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출몰한 꼽등이
꼽등이 혹은 곱등이를 아는지?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독자라면, 귀뚜라미와 비슷한 벌레를 기억해 낼 수도 있겠다. 별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벌레가 갑자기 작년에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오르고, 아이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올해에도 아이들은 꼽등이가 나타났다고 수근거린다. 아이들 사이에 언제부턴가 꼽등이는 친숙한 곤충이 되었다.
지난해 7월경 춘천의 한 아파트에 수천 마리의 꼽등이가 출몰했다는 뉴스 보도가 발단이다. 이후 인터넷 상에서는 ‘꼽등이는 살충제를 뿌려도 다시 살아난다’, ‘꼽등이를 밟아죽이면 연가시라는 기생충이 나와 사람 몸에 기생한다’는 등등의 괴소문이 퍼져갔다.
특히 아이들은 죽을 때에는 연가시가 나와 사람을 위협한다는 것과 엄청난 번식력을 가졌다는 점에 꽂혀 꼽등이를 공포의 벌레라고 이야기 했다. 대부분 아이들은 실물을 보지도 못했을 꼽등이를 괴담 수준으로 이야기 했다. 그래서 한순간 꼽등이는 마땅히 죽여야 할 괴생명체가 되어버렸다. 전문가들까지 나서서 “조사결과 인체에서도 연가시가 나온 경우가 있지만 사람에게는 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만진다거나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끔찍한 질병에 걸리는 수준은 아니다”라며 안심시켰다.
그 이후의 변화가 놀랍다. 죽여야 할 꼽등이가 갑자기 열광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꼽등이 팬카페가 만들어지더니, 꼽등이송이 인기를 끌게 된다. 아래 노래는 꼽등이에 대한 변화되는 취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치 꼽등이와 대화하듯 꼽등이를 반복하는 중독성 있는 노래다. 또한 아이들은 꼽등이를 의인화하여 미소녀와 같은 모양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꼽등이를 주제로 한 게임도 만들어졌다. 아이들 사이에서 꼽등이는 낯설고 공포스러운 존재에서 친숙한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근 몇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왜 꼽등이가 인기를 끌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인터넷 시대에 유행은 우발적으로 발생하고, 곧 사그라든다. 만약 꼽등이가 말을 할 줄 안다면, 아이돌 스타처럼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는 식상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앞선 꼽등이의 괴담적 요소와 후크송에서 살펴볼 수 있듯 이미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고착성 요소(Stickiness Factor)를 내재하고 있었다. 내재한 요소가 어떠한 특정상황에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유행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티핑포인트>란 책에서 볼 수 있듯 유행은 복잡한 상황적 맥락 속에 나타나는 우발적 결과물일 뿐이다. 꼽등이가 아니더라도 인터넷에선 하루에도 많은 유인 요소가 넘쳐나며, 아주 잠깐 중요한 것처럼 유행하며 소비되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아이들의 꼽등이에 대한 반응은 과장된 연기와 놀이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처음 꼽등이가 흉측한 해충으로 연가시와 함께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다소 과장스러운 반응이다. 이러한 과장된 분위기는 연극과 같이 작위적이고, 놀이적 성격을 가진다. 그런 상황에서 실제 꼽등이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과학적인 이야기는 놀이를 김빠지게 하는 훼방일 뿐이다. 그런 태도는 아이들의 비웃음만 사게 된다. 사실 아이들은 꼽등이가 정말 무서운 것이 아니라, 무서운 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꼽등이의 위험성이 이미 과장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듯, 우리 시대의 대중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렇게 행동한다. 현대사회에서 대중은 무지한 것이 아니다. 실상을 알면서도 즐기기 위해 무지한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꼽등이에 대한 인터넷 기사에 달린 아이들의 댓글을 보면 인터넷 기사를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님을 금세 알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아이들이 기자들과 놀아주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이 쓸데없는 괴담에 빠져서 혼란스러워 한다는 어른들의 걱정은 지나친 것이다. 나의 청소년기에도 근거 없는 ‘홍콩할매 괴담’이 퍼졌고, 그런 식의 괴담은 어느 학교에서든 꾸준히 생산되고 소비되었다. 청소년들 사이에 괴담은 어떠한 문제나 징후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나이 또래가 공통적으로 친구들과 가질 수 있는 관심사의 공유와 유행하는 놀이문화일 뿐이다. 어차피 곧 사그라질 한바탕 소동으로 이해하며, 청소년들의 눈높이에서 놀아줄 수도 있어야 한다.
낯선 생태계와 놀이하는 아이들
그러나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꼽등이가 공포의 대상에서 친밀한 존재로 갑자기 반전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단순히 몇몇 네티즌의 재능에 의해 만들어진 인터넷 송이나 팬덤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현대사회의 미학적 취향이 일관성이 없고 변덕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 것은 울리히 벡이 말한 대로 현대사회의 위험이 타자화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꼽등이에 대한 공포를 느꼈지만, 이러한 위험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것을 금방 간파하고 오히려 꼽등이를 대상화한다. 이는 꼽등이가 하나의 생명체라거나, 그들의 갑작스러운 대규모 출현이 기후변화를 통한 생태계의 혼란 때문이라는 맥락을 사라지게 한다. 오히려 꼽등이 자체가 인격화되면서, 소비할 또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될 뿐이다.
자본은 이러한 흐름을 누구보다 빨리 포착한다. 특히 요즘 아이들의 가장 큰 놀이터인 게임세상에서 꼽등이는 이벤트의 대상이 된다. 꼽등이는 몬스터가 되고, 몬스터를 죽이면 연가시 아이템을 보상받게 된다. 꼽등이는 가상세계에서 죽일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되고 아이템화 되면서 가상 재화가 된다. 이는 등가교환이 가능한 대상이다. 이를 통해 꼽등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가상적 실재화가 된 존재로 등극한다.
게임사의 마케팅에 아이들이 이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꼽등이의 등장을 아이들은 놀이화하고, 그것에 상상력을 덧붙여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꼽등이는 그동안 몰랐던 잉여적 존재이고, 그런 잉여물을 그들만의 잉여적 행동을 통해 깜짝 스타로 만들어주는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자본이 거기에 반응하게 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더욱 빠르고 민감하게 새로운 대상을 스타로 만들어낸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인기가 한시적일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대중적 스타는 우상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소비되는 일시적인 상품 대상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대부분의 경험은 일시적인 체험으로 축소된다. 특히 도시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자연은 일시적인 체험으로 소비된다. 대부분 자연보다는 오히려 도시가 더욱 자연스러운 현실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더 이상 현대 아이들에게 자연 환경 위험은 반응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가상적 문제가 된다.
인류에게 환경적 위험을 경고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아이들과 같이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아이들은 그 책을 읽고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던 것은 그 책이 50여 년 전인 1962년 처음 출판된 낡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책에서 경고한 것들은 이미 현실화되었고, 아이들은 환경적 재앙의 위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에서 태어나 자라온 것이다.
생태계적 관점은 대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깨닫고, 그 대상의 각각의 역할에 대해서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생각하는 대부분의 생태계적 관점은 오히려 ‘먹이사슬’의 관계로 상상된다. 적자생존과 경쟁이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생태계의 전부이다.
사실 우리 아이들은 어떤 생명도 무가치하지 않다거나, 약한 생명들과도 공생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학습한 적이 없다. 오히려 생명이란 필요에 의해 이용가능하고, 불필요하다면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적으로 훈련받아왔다. 생명에 대한 존귀함을 모르는 현상은 결코 게임 같은 것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경쟁과 적자생존의 본능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훈육된 것이다. 이것은 어느 조건 하나가 잘못되어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에 둔감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경 위험 경고 앞에 무덤덤한 아이들
되돌아보면 꼽등이의 등장은 최근 기후변화에서 발생한 환경 위기의 징후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후변화에 대한 지적보다는 아이들의 무지함을 탓하는 것이 오늘날 인터넷 언론의 모습이다. 조금 더 많은 클릭을 위해 관심을 유도하기에 바쁘며, 대중이 반응하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대중이 어리석다고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어리석지 않다. 오히려 요즘 아이들은 기자와 놀아주겠다는 듯 반응한다. 이러한 반응을 통해 나타난 꼽등이의 인기는 아이들의 놀이적 상상력에 결국 자본이 반응하는 유행 소비의 역전된 관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유행 소비 현상에서도 환경에 대한 성찰적 태도는 가능한데, 이러한 가능성들은 아직 발현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꼽등이에 대해 열광하는 태도를 보며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거나, 상업적 이용을 고민할 뿐이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기후변화 관련 메시지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이들 사이의 유행은 대부분 현상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그것으로 아이들의 행동을 평가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더욱 어른스럽게 그 안에 담긴 중요한 메시지를 찾아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동안 기후변화 등의 환경적 경고는 자연과 괴리된채 자라온 아이들도 이미 알고는 있지만 별 문제가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자연이란 채집되거나 체험하는 인공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른들 역시 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갈 아이들이 환경파괴에 대해 감흥이 없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것은 요즘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히 어른들의 문제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오히려 환경 문제를 가르칠 때, 분리수거는 꼭 해야 한다는 식의 공중도덕 정도로 문제를 축소한다. 자연을 체험하는 활동들도 잠시의 여가처럼 취급되곤 한다. 기후 변화 같은 환경 문제도 현대인이 알아야 하는 수많은 상식 중 하나 정도로 축소된다. 게다가 결코 시험에도 안 나오기에 아이들은 환경 위험을 자신과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며 쉽게 타자화된다. 이번 여름방학에도 많은 청소년들이 자연과 친밀해지기 위해 여러 캠프 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휴가를 다녀왔다. 모처럼 어렵게 경험한 자연 체험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환경을 꼭 지켜야 할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