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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라이프&여행] 서울에서 만나는 한글날 이야기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서울 종로 일대에는 한글날을 맞아 답사할 만한 장소가 여러 곳 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임을 알려주는 서촌 입구, 경복궁 내 집현전이 있던 곳에 다시 들어선 수정전,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일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의미가 깊은 곳도 있다. 북촌에 있는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석, 그리고 광화문광장 서쪽에 있는 ‘한말글 수호탑’이다. 그리고 주시경 선생, 헐버트 박사의 부조상이 있는 ‘주시경 마당’도 인근 빌딩 숲 사이에 있다. 뒤에 언급한 세 곳은 특히 근대 한글의 역사에서 중요하다. 오늘은 이들 장소에 얽힌 내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한글의 역사가 숨 쉬는 곳

 

먼저 한글날이 정해진 배경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한글날은 세종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준으로 정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28년(1446) 9월에 ‘훈민정음이 이뤄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1926년에는 음력 9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했다. 다만 ‘한글’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지 않아서 처음에는 가갸날이라고 했다. 가갸날은 1928년 한글날로 바꾸고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29일로 바꿔 기념했다. 그러다가 전형필 선생이 간직하던 <훈민정음해례본>이 광복이 되고 나서 공개되면서 9월 상순, 곧 음력 9월 10일에 한글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를 양력으로 바꾼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했다.

 

한글은 만들고 반포한 기록이 남아 있는 드문 문자이며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민주주의와 닿아있는 문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한글의 매력에 빠져 근대 한국에 온 외국인도 여럿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독립운동가인 미국인, 헐버트 박사를 꼽을 수 있다.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돼 한국에 온 뒤,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집필해서 배재학당 교재로 썼다. 헐버트 박사는 <사민필지> 이후 <초학지지>, <미국사기>, <천문약해>, <생리학초권> 등의 한글로 적은 교과서 편찬작업에 나섰다. 이와 함께 한글로 된 신문인 <독립신문>의 발행 중심에 있었다. 배재학당의 학교 출판사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자였고, 이 삼문출판사에서 <독립신문>을 인쇄했던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한글 역사 상 거의 처음으로 ‘띄어쓰기’를 제안하고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헐버트 박사는 중요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주시경 선생이다. 1892년 배재학당 출신 교사에게 수업을 받던 주시경 선생은 1894년부터 정식 입학해 영문법 등을 공부하는 중이었다. 1896년 <독립신문>이 창간될 때 삼문출판사 책임자가 헐버트 박사였고 이때 주시경 선생도 발간 업무에 참여했다. 주시경 선생은 한글 문법 연구뿐 아니라 ‘한글’이라는 이름을 정했다는 점에서 정말 중요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의 연구는 제자들에게 이어졌으니 이들이 중심이 된 단체가 그 유명한 조선어학회이다.

 

그렇다면 미국인으로서 헐버트 박사가 이렇게 한글에 깊이 빠진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 있다. 바로 1889년, ‘뉴욕트리뷴’에 기고한 기사이다. 이 글에서 헐버트 박사는 한글의 우수함을 자신의 사례로 보여준다. 더불어 그 한글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곧 자신이 한국에 도착한 지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1주일 만에 한국 사람들이 한글을 한문에 비해 가볍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한글 연구를 통해 그 우수함을 밝혀내고자 했다.

 

예를 들어 한글은 철저한 발음 중심으로 영국이나 미국이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말과 글자의 일치를 이뤄낸 글자라는 것이다. 또 지금은 한국 사람들이 한자를 쓰지만, 영국인들이 라틴어를 버렸듯이 한국인도 결국 한자를 버릴 것이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한글의 우수함에 대한 확신은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 한국인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헐버트 박사가 한국 독립운동에 투신한 배경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한글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아지던 가운데 일제강점기를 맞으며 우리글, 한글도 위기를 맞았다. 그런 점에서 한글을 다듬고 지킨 조선어학회와 ‘큰사전’ 편찬 이야기는 중요한 역사다. 2020년, 주시경 선생이 편찬하려고 했던 최초의 우리말 사전 원고인 ‘말모이’ 그리고, 처음 완성된 우리말 사전인 ‘큰사전’ 원고가 보물로 지정됐다. ‘큰사전’의 편찬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어학회와 ‘큰사전’

 

조선어학회 사건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됐다. 1942년 여름, 함경도 홍원 지역 유지였던 박병엽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형사가 그의 집을 수색하던 중 박병엽의 조카 일기장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문장 하나가 발단이었다.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께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라는 문장이다. 당시 국어는 일본어였다. 그러니 일본 형사들이 보기에 일본어를 쓴 학생을 혼낸 것이라면 그 선생님은 불온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굉장한 비약이었는데, 심지어 이 말은 오해였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일제의 형사들은 어거지로 수사하며 결국 이 일로 정태진 선생이 붙잡혀 왔다. 정태진 선생을 악랄하게 고문하던 형사들은 조선어학회 회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후 다른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모두 검거한 것이다.

 

이후 학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잡혀가면서 본격적인 조선어학회 사건이 시작된다. 조선어, 곧 우리 말과 글을 연구했다는 것으로는 죄를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해 학회원들을 내란죄로 몰아가기 위해 심하게 고문했고, 이 가운데 이윤재, 한징 선생, 두 분이 목숨을 잃었다. 또 수사 과정에서 1929년부터 연구해온 ‘큰 사전’ 원고를 비롯해 조선어학회가 연구한 자료와 원고가 모두 압수돼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뻔한 상황에 처했다. 결국 일제의 재판부는 한글 사전 편찬이 독립운동이라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등의 죄목으로 1945년 1월,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최현배 등 5명에게 2년에서 6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사실, 지난 몇 년간의 수사와 고문, 재판 과정을 보면 어이없는 결과이긴 하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서 구금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정태진 선생을 제외한 4명은 경성 복심법원에 상고(당시 용어로는 항고)했다. 상고한 이유는 서울에서 재판받는다면 추운 함흥보다는 나은 상태로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글을 연구한 것이 범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도 지지부진, 겨우 8월 12일에 상고 재판을 연다는 결정을 하고, 다음날인 8월 13일 궐석재판으로 상고도 기각되었다. 당시 어수선한 상황 때문에 이러한 판결문이 도착하기 전, 8월 15일 감옥에서 광복 소식을 듣고, 다음날인 8월 16일 함흥 형무소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다시 연구를 이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8월 18일, 서울행 열차를 타고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이렇게 도착한 학회원들은 8월 25일, 학회 재건을 하며 다시 활동에 들어갔다. 한글 교과서도 편찬하며 새로운 시대, 곧 한글이 중심이 되는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열성을 다한 것이다. 광복은 일본어, 일본 글자의 시대에서 한국어, 한글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되찾은 것이 바로 광복이다. 그렇지만 찾지 못한 것도 있었다. 바로 10년 넘게 준비한 사전 원고이다. 그 암울했던 시절, 표준말 정립, 외래어 표기법 정리에만 10여 년 가까운 노력을 들였던 원고였다.

 

그런데 1945년 10월 2일, 뜻밖의 전화 한 통이 학회로 걸려 왔다. 창고를 정리하던 서울역 역장이 조선운송주식회사 창고에서 종이 뭉치를 발견했는데, 겉장에 ‘큰사전’이라고 적힌 걸 보고 조선어학회로 연락을 한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울역에 도착한 정인승 선생을 비롯한 사전 편찬 관계자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 같다. 2만 6000매의 사전 원고였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사전 편찬이 시작되었으나 난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권은 을유문화사의 도움으로 나왔지만 이후 작업을 이어갈 자금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국의 폴 앤더슨 대위가 미국 록펠러 재단을 연결해주며 사전 작업 비용을 받게 되었다. 이후 6·25 전쟁, 한글 간소화 파동 등을 겪으며 늦어졌던 <큰사전>은 1957년 한글날 마지막 6권을 펴냈다. 16만 4125개의 낱말을 수록한 사전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11년 만의 일이며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을 계획한 지 28년 만에 나온 성과이다.

 

이렇게 귀하게 자리를 잡은 한글, 그리고 우리말의 역사를 생각하면 함부로 한자를 다시 쓰자고 하거나 외래어,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쓰는 일은 줄어들 것 같다. 한말글 수호탑은 이를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다. 더불어 조선어학회 표석, 그리고 주시경 마당을 함께 둘러본다면, 또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을 만난다면 괜찮은 한글날 나들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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