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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은 싫어하면서, 같은 옷을 입는 아이들

기성세대에게 교복은 추억의 대상이다. 그렇다고 교복을 입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기성세대들이 교복이 예쁘다고 말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교복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억압하는 굴레처럼 느껴질 뿐이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는데 우울한 이야기를 해서 걱정이 된다. 우선 최근 몇 가지 현실을 되짚어본다.

학창시절의 상징, 교복
교복은 학창시절의 상징이다. 특히 기성세대에게 교복은 추억의 대상이다. 그래서 지나가다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면,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부럽기도 하고, (교복 입은 모습이) 예뻐 보인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교복을 입고 있으면 학생으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육과 성장이 남다른 요즘 10대들은 교복을 입지 않으면 20대와 크게 구분이 되지 않기에 교복은 학생들을 구별하는 장치이다.
학생이라면 당연히 교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생각은 통념이다. 교복을 입으면 좀 더 학생다워진다고 믿는 어른들이 많고, 실제로 교복을 입으면 학생들에게 일정한 구속력을 갖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교복을 입을 때와 입지 않았을 때, 학생들의 행위양식에는 변화가 있다.
교복과 같은 유니폼을 최초로 입게 된 것은 나폴레옹시대에 학생들을 유사시에 군인으로 활용하기 위해 구별하기 위한 훈련복이었다. 따라서 유니폼(uniform)은 권력자가 학생들에게 유니폼을 입게 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다. 교복은 간호사복, 군복, 운동선수의 유니폼과 달리 학생으로서 ‘기능’을 더욱 편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다른 사회적 지위와 ‘구분’하기 위해 활용한다. 교복을 입으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이란 정체성이 무의식적으로 강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복을 통해서 학생들을 학생답게 처신하게 하는 한편, 어른들 기대의 반대편에선 학생들은 교복을 불편해할 수밖에 없다.

좀 더 개성적으로 보이고 싶은 아이들
이런 문제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때에는 공통적으로 경험했던 일들이고, 교복을 둘러싸고 여러 논의도 많았다. 한때 교복은 일제잔재라고 하기도 했으며, 교복의 가격이 높아지고 학생들의 개성을 억압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다고 교복자율화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교복은 개성의 억압일 수 있지만 또는 집단의 동질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또한 교복 자율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옛날 옛적 억압된 시대상에나 어울리던 상징투쟁의 연장일 뿐이다. 오히려 교복을 입자/말자라는 주장 자체가 이제 다소 상투적이고 촌스러워 보이는 주장처럼 보인다.
지금 교복을 입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교복이 예쁘다고 하면 당연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교복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억압하는 굴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교복만 입으면 왠지 짱(짜증이) 난다고 하며,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사복으로 갈아입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교복이 예쁘고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어울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들릴 수가 없다. 오히려 교복이란 제한된 조건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을 표출하려고 노력한다. 오히려 요즘 청소년들에게 교복은 또 다른 패션 아이템이다. 많은 대중문화에서 교복을 귀여움과 깜찍함 등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기표로 활용하기에, 교복을 억압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촌스럽지 않은 ‘좀 더 예쁜’ 교복을 입고 싶어한다. 그래서 같은 교복이라도 바지와 치마의 길이, 바지통, 주름 등을 자유자재로 변형시켜 다른 아이들과 차별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패션으로 받아들이고 익숙하게 여기는 문화이다.
특히 교복의 가격이 고가화 되며 브랜드의 차이로 같은 학교의 교복이라도 메이커에 따라 달리 보일 것이라 믿는다. 교복을 이용해 미세하게나마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욕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도되어 왔고 또래문화 안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어차피 밖에 나갈 때에는 미리 준비한 사복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에 교복 자체가 주는 억압감을 그리 크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것은 현재 청소년들에게 교복이 가지고 있는 차별적 의미이다. 필자 역시 학창시절에는 교복을 입는 것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이 지겹기도 했고, 교복을 통해서 내가 어느 학교인지 드러내 보이게 되어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소위 명문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은 교복을 자랑스러워했던 적도 있었다.
학교 간 평준화가 많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학교 간 편차가 있다는 것은 암암리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특목고와 같이 공부 잘하는 학교를 많이 만들려고 하는 최근 교육제도는 오히려 학교 간 편차를 조장하고 있다.
교복은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강제적으로 집단의 소속을 드러나게 해 그 집단의 이미지는 사회적인 우열화로 결정된다. 교복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학교 간 격차를 조장하는 교육제도 안에서 차별은 발생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불편한 것은 교복이 아니라 교복을 통해 받게 될지 모를 차별적인 시선일 것이다.

졸업식, 학생들의 카니발
언제부턴가 2월 졸업식에 학생들은 서로 서로의 교복에 밀가루를 던졌다. 왜 밀가루를 던지는 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엄숙한 졸업식에 좀 더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려는 ‘학창시절 최후의 장난’이라고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교복을 과도하게 찢어버려 흔히 ‘알몸졸업식’이라는 제목으로 사진들이 매스컴과 인터넷에 떠돌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에 도가 지나치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러나 관심의 초점은 학생들의 알몸이 아니라 학교라는 상징성이 담긴 교복을 가해하려는 이유이다.
학생들이 왜 교복을 저렇게 찢어버리고 싶어하는지 한 번이라도 성찰하지 않고, 비판만 한다면 결코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졸업식장 앞에 경찰과 순찰차로 감시한다면 아이들의 행위는 사라질 수 있으나, 마음은 결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학창시절의 기억이 담긴 교복이란 더 이상 추억할 필요도 없는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갈기갈기 찢겨가는 교복을 보면서 더 이상 이제 청소년들은 자신의 청춘을 가두어 놓은 학교를 떠난다는 해방감을 확인하려 한다. 학교를 떠나는 섭섭함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에 앞서, 당장은 그토록 탈출하길 바라던 학교란 제도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을 과격하게 표현하고 싶어한다. 왜 이렇게 학생들이 학교를 억압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게 됐는지 안타깝다.
그렇다고 그들이 교복을 찢는 행위가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대한 저항이란 과도한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 학생들의 행위들은 지나간 학창시절의 시간과 단절하려는 또래 간의 카니발(Carnival)이다. 바흐친(Bakhtin)이라는 철학자는 중세와 르네상스시대에는 고급문화와 피지배 계급의 민중사회에서 비공식적인 문화와는 갈등과 긴장이 있어 왔다고 분석했다. 진지하고 엄숙주의적인 공식문화와 달리 기성의 권위에 대해 거부하는 카니발은 세상의 모든 것을 뒤바뀌고 역전하며 경건한 모든 것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든다고 정의한다.
졸업식이 공식적인 의식이라면 일부 학생들이 모여 교복을 찢는 등의 훼손행위는 그들만의 카니발로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지속적인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탈적 행위일 뿐이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가 자신들을 몰개성화 시켰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데, 일부 학생들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해소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대부분 학생들은 왜 했냐고 하면, ‘그냥 재미있어서요’라고 넘겨서 이야기한다. 그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 없는, 스트레스의 표출양식으로 보인다.

스스로 동질화되려는 아이들
교복이 학생들의 개성을 일체화시켰다는 비판과 함께 모순적으로 학생들은 스스로를 동질화하고자 한다. 흔히 제2의 교복이라고 불리는 ‘노스페이스’를 학생들이 똑같이 입는 것은 오히려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개성을 일체화하는 시도로 보인다. 언제부턴가 중 · 고생들이 ‘노스(노스페이스의 줄임말)’를 입기 시작했는데, 노스가 단순히 보온성이 뛰어난 옷이기에 유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벌에 최고 몇십만 원 이상이 넘는 고가의 등산복 브랜드이기에 노스는 부모님의 등골을 휘게 한다고 해서 ‘등골브레이커’라고도 한다. 또한 각기 다른 가격과 모델에 따라 아이들 사이에 ‘계급’ 차이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체화된 소비를 하는 것은 노스를 입는 집단에 편입되고 싶어하는 동질성에 대한 욕구와 다른 아이들과 유행에 낙오되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한 절박한 소비이다.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교육 체제의 교복은 거부하면서, 자기들끼리의 동질성을 획득하기 위해 ‘교복’ 같은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안감’ 때문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하나로 규정한 학교에서 교복을 입으면 자신들이 획일화 될 것이란 불안감을 느끼는 반면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탈락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교복 같이 동일한 옷을 입으려고 한다.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한 우리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이제 자발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해 낼 용기도 사라지고, 남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마치 계급처럼 존재의 위치를 평가하며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학생들을 경쟁의 기계로 만들어 가고, 아이들은 교복이나 의복마저도 경쟁사회의 기능적 수단으로 적용해 버리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결국 아이들을 마치 기성복을 입히듯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규정하기보다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바라보고 대하면서 각각의 개성을 살려줄 수 있는 방법적 고민이 실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집단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평가해내며 때로는 집단 안에 숨거나 눈치 보는 삶의 방식을 체득하는 등 이유 없는 분노를 안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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