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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라이프&역사]조선시대 왕실 도서관

규장각과 집옥재 이야기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디지털 기술과 통신의 발전으로 여러 미디어가 생겨나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독서’가 갖는 유익함을 강조하며 읽기 모임 등이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보고 듣는 속도감과 달리 느리지만 읽기가 갖는 힘이 여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손으로 만지며 종이를 넘기고 또 메모할 수 있는 책이 가진 물건으로서 느낌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래서 책을 읽으려고 마음을 먹고 우리는 곧장 서점으로 가기도 하고 도서관으로 가기도 한다. 이렇게 책은 가깝고 조금은 흔한 존재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전근대 사회에서 독서는 지금과 달랐다. 읽고 싶다고 누구나 쉽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책은 귀하고 비쌌다. 같은 조선이라고 해도 시기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맹자』를 구하려면 당시 비싼 면포 3~4필을 줘야 했다. 이 면포 가격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십만 원 이상, 때로는 수십만 원에 이르렀다고 하니 책 한 권 가격이 작은 규모의 가구와 비슷했다. 비유하자면 책 한 권 가격으로 책장 몇 개를 살 수 있다고나 할까. 
 

책의 값어치 뒤에는 종이가 있었다. 종이 2장이면 쌀 한 말을 구할 수 있었으니 책이 비싼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인쇄를 위한 활자 주조나 목판 제작 역시 개인이 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때문에 보통 사람이 비용을 지불하고 책을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조선에서는 필요하다고 판단한 책을 중앙정부나 지방의 관청이 인쇄해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는데 그 대상은 관리와 양반에 그쳤다.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책이란 그림의 떡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 종이라도 구했다면 사람들이 베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선시대 책 가운데 필사본이 많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 대여점 ‘세책집’ 큰 인기

 

조선시대에 책을 구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서점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기록으로 보면 19세기, 곧 순조 때 책을 살 수 있는 서점이 생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책값은 비쌌으며 책 내용에 대한 정부의 간섭도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즐길 거리가 없던 시절, 중국과 조선의 소설류가 유행하며 책을 읽고자 하는 욕망이 늘어났다. 이런 공백을 메워준 것이 바로 ‘세책집’이다. ‘세책’은 책을 세낸다는 뜻이니 요즘으로 치면 책 대여 서비스다. 관련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세책집은 굉장한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채제공이나 이덕무는 세책집에 드나들던 부녀자들이 몸에 지닌 장신구를 팔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도서관은 없었을까. 물론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의 나라라는 점에서 조선시대에 여러 곳에 도서관이 있었다. 성균관을 비롯한 서원이나 향교에서 책을 보관하고 출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던 사람은 학생, 사대부로 한정됐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도서관이었다. 혹시 도서관 가운데 규모도 크며 다양한 책을 소장한 곳이라면 어떠했을까. 하지만 그런 곳이라고 하면 궁궐 내 왕실의 도서관 정도를 상정할 수 있다. 더 폐쇄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능 역시 지금의 도서관 보다는 ‘문서보관소’ 역할이 더 강했다. 다만 장서량이 많다는 점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에 종사하는 국가의 관리들에게는 유용한 공간이었다. 조선에서는 집현전과 규장각, 그리고 집옥재가 있다. 이 중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정조 때 만든 규장각, 그리고 고종 때 만든 집옥재를 중심으로 그 모습을 살펴보자.
 

 

처음 정조가 대외적으로 표방한 규장각 설치 목적은 역대 국왕의 글과 그림, 그리고 왕실 족보, 각종 문서 들을 보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정치 개혁의 중심지로 변모되며 규장각은 정조 시기, 정치의 핵심 기구로 등장했다. 규장각에 검서관을 둬 연구 역량을 높인 뒤 승정원, 예문관, 홍문관의 업무 일부를 담당하고 과거를 실시하며 소장 관리들을 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도 맡은 것이다. 
 

이런 업무를 맡았다고 해도 규장각의 존재 방식은 왕실 도서관이었다. 몇 개의 부속 영역을 둬 도서를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왕실에 전해지던 어필, 어제를 보관하는 곳은 봉모당으로 하고 열고관과 개유와에는 중국의 책과 문헌을 보관하도록 했다. 또 조선의 책은 서고(西庫)에 두도록 했으며 이들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으로 ‘이문원’을 새로 설치했다. 지금으로 치면 도서관 안에 한국관, 외국관, 사서실을 둔 셈이다.

 

여기에 더해 출판 업무를 보던 교서관을 규장각으로 통합하고 활자를 새로 만들며 출간사업도 했다. 왕이 볼 책(어람용 책)은 강화도에 서고(書庫)를 만들어 보관하도록 했으니 이를 강도외각, 혹은 외규장각이라고 부른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인들이 약탈해 간 책이 바로 이 외규장각에 보관하던 책이다. 정조는 소장 도서를 늘리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청에서 만든 백과사전류인 <고금도서집성> 1만 권을 포함해 8만여 권의 서적을 중국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들 도서는 지금도 상당 부분 남아있어서 규장각 도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치 기구에서 왕실도서관으로

 

규장각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정조 사후 정치적 역할은 축소되거나 사라졌다. 그러나 왕실 도서관으로서 역할은 계속 이어갔다. 그러던 중 규장각에 변화가 일어났다. 1868년, 고종이 새로 지은 경복궁으로 옮겨가면서 중심 궁궐이 바뀐 것과 관련이 있다. 다만, 고종은 경복궁 중건 이후에도 화재로 한동안 창덕궁에 머물러서 실질적인 변화는 조금 뒤에 일어났다. 대체로 1885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다시 경복궁으로 옮겨가며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때 경복궁 북쪽 영역이 새롭게 재편되면서 도서관의 건립도 이뤄진 것이다. 1891년에 경복궁 북쪽에 완성된 집옥재가 바로 규장각의 역할 일부를 담당한 공간이다. 
 

고종은 규장각의 도서 중 중국 관련 도서를 집옥재로 옮기도록 했으며 새롭게 도서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때 이전과 다른 성격의 책, 곧 서양 관련 책이 집옥재의 소장도서가 됐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서양의 정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1883년, 보빙사로 미국을 다녀온 사신단의 보고 이후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렇게 서양 관련 도서를 집옥재에 보관한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당시 집옥재의 도서 목록을 보면 천문 역서, 지구와 세계지리, 항해, 각 나라에 대한 정보 제공, 어학, 만국공법, 신식 군사제도와 전술·무기, 수학과 의학을 비롯해 각종 과학과 관련된 책, 서양 예술에 관련된 책이 있다. 이와 같은 집옥재 소장 도서의 변화를 보면 당시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실 도서관의 변화와 함께 민간에서도 새로운 도서관에 관심이 높아졌다. 보빙사의 일원이었던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서양의 공공도서관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를 참고하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대중의 교양을 위해 공공도서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높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는 1906년, 이근상, 민형식, 윤치호 등이 도서관 설립을 위한 평의원회를 구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도서관 설립 준비업무를 했다. 또 도서관에 필요한 책을 각지에서 기증받고 향후 설립될 도서관장으로 민영기를 선출했다. 이름도 정했으니 ‘대한도서관’이 되었다. 

 

 

‘대한도서관’과 ‘대동서관’ 이야기

 

공공도서관 설립 절차가 진행됐고 도서관 건물도 정부 건물 중 하나를 임대하기로 했으니 주요 임원이 관리였다는 점에서 국립도서관으로 발전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간섭으로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며 1910년, 조선총독부 취조국에 10만 권에 이르던 도서 전체를 몰수당하며 공공도서관 설립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1906년, 평양에서 설립한 대동서관은 짧은 시기지만 운영까지 이뤄졌다. 대동서관은 도서관 입장료가 무료였다는 점에서 당시 놀라움을 줬다. 1만 여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던 대동서관은 사립 공공도서관의 시조라고 할 수 있지만 역시 국권을 빼앗기며 1910년 폐쇄됐다. 
 

규장각, 그리고 집옥재에 소장 장서 역시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일제가 관리 아래로 들어갔다. 궁궐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왕실 소장 도서를 규장각으로 모았다가 제실도서란 이름으로 관리한 것이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을 거쳐 지금의 서울대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지금 규장각은 경성제국대학 시절 책과 광복 이후 기증받은 도서를 포함해 책 17만 5천여 권, 고문서 5만 점, 그리고 목판 1만8천 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의 왕실 도서관은 국권을 빼앗기며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명맥이 끊기며 과거에 갇히고 말았다. 다른 나라의 대표적인 국립도서관이 대체로 왕실 도서관에서 발전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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