산되었다. 이후 교원평가와 둘러싼 교원단체와의 갈등으로 난항을 걷다 2005년 6월 20일, 김진표 교육부총리와 교원3단체장간에 정부, 교원단체, 학부모단체가 참여하는 ‘학교교육력제고를위한특별협의회’를 구성․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협의회는 합의(9. 5)를 통해 부적격교사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육부가 합의안이 마련될 때까지 시범학교 선정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시범학교 48개교를 확정․발표(11. 7)함으로써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교육부는 19개교를 추가 지정하여 총67개교의 시범운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대해 한국교총 등 교원단체는 강도 높게 교육부의 행태를 비판하고 전국학교에 교육부의 졸속적 교원평가 시범운영 참여에 신중을 기해야 함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김진표 교육부총리는 “선생님께 드리는 호소문(11. 24)을 통해 교원의 협조 당부와 함께 교원증원, 수업시수 법제화, 교원잡무 감축 등의 교육력 제고사업 추진을 약속하였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 교육위원인 이주호의원은 학교별로 교원평가관리위원회 설치를 주요골자로 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하여(2005. 10. 21) 현재 국회 교육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2. 교원평가 시범운영 과정 및 결과 교육부의 67개교 시범운영 기간에 한국교총은 올해 시범학교 10개교 평가담당 교사, 교장, 교감을 대상으로 방문 면담조사를 실시하였다. 면담조사 결과 동료교사와 학부모와의 평가차이가 커 이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평가주체가 학생인 경우에는 장난 섞인 평가현상이 나타났으며, 수업개선과 교사개인의 선호여부에 대한 평가를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학생지도에 엄격함을 요구하는 생활지도 담당 교사들의 학생평가가 낮게 나타나는 등 인기에 편중되는 평가결과가 나타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소규모학교의 경우 평가에 대한 객관성과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어, 이에 대한 대안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교육부는 48개 교원평가 시범학교 중간 점검 결과를 발표(2006. 3. 6)하여, 시범학교 교사 67%가 “수업 개선될 것”, 학부모 82%, 학생 73%가 긍정적으로 답변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교원단체는 정부의 전폭적인 행․재정적 지원에 따른 당연한 결과일 뿐, 평가방법, 신뢰도에 의문이 가며, 당위적 결론도출보다 문제점을 보완해야한다며 교육부의 긍정적 평가를 폄하하였다. 한국교총은 리서치 앤 리서치와 공동으로 시범학교 교원 756명을 대상으로 전화여론조사를 실시(2006. 8. 30 - 9. 5)하였는데 응답 교원의 93.8%의 교원이 “더욱 충분한 시범운영기간이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평가 결과를 인사․보수에 반영치 말아야 한다“에 82.3%가 응답했다. 이에 따라 한국교총은 시범운영기간 연장을 통해, 교원평가 수정․보완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후 한국교육개발원은 교원평가 정책 포럼(교원평가제 시범 운영 결과와 개선방향)을 개최(2006. 9. 26)하여 2006년 3월부터 8월까지 시행되었던 2차 교원평가 67개교 시범학교 운영 결과를 발표하였다. 더불어 교육부는 보도 자료를 통해 시범학교 교사 73.9% “내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 학생 67.8%, 학부모 77.9% “수업과 학교 경영에 자신들 의견 반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교총은 교원평가는 공정성 미확보, 소규모학교(10학급 미만, 3,455개교) 동료평가 현실성 결여, 연 1-2회 공개수업평가, 실효성 의문, 정부, 교원충원 등 교육여건개선 약속 이행 촉구 등의 이유를 들어 연내법제화 추진을 반대하고, 시범운영을 더 연장하여 문제점을 보완해야 함을 주장했다. 전교조는 교원평가의 반교육적 위험성, 시범학교 선정과 운영 과정에서 공정성과 객관성 부족, 시범운영기간이 너무 짧다는 점에서 교원평가제의 도입문제는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부는 한국교육개발원의 2차 시범실시 결과보고 이후 교원단체, 학부모단체, 교육전문가 등의 여론수렴을 듣는 차원에서 “교원능력개발평가 정책 추진 방행 공청회”를 개최(2006. 10. 20)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공청회 이전에 교육부가 보도자료를 통해 교원평가 시행을 사전 확정하고 공청회를 요식절차로 진행한다며 강력 반발, 공청회가 파행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부는 공권력을 동원, 25명의 전교조 교사들은 연행, 이중 3명은 구속, 22명은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 공청회에서 교육부 시안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교원평가 → 교원능력개발평가(명칭 변경) ▲ 평가대상 : 국․공․사립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원(유치원교원,전문상담교사,사서교사,보건교사,영양교사 제외) ▲ 평가자 : 교장, 교감, 동료교사, 학생, 학부모 ▲평가영역 : 단위학교 평가관리위원회에서 정함(교사 : 수업계획, 수업실행, 수업평가, 교장, 교감 : 학교운영 전반) ▲ 평가주기 : 3년에 1회의 평가(본회 요구 수용) ▲ 평가방법(동료교사 : 평소관찰, 수업참관 등, 학부모 및 학생 : 설문조사 작성, 제출, * 학부모의 경우 초등3년까지는 학교경영만족도 조사, 초등4학년부터는 학급경영만족도 조사 형태로 참여) 이 같은 교원평가방안을 2007년도에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통한 법제화를 통해 2008년도 3월 1일부터 전국학교를 대상으로 단계적 확대하여 정착시킨다는 구상이다. 3. 교원평가 관련 각 교육주체의 입장 교원단체에 있어 한국교총과 전교조의 입장은 차이가 있다. 즉, 한국교총은 전문직 교원단체로서 올바른 교원평가는 찬성하되, 충분한 시범운영과 문제점보완을 통해 졸속적인 교원평가가 아닌 올바른 교원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교조의 경우 교원평가가 가지고 있는 반교육적 문제점을 감안할 때, 교원평가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교원평가 이전에 학교교육력 제고를 위한 제반여건(교원증원, 수업시수법제화, 잡무감축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양 교원단체가 공히 하고 있다. 교원평가의 교원평가에 대한 학부모단체 및 시민단체의 입장은 절대적 찬성이라는 기본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나아가, 교원평가를 통해 부적격교원 선별이 가능하게 하고, 보수, 인사에 반영되어야 하며, 평가를 3년 주기가 아니라 1년마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교육부의 시안에 대해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모임은 허상뿐인 교원평가 법제화를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반면 한국국공사립초․중․고교장회 회장인 배종학 교장은 교육부 공청회에서 원칙적으로 교원 평가에 동의하였고, 국민 모두가 열망하는 진정한 교원평가제도가 정착되어 평가로 검증된 우수한 교원이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Ⅱ. 교원평가의 과제 그간 교원단체는 마치 교원평가만 시행되면 학교의 모든 문제가 해소되고, 교원 전문성 신장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착각, 공교육 불신과 붕괴의 원인을 교원으로만 돌리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를 경계하고 교원평가의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교육여건 개선 및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와 반면 교육부는 교원평가 2008년 실시를 위해 입법절차를 강행하려 할 것이다. 교육부는 1년도 안 되는 시범운영으로 단지 교원평가에 대한 이해도나 만족도 내지는 적응성이 높아졌다고 해서 교원평가 적용의 타당성이 확보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2006년 법제화 추진, 2007년 500개 선도학교 선정, 2008년 전국 학대 실시를 강행해서는 안 된다. 참여정부 임기 내에 성과주의나 한건주의식으로 교원평가를 무리하게 강행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교육현장에 돌아올 것이며, 이러한 우려는 영국이 교원평가제의 후유증으로 교직이 3D 업종으로 인식되어 교직 기피현상이 심화되자 러시아, 페루, 아프리카 등 55개에 이르는 국가에서 교사모집 공고를 내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 것을 볼 때 이는 기우가 아님이 증명되고 있다. 대학교수의 경우 강의평가제가 도입되는데 5년여가 소요되었고, 성인인 대학생들마저 강의평가를 성의 없게 하는 태도가 문제가 되고 형식적인 운영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교원평가 도입은 교육여건, 평가의 문제점 보완, 인프라 구축 등 충분한 준비와 기간을 전제로 추진되어야함을 강조한다. 교육정책은 포퓰리즘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며, 교육 본질적으로 접근해야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실을 교육부가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하며, 정부가 졸속적인 교원평가를 강행할 경우 이에 따른 혼란과 갈등은 고스란히 학교현장으로 돌아올 것이다.
변수란 | 일본 동경한국학교 파견 교사 “굿모닝”, “하이”. 매일 아침 이곳, 동경한국학교 교무실에서 필자가 원어민 선생님에게 건네는 유일한 말이다. 개학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났지만 아침 인사 내용은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 영어책에서 배운 대로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 등 세트로 짜인 영어 문장을 한 번 정도 써 먹은 뒤로는 더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일상사 혹은 학급 아이들 문제에 대해서 프리토킹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문장을 어떻게 만들어 얘기해야 할지 막막해지기 일쑤다. 그래서 겨우 인사말 정도만 하고 교실로 퇴장하는 신세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중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장장 10년이란 기간 동안 영어를 공부했으면서, 명색이 교사라는 사람이 영어로 얘기도 못하나 하고 말이다. 속으로 화가 나도 반박할 여지는 없다. 영어 회화 책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전자 사전을 두드려 가며 말을 할라 치면 왜 말을 못하겠는가마는 더듬더듬 대는 모습이 쑥스럽기도 하고, 어쩔 땐 초라해지기까지 해서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필자의 영어실력이 항상 제자리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비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주 11시간씩을 원어민 선생님과 수업을 하는 이 학교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제법 상당하다. 물론 개인차는 있지만 원어민 선생님 앞에서 영어를 쓰는 데도 그다지 부끄럼이 없다.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영어가 정규 교과 수업으로 도입된 지도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현재 3학년부터 시작되는 영어를 1학년부터 확대하고자 교육부는 올 2학기부터 시범학교 50곳을 선정, 발표한 바 있다. 교육부는 초등학교 때 영어를 배웠던 고등학생의 영어 실력이 초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지 않은 학생보다 영어 실력이 월등하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고 영어 교육의 조기 실시를 주장하고 있지만 찬반의 여론이 무성하다. 공립초, 정규교과로 영어 교육 안해 이런 논란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직 공립 초등학교에서는 정규 교과로 영어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있는 일본은 초등학교 영어교육 문제를 놓고 고심에 빠져 있다. 초등영어교육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자 당초 2005년 3월경에 초등학교 영어에 관한 방안을 내놓을 방침이었으나 구체적인 교육과정은 아직 불투명한 상황에 있다. 영어를 도입한다고 가정했을 때 ‘정규 교과로서 가르칠 것인지’, ‘총합적 학습의 시간을 이용할 것인지’, ‘도덕과 같은 영역에서 다룰 것인지’ 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현재 일본도 정규 교과는 아니지만 총합학습의 시간에 ‘국제이해교육’ 혹은 ‘이문화 교육’으로서 영어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학교의 영어활동 내용을 보면 가장 많은 것이 노래나 게임 등 영어를 즐기는 활동이며, 그 다음으로 간단한 영어 회화 연습이 들어 있다. 영어활동 연간 평균 실시시간 수를 보면 1학년은 8.0시간, 2학년은 8.1시간으로 월 1회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3학년은 12.4시간, 4학년은 12.7시간, 5학년은 13.2시간, 6학년은 13.7시간으로 월 1회 정도이다. 이 말은 결국 정규 교과목이 되어 주 1회 정도 실시한다고 했을 때는 대강 연간 35시간이나 필요하게 됨을 뜻한다. 현재 이 정도의 시간을 충족시키고 있는 학교는 전국 2만 3000교 가운데 1% 전후에 지나지 않고 있다. 주 5일제 수업 때문에 수업 시수가 부족한 가운데 영어까지 넣는다고 하면 또 다른 과목의 시수를 줄여야 할 것이며, 그런 만큼의 효과를 결과로서 내놓아야 하는 부담감 또한 생기는 것이다. 정규 교과가 되었을 때 부각되는 또 다른 문제 중의 하나가 ‘과연 누가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영어활동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90%가 학급 담임이 지도하고 있다. 6학년만 놓고 봤을 때는 학급 담임이 92.6%, 영어지도 담당교사가 2.4%, 특별 시간 강사가 2.3% 정도 차지하고 있다. 학급 담임의 입장에서는 정규 교과로서 도입이 된다고 했을 때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은 당연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영어 수업은 영어 전담 교사가 가르치고 있다. 중등 영어 교사 자격 소지자이거나 혹은 초등 교사 가운데서도 영어를 잘한다 하는 사람이 영어수업을 전담하고 있다. 물론 학교에 따라 사정이 다른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그러한 관례를 따르고 있다. 만약 여기에서 1, 2학년까지 영어교육이 확대된다면 영어 전담 교사 수가 더 요구될 것이고, 학급 담임이 지도한다고 했을 때는 학급마다 수준의 차이가 생기게 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일본의 경우 초등학교 영어교육에 관한 의식조사에서 약 70~80%의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영어 도입을 찬성하고 있다. 대개의 학부모들은 영어를 도입하면 영어 기술이 향상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주 1회 정도의 수업으로 영어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사실상 무리가 있다. 학부모 70~80% 초등 영어 도입 찬성 영어 조기 교육에 관한 이론이 무수한 상황에서 ‘신학습지도요령’의 초점의 하나인 초등학교에서의 영어 필수화에 대해 일본 문부과학성 대신은 9월 27일 “일본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서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어느 쪽의 의견이 타당한가는 단정 짓기 힘들지만 현재 영어가 국제어로 통용되고 있는 이상 영어교육을 어떤 방법으로든 실시해야 함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성’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영어가 제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모든 교과를 제쳐 두고 영어 수업만 할 수는 없다. 또한 아무리 시간 수가 확보된다고 해도 가르치는 교사의 실력이 형편없다면 백 날 해봐야 제자리걸음일 것은 뻔하다. 물론 예산이 풍부하여 원어민 교사를 학교에 몇 명씩 배치하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 혹은 취업을 위해서 영어가 필수가 되는 상황에서 영어에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목적의식’이 있고 ‘효과적인 학습 방법’을 선택하여 영어 학습을 꾸준히 한다면 누구라도 영어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한국이나 일본을 막론하고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학습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영어는 너무 어려워’, 혹은 ‘나는 영어로 말할 수 없어’ 등의 말을 하지 않도록 쉽고, 다양한 교재 개발과 아울러 효과적인 교수·학습 방법에 관한 연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장이 좀 어색하면 어떻고, 발음이 좀 서툴면 어떤가? 흔히 하는 말로 외국어를 할 때는 조금 뻔뻔스러워질 필요도 있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원어민 앞에서 더 이상 기죽을 이유도 없다. 영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우리보다 우수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제 ‘문법이 틀리면 어쩌지’ 하며 불안해 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볼 작정이다. 내일은 ‘It’s a beautiful day’, ‘I like fall’, ‘How about you?’라고 말해서 깜짝 놀라게 해줘야겠다. 그런데 날씨가 흐리면 어떻게 하지?
최수룡 | 대전 버드내초 교사 누구든지 사는 것이 평탄치는 않겠지만 올해에는 유난히도 정신적 고통을 무척 많이 받아 힘들었다. 직장생활에서 승진포기라는 절망은 하루하루가 목적의식 없이 무의미한 생활을 하게 했다. 나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무능하다는 생각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러다 보니 주위의 모든 분들과 연락을 끊게 되었고, 모든 모임에 의도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꼭꼭 마음을 가두어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는 생활이었다. 계속되는 이런 생활은 필자로 하여금 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했고, ‘못난이’라고 자학을 하게 되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학교에 출근해 학생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교재연구를 대충 하다가 퇴근하여, 저녁에 TV 드라마를 몇 편 보다가 지쳤을 때 잠을 자는 것의 연속이었다. 학교행사에서도 꼭 필요할때 외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직장동료 간에도 될 수 있으면 어울리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의도적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를 본 아내는 정신 좀 차리고 함께 산행이나 산책을 하자고 제의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항상 핑계를 대고 회피하였다. 번민으로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여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자게 되었으니 병에 걸려도 크게 걸린 것이었다. 이 병은 몇 년 전부터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1년에 두 번 치르는데, 3월 초와 9월 초 인사이동 시기다. 승진이나 영전을 하는 사람의 명단이 발표되면, 동료나 선후배 선생님들의 승진이나 영전에 대한 축하인사가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축하 인사를 하면 선생님 같은 분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먼저 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인사말이 이제는 해가 거듭 될수록 나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다가오기에 전화하기도, 하지 않기도 거북한 갈등으로 몸살을 치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번민의 시간이 한 두어 달 이상 거치게 되기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3월 초에 대전시교육청에서 가진 교육혁신위원회의 승진규정 공청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주제 토론자 발표 후 참관자와의 질의응답 시간에 평소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승진규정과 수석교사의 필요성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됐는데 참석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 내용이 한국교육신문 1면에 대서특필 돼 갑자기 전국의 교원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전국에서 격려 전화와 동감하는 분들의 이메일 등으로 신문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선생님들의 격려 메시지와 전화는 필자에게 자긍심과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 후 필자는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삶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문단에도 등단하여 수필가로 신인상을 받게 되었고, 7월부터 한교닷컴 e-리포터로 활동하면서 연 3회 베스트 리포터로 선정되었다. 필자의 글을 보고 인터넷 카페, 기업체 홈페이지, 종교단체 등에서도 청탁이 쏟아졌다. 글을 읽고 무명의 독자들이 보내주는 댓글은 새로운 삶의 즐거움을 찾게 하였다. 오로지 승진을 위한 삶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승진을 하지 않더라도 더불어 살면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은 것이다. 2006년에 우연히 필자에게 다가온 행복의 미소는 일생에서 가장 멋진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필자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글쓰기를 하면서 즐겁게 사는 방법을 깨닫게 해준 2006년은 더욱 잊지 못한다. 노랑과 빨강의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름다운 이 가을에 아직도 승진에 얽매어서 헤어나지 못하였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창희 | 서울 대방고 교사 오래전의 일이다. 지금은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아주 아끼던 후배교사가 있었다. 교원임용시험을 통하여 교직생활을 시작한 첫 번째 세대였다는 것은 기억이 되는데, 정확히 몇 년 전이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첫 대면에서부터 서로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탓에 이후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풍기는 외모와 행동이 필자의 초임발령시절과 비슷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보다는 네 살 정도 아래였기에, 자연스럽게 형님, 아우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 후배가 학교에 온 지 1년여가 지났을 무렵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형님, 교사가 된 지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정말 빠르게 지난 것 같아요. 무슨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는지 모르겠네요. 봉급 열두 번 받았더니 어느새 1년이 지나 버렸네요.” “이 친구가 벌써 그것을 알아 버렸네. 조금 지나면 더 빠르다는 것을 느끼게 될 걸, 우리 지금부터 흐르는 시간을 멈추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해 볼까?” 그냥 웃고 지나쳤지만 그날 이후로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 까라는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때 필자는 30대 중반을 넘어 막 후반으로 넘어간 직후였다. 집 근처에 자주 이용하는 약국이 있었다. 자주 가다 보니 약사와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부친이 교직에 몸담았었고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다고 했다. 필자보다는 14~15년 정도 위의 연배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요즈음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했더니 “아직은 잘 모를 것입니다. 40대가 되면 세월의 빠르기가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빨라집니다. 그것이 50대가 되면 100m 달리기로 바뀌게 되지요.” 두 경우를 생각해보니 정말 그 이야기들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교사는 봉급 열두 번 받으면 1년이 지나고 새로운 아이들 만나서 지내다 보면 또다시 봉급 열두 번 받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또 1년이 지나는 것이다. 또 몇 년이 흐르면 새로운 학교에서 다시 둥지를 틀게 된다. 요즈음에는 그 약사의 이야기가 더 실감 있게 다가온다. 아니 그가 이야기했던 마라톤보다 훨씬 더 빠르게 느껴진다. 벌써 100m 달리기에 돌입한 것 같다. 2006년에도 필자는 어처구니없게 ‘빠른 세월을 어떻게 잡아둘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2006년뿐 아니라 매년 해온 생각이다. 아니 매년이 아니라 매달 해왔을지도 모른다.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지만 생각은 계속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2006년이 가기 전에 그 생각을 접게 됐다. 얼마 전에 그 후배교수와 전화통화를 했다. “어이, 김 교수, 교수되어서도 세월이 빠른가 모르겠네.” “말도 마십시오. 마라톤을 하네요. 벌써 40이 넘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마라톤’이라는 이야기는 약사가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후배도 40대에는 마라톤 하는 기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형님, 이제는 세월이 왜 빠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붙잡는 일 포기해야 할까 봐요. 그냥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필자도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된 것이다. 아무래도 세월의 흐름과의 숨바꼭질은 이쯤에서 접어야 할 것 같다. 오늘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세월을 잡기 위한 몸부림보다 그 세월을 즐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변종만 | 충북 청원 문의초 교사 2006년에 우연히 필자에게 다가온 행복의 미소는 일생에서 가장 멋진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필자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글쓰기를 하면서 즐겁게 사는 방법을 깨닫게 해준 2006년은 더욱 잊지 못한다. 노랑과 빨강의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름다운 이 가을에 아직도 승진에 얽매어서 헤어나지 못하였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10월 중순경이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감독을 맡아 6학년 교실에 들어갔다. 요즘 아이들이 평가에 관심이 부족한 것을 알지만 혹시라도 긴장하는 아이가 있을까봐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신경을 썼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이 필자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그중 하나가 ‘선생님은 뭐가 좋아 매일 그렇게 즐거워하느냐’는 것이었다. 모범을 보여야 할 최고 학년인데도 철부지행동을 일삼는 아이들이 던진 뜻밖의 질문이었지만 마음속의 다짐까지 꿰뚫어본 관찰력이 대견스러웠다. 한편 낙천적으로 사는 모습이 아이들 눈에 좋게 보였다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똑같은 사물을 보거나 사건을 접하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긍정적으로 보면 다 좋게 보이던 것도 부정적으로 보는 순간 다 나쁘게 보이는 게 순리다. 그러니 바보가 아니라면 굳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살 이유가 없다. 필자가 보내는 메일에는 ‘삶을 아름답게 하면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 집니다’라는 서명이 함께한다. 누가 만들어 줄 때를 기다리면서 불평만 하면 멀리 달아나는 게 행복이다. 항상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주변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고 작은 것에도 만족해하면서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행복이다. 필자가 살아가고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예를 들어가며 얘기해 주는 것으로 질문에 대해 답변했다. 아이들의 표정이 덩달아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인다. 짧은 시간에 얼마나 가르칠 수 있으랴만 긍정적으로 즐겁게 사는 게 더 좋다는 것만은 이해한 분위기였다. 우리 반 아이들이 필자를 바라보는 눈도 6학년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냥 아이들이 좋아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친근감을 느끼도록 편안하게 대하면서 아이들과 가깝게 지냈더니 부모님들까지 필자를 신뢰한다. 학교와 교사를 믿고 따르니 참교육은 부수적으로 이뤄진다. 사회에서는 교사가 무릎을 꿇게 하는 사태를 바라보며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잘못을 질타했었다. 하지만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반의 부모님들이 보여줬다. 10월 초 이웃 반 선생님의 돈을 탐낸 아이들이 있어 급히 부모님을 학교로 불렀다. 부모님들에게 자초지종과 함께 사후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해주자 다음날 바로 이웃 반 선생님을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비록 무릎은 꿇었지만 가슴 뭉클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누가 욕할 것인가? 교사라면 누구나 아이들에게서 행복을 찾는다. 그중에서도 담임을 맡은 아이들이 1년 동안 잘 따르면서 속 썩이지 않고, 말썽부리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좋은 방향으로 생활태도가 변하고, 소외감을 느끼던 아이들이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게 가장 큰 보람일 것이다. 그러니 올 한해 필자는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생활하는 게 교사들의 일상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직장의 분위기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교직원 간에 마음을 터놓고 생활할 수 있다. 이왕이면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데 앞장서려고 노력했다. 누구라도 말 한마디만 꺼내면 회식을 비롯해 직원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순리적으로 처리되니 직원들끼리 얼굴 붉힐 일도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방학 동안에는 학교에 출근한 직원들끼리 밥을 직접 지어먹으면서까지 동료애를 나누도록 만들었다. 2006년을 되돌아보면 아이들이나 직원들과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아내며 더 즐거워했던 한해였다.
이영관 | 경기 수원 제일중 교감 필자에게 2006년은 한마디로 격동의 해였다. 3월 1일, 2년간 근무했던 학교를 떠나 거주지 가까운 곳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출근 시간이 20분에서 5분으로 바뀌었다. 학교에 볼 일이 있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가도 된다. 태어난 고향에서 물리적 공간이 가까워지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학교에 애정이 더해지는 기회가 되었다. 4월 27일에는 교육칼럼집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1년여 넘게 ‘한교닷컴’에 쓴 기사 정수(精髓)를 모으고 평상시 쓴 글을 주제별로 모으니 번듯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하나의 창작품을 만든다는 것, 개인사에 큰 족적이 아니던가? 한편 이 날 참석한 100여 분의 축하 속에서 더불어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평상시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는 인생 공부를 하였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분이었을까?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상위에 랭크됐다는 소식은 필자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평생 잊지 못할 ‘연수의 꽃’이라는 교장 자격연수도 했다. 시·도 연수 1주일에 이어 6월 19일부터 교원대에서 5주간의 연수가 있었다. 과제물 제출, 논술고사, 분임장 활동 등 그 바쁜 와중에 연수 과정 기록으로 수백 장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여 한교닷컴에 관련 기사를 쓰고, 교육토론회에 출연하여 ‘교장 공모제의 허상과 음모는?’을 자신 있게 발표하였다. e-리포터 활동이 이론적 배경, 논리적 근거 제공에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수료식 때 전국의 600여 연수생들에게 나누어 준 ‘이영관 한교닷컴 e-리포터의 초·중등 교장 자격연수 기사 모음집’은 교원대 관계자로부터 20년 교장 자격연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과찬을 받았다. 7월 30일, 5박 6일간의 일정으로 러시아와 중국에 산재하여 있는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39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탐방하였다. 연해주 신한촌기념비, 극동대학교 한국학대학, 이상설 선생 유허지, 단지동맹비, 대성중학교, 윤동주 생가, 백두산 천지, 여순 감옥 등을 돌아보며 그 당시 애국선열들의 애국심에 고개를 숙이면서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9월 1일, 전임 교장선생님이 정년 퇴임하시고 새 교장 선생님이 부임하셨다. 그러고 보니 교감 3년차 동안 네 분의 교장 선생님을 모신 셈이 된다. 2년차, 신규, 7년차, 3년차 교장선생님들이다. 그분들로부터 배울 점도 많고 ‘내가 교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바람직한 학교장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 중이다. 10월 9일, 62시간의 특수교육 장학과정 직무연수. ‘특수·통합학급의 장학 및 지원’이라는 연수 주제는 이 분야에 익숙치 않은 필자에게 세상과 인간을 보는 눈을 바꿔 주었다. 그리고 인생관, 가치관을 재점검해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그밖에 도교육청의 기획홍보 장학관 공모에 도전하여 실패의 쓴잔을 마셨지만 역량의 부족을 더 채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경기교육인터넷방송 기획팀장으로 활동하여 교육 콘텐츠 제작 방향을 제시하고 경기도교육청 방과 후 학교 장학자료 팀장으로 활동하여 뜻을 같이하는 경기도 내 선생님들과 함께 어울리며 작은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또 경기교육자원봉사협의회 산하 서호사랑 팀장 역할로 학생들에게 애향심을 기르며 자원봉사활동의 즐거움을 익히게 하니 토요일도 바쁘기만 하다. 그리고 3년 전부터 시작된 대학 동기 인터넷 카페지기 활동은 친목도모와 교육정보 공유는 물론 정기적인 모임의 활성화로 이어져 구성원이 만족해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교직생활 30년. 이렇게 흥분했던 해가 또 있을까 싶다. 정말 잊지 못할 2006년이다.
조은경 | 전주 근영중 교사 누구나 이맘때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서면 아쉬운 점들과 기뻤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오를 것이다. 교육계는 급격한 사회 변화와 함께 공교육의 난항과 교육 개혁, 교권 회복을 위한 대책마련 및 자성의 목소리가 컸었다. 공교육 담당자의 입장에서 통감하는 바이며 개인적으로도 올해 유난히 학생들에게 역사와 국제이해 부분을 가르치고 생활지도를 하면서 무엇이 올바르고 적절한 것인지 고민하는 때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는 항상 넓은 시야, 다양한 경험 그리고 열린 마음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물은 흘러야 생명력을 유지하듯이 교육의 방향 역시 변화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2006년 대외적으로는 한·일 공동수업, 한·중·일 평화교재실천교류회, 북경 역사회, 국제이해학회 참가 등 분주하고 귀한 경험과 배움을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박물관 체험 교실’과 ‘외국인과 함께하는 문화교실(CCAP)’을 운영하며 학생들과 함께 실천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한 시간들이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봄, 가을에 일본의 역사 교사와 전통문화 전공 교수를 초청하여 공동 수업을 하였는데 3월 말에는 요코하마의 스즈키 선생님과 함께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오오가와 쓰네기치를 주제로 수업을 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참 진지했다. 그네들이 한국뿐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애정을 지녔다는 사실이 학생들에게 전달됐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하면 이처럼 학생들의 마음이 열린다. 10월 중순에는 미야모토 교수와 다도(茶道)를 시연하면서 평화와 화해를 이끌어보았다. 다른 나라의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서로를 위한 이해와 배려로부터 우호관계가 성립되고 아시아의 긍정적 미래를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게 보람 있었다. 평화교재실천교류 참가는 올해 4회째인데, 처음으로 중국까지 동참해 동아시아 3국 회의가 된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남’에서 서로를 ‘앎’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1회 때부터 발표 및 토론자로 참가하며 느낀 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만남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릇된 역사 인식과 역사 교육에 관한 좋은 의견이 도출되고 일치하는 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회(역사) 교과와 창의적 재량 활동시간에 국제이해교육을 담당하고 있어 시간 나는 대로 다문화에 대해 학생들과 대화를 한다. 현재 국제결혼이 증가하면서 국제결혼가정 아동들의 증가가 두드러지고 있다. 따라서 다문화 이해 교육은 당연히 교육현장의 과제다. 대화의 전제는 무엇보다도 인권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일이다.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할 때 인간에 대한 애정을 느낀 학생들 맘이 열린 것처럼 다문화 교육과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많이 만나고 얘기하는 것이다. ‘외국인과 함께하는 문화교실’ 운영에서는 각국의 지식인들이 학생들과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는데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더불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 체험교실’을 전주 국립박물관과 연계하여 실천하였는데 가능한 한 지속하고 싶다. 분주하다면 분주하였다고 할 수 있었던 올 한해!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마음가짐은 변함이 없다. 교육이란 학생들이 건전한 몸과 마음으로 미래 사회를 선도하며 행복한 삶을 꾸리게 하는 데 그 진정한 목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한번 가르친 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다. 좀 더 자 자신을 돌아보고 그 중요한 사명감을 맡은 이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즐거움을 향유하며 상생(相生)을 동감하며 학교에, 나의 수업에 함께 하기를 바란다.
장옥순 | 전남 마량초 교사 올해로 교직에 첫발을 디딘 날지 26년이 됐다. 첫 부임지도 바닷가 학교였는데 올해 찾아온 이 학교도 운동장 너머로 출렁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이제 보니 저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편안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던 150일이었다. 마량항에서 완도 고금도를 향해 건너가는 여객선을 2층의 우리 반 교실에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우리 반 20명 개구쟁이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 부스러기들을 하나씩 주워 담아 청소를 하며 혼자서 실실 웃는 시간이 늘어나는 오후 시간의 즐거움. 며칠 전, 알림장을 제때에 쓰지 않고 영찬이와 쫑알대며 장난치는 승현이에게, “그렇게 늦게까지 알림장을 안 쓰면 선생님이 뽀뽀를 해버릴 거야! 선생님이 볼에 뽀뽀를 하면 장가도 못 가요”했더니, 승현이가 얼른 대꾸를 하였다. “그럼, 선생님한테 장가가면 되지요.” 뭐라고? 선생님은 이미 시집을 갔고 너무 늙었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영찬이가 말대꾸를 했다. “아니에요. 선생님은 하나도 안 늙었어요.” 그것뿐이 아니다. 밥을 늦게 먹는 강이와 아영이의 식사 지도를 하고 교실에 들어오니 유림이와 고은이는 “선생님, 사랑해요”를 써 넣은 쪽지 그림과 편지를 몰래 넣어두고 갔다. 아직도 나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연인처럼 아이들이 던지는 사랑의 밀어에 코끝이 찡해지는 철없는 선생이다. 필자는 이 선생의 자리를 오래도록 아끼고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왔다. 그 사랑이 잠시 흔들렸던 2006년의 아픈 기억을 이제는 담담히 반추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고학년 담임교사 20여 년의 경험이 무색할 만큼 1학년 아이들에게 적응하지 못해서 좌절하고, 다시 ‘교육학’ 공부를 하기 위해 퇴근 후 도서관에 출근하며 이론과 현장을 접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증후군) 아이들과 특수교육 대상 아동이 함께 사는 교실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마저 느낄 수 없었던 1학기를 보내면서 몇 번이나 포기를 생각했던 아픈 상처들이 이제는 진주가 되어 20개의 보석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이제는 마음 놓고 2학년으로 올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참 다행이다. 이른 아침이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발소리 줄여가며 책을 보는 귀여운 모습, 별점을 많이 올려서 더 좋은 선물을 받으려고, 모둠장이 되려고 자신을 통제하고 바람직한 생활태도를 습관들이는 모습, 이제는 글쓰기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큼 의젓해진 모습, 읽기 책 속에 나오는 동화들을 까만 눈 반짝이며 줄줄 외우며 드러낸 앞니 빠진 모습들은 한 볼때기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예쁘기만 하다. 싸우고 소리 지르고 다쳐서 단 1분도 교실을 비울 수 없어 전전긍긍 했던 지난 일들을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라는 울타리에 처음 들어온 나의 꼬마 고객들에게서 학교에 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소리를 듣는 요즈음, 나도 행복한 교단일기를 써서 종업식 날 아이들 품에 안겨 줄 숙제를 하고 있다. 교단일기를 20명의 어린 왕자들이 읽고 즐거워할 것을 상상하니 나도 행복하다. 아직도 필자에게 아이들을 향한 처음 사랑을 타오르게 하는 우리 반 아이들은 나의 스승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다.”고 한 아미엘의 말처럼 아이들의 아름다운 변모를 글로 노래할 수 있었던 2006년의 한복판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내 생애의 어린 왕자들이니 그들이 남긴 사랑의 언어를 기록으로 남겨 2006년을 가득 채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