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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자그로스 유목민들의 마을 박티아리

 

이란에 가서 페르시아 유적을 찾아다니고 아기자기한 마을을 걷는 여행을 했었다면 이번에는 지구별에 마지막 남은 유목민 박티아리(Bakhtiari)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자그로스 산 하나를 넘으면 된다고 했는데 자그로스 산은 이름처럼 산세가 예쁘지 않았다. 지프차가 진흙에 빠져 겨우 꺼냈더니 얼마 가지 않아 쌓인 눈 때문에 차를 겨우 돌려 다른 길로 돌아서 가야 했다.

 

 

아침에 출발한 여정은 저녁이 다 돼서야 박티아리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가서 두 다리 쭉 뻗을 마음이 간절했는데 차가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 계곡에서 내려오는 하천에 유실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도 동물도 모두 발이 묶여 버렸다. 마침 근처에 중국 건설사가 짓는 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중장비들이 몰려와 임시 도로를 만들었다. 사람이 먼저 건너갈 줄 알았는데 소 떼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사람보다 먼저 다리를 건너는 게 아닌가. 얼마나 집에 가고 싶었을까? 사람들 눈치도 안 보고 서둘러 집을 향해 뛰어가 버렸다.

 

다리를 건너자 박티아리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묵어갈 집에 들어서자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남자주인과 양 갈래 머리를 딴 여자주인이 우리를 맞았다. 이 부부는 몇 년 전까지 하던 유목민 생활을 접고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인사를 하고 저녁 식사가 준비될 동안 마을을 잠시 둘러보았다. 마을은 산세가 험준한 곳에 자리했다. 대도시에서 볼 법한 철제 다리를 건넜다. 계곡물에 휩쓸려 내려간 그 다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이 다리가 생기기 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건너다녔을까.

 

저녁 시간에 맞춰 풀 뜯고 돌아오는 목동과 양 떼가 다리를 건넜다. 문명이 주는 여유로움이 걸음걸음 묻어났다. 저녁 식사는 닭 요리가 준비됐다. 양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여행자를 배려해주었다. 사소한 것이지만 아주 고마웠다.

 

너무 험한 길을 달려왔더니 눈꺼풀이 절로 감긴다. 꿀잠을 자고 다음 날 이른 아침 동네 산책을 나섰다. 어제 보았던 그 목동과 양들이 철제 다리 반대편에서 건너와 능선 너머로 사라졌다. 산세도 구름도 정말 예쁜 마을이다.

 

 

박티아리 학교에 가는 날. 여학생반에 들어섰다. 검은 차도르를하고 있는 학생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으레 “BTS 좋아요”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분필을 쥐고 칠판에 한반도를 그렸다. 한국이란 나라가 지구별 여기에 있고 인구·강·산 등 한국 지리시간이 잠시 펼쳐졌다.

 

아이들 눈이 좀 더 알려달라는 눈치였다. 한국은 대장금과 주몽의 나라라고 하니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나라를 알리는 길이 올림픽도 정치도 경제도 아닌 드라마와 가수가 되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의 꿈이 무엇인지도 물어보았다. 양치기나 가정주부가 꿈이라는 답변보다는 간호사·건축가·선생님·패션 디자이너 등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내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학교를 나와서 마을을 구경 다녔다. 학교 정문을 나오자 공동묘지가 보였다. 묘비가 신기하게도 동물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만져보고 비석에 그려진 그림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유목하느라 바쁜 사람들이 이렇게 정교한 묘비를 만들었다니! 손재주가 많은 사람들 같았다.

 

마을 파노라마를 보기 위해 언덕을 올랐다. 제멋대로 생긴 골목을 따라 걸었다. 넓적 빵을 굽던 여인이 낮은 담 너머에서 들어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커다란 주전자에 물을 끓여 차도 내주었다. 그녀가 내준 마당에 앉아서 한 손에는 차, 다른 손에는 빵을 들고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풍경도 풍경이지만 지나는 박티아리 사람들 구경도 재미가 쏠쏠했다. 그들은 외지인이 신기한 듯 손을 흔들고 다가와 악수를 건네기도 했다.

 

 

오랜 시간 사람이 살지 않아 폭삭 무너진 아랫집 지붕도 재미난 볼거리가 됐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어디선가 몰려온 아이들이 산행에 함께 했다. 허겁지겁 오르막길을 올라온 아이들. 가까이서 보니 아까 여학생 교실에 기웃거리던 학생들이었다. 함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동네 구멍가게에 들러 달달한 것을 손에 쥐어 주었다. 가게 안에 있는 모든 것들도 어제 우리가 달려온 그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오지 비용이 붙었을 것 같았으나 실제 가격은 도시와 많이 차이가 나지 않았다. 구석으로 들어갈수록 일자리는 없을 것이고 급여도 터무니없이 적을 테니 물가가 더 비싸지는 일은 이들에게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많은 박티아리 사람들이 정착을 하고 살고 있지만, 아직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박티아리 사람들이 있다.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유목민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여행자에게는 며칠 체험이겠지만 매년 두 번 수많은 동물을 이끌고 험준한 산을 오르고 내리는 일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은 일.

 

박티아리 유목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유목민 가족 중 엄마의 인터뷰가 가슴을 후벼 팠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유목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했다. 이동하며 아이를 돌보고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만들고 동물까지 돌봐야 하는 그녀의 고단한 삶은 삶이 아니었다. 그녀의 고단한 삶이 더 이어지지 않길 바랐다. 다음 이란 여행에서 유목민 생활 체험을 못 하게 되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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