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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교사의 슬기로운 삶을 위한 선택, 학습자의 길 vs 심판자의 길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인 마릴리 애덤스(Marilee Adams)는 문제를 대하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학습자(the learner)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자(the judge)의 길이다.

 

먼저 학습자는 배우는 태도로 모든 상황과 타인과 사건을 바라본다. 판단을 유보하고 깊이 관찰하고 이해하려 한다. 학습자는 배움에 이르는 질문을 던지고 관찰자의 입장에 서려 한다. 또 자기 자신의 기분과 생각과 행동을 고요히 살피며, 매사에 생산적인 질문을 던지며 참여한다. 학습자의 마인드는 항상 열려있다. 언제나 허리 굽혀 진리의 조각들을 줍는다.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것보다 교훈을 찾으며 상생의 길을 발견하려 한다. 학습자는 열려있고 그만큼 창조적이다.

 

이에 반해 심판자는 자신의 틀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해 버린다. 심판자는 쉬 판단하고 따지고 정죄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심판자는 상황과 타인을 판단하고 점수를 매기고 정죄하는 데 전문가다. 약점이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남을 공격하는 데 능하다.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악취를 풍기며 빛난다. 혐오와 차별에도 익숙하다. 또한 독선과 거만한, 우월감, 그리고 방어적인 자세로 가득 차 있다. 심판자의 마인드는 닫혀 있고 내내 굳어있다.

 

애덤스에 따르면 학습자와 심판자는 던지는 질문도 전혀 다르다. 심판자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사고한다. "뭐가 잘 못 됐지?", "누구 탓인 거야?",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어떻게 하면 통제할 수 있을까?", "이들은 왜 이렇게 어리석고도 실망스러울까?", "저들이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이와 달리 학습자는 다르게 질문을 던지고 행동한다.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일은 무얼까?", "내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나는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지?", "어떻게 하면 양쪽에 다 유리하게 되고 상생할까?",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과 방법은 무엇일까?", "제대로 일이 돌아가게 하려면 어떻게 하지?", "어떤 일들이 가능할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얼까?“

 

애덤스는 질문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학습자의 태도를 지니고 살아갈 것을 역설한다. 단지 심판자의 질문은 나쁜 질문이고 학습자의 질문은 좋은 질문이라는 것이 아니다. 심판자의 질문은 우리가 익숙한 삶과 사유의 방식이고 학습자의 질문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새로운 길이라는 것이다. (마릴리 애덤스의 <삶을 변화시키는 질문의 기술>중에서)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평생 배움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학습자로 사는 것이 지혜롭고 현명하다. 왜 그럴까?

 

첫째, 배우는 자의 마음을 선택하면 자유로워진다. 자신을 옥죄는 삶과 관계와 마음의 무거운 짐들이 한결 가벼워진다. 학습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며 자신의 실수와 타인의 악행으로부터도 배운다. ‘타산지석’과 ‘셋이 걸으면 그중에는 반드시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있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 학습자의 태도를 지니면 삶이 여유로워진다. 우리는 너, 나 없이 모두가 불완전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옳고 그름보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함께 공존하는 조화의 길을 찾음으로써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은 ”우리의 임무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과 자연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두 끌어안아 연민의 범위를 넓힘으로써 스스로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했다. 누구나 좋은 삶을 꿈꾼다. 그러나 거기엔 선택과 결단을 요구한다. 우리의 20세기 최고의 석학이자 비교문화의 전문가인 고(故) 이어령 교수는 ‘남에게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특이한 민족성’을 지적했다. 학교에서든 일상의 대인관계에서든 교사가 가르치는 것에만 몰입하기보다는 배우는 학습자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슬기로운 삶의 자세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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