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사당놀이는 우리 민족의 민속놀이 중 가장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남사당놀이는 조선시대 말엽부터 천민들에 의해 놀아지던 것으로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음악과 소리(노래), 춤을 곁들인 갖가지 곡예와 탈놀이, 인형놀이까지 함께 어우러진 종합 예술로 우리나라 민속 예술의 큰 맥을 이어오고 있다. 남사당패는 유랑연예집단으로 갖가지 재주부리기를 일삼던 무리로 본디는 독신 남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여자가 들어가게 된 것은 1900년 이후부터인 남사당 말경의 일이라고 알려졌다. 남사당놀이는 관아나 부유층 등 지배 계층으로 불려 다니던 광대놀이와는 달리 서민들의 욕구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민중놀이이다. 남사당패는 성 밖이나 농 · 어촌을 돌며 주로 서민들이 사는 곳을 찾아 공연했는데 마을에 들어가 공연하는 것은 양반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다. 남사당패의 구성을 보면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정점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화주, 놀이를 관장하는 뜬쇠, 연희자인 가열, 새내기인 삐리, 나이든 저승패와 등짐꾼으로
[PART VIEW]경북 안동 지역에 전승되는 차전놀이는 훗날 고려 태조가 된 왕건과 후백제의 왕 견훤이 안동의 병산 전투에서 결전하게 되었을 때 삼태사(성주 김선평, 현관 권행, 장길)가 고려 왕건을 도와 싸움을 승리로 이끈 데 대한 기념으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안동 성주가 견훤을 물리치고 난 후 군민과 등짐장수들을 모아 축하연을 베풀 때 등짐장수들이 흥에 넘쳐 쪽지게 위에 주장을 태우고 “월사 덜사” 하며 서로 밀며 뛰어 놀았다. 이때부터 안동 향토민들이 천리천을 경계로 동 · 서부 양편으로 나뉘어(동부는 왕건군, 서부는 견훤군을 상징한다) 쪽지게 모양의 도구를 만들어 그 위에 덕망 있는 사람을 태워 그 지휘를 받으며 밀고 밀리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차전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벌어지는 대동놀이로 지속되어 왔으며 협동 · 단결로서 상무정신을 발휘하는 호방한 겨룸, 수백 명의 남성들이 동채를 들고 싸움에 임하며 승리를 좌우하는 역동성 있는 남성대동놀이로 자리매김 했다. 차전놀이는 동채싸움, 동태싸움이라고도 부르는데 놀이에 쓰일 동채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마을 어른들이 곧고 위, 아래의 굵기 차이가 없는 참나무를 물색해 부정을 막기 위해 사람의 접근을
북청 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 전 지역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세시풍속의 하나로 민속놀이이다. 마을마다 각기 사자를 꾸민 후 집집마다 돌며 집안에서 풍물을 치고 사자를 놀리면 잡귀가 물러나 액을 막고 복을 불러들인다 하여 집안 구석구석까지 돌았다고 한다. 현재 북쪽지방의 탈춤 가운데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해서지방의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과 함께 함경도의 북청 사자놀음 등 네 종목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사자가 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자가 탈춤에 등장하는 이유는 불교문화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사자는 백수(百獸)의 왕이니 사자춤도 벽사(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탈놀이와 함께 널리 연행되고 있다. 사자춤은 우리나라 곳곳의 탈놀이에서 보이는데 그 가운데 독립된 사자놀음의 하나는 북청 사자놀음이다. 다른 사자춤과 달리 북청 사자는 쌍 사자가 등장하며 보통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앞채 사람이 뒤채 사람의 어깨에 올라타고 높이 솟기도 한다. 앞채 사람이 먹이인 토끼를 어르다가 잡아먹는 과정을 연기하기도 하며 어느 사자춤보다 교묘하고 힘찬 동작을 특징으로 꼽는다. 북청 사자놀음은 대사의 묘미나 풍자적인 측면보다는 사
송파산대놀이는 서울 · 경기 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의 놀이이다. 이 놀이는 매년 정월 대보름과 단오 · 백중 · 추석에 명절놀이로 공연되었다.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고려시대부터 민중들 사이에서 성행했던 가면극이다. 산대놀이의 산대라는 이름은 동네 어귀의 앞동산에 세웠던 가설무대에서 놀이가 많이 행해졌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현존하는 서울, 경기 지방의 산대놀이에는 주로 장터에서 벌어져 서민들의 애환을 달랜 송파산대놀이와 관청을 중심으로 행해진 양주별산대놀이가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전체 7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 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하고, 가면을 배열해 놓고 고사를 지낸다. 길놀이 행렬의 순서는 붉은 바탕에 ‘산대도감(山臺都監)’이라고 쓴 기가 앞서며 그다음 악사들과 쌍호적 · 꽹과리 · 징 · 장고의 순으로 선다. 놀이를 준비한 모갑이 가면을 쓰지 않고 서고, 그 뒤에는 기타 여러 사람이 탈을 쓰고 행진한다. 마지막 뒷놀이는 굿이 끝난 뒤 연희자와 관중이 함께 어울리는 화해와 유흥의 잔치다. 송파산대놀이는
[PART VIEW]하회 별신굿탈놀이는 농촌형의 서낭제 탈놀이로 12세기 중엽부터 상민(常民)들에 의해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연희되어온 탈놀이다. 여느 탈춤과 달리 별신굿의 하나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별신굿은 특별한 큰 굿을 의미하며 5년 또는 10년 만에 한 번씩 열린다. 현재는 한 해에 한 번씩 진행돼 관광객이나 일반인들이 예전보다 쉽게 볼 수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굿과 탈놀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탈놀이 자체를 굿놀이라 했으며 굿의 일부였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산주(산의 주인)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서낭신(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하회 마을의 서낭신은 열일곱 살의 처녀신 의성 김씨라고 전해 오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그녀는 하회탈을 만들었다는 허도령을 흠모하였는데 자신 때문에 신의 금기를 어겨 허도령이 요절하자 번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서낭당을 짓고 그녀를 신으로 모신 후 매년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다른 탈놀이에서 볼 수 없는 서낭신을 위한 무동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