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77,374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전북교육청이 최근 초등 교사 합격자를 번복해 논란에 휩싸인 가운데 중등 교사 탈락자에게 재시험 기회를 주기로 해 말썽을 키우고 있다. 1일 도 교육청에 따르면 지난달 발표한 2007학년도 중등 교원 임용 시험에서 불합격했던 A(43ㆍ여)씨에 대해 재시험 기회를 주기로 했다. A씨는 1980년대 당시 국립대 사범대 졸업생중 미임용자를 뜻하는 이른바 '미발추(미발령 교사 완전임용 추진위원회)' 정원으로 응시했으나 2차 전형인 논술 시험에서 답안 작성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불합격했다. A씨는 지난달 말 합격자 발표 이후 "답안 작성 규정이 명확하게 공지되지 않았다"며 이의를 제기해오다 교육청이 지난 23일 초등교사 합격자를 번복 발표하자 교육청에서 밤샘 농성을 벌이는 등 반발 수위를 높여왔다. 교육청 관계자는 "'미발추' 선발 취지가 미임용자에게 교단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인 만큼 재시험 기회를 주기로 했다"며 "A씨의 탈락으로 정원이 1명 비어있는 만큼 논술 전형을 다시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임용 적격 여부를 가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교육부와 고문 변호사 등에 의뢰해 행정적.법률적 자문을 거친 결과 (재시험 전형에)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교육청은 그러나 중등교사 합격자를 발표한 지 한달이 지나서야 뒤늦게 추가 합격자를 선발하기로 한 데다 특정 탈락생에게만 재시험 기회를 주기로 해 임용시험 합격 여부를 번복했다는 지적을 받게 됐다. 교육청은 특히 같은 시기 치러진 초등교사 임용시험에서도 특정 수험생의 부친이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탈락생들이 반발하자 지난 23일 이들 27명을 전원 합력 처리했다. 이에 따라 교육청은 교사 임용시험을 진행하면서 불합격생들의 이의 제기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데다 합격자 발표 이후 뚜렷한 원칙 없이 합격 여부를 번복하게 됐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교육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불가피하게 추가 합격자를 내거나 재시험 기회를 주게 됐지만 다각적으로 검토를 거쳐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이라며 "추후 이러한 문제가 다시 불거지지 않도록 재발방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성차별적 요소가 많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1일 고려대 교육대학원 원경미씨의 석사논문 '교과서의 등장인물이 영어학습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현행 초등학교 3~6학년 영어교과서의 '대화'(Dialogue) 파트를 분석한 결과, 핵심 표현의 화자(話者)는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더 많았다. 전체 128건의 초등학교 대화 파트에는 핵심 표현을 남성이 발언한 경우가 263회인 반면 여성은 이보다 24.6% 적은 211회였다. 초등학교 교과서는 연구개발에서 발행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관장하는 국정교과서로, 대화 파트에서 각 단원의 핵심 표현을 반복적으로 제시해 학생들이 이를 익히게 하고 있다. 또한 성별 출현 장소와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 대화시 남녀 역할 등을 분석한 결과 대화 내용에서도 성차별적 요소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자녀의 간식을 챙겨 주거나 등교 준비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등 양육자와 가사 노동자라는 남성중심 사회의 편견이 많이 반영돼있다는 것이다. 3학년 4장의 'Wash Your Hands'(손을 씻어라)에서는 야외활동을 하다 집에 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빵을 챙겨주며 '손을 씻어라'는 주의를 주고, 3학년 8장의 'It's Snowing'(눈이 와요)과 4학년 4장 'What Time Is It?'(몇시에요?)에서도 어머니는 장갑을 챙겨주고 등교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 또 추석날 외국친구가 집에 방문하는 내용을 담은 5학년 10장 'Do You Want Some More?'(더 드시겠어요?)에서 어머니는 음식만 차려주고 대화에는 참여조차 않는다. 반면 아버지는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 자녀와 부인의 내조를 받는 존재로 묘사됐다. 4학년 7장 'My Father is a Pilot'(내 아버지는 비행사)에서 아버지는 구두손질을 하면서 자신을 돕는 딸에게 'Good Girl'(착한 딸)이라고 칭찬을 하고 4학년 3장 'How Old Are You?'(몇살이세요?)에서는 아버지가 길을 찾아 가족을 인도한다. 논문은 "남성이 단원의 핵심 표현을 주도적으로 말할 경우 학생들이 성적 불평등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며 "남성은 가족의 대표자, 여성은 가사노동자로 단순 구분짓는 것은 21세기 변화된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교원의 질 향상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정부가 도입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교원 자격증 갱신제의 갱신 강습에 대해서, 우수한 교원에 대해서는 강습을 면제할 방침을 결정했다.이는 자민당 교육 재생 특명 위원회(위원장=나카야마 나리아키?모토후미과상)에서 분명히 했다. 면제의 대상은, 도도부현 교육위원회등이 인정하는 「슈퍼 교사」나, 문부 과학상이 표창하는「 우수 교원」등으로 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교원의 지도력을 고려하지 않는 획일적인 연수는 「리더적인 교원까지 현장으로부터 일정기간 빗나가게 하게 된다」 등 반대 의견이있었다. 「슈퍼 교사」는, 각 도도부현등이 지도력의 높은 교원을 인정하는 제도이다. 또,「우수 교원」은 금년도 도입된 것으로, 전국에서 약 760명을표창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번 국회에 교원 자격법 개정안을 제출할 방침이다. 지금까지 기한이 없었던 교원 자격증에, 10 년간의 유효기간을 설정한다. 갱신시에 대학 등에서 강습을 받고, 교원의 지식이나 기능을 쇄신하게 되면, 강습을 수료할 수 없는 교원의 자격증은 효력을 정지시킬 방침이다.
2월달처럼 교육계가 바쁜 달도 없을 것 같습니다. 졸업식이 있어서 그 동안 학교생활을 하면서 정들었던 스승님과 교실을 두고 교문을 나서는 수많은 졸업생들이 학교를 떠났고 3월 새학기에 새내기 신입생을 맞이 할 준비로 한창 바쁜 2월입니다. 그리고 신학년도 학교교육과정을 수립하느라고 지혜를 모으는 준비하는 달입니다. 교원들은 3월 1일자 정기 인사이동으로 많은 선생님들이 정들었던 제자와 동료교직원 앞에서 이임인사를 하고 송별연까지 받으며 정을 떼기가 아쉬운 2월입니다. 근무만료가 되어 밀려나듯이 학교를 옮겨야하는 선생님! 가정사정으로 타 시ㆍ도나 가까운 시ㆍ군으로 학교를 옮겨가는 선생님들은 2월이 너무바빠서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희망에 의해 학교를 옮기는 선생님 ! 승진의 기쁨을 안고 새로운 임지를 찾아가는 선생님! 올해는 명예퇴직을 많이 받아서 교직을 일찍 떠나는 선생님! 아직 젊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주민등록상의 나이 때문에 정년을 맞으시는 선생님! 인사 이동이 있는 2월은 남아있는 선생님들도 정들었던 선생님들을 떠나 보내고 새로운 선생님들을 맞이하게 되니 인사이동이 된것처럼 새로움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한평생을 외길로 2세교육에 몸바쳐 40 여년을 일해온 선생님들이 교직을 떠나는데도 정년퇴임식마저 떳떳하게 하지 못하고 동료직원과 송별연정도로 교직을 마감하는 현실이 한편으로 서글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많은 제자들은 어디에서 무얼하며 살고 있는지 스승이 교직을 떠나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제자사랑이 부족했던 탓일까요? 아니면 스승존경풍토가 사라진 탓일까요? 정년퇴임식을 갖는 선생님들도 많이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다고 사양하거나 간소화해서 치루는 것도 스승의 겸손함 때문이 아닐까요? 명예퇴임을 하시는 많은 선생님들의 교직을 떠나는 모습이 더 쓸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승진과 영전을 하는 선생님들처럼 축전이나 화분을 보내는 풍토도 조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올처럼 숫자도 많은해는 떠나는 분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도리어 정년이나 명예퇴직을 하시는 분 중에는 교직에 있을때 가까이 정을 나누던 분들을 식당으로 초청하여 감사의 정을 나누며 식사대접을 하고 떠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정기 인사이동으로 많은 교원이 자리를 옮기는 2월에는 기쁨과 영광의 축하를 받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뜻대로 인사이동이 안된분들도 극소수지만 있을 텐데 임명권자를 원망하며 신세한탄을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인사를 잘해도 좋은쪽이 있으면 불평을 하는 쪽이 있게 마련인데 마음속에 화를 쌓으면 새로운 임지에서 잘 근무할 수 없을 것입니다. 2월은 축하와 원망이 교차하는 달입니다. 인사에 만족하는 선생님들은 주위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선생님들은 원망보다는 관용하는 마음으로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마음을 추슬러서 새로운 임지에서 주어진 여건대로 교육의 뜻을 펴야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타면 종 두고 싶다”는 속담처럼 현실에 만족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易地思之의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정화하여 2007학년도가 시작되는 희망찬 3월을 맞이하는 긍정적인 선생님을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2월을 마감하였으면 합니다.
요즘 교육뉴스 보기가 겁난다. 교원으로서 자존심이 팍팍 상한다. 어쩌다 우리 교육계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러다가혼자 이런 말도 내뱉는다. "선생님들은 이제 승진을 위하여 자존심 마저 내던졌구나!" "돈의 유혹에는 쉽게 넘어가는 상대가 바로 교사들이로구나!" "교육부의 가산점이라는 미끼에잘도 걸려드는 것이우리 선생님들이구나!" 결국 교육부가 펼치는 교육정책을 보면 선생님 경시 내지는 멸시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독자들은 무슨 교육기사를 보고 리포터의 자존심이 상했나 궁금할 것이다. 근래 세 가지 기사를 보았다. 교원평가제 시범운영학교 506개교 선정, 학교폭력 담당 수당 및 가산점 신설, '영어로 수업' 교사 추가 성과금. 제목만 보아도 선생님들은 낚시 바늘에 가산점과 돈만 매달아 놓으면 달라 붙는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좀더 과장하면 간이고 쓸개도 없는 인간이라고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교원평가제 시범운영학교만 해도 그렇다. 교육부의 억지식 밀어붙이기 교육정책에 협조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리포터는 교원평가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성 신장, 교육력 제고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교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정정당당하게 하라는 것이다.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작년 평가 선도학교 67개교에서 갑자기 올해 506교를 선정한 것도 그렇다. 총 702개교가 응모를 하여 196개교가 탈락하였다니 교사들은 승진을 위해서라면 '교육부 낚시 바늘에 잘도 걸려 드는구나' '교육부 술책에 함께 놀아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리포터는 전임교 교감 시절, 모 부장교사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교감 선생님, 우리 학교는 교육부지정 교원평가 선도학교에 응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대답했을까? "네, 부장님.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승진만을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지금 찬반양론이 분분하고 교육계의 정서가 그것을 지지하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만 살자고 응모할 수는 없습니다." 교감 승진에 당장 0.001이 아쉬운데 시범학교 가산점이라는 커다란 미끼를 누군들 물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자. 우리들이 언제부터 그런 점수에 노예가 되었나? 우리 선생님들은 존경과 자존심, 자부심을먹고 사는 것이다. 줏대 없이 교육부의 천박한 교육정책에 놀아나기 때문에 교육부장관을 비롯한 교육관료들은 선생님들을 계속 깔보는 것이다. 이렇게 나가다간 선생님들은 계속 무시당하고 마는 것이다. 무시해 달라고 자초하는 것이다. 승진도 좋고 가산점도 좋지만 우리 선생님들은 교육부의 잘못된 교육정책을 일갈하고 좌초시킬 힘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제자들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히 교과지도에 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지 않을까?
나의 인생 구호로 삼아온, 아니 내 인생의 목표로 삼아온 언어가 있다. ‘봉주리’, 그 뜻은 나의 전부를 사랑으로 주겠다는 의미이다. 내 이름이 봉희이니까 '봉희를 주겠다' 의미에서 출발한 나만의 어휘이다. 어느덧 18년의 세월 동안,어린 영혼들을 만나서 그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에게많은 것을 배웠다. 그 동안학생들을 만나는 순간 순간,그들에게비취어질 나의 모습에 신경을쓰지 않을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톱스타는 아니더라도 매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내자신에 대한변화와 변신이없다면그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 없다.오히려 그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더욱이일선에서 학생들과 함께 해 본 이라면 누구나알겠지만 인기는 곧 학습 효과와 직결되는 중요 요소 중에 하나다. 요즘 자신의 속마음을열고 다가오는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다. 내가 학생들에게 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여러가지 구호다. 군대도 아니고 데모를 하는 것도 아닌데 웬 구호냐고 말하는 이가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교육자로서의나 자신에 대한 다짐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열정을 다하고픈 마음을 적은 인생구호이기도 하다. 또한 나의 구호는 아이들의 관심을 촉진하는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는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요즘학생들 앞에서"봉주리"를 자주 외치곤 한다.그러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봉잡아" 한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봉주리' 하니까 아이들은 심심한 탓인지 '봉잡아'했을 뿐이다. 물론 그 당시에 모 방송국의 인기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는 봉이야" 라는 말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된 탓도 있었다. 사실, 맨 처음에는 일종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투였다. 또한 얼마 지나서각 방송국의 TV의 광고에 마라톤 선수 이봉주가 나와서 '봉쥬르 라이프'라고 외치는 바람에 내 구호는 더욱 더 빛을 발하게 되었고학생들 사이에서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아무튼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내 인생 구호처럼 되어버렸다. 아니 나의 별명이 되어버렸다고 해야 옳은 말일 게다. 결국 학교에서 '봉주리 선생님' 으로 통하게 되었다. 내가 운영하는 학습 홈페이지의 이름도 "봉주리 국어"가 되어 버렸다. 내가 교정을 거닐다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은 언제나 "봉주리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한다. 그 때문에 수업시간이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에게 외치게 되었다. 물론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어수선하거나 떠들면, 나는 여지없이 "봉주리"하고 외친다. 그러면 아이들도 '봉잡아'하면서 분위기가 일신 바뀐다. 때론 학생들이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아서 서운하거나 상할 때면 "봉주리"하고 외치기도 한다. 스스로아픈 맘속을 달래려는 노력이다. 어느새 구호는 내 스스로 다짐하는 언어이자 내 마음을 추스르는 작은 응원가가 되고 있다. 때론 이 구호처럼 나의 모든 것을 학생들에게 주고 있는가를 반문해 보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한다. 매년 한 학기가 끝나면 나의 모습을 스스로 점검하는 때가 있다. 학기말고사가 끝나면 꼭 행하는 통과의례이다. 기말에는 공부에 대한 집중력이 어느 때보다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이때에 내 자신을 돌아보는 손거울 게임을 하곤 한다. 이 게임의 방법은 한 장의 종이에 우리반 35명의 학생이 서로 돌려가면서 좋은 점과 개선해야 할 점을 30초 안에 적는 것이다. 물론 나도 함께 참여한다. 36장의 종이가 한 바퀴를 돌아서 내게로 돌아오면 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손거울 게임이다. 늘 이 게임을 할 때마다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워지곤 한다. 정말 수없이 다짐하고 결심한 내 삶의 구호인데 실천이 그리 지가 않다. 아니 결심이 자꾸 무너지기가 일쑤다. 지난 해도 손거울 게임을 통해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를 심판하는 준엄한 글도 있고 예리하게 나의 잘못된 습관을 지적하는 내용도 있다. 물론 나를 향한 아부성의 글도 있기는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학생들에게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공개하면서 이렇게 반성하며 용서를 구한다. "나를 통해 혹시 마음이 상하거나 상처를 입은 학생들이 있다면, 사랑으로 혹은 너그러움으로 용서해주길 바랍니다. 더 노력해서 좋은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반 학생들에게 오늘도 이렇게 말하련다. “앞으로는 나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주는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저의 이 마음을 꽉 붙잡아주시길 바랍니다.” "봉주리!” “봉잡아!" 앞으로 끝나지 않을 내 인생의 구호가 될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을 대하는 내 마음이 이 구호처럼 겸손으로 사는 좋은 선생님이면 좋겠는데…. 언제까지 나 자신과의 이 싸움은 계속될지… . 겸손의 새학기를 다시금 준비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학년도 여대생 특화 진로교육과정 지원 대학으로 지난해 시범운영 8곳에 올해 신규지원 16곳을 합친 24개 대학을 선정했다고 1일 밝혔다. 여대생 특화 진로 교육과정 지원사업은 여대생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조기에 발견해 직업 기초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각 대학이 진로와 관련한 교육과정을 개설ㆍ운영하는 것을 도와주는 사업이다. 사업참여를 위한 공모에는 총 62개 대학이 응했으며 이중 24개 대학이 지원대상으로 선정됐다. 교육부는 지난해 시범운영 결과 학생 만족도가 높아 올해 지원대학 범위를 일반 4년제에서 전문대학까지 확대했으며 질 높은 교육을 위해 과정당 50명 내외로 학생 수를 유지할 것을 선정 대학에 권고했다. 선정대학은 동국대 서강대 연세대 충북대 경북대 동의대 순천대 원광대 등 시범운영대학 8곳, 덕성여대 이화여대 건양대 상지대 세명대 계명대 동서대 부산대 제주대 조선대 등 신규지원 4년제 대학 10곳, 동서울대 장안대 강릉영동대 공주영상대 안동과학대 경남정보대 등 신규지원 전문대 6곳 등 총 24개 대학이다.
이혜숙 | 한국방송통신대 연구교수 우리사회에서 학부모는 어떤 존재로 비춰져왔는가? 학교교육에서 후원자이거나 소위 ‘치맛바람’의 근원지, 왜곡된 교육열의 주도 세력쯤으로 다루거나 비춰졌다. 적어도 십여 년 전에는 학부모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최근에 학부모를 보는 시각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교육정책 토론 프로그램에서 학부모 대표가 패널로 반드시 등장하거나 새로운 대입제도의 도입이나 전형제도의 변화 등 학교교육이나 교육정책과 관련하여서 교사단체의 인터뷰와 같은 비중으로 학부모단체의 인터뷰를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굳이 구색 맞추기라고 저평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 만큼 학부모 집단에 대해 교육당국자들이 의식하고 있으며, 이들의 의견 수렴을 중시한다는 반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학부모 집단을 다루는 현재의 모습이 단지 시간 흐름의 결과는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학부모들의 적극적이며 투쟁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참교육학부모회와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등 초기의 학부모운동 단체의 역할이 컸다. 초기엔 학교 후원자 역할에 머물러 해방 이후 초기의 학부모단체는 학교교육의 재정 협력자, 후원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학부모들은 학교교육에서 재정 지원을 담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교육에서 주체로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진 1995년에 이르기까지 학내 학부모 조직은 이름과 성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그 역할에서의 변화는 적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생긴 학내 학부모 후원단체는 ‘후원회’이다. 후원회는 1946년에서 1952년까지의 학교후원조직으로 당시의 취약한 국가교육재정을 보조하였던 단체이다. 후원회의 주요활동은 회비와 찬조금, 기부금, 자축금 등의 명목으로 기금을 모아 재정적인 후원을 하였다. 그러나 학부모에게 과도한 재정적 부담을 강요하는 폐단이 발생함에 따라 교육부에서 ‘사친회’로 개편하였다. 1953년 사친회는 후원회의 폐단을 방지하고, 당시에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PTA(Parent teacher association)의 기능을 도입하여 발족하게 되었다. 사친회는 교사와 학부모가 협력하여 학교교육의 효과를 증진시키겠다는 의욕으로 출발하였으나 사친회비 징수로 인해 심한 파장을 일으켰으며, 특히 교사가 회비 징수를 책임지게 됨으로써 비교육적인 문제와 폐단을 낳게 되었다. 사친회는 후원단체가 아닌 교육단체로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단체였으나 잡부금 등의 징수 문제로 인해 1962년 해산되었다. 이후 각급 학교 산하에 사친회를 폐지하고 ‘기성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의 교육비 전담 능력에 어려움이 컸었는데, 기성회는 1963년 발족하여 긴급한 교육시설의 확보와 학교운영을 지원하여 교육의 정상화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후 기성회비가 학교의 시설 부족을 원조하는 데서 나아가 교재연구비란 명목 하에 교원 생계 보조금 지급으로 성격이 변질되면서 기성회 회비 전용, 회비 징수 등에서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여 폐지되고, 1970년에는 ‘육성회’ 조직이 만들어졌다. 육성회는 1995년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지기까지 학교의 학부모 조직으로 자녀교육을 위해 학부모들이 교육비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다 1995년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학부모들의 학교교육 참여가 제도적으로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학교 내에 학교운영위원회가 제도적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학교 외에서 만들어진 학부모운동 단체의 역할이 컸다.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학교 내 공간에서도 학부모들의 주체적인 참여의 길이 마련되어 50년 이상 학교 재정 충당을 담당한 학부모의 역할에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교조 영향으로 등장한 학부모회 학부모들의 학교교육 참여 촉구에 대한 주장은 학교운영위원회가 학교 내에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학교 내 학부모 조직의 역할이 후원의 역할에 그치는 동안 학교교육의 문제를 제기하던 학부모들이 학교 밖의 모임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면서 학부모의 학교교육 참여 역사는 새로 씌어지게 되었다. 학부모들이 교육주체로서 자신의 권리와 목소리를 드러낸 것은 1989년 학부모운동 단체인 ‘참교육학부모회’를 발족시키면서이다. 이로써 학부모들은 학교교육의 후원자라는 소극적 위치에서 탈피하여 학교교육의 모순을 문제를 제기하고 학교의 변화와 개혁을 요청하는 적극적 위치로 이동하게 된다. 참교육학부모회가 발족하면서 학부모운동이 태동되었는데 이런 움직임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980년대는 교육계에 일대 지각변동이 있던 시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교원노조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이며, 학부모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교사들은 교육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이념을 표방하고 교사의 자주적 단결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89년 5월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를 결성하게 되었다. 전교조의 결성은 다른 교육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우리사회에서 교육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교조의 결성은 국가주도의 교육에 변화를 촉구한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비록 합법성을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지만, 교사뿐 아니라 학부모도 교육주체로서 교육운동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이런 배경에서 학부모운동은 전교조의 결성과 더불어 일어나게 되었다. 전교조가 결성되고 난 몇 달 뒤인 1989년 9월에 참교육학부모회가 결성되고, 그 1년 뒤인 1990년에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가 발족하면서 학부모운동이 교육운동의 전면으로 부각된 것이다. 1989년 5월 28일 전교조가 결성되면서 학부모들도 교육주체 선언을 하여 그 맥을 이었다. 이 당시에 학부모들은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실현을 주장하는 전교조를 교육문제 해결의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단체로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교육문제는 교사, 학부모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할 때만이 해결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기존의 육성회, 새마을 어머니회가 문교부, 교육청의 전교조 탄압에 동원되어 어용 학부모의 모습을 드러내자, 많은 학부모들이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며 자주적 학부모 모임의 필요성을 요청하였고 이것이 참교육학부모회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게 되었다. 변화하는 학부모들의 사회적 인식 참교육학부모회는 1989년 3월 11일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에서 민주 학부모 건설 준비 위원회 주최로 개최된 마산지역 학부모 중심의 모임을 그 시초로 하였다. 이후 발기인 성격의 모임이 창립총회로 이어지고, 대구, 의정부, 서울, 광주 등의 순으로 지역 학부모회가 결성되면서, 1989년 9월 22일에 단일 조직으로서의 참교육학부모회가 창립되었다. 참교육학부모회는 학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면서 겪는 고민을 통하여 좀더 나은 교육환경을 조성해 주고 싶다는 학부모들의 자생적인 사회적 인식을 바탕으로 교육 정책에서 소외되어 온 학부모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고 이와 함께 교사, 학생, 사회 각 계층의 의견도 함께 수용하여 교육문제에 대한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또한 교육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그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하여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 학부모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참교육학부모회는 발족 초기부터 전교조가 주창하는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위한 참교육 운동’에 동의하는 등 전교조 지원 및 연대의 차원에서 출발하였다. 참교육학부모회는 교사들이 결성한 전교조의 영향으로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결성한 단체이다. 참교육학부모회 임원이 교육비평의 한 좌담회에서의 말에서 전교조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참교육학부모회가 출범할 당시에는 전교조 교사에 대한 탄핵이 극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육성회 간부 같은 극소수 학부모들이 전교조 교사를 불순한 교사로 매도하면서 교사를 찾아내는 데 일조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이건 안 된다. 학부모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학부모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당시 학부모들은 교육체제 전반에 대해서, 그리고 극소수 부유층이 주도하는 ‘치맛바람’에 대해서 깊은 불신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전교조 사태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것이었다고 봅니다.” 참교육학부모회가 전교조의 영향을 받아 발족한 데 비해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는 전교조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전교조의 결성이라는 사회적,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 하에서 설립된 단체이다.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는 1989년 3월 크리스천 아카데미 주체로 열린 ‘중등교육 정상화를 위한 대화모임’에 참석했던 학부모 모임을 주축으로 1989년 비공식 모임인 두 차례의 워크숍 개최를 통해, 1989년 7월에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고 10월 이후 60여 명의 준비위원이 모여 학부모 연대의 정식 출범을 위한 2차의 준비활동을 가졌다. 이후 1990년 3월 3일 발기인 대회를 가진 후 1990년 4월 28일 창립되었다. 교육의 주체로서 학교교육에 참여 학부모운동 단체의 설립은 당시 사회의 민주화 흐름과 관계가 깊다. 1980년대 우리사회는 거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기존의 지배적인 질서와 새롭게 창출되는 대안적인 질서가 대립·갈등하는 시기였다. 우리사회를 규율하고 있는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려고 의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이른바 ‘민주화 운동’으로 명명하였고,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모든 행위들을 민주화 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이런 사회 각 부문에서의 민주화를 향한 요구와 시도가 교육현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교육운동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1989년 참교육학부모회와 1990년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의 설립으로 학부모도 교육의 한 주체로서 자신들의 교육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전개하여 교육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학부모운동을 통해 학부모들은 개별적인 대응이 아닌 조직적인 대응으로 학교교육의 문제와 모순을 제기해 나가면서 기존의 개별 학부모들이 보여 왔던 학교와의 관계 변화를 주도하여 왔다. 교육에서 소외되어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던 학부모들이 학부모운동 단체의 활동을 통해 당당히 교육에서 주체적 역할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교육학부모회와 인간실현학부모연대의 설립은 학부모 참여의 양상이 기존의 후원, 지원의 성격에서 학부모의 자녀 교육에서의 권리의식을 주장하고, 이런 주장을 사회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사회적 성격을 띠는 학부모운동의 전개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학부모 참여의 패러다임을 바꾼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양대 학부모운동 단체의 설립은 그 동안 교육논의에서 소외되던 학부모들이 학부모의 관점으로서 자녀의 학교교육에 참여하는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이후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 학부모의 학교교육 참여의 길을 확대하는 데 공헌하게 되었다. 이들 단체는 ‘촌지 안주고 안 받기 운동’, ‘육성회비반환청구소송’, ‘학교운영에 학부모 참여 보장’ 등 기존 학부모 조직과 다른 주장을 통해 학부모 참여의 새 패러다임을 형성해 나갔으며, 교육의 주체로서 학부모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한 몫을 담당하였다. 1990년대 이후 다양한 변화 생겨나 1990년대 이후 시민단체에 의한 시민운동의 활성화로 교육운동은 시민단체에 의해 주도되는 성격을 보여준다. 학부모운동 역시 학부모 및 시민이 연대되는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학부모운동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학부모들로 구성된 기존 학부모운동 단체와 함께 시민의 학교교육 참여를 촉구하는 교육시민운동단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 결성된 ‘교육개혁과교육자치를위한시민회의(교육민회)’는 학부모, 시민이 함께 모여 만든 최초의 교육시민운동단체라 할 수 있다. 교육민회의 등장은 학부모운동 단체들은 물론이고 교육에 관심이 있는 시민단체들 간의 협력과 연대활동을 촉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교육민회는 국가적 정책대안과 교육개혁을 위한 운동을 중심과제로 삼아 교육시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90년대 중반에는 ‘새교육공동체를위한시민모임’이 교육개혁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교육바로세우기전국협의회’, ‘올바른교육개혁을위한범국민연대회의’, ‘정의로운사회를위한교육운동협의회’, ‘참교육시민모임’ 등의 교육시민단체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도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들의모임’, ‘교육공동체시민연합’, ‘학교사랑학부모연합회’, ‘자녀교육학부모연대’들이 만들어졌으며, 가장 최근인 2006년 9월에는 ‘뉴라이트학부모연합’이 발족되었다. 학부모운동 단체가 발족한 후에 생겨난 교육시민단체들은 기존 학부모운동 단체와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보충수업폐지 반대, 0교시 수업유지, 모의고사 수시 실시,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 찬성, 평준화 해제 요구 등 경쟁 중심적 교육구조가 유지되는 일련의 교육정책을 지지하면서 기존 학부모운동 단체와 그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2000년대 들어 학부모운동 단체 또는 교육시민단체가 성격이 다르며, 그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2006년에 결성된 뉴라이트학부모연합은 뉴라이트운동의 연장선에서 결성된 단체로서 교육시민단체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90년대 이후 교육시민단체의 출현은 학부모운동의 기조를 보수와 진보의 양대 진영으로 재편하는 듯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사안별로 의견이 첨예하게 달라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학부모운동이 다양한 교육시민단체의 출현으로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서 벗어나 그 목소리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학부모가 균질적이지 않은 집단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교육시민단체의 목소리는 더욱 다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양정호 |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한국은 광복 이후 지난 60여 년 동안 교육문제에 있어서 가장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다. 한국교육의 다양한 변화는 가장 직접적으로 학교구성원인 교직원과 학생에게 가장 먼저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학생을 뒷바라지하는 학부모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면에서 교육현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거처럼 학교에서 주로 생활하는 교사나 학생에 초점을 맞춘 호의에 머물기보다는 학부모가 겪어온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다. 변치 않는 학부모의 자녀교육열 최근 각 가정의 자녀수가 줄면서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크게 늘었다는 언론보도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이지만 과연 이전과 비교해서 더 늘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자료를 보면 학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는 자녀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좋은 가문의 규수와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한양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학원이 밀집해있는 서울 대치동으로 이사 가는 것과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광복 이후에 우리나라 학부모의 자녀교육관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60년대와 현재의 사례를 에피소드형식으로 재구성해서 보면 와 같다. 1960년대 - 중학교 입학시험에 엿기름 대신 엿을 만들 수 있는 물질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무즙을 넣어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항의하는 학부모들의 ‘무즙 사건’이 일어났다. -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너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배워야 하고 못 배우면 농사나 짓고 사람대접을 못 받으며 모든 뒷바라지를 다할 테니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였다. 2000년대 - 서울의 세 엄마시리즈가 유행하는데 자녀가 공부가 어렵다고 하면 대치동 엄마는 다른 학원으로 옮겨보자고 하고 압구정동 엄마는 이제 유학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하며 용산 동부이촌동 엄마는 집 주위에 있는 빌딩들이 다 우리 것이니 걱정 말라고 토닥였다고 한다. - 아이의 실력은 엄마의 능력에 달려있다며 약사를 그만두고 자녀를 위해 학원 스케줄을 짜고 교육정보를 수집하고 입시 설명회 참석으로 바쁘지만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후회는 없다는 당당한 엄마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사례를 보면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부모가 자녀교육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다만 사회가 발전하고 시간이 흘러오면서 자녀교육에 대한 주도권이 아버지에서 어머니에게로 완전히 넘어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과거처럼 학부모가 학교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교육을 통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이 점차 약화되면서 이제는 단순히 학부모가 자녀교육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을 지원하는 역할에서 적극적으로 자녀교육을 직접 설계하는 매니저로서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최근에 서점가에서 ‘~엄마들의 자녀교육 성공기’라는 책들이 증가하고 몇몇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학부모가 이렇게 수동적인 모습에서 적극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고등교육 기회의 확대와 현재의 어려운 교육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고학력화로 자녀교육에 참여해 광복 이후에 단기간 내에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와 더불어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기회의 확대는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60년 전에는 가장 뒤쳐진 후진국이면서 초등교육을 받은 비율도 상당히 낮은 수준을 유지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 고등학교 진학률이 70%에 이르게 되었고 현재는 거의 100%에 육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학교 진학률도 2005년도에는 1960년대에 비해 무려 2.6배 상승한 82%까지 증가하였다. 즉,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졸업한 후에도 10명 중 8명이 전문대 이상의 대학에 진학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등학교나 대학교 진학률이 증가하게 되면서 학부모 구성도 질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 대부분의 학부모가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다면 지금은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약 절반 이상이 대학교를 졸업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학부모의 학력이 크게 증가하면서 자연히 자녀에 대한 관심과 자녀의 학교생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처럼 단순히 학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 정보를 수집하려고 노력하며 수집된 정보를 학부모가 서로 교환하면서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학부모들은 학교 또는 교사만이 자녀에게 의미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 자신도 어느 단계까지는 가르치거나 자녀교육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도 한 원인 또한 학부모들이 이렇게 자녀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현재 우리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학부모들의 최대 관심은 자신의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느냐, 또는 좀더 구체적으로 명문대학에 진학하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자녀의 명문대학 진학여부를 부모의 사회적 체면과 어느 정도 연계시키는 독특한 한국문화에서는 더더욱 자녀교육 열풍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고등교육을 받은 학부모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학부모 집단은 누구보다도 우리사회에서 대학출신이라는 기득권과 특정 명문대학 출신들이 사회지배층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자녀들이 좋은 초중등학교를 가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과거와 달리 최근 나타나고 있는 공교육 약화로 인한 학교교육의 불신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몇십 년 전에는 학교에 자녀를 보내 놓고 자녀가 학교에서 열심히만 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이전과 같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학부모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자연스럽게 학부모들은 공교육보다 사교육에 더 의지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조사된 결과를 보면 학생 10명 중에서 7~8명이 사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사교육비도 급격히 증가해서 가계지출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공교육 불신과 사교육 확대로 인해 조기유학을 보내는 편이 차라리 났다는 자조석인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한다. 이런 교육현실 속에서 자녀를 키워야 하는 학부모들의 입장에서 볼 때 최근 나타나고 있는 지나친 자녀교육의 관심도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현실에 적응해 가는 학부모 그럼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우리교육의 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을까?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만을 생각하는 미시적 시각으로 교육 전반을 바라 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좀 더 적극적으로 또는 조직적으로 학부모들이 자녀의 학교교육에 참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학부모가 학교의 한 구성원으로 학교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부분은 현재 모든 학교에서 운영되고 있는 학교운영위원회나 학부모회 두 가지이다. 예전에는 사친회, 기성회, 육성회라는 이름으로 학부모가 단순히 학교를 후원하는 역할에 그쳤다면 지금은 학교운영위원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현재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학부모 위원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로 주로 구성되었거나 학교운영위원회에 대한 홍보부족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몰래 참여해 의도했던 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도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학부모들이 학교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학부모들 입장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학부모들이 보다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교육문제에 참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1980년대에 나타난 교육운동의 영향으로 조직된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1989)’,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1990)’를 시작으로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모임(2002)’에 이르기까지 전국 규모의 학부모단체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학부모단체들은 과거의 학부모단체들과 확연히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즉, 단순히 학교 후원조직을 넘어서 교육의 다양한 현안에 집단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학부모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학부모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부모와 학부모단체의 영향력은 상당히 커졌다. 예를 들어 각종 교육관련 정책 간담회, 토론회, 공청회는 물론 정부 주도의 각종 위원회에도 학부모단체의 대표로서 학부모가 참가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으며 교육부나 국회의원도 역시 학부모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있다. 이렇게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학부모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자신의 자녀교육에만 각자 개별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교육주체로서의 책임감 가져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과거와 현재의 학부모들은 관심 정도나 집단구성 그리고 위상 면에서 상당히 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 지금 시점에서 학부모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교육시키고 우리나라 교육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지금은 광복 이후에 변화된 학부모의 모습에 적합한 사고와 행동이 필요한 시기이다. 우선 교육정책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흔히 언론에서는 우리나라 교육 문제를 학부모의 과도한 교육열로 돌리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그런지 적극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다양한 교육정책의 변화로 인해 희생된 집단이 학부모일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자녀가 지속적으로 학교에 다니도록 지원한 학부모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학부모도 교육정책이 마련된 이후에 영향을 받는 수동적 입장에 놓이기 보다는 납세자로서, 자녀의 학부모로서 적극적으로 자녀의 교육현실이 개선될 수 있도록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학교, 믿고 맡길 수 있는 학교, 사교육이 필요 없는 학교가 되도록 수요자의 입장에서 정부에 요구할 것은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노력에 더해서 학부모단체를 통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 교사를 포함한 다른 교육집단들도 학부모의 이런 요구들이 제시될 가능성에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학교의 한 구성원으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학부모가 해야 한다. 학교는 교직원, 학생, 학부모가 서로 교류하는 공간이다. 단순히 어느 한 집단만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면 학교 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자녀가 피해를 보거나 하면 학부모는 학교 교직원에게 직접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시험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자녀 일로 교사를 폭행하는 경우에서처럼 적절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지고 학부모나 교직원 모두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학생들이 만들어 유명해진 〈학교대사전〉에 표현된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를 봐도 이 두 집단은 서로 긴장관계에 있고 ‘평상시엔 교사가 우위를 점하나 학교에서 사고나 불상사가 일어나 학부모들이 분노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부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학교 차원에서도 학부모의 의견이 적절한 절차를 통해 수렴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학부모들도 책임감을 가지고 학교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될 때 교직원, 학생, 학부모 모두가 상생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된 여건에 맞는 태도 보여야 마지막으로 자기개발을 통해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자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최대 관심분야가 교육일 것이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희생을 해서라도 지원해 줄 각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자녀수가 한명인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여기에서 문제는 과거와 달라진 사회현상에 대한 고려를 현재 학부모들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전에는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했는데 지금은 학교교육에 더해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자연히 자녀의 사교육비를 부담하느라 대부분의 학부모는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게 된다. 30대나 40대가 대부분인 학부모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지출하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노후보장을 위한 투자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은퇴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수명이 늘어나면서 미래사회에는 노후에 어떻게 생활할 지가 점차 큰 문제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학부모들은 자녀교육에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노후에 대해서는 준비를 할 겨를이 전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학부모들은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자기개발을 비롯한 체계적인 노후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자료를 보면 지금의 자녀세대는 학부모 세대처럼 부모봉양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다를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사회생활을 할 시대의 사회여건은 자녀들이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벅찰 가능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학부모는 지난 60년 동안 많이 변해왔고 교육여건도 상당히 달라졌다. 이제 학부모들은 현재의 변화된 위상에 걸맞은 책임감을 가지고 자녀교육에 임할 필요가 있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학부모가 자녀교육에 대한 부담을 전혀 가지지 않고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모든 일이 학부모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는 사회가 오길 기대해 본다.
박보영 | 연세대 교육연구소 전문연구원 언론 통해 보이는 학부모의 모습 기사와 뉴스 등 언론 매체를 통해 그려지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매우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라서,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우리 사회의 교육을 망치고 교실을 붕괴시키는 주범이 꼭 학부모들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언론 매체를 통해 그려지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지만, 그 대표적인 양상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학생의 권리에 대한 수호자 혹은 대변인으로서 학부모의 모습이다. 언론 매체는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의 전반적인 인권 수호에 대해 합리적인 활동을 벌이는 일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학부모들의 이의 제기 방법이 폭력적이거나, 이의 제기 과정에서 당황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 매우 선정적인 방식으로 학부모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2006년 5월 청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무릎 꿇은 교사’ 사건을 보더라도 언론은 교사가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 꿇는 일이 발생한 전체적인 정황과 구조적 요인 등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교사가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만을 선정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교권이 침해되는 것이 모두 ‘지나친’ 학부모들 때문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학부모들은 흡사 ‘공교육 붕괴’라는 제목의 폭력무협활극 주인공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학부모가 학생의 권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곧 교권에 대한 위협인 것처럼 연결시키는 논리적 비약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의 모든 구조적 문제까지도 뒤집어쓰는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둘째는 대학입시의 최전선에서 학생의 전문적인 매니저로서 학부모들의 모습이다. 이들의 모습은 기존 전업주부의 모습이 아니라, 입시의 경향과 대책, 사교육시장에 대한 정보통으로서 준전문가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입시 매니저로서 가장 전문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대치동’의 엄마들은 ‘대치동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그에 관련된 책들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에 뒤질세라 ‘목동 엄마’들도 신드롬 만들어내기에 열중하고 있으니 한국 사회에서 학부모 역할이란 자녀에 대한 책임, 교육현장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부동산 가격에 대한 책임(?)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매우 막중한 역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학부모들의 모습은 언론과 시장의 부추김과 더불어 학부모들 스스로의 욕망이 결합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묘사된 모습 이외에도 학부모들의 모습은 자식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때로는 자식을 위해 새벽기도에도 나가고 천배도 올리는 모습으로, 때로는 사소한 교육문제에까지 민원을 제기하는 모습 등으로 다양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위에서 묘사된 어떠한 모습도 학부모들의 실제를 심층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고, 대개 이기적이거나 천박하게 묘사하고 있다. 경험과 다른 현실에 혼란 가중돼 그러나 실제로 학부모들은 자녀양육이나 교육현장과 관계맺음을 어떤 획기적이거나 선정적인 사건들의 모음을 통하여 경험하기보다는 꾸준히 반복되는 일상성을 통하여 경험하고 있다. 일상성 속에서 경험되는 학부모 역할이란 참으로 수고스럽고 혼란스러워서 대단한 에너지와 노동력이 투입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경험하는 이러한 수고스러움과 혼란스러움은 한국 사회 학부모들의 대표적 정서인 ‘불안감’으로 고스란히 축적된다. 현재 한국 사회의 학부모들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학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지가 혼란스럽다. 전통사회에서는 대가족제도 내에서 부모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조부모 세대로부터 전수받았다면, 현재의 학부모 세대들은 핵가족화된 가족 구조 속에서 부모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을 받을 수가 없다. 또한 산업사회에서 가정이란 아무나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는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자녀교육은 부모에게, 실제로는 어머니 혼자에게 맡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전 세대보다 자녀의 수가 감소되어 자녀 양육과 학부모 역할에 드는 노동력이 줄어들 것 같지만 이것은 산술적인 수치일 뿐 자녀에 대한 기대감은 이전 세대보다 더 커지고, 한 자녀 혹은 두 자녀를 어떻게 키워내는가가 인생의 가치와 맞물려 평가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학부모들은 상당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예전에는 자녀들이 많은 형제들 속에서 상호작용을 경험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자생력 있게 성장하였는데, 현재 한 자녀 혹은 두 자녀로 이루어진 자녀 세대들은 이전 세대보다 심각한 정서적 빈곤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녀들에게만 몰입하기에는 학부모 세대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짐이 매우 무겁다. 생활세계에서의 무한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학부모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공부하고 교육받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벌 위주의 현실도 불안감 키워 둘째, 한국사회의 현실 또한 학부모 역할을 어렵게 만든다. 학부모들 스스로가 사회생활을 경험해보아서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지만,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학벌사회’이다. 학벌이 곧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이며, 심지어는 학벌이 공공연히 능력과 도덕성을 가늠하는 척도로도 사용된다는 것을 학부모들은 알고 있다. 학부모들 자신이 그것을 여실히 경험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자식들의 학벌을 관리하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고, 이것이 학부모들 사이의 불안을 무한대로 증폭시킨다. 또한 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해도, 보육과 교육에 대해 한국사회에서는 사회 전체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모두가 부모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이 여유롭고 행복한 일이기보다는 굉장히 팍팍한 일이 된다. 한국사회에서 출산을 꺼리게 만드는 가장 주된 이유라는 사교육은 그 시장이 점점 확대되어 학부모들의 무한한 지출만을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한국사회는 현재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은 없고 전체적인 복지의 수준은 일천(日淺)하다. 학부모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녀의 사교육에 대한 부담과 더불어 자신의 노후에 대한 부담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학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상구가 없이 앞뒤로 꽉꽉 막힌 미로에 갇힌 것과 같다. 셋째, 공교육과의 조율 없이 이루어지는 대학입시제도의 변화방향도 학부모들에게는 큰 혼란거리이다. 자녀교육 문제와 관련하여 학부모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민감한 부분은 바로 대학입시와 관련된 부분일 터인데, 교육정책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양상도 학부모들로서는 따라잡기가 힘들다. 대학입시제도는 변화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장기적인 숙고 속에서 공교육 제도와 조화를 이루며 이루어지는 것인지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8학년도 대학입시제도는 항간에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2008학년도 대학입시제도가 수학능력시험과 내신 성적, 논술시험의 반영 비율을 비슷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이전의 대학입시제도와는 달리 수험생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내신 성적의 반영비율을 높이는 것이나, 논술시험을 강화 혹은 통합논술의 형태로 변형하여 창의적 사고력이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수학능력시험과 내신 성적, 논술시험의 반영비율을 비슷한 수준으로 조정한다는 것도 탓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까지 공교육 제도를 통해 논술시험을 준비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폭넓은 독서와 토론, 창의적인 사고와 글쓰기 등이 공교육 제도에 적응하기에 방해가 되어왔던 것이 한국교육의 현실이다. 공교육의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입시제도는 결국 사교육에 대한 의존이라는 당연한 해결방안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학부모들은 자녀들과 더불어 굉장한 불안과 혼란, 수고스러움을 통하여 교육현장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학부모들은 언론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거칠고 아무 생각이 없거나,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스캔들 속에 있다기보다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 묵묵히 불안을 걷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학부모 둘러싼 환경의 지각 변동 그렇다면 학부모들의 실제 생활과 학부모들에 대한 이미지 사이에 이러한 간극이 발생하는 것은 왜인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과장된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서서히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기에 그 변화가 감지되는 것인가? 이러한 혼란스러운 질문 속에서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학부모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규정해나가야 하는 과도기에 있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자기이해에 영향을 주는 힘들은 여러 각도에서 작용하고 있지만, 그 핵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학부모들의 변화에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주는 것은 ‘교육 수요자’로서의 자기이해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교육에 시장경제논리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교육을 인격적 관계의 측면으로 보는 입장과 더불어 서비스의 공급과 수요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입장이 저변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1995년에 ‘5·31교육개혁안’이 발표된 이후로 교육개혁의 방향이 ‘수요자 중심교육’으로 설정되면서, 학부모들이 스스로를 교육 수요자라는 정체성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을 교육 수요자라고 인식하는 학부모들은 학생들과 더불어 최고의 만족을 주는 교육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게 된다. 이것은 학교에서 경험하는 교육의 질 뿐만 아니라, 학교의 생활공간, 전체적인 복지와 배려의 수준 전체에 대한 평가를 포괄하게 된다. 학부모가 스스로를 교육의 수요자로 이해할 때, 학부모는 교사를 포함한 교육 전반에 대해 평가할 권리를 가지게 되며, 동시에 다양한 교육서비스 중 만족스러운 교육서비스를 선택할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만족스럽지 못한 교육서비스에 대해서는 민원을 제기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를 하는 등 불만을 표현하게 된다. 둘째, 학부모들이 자신을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는 ‘인권의식’의 확대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인권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미흡한 수준이나마 인권의식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전체적인 인권과 교육권, 학습권 등의 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학부모들은 학생의 보호자라는 측면에서 학교생활에서 학생의 인권이 보호되도록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이 가진 권리의식이 성숙하고 균형 있게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과도기적인 문제점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은 아직 자신의 권리 주장과 더불어 타인의 권리 존중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측면이 있고, 동시에 성숙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학부모들은 그들이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최선의 것이 입시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실은 학부모들이 학생들의 존엄성을 가장 심하게 훼손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다. 셋째, 학부모들이 공식적인 통로를 통하여 학교교육과 교육제도 전반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제 학부모들은 사친회, 육성회, 어머니회 등과 같이 학교의 행사에 조력하는 형태와 달리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하여 학교의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학부모 단체들을 통해 교육현장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서 비전과 안목을 가지고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학부모들은 교육현장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이 아닌 연대의 차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경험하고 있다. 과도기에 접어든 학부모의 역할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학부모들이 스스로를 교육 수요자와 권리의 주체로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과 교육 참여의 통로가 공식화되었다는 흐름들은 서로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두 학부모들에게 이전보다 큰 권한을 부여한다는 점이고,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보다 강력해질 전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관찰해보면 권한을 나누어야 할 시점이 오면 항상 어김없이 사회에 큰 진통이 있었다. 양반과 상민, 귀족과 노예,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이 그들의 권한을 나누기 시작할 때 갈등과 폭력, 혼란과 분쟁, 투쟁과 대립, 가해자와 피해자, 선구자와 희생양이 꼭 발생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을 겪더라도 권한의 나눔은 늘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하였다. 우리 교육현장에도 이제 예상된 혼란이 진행될 것이다. 교육에 대한 권한을 나누기 위한 혼란이다. 이제까지 교육현장에서는 사실 교권(敎權)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제 학생과 학부모들이 이러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함께 나누기를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무릎 꿇은 교사’와 같은 일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우리가 ‘교육 3주체’에 대해 논의를 해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예견되는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나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2007년에는 교사들이 스스로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학생과 학부모에게 다가가는 진정한 의미의 교권(敎權)이 확립되기를, 학생들이 자신의 권리와 더불어 스승의 권위를 존중함으로써 진정한 배움이 생동하기를,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학생의 삶을 살리고, 교사의 기(氣)를 살리고, 학교의 생동감을 살리고, 교육현장의 평화를 일구어내는 진정한 의미의 상생이 넘치기를 기대해본다. ‘교육 3주체’가 권한을 평화롭게 나눔으로써 우리 교육이 보다 인간화되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사회의 현실도 학부모 역할을 어렵게 만든다. 우선 학벌 위주의 현실이 그렇다. 학벌이 능력과 도덕성을 가늠하는 사회를 경험한 학부모들은 자연스럽게 자식들의 학벌을 관리하게 된다. 또한 보육과 교육을 부모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적 분위기와 공교육과의 조율 없이 이루어지는 대학입시제도의 변화 방향도 학부모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학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복잡한 미로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김성열 | 경남대 교육학과 교수 오늘날 학부모가 수행하는 역할은 이전에 비하여 다양하다. 재정후원자의 역할을 넘어서서 자원봉사자로서 그리고 학교교육과 관련한 의사결정자로서, 교육위원과 교육감선출권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학부모들은 이제 학교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데 전문성을 가지고 보다 직접적으로 참여할 것이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증대되는 것을 기대하면서도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학부모들이 수행하는 역할과 새롭게 수행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역할에 대하여 논의하려고 한다. ‘우리 아이’를 위한 지원 필요해 초·중등학교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역할은 재정적 후원자로서 시작되었다.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으로 규정되었지만, 열악한 국가재정 때문에 무상으로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학부모가 일정액의 교육비를 부담해야만 했다. 학부모들이 재정적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학부모조직이 구성되었다. 시대에 따라 학부모조직은 후원회, 사친회, 기성회, 육성회 등으로 변천되어 왔다. 초등학교 교육의 완전 무상 의무교육화 그리고 중학교 교육의 완전 무상 의무교육화가 이루어진 후, 재정적 후원자로서의 학부모 역할 수행 조직이었던 육성회는 폐지되었다. 사실 그동안 학부모들의 재정적 후원자로서의 역할 수행은 끊임없는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논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인한 의무교육비 부담주체로서 학부모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이 논란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초·중학교 교육의 완전무상화가 이루어지면서 해소되었다. 다른 하나는 공적으로 제도화되지 않은 일부 학부모들의 학교운영에 대한 재정적 기여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었다. 학교발전기금의 조성을 제도화함으로써 일부 학부모들의 재정적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공식화하였지만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학부모들이 재정적 후원자로서 역할을 떠맡는 것을 완전히 폐지해야 하는가? 모든 학부모가 의무교육단계에서 발생하는 교육비를 공적(公的)으로 부담하는 역할은 이미 폐지되었고, 더 이상 요구되지도 않는다. 국가가 새로 태어난 세대들을 민주시민으로 키우기 위한 공통의 교육을 하는 데 드는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미 부담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학교가 특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거나 운동부를 구성하여 운영하거나 특정의 시설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비용도 여전히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물론 공공 재원으로 부담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단위학교가 주체가 되어 발전기금을 조성하여 그러한 소요재정을 충당할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발전기금의 조성이 그것에 참여하지 않은 학부모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에서 개별학교의 특별한 소요재정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유 있는 학부모들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제도를 통하여 재정적 기여를 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단위학교 수준에서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를 위하여 기여하려는 마음과 행동은 소중히 여겨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단위학교 수준에서 재정적 기여를 하는데 내가 그렇지 못한다고 해서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부모 능력 활용할 수 있어야 학부모들이 단위학교 수준에서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자원봉사자이다. 학부모들은 학교행사에 노력 봉사를 하는 일, 교통지도를 하는 일, 학교급식 운영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일, 일일교사로 참여하거나 보조교사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해왔다. 학부모들의 자원봉사활동은 크게 보아 노력을 제공하는 자원봉사와 전문적 지식을 제공하는 봉사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학부모들의 자원봉사활동은 학교가 요청하는 도움에 노력을 제공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학부모들은 학교행사에 노력 봉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학교체육대회, 연구학교 시범발표회 등 외부에서 오는 방문객이 많은 행사를 치룰 때에는 학부모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학부모들도 그러한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교통지도를 하는 것과 같은 자원봉사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참여하는 학부모들은 녹색어머니회를 조직하여 효율적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학부모들은 급식식자재 검수요원으로, 학교급식에 모니터요원으로 참여하거나 배식하는 데 참여하여 봉사하기도 한다. 전문지식을 제공하는 자원봉사 활동은 최근에 들면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학부모에게 구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 또한 전문성을 갖춘 학부모들이 늘어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교원들이 부족하여 제대로 운영되지 않은 중·고등학교에서의 수준별 교육과정도 전문성을 갖춘 학부모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면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전문성을 갖춘 학부모들에게 시민강사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교통비 등에 해당하는 상징적 수준의 보상을 하여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데 활용하고 있는데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자원봉사자로서의 학부모 역할은 학교의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충분하게 갖출 수 없는 한 여전히 요구될 수밖에 없다. 학교는 또한 학교행사에 학부모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러나 학부모들이 자원봉사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활성화되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우선, 학교에서 학부모들의 자원봉사를 귀찮아하거나, 크게 반겨하지 않는 경우들도 없지 않다. 학부모들의 자원봉사활동을 위한 자생조직이 불법찬조금 등을 조성하여 학교가 곤란한 일을 당하는 경우를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학교에 학부모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할 개방적 분위기가 아직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일부 학부모들이 자원봉사활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면서 치맛바람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일부 학부모들만이 자원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는 듯하다. 학부모들의 다양한 능력을 학교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자원봉사는 활성화되어야 한다. 학교는 학부모들의 노력과 전문성을 자원봉사를 통하여 제공받으려는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학부모들은 학교행사나 일을 돕는 데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 자녀들을 키우는 데 학부모로서 도움을 학교에 보태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를 권장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공동 목표 달성하기 위한 노력 학부모들이 학교운영과정에서 의사결정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의사결정자로서 학부모 역할이 제도화된 것은 학교운영위원회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학교운영위원회는 학부모들로 하여금 재정적 후원자로서나 자원봉사자로서 역할을 넘어서서 학교운영과정에 학부모로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학교장 중심의 닫힌 학교운영을 학교구성주체 중심의 열린 운영구조로 바꿈으로써 학교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고 지역의 실정과 특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을 창의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도입되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단위학교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사결정과정에 학교의 구성주체들을 참여시킴으로써 학교장 중심의 ‘닫힌’ 의사결정체계를 단위학교 구성주체 중심인 ‘열린’ 의사결정체계로 바꾸어 놓은 제도이다.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하여 단위학교 의사결정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단위학교 의사결정자로서 학부모들은 무엇보다도 학교운영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하려는 의욕을 가지는 것이 요구된다. 학교운영위원회는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학교운영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약 학부모들 사이에 학교운영에 대한 무관심이 만연한다면, 학교운영위원회는 실패의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부모들과 지역사회 인사들은 학교운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하며, 특히 학교운영에 관하여 식견과 합리성을 가진 학부모들은 참여하는 것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학부모들은 또한 교장, 교사들과 학교교육을 공동으로 논의하고 학교교육에 대한 책무성을 함께 나눠가지는 동반자적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부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위원회를 이용하여 학부모들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동반자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무조건 관철시키려고 하기에 앞서 교장이나 교사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동반자적 관계는 동등한 기반위에서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운영위원은 학교장의 이중적 지위에서 오는 고충을 이해하고 협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학교장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로 일관한다면 이는 학교현장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집행자인 학교장을 무력하게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학교운영위원회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행하는 자신들의 모든 활동이 개인 자격이 아닌 학부모들의 대표자격이라는 점을 언제나 유념하도록 해야 한다. 학부모 학교운영위원은 개인적 판단에 따라 활동하기 보다는 전체 학부모들의 의사를 파악하여, 비록 그것이 자신의 판단과 다를지라도 대변해야 한다. 학부모 학교운영위원은 안건을 상정하거나 발의하기 전에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며, 학교운영위원회에서 논의된 사항을 학부모들에게 전달하고 보고하여야 한다. 의식 있는 유권자로서의 조건 교육위원과 교육감의 선출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지방교육자치에관한법률’이 지난 2006년 정기국회에서 개정되었다. 학교운영위원이 선출하던 교육위원과 교육감을 이제는 주민들이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학교운영위원이던 학부모들만이 참여하던 선거에 모든 학부모가 유권자로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2006년 8월 교육위원 선거까지 적용되었던 학교운영위원으로 구성되는 교육감 또는 교육위원 선출선거인단에 의한 교육감과 교육위원의 선출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일부에서는 지역교육의 수장(首長)이나 대의기관의 구성원을 학교운영위원인 일부 학부모들이 선출하는 것은 지역주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거인단의 규모가 작은 데서 초래되는 비리와 담합 등의 가능성, 학교운영위원의 30~40%를 차지하는 교원집단의 과도한 영향력의 작용 가능성들도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금년 2월 14일에 실시된 부산교육감선거부터 적용된 주민직선은 지역 교육운영의 책임자 선출에 지역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고, 그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게 하였다. 주민직선은 주민들로 하여금 지역 교육운영의 책임을 진 사람에게 잘잘못을 직·간접으로 따져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함으로써 주민통제의 원리라는 지방교육자치제의 본래적 의미를 실현한다. 교육위원과 교육감의 주민직선은 교원들의 집단이기주의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요구들에서 교육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학부모들은 교육위원과 교육감의 선출권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자신들의 커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학부모들은 내 아이의 교육에 도움이 되는 기술적 능력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거시적 안목으로 우리 지역의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지역단위에서 학부모회를 조직하는 것도 그러한 조건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부모 조직은 교육감과 교육위원 선출권자인 학부모들을 의식 있는 유권자로 만드는 일, 학부모들의 교육적 요구를 선거과정에 공론화하는 일 등을 할 수 있다. 능력 갖추기 위한 제도 필요해 이제까지 살핀 바와 같이 학부모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그리고 과중하기까지 하다. 어떤 이의 지적처럼 학부모의 공적 역할은 커져 버렸고, 이에 따라 학부모들은 짐이 무거워짐을 느끼고 있다. 학부모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역할수행능력을 충분하게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학부모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게 현 실정이다. “학교와 교육은 학부모의 도움 없이는 개선될 수 없다”는 인식을 우리 모두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학부모들의 역할 수행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학부모지원 프로그램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학부모 지원을 위한 다양한 활동(정보제공, 참여촉진, 역량구축, 재정지원 등)에 관하여 국가수준, 지방 및 지역수준, 단위학교 수준의 의무를 규정하는 가칭 ‘학부모지원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학부모지원에 관한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미국의 ‘교육개혁법(NCLB ACT)’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학부모들이 학교운영과정에 의사결정자로서의 역할이 제도화된 것은 학교운영위원회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반면에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해 압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경향도 있다. 학부모들은 학교교육을 공동으로 논의하고 학교교육에 대한 책무성을 함께 나눠가지는 동반자적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반자적 관계는 동등한 기반위에서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김철수 | 경남 거제중앙고 교사, 사진작가 오염된 물질 걸러주는 하천습지 상류에서 떠내려온 퇴적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가다 저 편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주로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이 퇴적물은 식물의 종자를 받아들여 쉽게 자리를 잡게 해 준다. 이곳에 자리 잡은 식물들이 왕성하게 자라고, 그 종류가 늘어나면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찾아와 생물의 지상낙원을 만들게 된다. 하천에 있는 습지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강둑 옆에 길게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것으로 하천변습지라 하고, 홍수 때 물살이 세어지면 중간 중간에 수로가 발달된다. 담양습지는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강 가운데 퇴적물이 쌓여 섬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섬의 윗부분은 빠른 강물에 깎이고, 아랫부분은 중간에서 꼬리 모양으로 퇴적물이 쌓이는데, 마치 그 모습이 고구마를 닮아 있다. 이 섬의 이름을 강 가운데 만들어진 섬이라고 하여 하중도(河中島, 하중은 강물에 의해 떠 내러온 퇴적물임)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강의 밤섬이 있다. 이런 하천습지는 각 마을과 도시에서 내려오는 생활하수나 축산폐수를 걸려주는 역할을 한다. 하천습지에서 자라는 갈대와 고마리 및 버들류가 오염된 물에 포함된 질소와 인 성분을 흡수해 성장하면서 물을 맑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대와 버들류가 자라는 하천습지를 오염된 물질을 걸러내고 맑게 해주는 자연 정화조라고 부른다. 풍월산천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 예부터 사람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에 모여 마을을 만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공동의 생활체를 이루고 살면서 문화와 전통을 가꾸어 왔는데, 담양습지를 안고 있는 영산강도 예외는 아니다. 전남 담양군 용면 용추봉에서 발원된 영산강은 115.5㎞를 여행하다가 황해로 몸을 섞는다. 1976년 용추봉 아래에 만들어진 담양호는 사시사철 물을 내려 보내 담양습지가 마를 날이 없도록 한다. 담양호에서 내려온 물이 담양읍을 지나기 전에, 금성천이 몸을 섞어 그 수량을 늘리고, 관방제림(官防堤林)의 나무들에게 단물을 제공한다. 담양읍을 관통하고 내려온 강물에 동에서 서로 흘려오는 오례천이 합쳐지면 더욱 강폭이 넓어지는데, 두 물이 합쳐지는 이곳을 바라보고 면앙정(俛仰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면앙정은 ‘우러러보면 하늘이, 내려다보면 땅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 백년 살고자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정자는 중종 28년(1533)에 송순이 건립하였는데, 이황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고, 후학을 기르며 학문을 논한 곳이다. 이곳은 송순의 시문활동 근거지이면서, 당대 시인들이 즐겨 찾는 호남제일의 시문학 장소였다. 지금도 정자 안에는 그와 교류한 이황, 김인후, 임제, 임억령의 시편들이 판각되어 걸려 있다. 봉산면에서 시작되는 5번 군도를 따라 수북면으로 가면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삼우교를 만나게 된다. 삼우교를 지나 바로 좌회전하여 강둑을 따라 약 5㎞를 내려가면 장성-담양 고속국도의 일부인 영산교를 만나게 된다. 삼우교에서 영산교까지의 구간을 특별히 담양습지라고 부른다. 강물이 영산교에 이르기 전, 다시 한 번 남도의 들녘을 적시고 내려온 증암천을 받아들이는데, 특별히 잘 발달된 하천습지의 특징을 보이는 구간은 증암천이 합쳐지는 부분에서 영산교까지의 2㎞ 구간이다. 증암천의 물이 영산강에 섞이는 지점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정자가 있는데, 이것이 송강정(松江亭)이다. 송강정은 환벽당(環碧堂), 식영정(息影亭)과 함께 송강 정철의 대표적인 유적지인데, 특히 송강정은 벼슬에서 물러난 송강이 초막을 짓고 4년간 살면서 은거생활을 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한 많은 시가와 가사를 지었다. 사미인곡은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을 남편과 이별하고 사는 부인의 심사에 비겨 자신의 충정을 고백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글은 아름다운 가사문학의 정취가 배어나는 대표적인 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사문학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아름다움을 풍겼기에, 후세 사람들은 정자 앞을 흐르는 증암천을 송강으로도 부르고 있다. 달리 말하면 영산강 상류에 해당하는 담양습지는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송순과 정철은 사시사철 유연히 흐르는 강물과 넓은 농토를 바라보면서 자연에 묻혀 사는 이의 아름다운 삶을 노래하였다. 지금의 담양습지는 식물과 동물이 잘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자연을 사랑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전국의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예전처럼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입을 열면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있다. 방문객 반기는 담양습지 생물들 2004년 7월 환경부는 전남 담양군의 대전면, 봉산면, 수북면과 광주 용강동 일대 영산강 상류 98만㎡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하였다. 이곳은 하천습지로는 처음으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담양습지’로 명명되었다. 담양습지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물길을 따라 선버들과 버드나무숲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달뿌리풀과 줄 군락이 밀집되어 자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상징 식물인 대나무 군락이 하천변에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어 멸종위기종인 매와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 보호야생동물인 삵, 다묵장어, 맹꽁이 등이 서식하고 있어 보전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밝혀졌다.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이곳에 살고 있는 식물은 205종류, 조류는 58종으로 확인되었는데, 여름철에는 많은 개체수의 해오라기, 쇠백로, 중대백로 등이 찾고 있다. 하천바닥에 무리지어 자라는 달뿌리풀은 갈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식물이다. 갈대와 다른 점은 마디에 털이 있고, 잎의 크기가 훨씬 작은데 있다. 줄기가 땅바닥에 닿으면 마디에서 뿌리를 내어 강변에 길게 자라는데, 마치 그 모습이 강변을 달려가는 모습이라 ‘달려가면서 뿌리를 내는 풀’이라는 달뿌리풀이 되었다. 갈대가 주로 강의 하류에 자란다면, 달뿌리풀은 모든 산의 계곡이나 강의 상류에 자라는 하천 보호 식물이다. 홍수 시 담양습지를 찾으면 물속에 잠긴 버드나무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고, 이제 물속에 잠긴 식물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며칠 후 물이 빠지면, 물속에 잠겨 있던 버드나무와 달뿌리풀은 거짓말처럼 처음의 모습을 금방 회복해 간다. 이런 강인한 생명력을 보면서 이곳에 나타난 생물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곳에 적응하여 살아온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담양습지에는 하천의 가장자리에 다수의 물웅덩이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물 흐름이 완만하여 많은 물속식물들이 살고 있고, 그래서 많은 물고기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이곳에 살고 있는 물속식물에는 물수세미, 말즘, 붕어마름, 검정말, 마름, 개구리밥 등이다. 마름이 가득 자라고 있는 물웅덩이의 바닥에는 많은 우렁이가 기어 다니고, 이곳에서 낚시하는 아저씨의 손길은 붕어, 참붕어, 피라미를 들어올리기에 마냥 바쁘다. 홍수를 막기 위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하천 둑은 자연습지와 농경지를 가로 막는 장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천 둑은 사람들에 의해 자주 훼손을 당하지만, 해마다 다양한 식물이 싹을 틔워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하천 둑에 자라는 식물들 중 일부는 외국에서 들어와 번성을 누리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전부터 우리와 같이 삶을 이어온 것들이다. 쑥, 박주가리, 돌콩, 차풀, 민들레, 자귀풀, 사위질빵,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 갈퀴나물, 인동, 환삼덩굴, 칡, 익모초…. 그 중에서 가장 번성을 누리는 것은 환삼덩굴이라는 일년생풀인데, 손가락 모양을 닮은 잎을 가지고 있다. 한삼, 또는 율초라는 이름을 가진 환삼덩굴은 줄기나 잎 꼭지에 바늘 같은 털이 있어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가는데 사용한다. 몸에 쉽게 달라붙는 모양이 어머니가 아기의 손을 잡은듯하다고 하여, 아기를 잃은 어느 어머니가 죽어서 이 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담양습지의 하천 둑에 가면, 거칠면서도 반가운 어머니의 손처럼 다정한 환삼덩굴의 잎이 손처럼 펼치고 있어 마치 우리를 반기는 것 같이 보인다. 우리 자연의 식구 된 귀화식물들 귀화식물은 사람들의 늘어난 교류 활동으로 자생지에서 우리나라로 유입돼 우리 산야에서 자라게 된 것과 수입하여 재배하는 식물이 논밭을 벗어나 야생화된 것을 말한다. 이들의 특징은 강한 번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시의 도로변이나 자연이 많이 훼손되어 기존의 자생 식물이 살기 어려운 지역에 주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 귀화식물이 나타나는 비율이 높으면 자연이 많이 파괴되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귀화식물의 분포가 자연 파괴 정도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나타난 귀화식물은 약 180종이 분포하고 있으며, 확인되지 않은 종까지 합치면 200여 종이 되리라 추측된다. 담양습지에도 여러 종류의 귀화식물이 나타나는데, 달맞이꽃, 소루쟁이, 미국가막사리, 도꼬마리, 돼지풀, 미국자리공, 개망초, 망초, 나팔꽃, 서양민들레, 아카시나무 등이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 그 이름 달맞이꽃~’ 다른 꽃들이 아름다움을 뽐낼 때, 저 혼자 부끄러워 하다가 다른 꽃들이 잠든 시간인 밤에만 노란색 꽃을 피우는 달맞이꽃은 ‘달을 맞이하는 꽃’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 꽃말도 소원과 기다림이 되었다.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달만을 사랑한 님프가 쥬피터의 노여움을 사 달맞이꽃이 되었고, 그래서 밤이 되면 사랑하는 달의 신 다이아나를 보면서 부끄럽게 꽃잎을 연다고 한다. 돼지풀은 잎이 쑥 모양과 닮아 쑥잎풀이라고도 하는데, 아메리카에서 들여왔다. 돼지는 먹지 못하는 것이 없는 잡식성 동물인데, 이 풀은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돼지만 먹을 수 있다고 돼지풀이라고 한다. 이것의 꽃가루는 몸에 열이 나게 하는 알레르기를 유발한다. 망초 종류는 전 세계에 250여 종이 있는데, 이중 우리나라에는 민망초, 개망초, 실망초, 망초, 주걱개망초 등이 있다. 망초란 이름은 밭에 이 식물들이 들어오면 농작물이 망하고 잘 자라지 못한다고 붙여졌다. 또는 이 식물이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해에 우리나라 전역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기에 나라가 망할 때 들어온 식물이라는 의미도 있다. 망초는 작은 꽃들이 꽃줄기에 많이 달린다고 잔꽃풀이라고 하고, 개망초는 꽃의 모양이 계란을 익힌 모양이라 어린이들은 보통 계란부침풀이라고 한다. 이처럼 달맞이꽃, 돼지풀, 망초, 개망초는 우리 자연의 식구가 되었기에 더 이상 미워할 수 없다. 단지 이들이 귀중한 자연 유산인 담양습지에 빠르게 잘 조화되고 융화되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과 자연 공존하는 공간으로 예로부터 담양은 대나무로 유명하다. 대나무는 선비의 정신을 대표하는 식물이고, 계절에 관계없이 푸르고 꿋꿋하여 절개를 상징한다. 대나무의 푸른 기상은 죽어서도 악기에 남아 오랫동안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대나무가 있는 곳에 음악이 없다는 것은 ‘팥 없는 붕어빵’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담양습지를 주변으로 한 영산강 유역에는 가사문학이 발달했다. 지금도 가사문학의 흔적은 소쇄원(瀟灑園), 면앙정, 송강정, 환벽당, 식영정에 남아 있고, 이들을 감싸고 있는 자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담양습지 주변의 대나무밭에 들어가면 대나무의 흔들림이 노래와 율동이 되고, 습지를 흘려가는 물소리는 창이 된다. 자연습지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든 곳도 담양이다. 관방제림은 국가에서 홍수나 바람을 막기 위해 강둑에 만든 인공적인 숲인데, 인조 26년(1648)에 처음으로 조성되어 식재되기 시작하였다. 약 2㎞의 제방에 수령 200년 이상 된 푸조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개서어나무 등이 거대한 풍치림을 이루고 있다. 그 풍치가 아름답고 유명하여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특히 이 숲과 하천은 사람의 삶터로 그대로 이용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담양장터와 어울려진 관방제림은 그 자체가 생존의 공간이다. 그 외에도 담양에는 대나무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죽림원과 죽박물관이 있고, 수삼나무(메타세퀘이아)길과 담양호가 있어 자연미를 가슴 깊이 느끼게 해 준다. 대나무와 담양이 인연을 맺은 것은 예전부터이지만, 많은 대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홍수로 농경지가 침수되기 시작한 1960년대 무렵이다. 하천변의 농경지는 잦은 홍수로 경작이 어려웠고, 이것을 이겨내는 길은 대나무 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량으로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비록 강둑이 만들어지고 대나무의 인기가 시들하면서 많은 대나무밭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하천 둑 가까이에는 많은 대나무들이 자생하여 담양습지와 더불어 학술 및 생태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자연유산이 되었다. 이처럼 담양습지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 자체이다. 예전부터 담양습지와 더불어 살아온 이곳 사람들은 넓은 농토에서 풍부한 양식을, 넓게 펼쳐진 대나무밭에서 경제적인 이득과 여유로움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몸으로 노래를 불러 가사문학을 발전시켰다. 지금도 담양습지는 많은 생물들에게 쉼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귀화식물들까지도 받아들여 융화된 생태계를 만들고, 여기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심상을 일으키게 한다.
불이의 경계 언젠가 충남 서산에 있는 부석사를 찾았을 때입니다. 템플스테이를 하며 절에 머물고 있던 외국인들이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벽안의 그들을 보면서 ‘아, 이 산사체험이야말로 상당한 경쟁력을 가진 우리 문화상품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이란 달리 사찰이라고 불립니다. 사찰에서 찰(刹)이란 찰간(刹竿)을 말합니다. 찰간이란 곧 당간(幢竿)을 이르는 것이니,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높은 기둥에 걸어두는 깃발 따위를 말합니다. 이 당간을 고정시키는 장치가 찰간지주, 곧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되는 것이죠. 사찰이라는 의미에서 보듯 우리나라 절의 상징이 곧 당간지주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당간지주는 일주문보다 앞서서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화엄사와 같이 당간지주가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경우는 당간지주가 들어선 이후 그 절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절 입구의 당간지주는 이곳에서부터 성역이라는 것을 일러주며, 속세에 찌든 마음을 버리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한편, 당간지주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상징하고, 나아가 이 성속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깨침을 던지고 있습니다. 성과 속의 경계를 나타내면서 성과 속이 둘이 아니라 같다는 이런 엉터리 논리가 어디 있냐고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불’이라는 이 짧은 말에는 ‘너와 내가 남이 아니다’라는 말도 성립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다름 아니다’라는 의미도 숨어 있습니다. 말장난 같은 그 오묘한 의미를 되새겨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나와 너는 분명 다릅니다만, 나는 네가 있기에 그리고 너는 내가 있기에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하루 살았다는 것은 결국 오늘 하루를 죽었다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흔히 성인이라고 부르는 예수, 공자, 간디,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들도 속된 세상에서 빛을 남긴 분들이지, 어디 멀리 외계에서 뚝 떨어진 분들이 아니잖습니까. 당간이 사라진 당간지주를 지나 일주문을 통과할 때면 성속불이의 오묘한 논리에 빠져듭니다. 경계라는 것이 단절이 아닌 동일의 개념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이번 호는 불이의 경계, 당간지주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당간지주의 모범답안 당간지주는 크게 당을 게양하는 길다란 기둥인 당간(幢竿),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지주(支柱), 당간 아랫부분을 받쳐주는 간대석, 간대석과 지주를 받쳐주는 기단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을 갖춰 제대로 남아 있는 당간지주로는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 등이 있습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동서로 90m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 있습니다. 발굴 결과 이곳에 서 있던 당간은 돌로 만들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아무래도 익산 지역이 질 좋은 화강암이 많이 산출되다 보니 백제 무왕 재위 시절에는 돌로 만든 미륵사지 동서탑이 들어섰고, 통일신라기 이후에는 당간까지도 돌로 만들었나 봅니다. 동쪽에 있는 당간지주 한 쪽에 조그마한 돌기둥이 서 있습니다. 당간지주의 키에 비하면 땅꼬마라고 불릴 만큼 작은 데요, 그 부러진 돌기둥이 바로 당간석의 한 부분입니다. 기단에는 안상(眼象)이 잘 드러나 있고 지주의 바깥쪽으로 선을 다듬어 놓았습니다. 최근에 익산의 한 석공업자가 익산의 돌을 사용해 주차장 인근에 당간을 복원해 두었습니다만, 지주 안쪽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인 간공(杆孔)이 나타나지 않는 등 정확도는 떨어져 보입니다. 하지만 당간이 있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참고자료로 활용할 만합니다. 금산사 당간지주도 기단부에는 안상을 새기고 양 지주의 바깥 면에 가장자리를 따라 세로띠를 돋을새김 하였고, 미륵사지의 것과 같이 지주 안쪽에 간공을 세 군데 뚫었습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와 함께 완벽한 당간지주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알려진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학자수(學者樹)라고 불리는 울창한 송림 속에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서 있습니다. 소수서원 경내에 들어서면 절터에 있던 석등 부재나 초석, 광배 등의 석물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절터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지요. 숙수사지 당간지주나 앞서 언급한 당간지주와 같이 지주 안쪽에는 간공 외에 장식을 두지 않고, 바깥 면에는 세로로 돋은 선인 돌대(突帶)로 장식하고, 지주 끝부분엔 굴곡을 주어 치미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양식이 통일신라기 당간지주의 정형이자 모범답안입니다. 이런 양식은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나 가야산 자락의 법수사지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도 마찬가지인데, 근래에 기단부를 새로이 복원해 놓았습니다. 당간지주도 개성시대 신라 도읍이었던 경주에서는 당간지주를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는 기단이나 간대석 부분이 땅에 묻혀있어 하부구조를 알 수 없으나 지주 바깥 부분에 여덟 잎의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렇게 당간지주에 연화문을 새긴 경우는 중원 미륵리사지, 고창 교운리 당간지주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황룡사지는 백제 미륵사지와 버금가는 대규모 절터입니다. 이곳에는 부러진 당간지주가 남아 있습니다. 비록 파손되어 그 용도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을 처지가 되었지만 이렇게 큰 절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옛날에는 꽤나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법합니다. 그 황룡사지 북쪽에 구황동 당간지주가 서 있습니다. 그 당간지주가 분황사의 것인지, 또 다른 절의 소속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 당간지주는 간대석이 거북모양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길쭉하고 우뚝 솟은 당간을 등에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딛는 거북을 상상해 보노라면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거북이 부도비의 귀부로 활용되는 경우는 많으나 이렇게 간대석으로 활용되는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사천왕사지 당간지주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으나 안과 바깥을 모두 뚫은 간공이 원과 직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어 산청 단속사지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망덕사지 당간지주의 경우는 다소 뻘쭘한 구석이 있어 보입니다. 그 연유인즉, 원래 이 망덕사를 짓게 된 것은 사천왕사를 확인하기 위해 온 당나라 사신 악붕귀를 속이기 위한 눈가림으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사천왕사 아래에 급히 지어진 절을 사천왕사라고 안내받은 사신은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고 일렀음에서 망덕사로 불리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망덕사지 당간지주는 별다른 특징 없이 밋밋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사천왕사지 당간지주와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서로 신경전을 벌이듯 그렇게 서 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 대군을 문두루비법으로 대파한 데는 이 사천왕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망덕사 또한 자기가 사천왕사라며 우쭐대기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경주시내 주택가에 덩그러니 자리해 있는 삼랑사지 당간지주는 나원리 탑과 함께 경주의 백색미인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백색미가 돋보입니다. 특히 일반적인 지주와는 달리 지주 가운데 부분이 군살 빠진 듯 날씬하네요.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그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 최대입니다. 당간지주 사방에는 어떠한 조각도 없어 꾸미지 않은 투박한 멋이 있기에 한 번 더 눈길이 가고 손길이 갑니다. 어마어마한 지주 위, 아래에 원형 간공이 있는데, 간공에 손을 넣어 두드리면 아주 얇고 투명한 소리가 울립니다. 외강내유(外剛內柔)란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요? 참, 그 오른쪽 지주 바깥쪽 간공에 머리를 집어넣으면 신기하게 머리가 쑥 들어간답니다. 머리가 크신 분은 안 빠질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PAGE BREAK]철당간 돌이나 철로 만든 당간은 아직도 몇 남아 있습니다. 나주 동문 밖 당간이나 담양 읍내리 당간의 경우처럼 당간석 이음새에 부분에 철테로 두른 경우도 있습니다만 철당간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계룡산 갑사 철당간은 지름 50cm의 철통 24개를 이어 그 높이가 약 15m에 달합니다. 원래 28개의 철통이 있었으나 1893년 벼락을 맞아 윗부분에 있던 4개의 철통이 부러졌다고 합니다. 기단부에 보이는 안상으로 보아 역시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아마도 용머리를 한 용두보당(龍頭寶幢)이나 보륜 등의 장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용두보당은 당간 상륜부를 장식했던 용머리 모양의 장식물로 당을 걸도록 장치되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존 당간 중에서 상륜부까지 완벽하게 남아있는 사례는 없습니다. 다만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동제 용두보당이 당간지주용이 아닌 실내용으로 작게 만들어져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경북 풍기에서도 용두보당이 출토되었는데, 당간에 당을 게양할 때 도르레를 이용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안성 칠장사 철당간도 원래는 30단이었으나 현재 철통 14단만이 남아 있습니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철통의 지름이 좁아지고 있으며 갑사 철당간과 같이 철통과 철통이 만나는 연결 부위에 철띠를 둘러놓았습니다. 법주사 철당간은 고려 목종 7년(1006년)에 처음 조성되었고 당시의 높이는 약 16m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년)에 대원군의 명에 의해 당백전(當百錢)이 주조되면서 이곳 철당간이 수거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후 1910년경에 철통 30단으로 복원되어진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철당간의 대표 주자는 청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입니다. 대개의 당간지주가 보물로 지정된 것에 비하면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어 몸값부터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간은 사람과 자동차의 소음에 시달리는 번화가에 자리하고 있어서 언제 훼손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용두사는 고려시대 사찰인데 화강석으로 지주를 세우고 철통 30개를 연결하여 당간을 세웠습니다. 현재는 20개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중 밑에서 세 번째의 철통에 ‘용두사철당기’가 새겨져 있는데 그 끝 부분에 ‘준풍(峻豊) 3년’에 만들었으며 그 시기는 고려 광종 때인 962년으로 밝혀졌습니다. 워낙 금싸라기 땅이라 한 때 당간지주 바로 옆까지 건물이 들어서기도 했다지만, 청주시민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주변에 제법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습니다.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고장 청주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찍어낸 고장이면서, 당간에 명문을 남긴 유일한 국보 문화재를 가져 가히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본고장이라 일컬을만합니다. 당간이 아닌 지주에 명문이 적힌 경우도 있습니다.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의 서쪽 지주 바깥쪽에는 모두 6행 123자의 글자가 쓰여 있는데, 이 명문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년) 8월 6일에 돌을 골라 이듬해 2월 30일에 건립을 마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간지주에 명문을 새기는 경우도 아주 드문 경우라 하겠습니다. 괘불지주로 당간지주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괘불지주(掛佛支柱)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이 괘불지주는 당간지주와 그 생김새는 닮았으나 그 기능은 많이 다릅니다. 괘불지주는 불교행사가 있을 경우 법당 앞에 불화를 걸어두고 그 앞에서 법회를 갖던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도 초파일이나 개산대제 때 큰 절에서 괘불지주에 대형 불화를 내걸고 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소위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말이 유래가 됩니다. 달라진 교원승진규정개정안이 발표되면서 일선 학교가 야단법석입니다. 내 몸 뚱아리를 휘감아 나가는 늦겨울 찬바람과 맞선 절터에서, 대답 없는 당간지주에게 물어봅니다. 정말이지, 가르치는 데만 전념할 수는 없을까 하고…. 이렇게 우물쭈물하던 차에 또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또 그렇게…. |울산 옥현초 교사
모든 시작은 누구에게나 항상 설렘으로 다가온다. 입학, 첫 출근, 첫 데이트, 결혼, 이사 등 모든 새로운 시작은 기대와 희망,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으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중에서도 3월은 우리 선생님들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을 설렘으로 잔잔히 흥분시키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올해로 교직생활 30년을 맞는 필자에게도 3월은 역시 설렘의 계절로 다가온다. 이번에 강의에 들어올 학생들은 어떤 학생들일까, 어떻게 하면 새 학기를 좀더 재미있고 알차게 보낼까 등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1학기를 시작하게 된다. 기대와 설렘으로 3월을 맞는 것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기 초가 되면 항상 필자를 긴장시키는 것은 학생들의 강의평가도 아니요, 성과급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얼마나 존경과 신뢰의 대상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이란 선생님을 존경하고 신뢰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육이란 학생들이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수용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 학생들이 신뢰와 존경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강의는 한낱 학점을 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 필자는 학생들의 평가대상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지 평가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지난해는 교원평가와 관련하여 교육부와 교원단체 간의 갈등이 다른 어느 때 못지않게 심각한 한 해였다. 교원평가 논란의 핵심은 무슨 내용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이냐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평가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이고 평가의 결과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교사평가의 주체로 처음에는 학생과 학부모가 포함되는 것으로 논의되다가 교장, 교감과 동료교사로 한정된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교육부는 교사들이 학생과 학부모의 요구에 부응하여 교육에 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사에 대한 평가주체로 학생과 학부모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평가의 대상으로 인식될 때보다는 존경과 신뢰의 대상으로 인식될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얻을 수 있는 이점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권위를 가져야 한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의 권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은 우선 교사 자신이 노력해야 할 측면과 교육부나 사회, 그리고 학부모가 노력해야 할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교사가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교사 자신이 교육적인 면에서 전문성이 있어야 할 것이며, 솔선수범으로 학생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사가 가질 수 있는 실질적인 권위이며, 권위의 내재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교사가 교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가르치는 일에 정통하고, 애타적인 동기에 의해 학생들에게 봉사하고 헌신한다면 학생들은 선생님을 동일시 대상으로 여기고 신뢰하고 존경함으로써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선생님의 권위가 한층 더 인정되기 위해서는 교육부나 사회, 그리고 학부모 등 주위에서도 선생님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교육부는 제도적으로 교사들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해주고 경제적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주어야 한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선생님을 존경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며, 방송이나 매스컴은 사회적으로 선생님들을 존경할 수 있는 풍토 조성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교사가 예뻐서라기보다는 선생님들을 그렇게 존경하고 신뢰해야만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학생이나 학부모가 선생님을 평가의 대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존경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얻는 이점들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새 학년 새 학기를 시작하는 이 3월에 교사들도 선생님으로 존경받을 수 있도록 각오를 새롭게 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며, 교육부도 어떻게 하면 선생님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 고심하여 정책을 개발해야만 한다. 아울러 학부모들도 진정으로 내 자녀들을 생각한다면 내 자식만을 잘 지도해주길 바라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며, 특히 자녀들 앞에서 선생님을 비난함으로써 선생님의 권위를 허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학년 초만 되면 경쟁적으로 촌지문제 등을 부각시켜 교사 전체를 매도하는 매스컴도 자성할 필요가 있다. 선생님, 그들은 평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신년사(新年辭)에는 ‘교육’이란 단어가 두 번 등장한다. “양극화와 고용 없는 성장, 부동산, 교육문제로 민생이 어렵고 저출산․고령화 등 미래의 불안도 있습니다”라며 한 번, “교육문제는 아직도 힘들고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빠르게 좋아지고 있습니다”라며 또 한 번. 교육계 입장에서는 좀 섭섭하기도 하지만 산적한 국정현안을 감안, 그나마 감사할 따름이라고 하면 너무 관대하다는 핀잔을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한명숙 국무총리의 신년사에는 ‘교(敎)’ 자도 없으니 말이다. 한 총리의 신년사(877자)는 대통령의 것(1240자)보다 양(量)이 적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신년사는 새해를 맞이하며 하는 공식적인 인사말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각 기관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역점사업이나 새로운 정책비전을 파악할 수 있다. 주요업무의 흐름과 기관장의 철학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신년사가 읽히지 않고 있다. 시․도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교육감 신년사 조회 수를 보면 소속 공무원의 1%에 못 미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교육감들이 신년사에서 밝힌 내용 몇 가지만 보자. 나근형 인천시교육감은 “폭력 없는 학교․학업중단 없는 학교․담배연기 없는 학교 등 ‘3무 학교’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효 교육을 강화하여 즐거운 가정과 학교가 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장환 전남도교육감은 “애교심과 애향심, 애국심을 기르는 교육활동에 주력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병인 경북도교육감은 “인성교육을 최우선 시책으로 펼치기 위해 학교 실정에 맞는 과제를 선정하여 바른생활 실천운동을 전개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인권교육과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나라사랑 실천운동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한장수 강원도교육감이 내 놓은 ‘자연환경 보전과 인간애 실현 및 남북교류와 평화협력의 기반 조성을 위한 ‘PLaN(Peace Life and Nature) 교육’은 제목만으로도 흥미롭다. 선생님들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도 많다. 김진춘 경기도교육감은 산하 기관장 신년하례회에서 학부모와 학생이 담임을 선택할 수 있는 ‘담임배정제도개선방안’에 대해 언급하고 지역청의 시범운영을 당부하기도 했다. 양상언 제주특별자치도교육감은 전국에서 가장 작지만 전국 최고의 교육수준, 나아가 국제적인 교육경쟁력 확보를 위해 외국어 교육 강화와 ‘제주국제고(가칭)’ 설립 등을 골자로 한 ‘글로벌 제주교육 7대 비전’을 제시했다. 물론 최규호 전북도교육감처럼 덕담으로 일관하거나 텍스트는 없고 동영상 신년사만 올려 읽어보기 불편한 곳도 있지만 한번쯤 찾아볼 가치는 충분하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학기를 맞은 선생님들에게 늦게나마 해당 교육감의 신년사 일독(一讀)을 권한다.
누군가와 언쟁하다가 상대가 하는 공격의 말 중에, 듣자마자 숨이 탁 막히는 말이 있다. 하나는 “나잇값이나 하세요!”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값이나 하세요!”하는 것이다. 이 말은 상대가 아무리 정중하고 부드럽고 경어체로 말해도 듣는 쪽에서는 치명적인 내상(內傷)을 입는다. 내상을 입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차라리 천한 쌍욕보다도 더 듣기 고약하다. 특히 상대가 나보다 한 살이라도 젊은 경우는 그 모욕감이 오래 남는다. 그리고 오랜 모욕감에 비례하여 두고두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부질없는 질문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개의 욕 가운데 어느 욕이 더 심한 욕일까 하고 묻는다면, 어떤 쪽이라고 답을 할지 모르겠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어 딱히 정답을 제시할 형편은 아니다. 내 경우라면 나는 ‘이름값이나 제대로 하라.’는 말이 더 심한 욕으로 느껴진다. 부연하자면 단순히 욕의 표현이 심하다는 문제라기보다, 이 욕으로 인하여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심리 기제가 더 강하게 작동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나잇값이나 하라는 말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경고로 쉽사리 해석이 되는데, 이름값을 못한단 말은 또 무엇인가. ‘이름값이나 제대로 하라’는 말 속에는 내 본명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는 물론이고 내가 달고 다니는 각종 직함들에 대한 불신과 조롱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직함이야 내가 얻은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내 이름 석 자야말로 함부로 조롱당할 일이 아니다. 그 이름을 지어 주신 분들이 내 부모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부모님까지도 함께 조롱을 당하게 된 것 같아서, 더욱 괘씸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저잣거리에서 하는 거칠고 질박한 댓거리 욕 가운데, “너 같은 놈을 낳고도 (네 어머니는) 미역국을 먹었겠지!”라는 것도 있다. 이름을 잘 보전하는 일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일임을 실감하게 한다. 사람의 이름에는 기대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의 기대이다. 하나는 이름의 의미처럼 괜찮은 사람이 되어달라는 기대일 것이다. 이른바 존재에 대한 기대이다. 다른 하나는 이 이름이 만천하에 높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기대일 것이다. 이른바 소통적 기대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이름만큼 ‘소통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숨어 있는 것이 또 달리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이든 그 부모가 이름을 지어 줄 때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세상에 나아가 그 이름을 크게 떨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꼭꼭 담는다. 착하고 아름다운 딸이 되기를 기대하며 ‘선미(善美)’라고 이름 짓는 부모의 마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내 이름만 해도 그렇다. 조부께서 내 이름을 ‘동방 인(寅)’자와 ‘터 기(基)’자를 가져와 ‘인기(寅基)’라고 지으셨을 때는, ‘동방의 기틀’이 되라는 큰 기대를 가지셨다고 한다. 이 나이 되도록 내 마음 하나도 제대로 닦지 못하는 나로서는 조상의 기대를 소중하게도 간직하지만 송구할 수밖에 없다. 교육학자 ‘이칭찬’ 교수를 처음 접했을 때, 그의 이름 속에서 내가 느꼈던 그 부모님이 품으셨을 사랑과 기대는 자못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어렵고 살기 힘들었던 옛날에는 ‘개똥이’라는 이름도 드물지 않았다. 설사 ‘개똥이’라고 이름을 붙이더라도 이름 속에 숨어 있는 기원의 의미는 어느 고상한 이름 못지않게 간절하고 각별한 맥락을 끼고 있다. 흙먼지 풀풀 나는 시골 길가에 마른 잡초와 자갈들 틈새에서 한 철 내내 말라 나딩구는 개똥! 그 개똥에 내재하는 미덕이 있다. 그 질박하면서도 검질기고, 누가 발길로 걷어차도 또르르 굴러가 다시 저쪽 잡초와 돌 틈 새로 처박히면서도 결코 부서지지 않고 버티어내는 모습이 개똥의 모습이다. 가난과 질병과 난리가 들끓던 세상, 개똥처럼 강인하게 살라는 기대가 이 이름에 들어 있는 것이다. 웬만 천덕꾸러기가 되어도, 상처 같은 것은 요만치도 받지 말고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것이다. 더러는 개똥이 민간에서 약으로 쓰이기도 하였다니, 남에게 유익한 바가 있기도 하였다. 이쯤 되면 ‘개똥이’란 이름이 만만한 이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개똥이’ 따위의 이름을 지니고, 그 이름에 담긴 소박한 기원을 어딘가에 안고, ‘개똥’처럼 살아왔던, 60, 70년대 아이들의 삶이, 오늘의 시점에서 그 나름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름과 삶의 관계가 크게 왜곡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름 자체는 모두 멋있고 세련되고 참해 보이지만, 온갖 주변 욕망에 찌들려 쉽사리 나약하고 작은 상처도 이기기 힘겨워 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개똥이’는 어떻게 인식될지 모르겠다. 이름이 지닌 원래 의미와 기대를 손상시키지 않고, 그 이름에 부합되게 살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훌륭한 도덕이다. 일찍이 공자님도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정명(正名)’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름[名]과 실체[實] 사이의 관계가 서로 어긋남이 없을 때 윤리가 설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름과 실체가 어긋나면 당장 오해와 왜곡이 생기고 혼란이 생긴다. 사물의 이름이 정명(正名)을 얻지 못하면, 즉 이름답게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물 자체가 왜곡된다. ‘수입 쇠고기’가 ‘한우 쇠고기’로 뒤바뀌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있는 일로 받아들인다. 그 정도로 ‘한우 쇠고기’는 이미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이름의 뒤틀림으로 인한 사물의 왜곡은 또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 이름이 정명(正名)의 경지를 갖지 못하면 그 폐해는 심각하다. 우리가 자기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 사람이 이 사람 맞아?’라는 의문을 계속 투사하며 살 수밖에 없다. 세상은 깊은 불신의 늪에서 갈등의 골을 깊이 파고 속임과 미움을 악순환 시킨다. 이름에 걸맞게 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름을 얻을수록 이름답게 살기가 만만치 않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기를 소망했던 시인 노천명은 이름의 무거움을 미리 알고, 이름의 운명으로부터 피해 가고 싶은 예감이 있었을까. 1938년에 발표된 이 시는 시인 노천명이 아직 이름 앞에 자유로울 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일찍이 바랐던 그녀,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일제 말 친일의 굴레에서 안타깝게도 훼손된다. 다시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 이데올로기의 굴레에서 그녀의 이름은 고초를 겪는다. 시대나 역사의 거울 앞에서 이름을 훼손하지 않고 보전하기가 만만치 않은 일임을 느끼게 된다. 이름에 걸맞게 살기가 만만치 않은 것은, 아직 세상에 이름을 크게 얻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더 하다. 요즘처럼 정보화 사회에서 살아가자면 더욱 그렇다. 인터넷 소통 공간은 익명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익명성은 거침없는 표현의 욕구와 자유를 넓혀 주기도 하지만, 실명에 대한 책무성을 슬쩍 놓아버리게 하는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익명성은 우리의 숨은 무의식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활개를 쳐보고 싶을 때 기대고 싶은 언덕이다. 심리적으로 보면 익명의 공간은 숱한 유혹을 유발시키는 공간이다. 범죄를 꿈꾸는 모든 범인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황’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전제로 범행에 착수한다. 자신의 실명이 알려진 고향 마을에서는 예의범절이 반듯하다가도, 대도시 군중 속의 익명 공간으로 들어오면 형편없는 행동거지를 보이는 경우를 굳이 남에게서 찾아야 할까. 그래서 심하면 아예 내 이름을 팽개치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최효찬 | 저자, 비교문학 박사 교육으로 ‘존경받는 사람’ 키워야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바람은 한결같다.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 공부도 잘하고 돈도 많이 벌어 부자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을 빛내주면 그보다 더한 바람은 없다. 흔히 “아이는 부모의 얼굴이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의 성공은 곧 부모의 성공과도 같다. 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에서 부모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더라도 자식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신들의 일 때문에 제대로 자녀를 돌보지 못했거나 자녀교육에 소홀할 경우 아이는 부모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장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부모가 아무리 성공했더라도 자식이야기만 나오면 풀이 죽어 고개를 들지 못한다. 반면에 사회적 지위가 낮은 부모라도 자녀들이 남부럽지 않게 자라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외국의 유명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간다면 그 부모는 언제나 남들 앞에서 당당해진다.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절로난다. 사는 것도 신바람이 난다.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데, 대부분 다음과 같은 유형 가운데 하나에 속할 것이다. • A-type : 공부는 잘하지만 이재에 어두워 가난하게 사는 사람 • B-type : 공부도 잘하고 이재에 밝아 부자가 된 사람 • C-type : 공부는 잘 못했지만 이재에 밝아 부자가 된 사람 • D-type : 공부도 못하고 이재에 어두워 가난한 사람 모든 부모들은 자녀가 B타입이나 C타입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B타입은 자칫 엘리트주의에 빠져 오만할 수도 있고, 반대로 C타입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피해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단점을 각각 가지고 있다. 그래도 모든 부모들은 B타입의 유형을 바란다. 공부도 잘하고 커서는 부자로 살았으면 하는 게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심정이다. A타입은 이전에는 통했지만, 지금은 순진한 사람으로 무시당할 수 있다. D타입은 모든 부모가 가장 바라지 않는 유형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부자가 된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존경받는 사람’이다. 존경받는 부자, 존경받는 기업인, 존경받는 교사, 존경받는 학자, 존경받는 정치인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저마다 존경받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살만한 사회일 것이다. 특히 부자 중에서 존경받는 부자, 존경받는 기업인 등이 많을수록 사회는 그만큼 훈훈한 인정을 꽃피우며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기업가로는 현재 빌 게이츠를 꼽을 수 있지만 빌 게이츠보다 100여년 앞서 선행을 실천해온 기업인이 있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으로 5대 150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빌 게이츠나 발렌베리 가문보다 더 오랜 전통의 존경받는 부자 가문이 있다. 경주 최부잣집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300여 년 동안 이웃에 대한 배려와 선행을 가문의 원칙으로 삼고 사회의 등불이 돼왔다. 부의 올바른 사용으로 신의 얻어 경주 최부잣집은 재산과 재물에 대한 원칙을 대대로 공유하며 가진 자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존경받은 부자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독립운동에 자금을 지원했는가하면 마지막에는 대학설립에 전 재산을 쏟아부음으로써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런 부자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최진립(1568~1636)과 그 아들 최동량, 손자 최국선에 이르러 재물이 쌓이면서 ‘진사 이상 벼슬 금지’ 등과 같은 가훈을 실천해 최진립의 11대손인 최준(1884~1970)에 이르기까지 12대에 걸쳐 300년간 존경받는 부자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경주 최부잣집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이 쌓은 부(富)의 쓰임새와 부자로서의 도덕성에 있다. 박경리가 쓴 소설 〈토지〉에는 동학당과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최부잣집의 윤씨 부인이 절에서 훗날 동학당의 접주가 되는 김개주에게 겁탈을 당한다. 그런데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이들 세력이 소작농들을 수탈하는 지주들의 집에 불을 지르면서 ‘응징’을 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최부잣집에도 김개주 등 동학당들이 들이닥친다. 최부잣집은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기고 종택(宗宅)을 보존하게 된다. 김개주와 윤씨 부인의 ‘악연’이 오히려 최씨 가문을 구한 셈이다. 물론 최부잣집이 상대적으로 악행을 덜 저질렀음도 참작됐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의 전통으로 한 곳에 정착해 살아왔다. 대대로 이웃들에게 신망을 얻는 가문은 명문가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패악을 일삼은 일부 양반가들의 경우 대대로 살아온 종택조차 온전하게 보존하기 힘들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처럼 동학혁명 등 사회적 격변을 거치면서 지역민들을 못살게 군 일부 악덕지주들은 처단의 대상이 되었고 종택마저 불에 타는 수모를 당했다. 대구 폭동 때에는 노동자를 착취했다며 수많은 공장들이 불에 타기도 했다. 명문가의 기준으로 현재까지 종택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지를 여부로 삼는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2006년 11월에는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가 복원되기도 했다. 1970년에 원인모를 화재 이후 36년 만에 다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악행을 저지러 불에 탄 양반가문의 사랑채였다면 결코 복원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가문의 자부심을 유산으로 전승 이 사랑채는 최부잣집을 존경받는 부자로 만든 상징물로서 그 의미가 있다. 최부잣집이 12대 300여 년 동안 부를 이어 온 배경은 다름 아닌 절제와 남에 대한 배려였다. 오늘날에도 경주 최부잣집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들이 쌓은 부의 쓰임새와 부자로서의 도덕성에 있다. 그 원칙들이 이른바 최부잣집의 수신(修身)의 철학인 ‘육연(六然)’과 제가(齊家)의 철학인 ‘육훈(六訓)’에 담겨있다. 최부잣집에서 오늘날 교훈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경영원칙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부의 안정을 도모한 데 있다. 여기에 부합하는 원칙으로 육훈 가운데 하나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말라”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수천 명씩 굶어죽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갖고 있는 논과 밭을 그야말로 헐값으로 내다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부잣집은 이런 논밭은 사들이지 않았다. 최부잣집은 다른 사람에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이용해 잇속을 챙기지 않았다. 최부잣집은 최대보다는 차대(次代)를 선택함으로써 장기적인 안목에서 부의 극대화와 안정을 도모했다. 재물이 넘치면 결국에는 시기와 질시를 받게 되고 이는 장기적으로는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주영 별장을 모 재력가가 헐값으로 사들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고 정몽헌 회장이 경영난으로 급하게 별장을 내놓자 당시 시세보다 싼 33억 원에 사들였기 때문이다. 모씨가 비난을 받은 것은 위기를 이용해 이를 헐값으로 재빠르게 매입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최부잣집은 요즘 기업이나 개인 등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중시되는 ‘이미지 관리’에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복원된 사랑방은 과객(過客)에게 항상 개방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사랑방을 찾은 과객의 신분은 학덕 높은 선비, 풍류객, 협객, 잔반(殘班) 등으로 이들은 세상의 소식을 알고 있었던 정보전달자였다. 경주에 사는 최부잣집에게 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정보 창구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특히 과객은 최부잣집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주는 자발적인 홍보맨 역할도 했다. 이들은 각 지방을 다니면서 최부잣집의 후한 인심과 높은 학덕을 널리 알렸고, 그 때문에 팔도 전역에 최부잣집 인심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는 또한 오늘날 강조되는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떠올리게 있게 한다. 경주 최부잣집은 또한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 무엇인지를 되새겨보게 한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의 손자 최염씨는 독립자금을 댄 할아버지의 수행 비서를 했지만 할아버지가 전 재산을 대학설립에 사용하는 바람에 한 푼도 물려받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최염씨는 ‘최부잣집의 후손’이라 것만큼 더 값진 유산은 없다고 말한다. 사회 환원으로 신뢰 얻은 대기업 우리나라에 경주 최부잣집이 있다면 스웨덴에는 발렌베리(Wallenberg) 그룹이 있다. 쉽게 비유하자면 발렌베리 가문은 한국의 경주 최부잣집과 같이 존경받은 부자의 길을 걸으며 스웨덴 사회의 등불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우리나라의 삼성, 현대그룹과 같이 스웨덴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통한다. 발렌베리 그룹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수익의 일정부분을 사회에 내놓으며 양심적인 경영을 해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발렌베리는 처음부터 존경받는 기업, 존경받는 부자가 결코 아니었다. 이 가문은 은행을 만들고 큰돈을 벌게 된 이후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도움을 줌으로써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평판을 얻고 5대 150년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발렌베리가(家)의 역사는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지난 1856년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현 SEB)을 설립하면서 시작했다. 금융업에서 출발해 전자, 트럭, 의료장비, 제지, 산업공구, 베어링, 원자력, 항공기, 정보산업에 이르는 100여개 업체를 보유하고 있다. 발렌베리라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에릭슨(통신기기), 일렉트로룩스(가전), ABB(중전기), 스카니아(상용차) 등 발렌베리가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이름을 대면 금방 알 수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창업자부터 5대째 내려오는 동안 조용하되 적극적으로 많은 돈을 사회에 기부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발렌베리 가문은 이미 100여 년 전부터 돈을 벌면 사회에 되돌려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들은 막대한 부를 자신들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번 만큼 사회에 되돌려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전통은 다음과 같다. 발렌베리 그룹은 수익이 나면 그 수익을 공익재단인 발렌베리 재단에 맡긴다. 발렌베리 재단은 수익의 대부분을 스웨덴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자금으로 헌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스웨덴 사회 전체로 되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발렌베리 창업자 아들인 크누트는 1917년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해 ‘크누트 앤 앨리스 발렌베리 재단(KAW)’을 설립했는데, 그 규모가 무려 4조원에 이른다. 이는 노벨 재단보다 규모가 크다. 그는 스톡홀름경제대학을 설립하는 등 공익사업과 도서관을 짓고 과학기술분야를 후원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기초과학기술 연구를 적극 지원해 스웨덴 노벨상 수상자를 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발렌베리 그룹은 창업자들이 줄줄이 재단을 만들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창업자 아들 크누트와 3대 마쿠스 발렌베리 등도 재단을 만들어 현재 ‘크누트 앤 앨리스 발렌베리 재단’과 ‘마리앤느 마쿠스 발렌베리 재단’, ‘마쿠스 앤 아말리아 발렌베리 추모재단’ 등이 있다. 이들 재단은 대주주이기 때문에 순이익은 이들 재단으로 들어가고 있고 이를 통해 투자 회사인 인베스터는 스웨덴의 과학 인재 양성을 이끌고 있다.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 시청 앞 광장에는 전 재산을 기부해 재단을 만든 크누트의 동상이 서 있다. 발렌베리 가문이 그만큼 스웨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쌓았다는 증거이다. 스톡홀름시(市)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는 기꺼이 사재를 털어서 시민의 행복을 증진하는데 써달라며 시에 기부를 했다. 시민들은 그 뜻을 기려 그의 흉상을 시내 한 복판에 세웠다고 한다. 명가의 세상 밝히는 원칙과 신념 명문가들은 각기 나름대로 가훈이나 원칙,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전통이 없다면 명문가를 수백 년 동안 유지해 오기 힘들다. 전통은 특히 위기 때마다 이를 극복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다. 원칙과 신념이 없다면 험한 세상에서 눈앞의 이익이나 불의와 타협하기 쉽기 때문이다. 명문가는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명문가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명문가가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결코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즉, 자신을 부자로 있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명문가는 사회와 궁합이 좋아야 진정한 명문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해 돈을 사용한다면 그게 바로 ‘졸부’라고 할 수 있다. 졸부와 명문가의 차이는 바로 그가 속한 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학혁명과 한국전쟁 때 사회와의 관계가 좋지 못한 양반가문들의 집이 불타기도 했고 또 공개처형을 당하는 등 큰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것은 재산을 모아 이웃을 돕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주변사람들과 궁합을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가족 간의 궁합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와의 궁합을 잘 유지한 대표적인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최부잣집의 사랑채가 소실됐지만 다시 재건된 것은 그 가문이 존경받는 부자로 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당한 재산이라야 후손들도 그 재산에 대해 떳떳하게 행사할 수 있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일군 록펠러 가문은 5대째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가문에 자긍심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선조들이 이룬 부의 축적이 한마디로 무자비했기 때문이다. 후손들은 깨끗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룬 재산을 혐오하면서 결국 사회에 재산을 기부하는 방식으로 내놓았다. 반면 발렌베리 가문은 록펠러 가문처럼 5대째에 이르고 있지만 그 후손들은 스웨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가문,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과 경주 최부잣집은 각각 5대, 12대에 걸쳐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을 실천하면서 존경 받는 부자의 본보기를 보여 왔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부자가 명멸해 갔지만 발렌베리 가문과 경주 최부잣집만큼 존경받은 부자의 사례는 결코 흔하지 않다. 특히 경주 최부잣집의 만석의 재물은 사라졌어도 그들이 남긴 ‘육훈’과 ‘육연’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있다. 명문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재능만으로 명문가를 탄생시키기는 불가능하며, 몇 대를 거쳐 정신과 철학이 이어져 가풍으로 자리 잡을 때야 가능한 일이다. • 경주 최부잣집의 제가철학 육훈(六訓)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둘째,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섯째,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여섯째,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 경주 최부잣집의 수신철학 육연(六然) 자처초연(自處超然) :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자기에게 초연하라. 대인애연(對人藹然) : 남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하게 대하라.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에는 마음을 맑게 가져라. 유사감연(有事敢然) : 일을 당해도 겁내지 말고 용감하게 대처하라. 득의담연(得意淡然) : 성공했을 때에는 오히려 담담하게 행동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는 오히려 태연하게 행동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