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의 권력 행사로서의 단발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도 역사에 얽힌 머리카락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아무리 임금이 앞장서서 상투를 싹둑 잘라 단발의 의지를 공표했다 해도,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적 덕목을 소중히 여겨온 조선의 백성에게 1895년 말 시행된 단발령은 외세의 침략을 신체에 새기는 계기였을 따름이다. 오죽하면 머리카락을 잘리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놓겠다고 절규하면서 단발에 저항했을까. 그만큼 단발은 무력 앞에서 근대를 강요당하는 자의 치욕을 상징했던 것이다. 두루 알려진 바와 같이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기는 관념은 중국이나 한반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 동양만 그런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전근대적인 세계는 다 그랬다. 게르만 국가에서도 머리를 자르는 것은 굴욕이었기 때문에 삭발은 죄인이나 음란한 여자를 벌하는 명예형(범인의 명예나 자격을 박탈하는 형벌)이었다. 농노가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도 머리를 빡빡 깎았다. 요컨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지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셈이다. 서양이라고 애초부터 단발의 장점을 속속들이 알고 실천하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큰 코에 피부가 하얀 그들도 알고 보면 봉두난발(蓬頭亂髮)의 족속이었다. 그런 주제에 남보다 한 발 앞서 단발을 시행했다고 어깨에 힘을 줬다. 그렇게 좋으면 자기들이나 할 것이지, 머나먼 곳까지 찾아와 문명개화라는 거창한 이념을 내세워 굳이 단발을 강권하거나 강요한 속내가 제국주의적 침략의 욕망에 있음을 누가 모를까.
강제적 단발에서 자발적 단발로 왕의 단발은 마치 시대의 변화에 부응한 자발적인 행위라는 듯이 포장되었지만, 거리에서 강제로 상투를 잘린 백성에게 단발은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남성의 단발은 힘없는 나라의 사내들이 겪어야 할 부끄러움이자 좌절의 경험이었을 터였다. 이렇게 처음부터 근대 국가의 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 남자의 단발은 이후 학교와 군대 같은 근대적 제도를 통해 정착되어 간다. “4월 5일에 회장은 오십여 명 신학생을 인솔하고 읍내에 가 일제히 단발을 시키고 모자를 씌운 후에 대(隊)를 지어 학교에 왕(往)하였소”(이광수, <농촌계발>, 1916∼1917년)에서 보듯이, 단발은 어디까지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것이었다. 남자에게 단발은 점차 근대를 맞이하기 위한 통과의례의 하나가 되었다. 개명한 남자들은 스스로 머리를 잘랐으며, 단발에 대한 거부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굴욕이 아닌 동경의 시선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잠깐 여기서 단발령의 대상이 남자였음을 짚고 넘어가자. 남자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는 것은 근대국가가 ‘국민’으로 통합하고자 한 맨 처음 대상이 남자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여성은 아직 ‘국민’에 속하지 않는 주변적 존재였기 때문에 근대국가의 정치적 요구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자의 단발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을까.
여자의 단발은 ‘아래로부터’ 남자의 단발이 국가권력과 제도를 등에 업고 ‘위로부터’ 집중적이고 강력하게 시행되면서 단시간에 정착된 반면, 여자의 단발은 서양과 근대를 동경하는 일군의 ‘신여성’이 자발적인 의지를 통해 ‘아래로부터’ 주도해나갔다. 남자의 단발도, 여자의 단발도 전통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지만, 흥미롭게도 단발을 한 ‘개명한’ 남자도 여간해서는 여자의 단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의 단발은 사회적 경멸과 반감에 맞서 더욱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사전에 보면 단발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머리털을 짧게 자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깨를 덮지 않게 일직선으로 가지런히 자른 여자의 머리 모양(연세 한국어사전)이다. 단발이 여성의 머리 모양을 가리키는 낱말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볼 때, 현대어의 단발이 지닌 뜻은 여자의 단발과 더욱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단발은 한때의 이슈로 끝나버렸고 그 후 커다란 사회적 저항 없이 진행된 것에 비해, 여자의 단발은 1930년대에 논란거리가 되어 식민지 시기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화제에 올랐다. 봉건사회의 인습과 제약을 타파하려는 열망이라는 점에서는 남자들과 한 치 다를 바가 없었을 터인데도, 시대를 앞서 나가고자 열망했던 소수 여성의 단발은 남자보다 더욱 혹독한 반대와 질타를 마주해야 했다.
기생의 단발과 여학생의 단발 역사적으로 여자의 단발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초의 장본인은 ‘여학생’이나 ‘신여성’으로 불리는 신흥 여성계층이 아니라 천한 신분의 기생이었다. 기생 강향란은 1920년대 초라는 이른 시기에, 단발에 남장을 결행하고 남학생들과 함께 수학하겠다고 선언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화류계에서 학창생활에 머리 깎고 남복한 여학생’, 동아일보, 1922. 6. 22). 기생은 전통사회에서 유일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던 여성으로서, 이른바 패션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특히 3•1운동 이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여학생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면서 기생은 시대의 뒤편으로 사라져갔고, 여자의 단발은 여학생의 손에 주도권이 넘어갔다. 물론 여전히 곱게 땋은 댕기머리를 고집하는 여학생도 있었고, 쪽진 아낙네도 흔히 볼 수 있는 세상이었다. 여자의 단발이 처음부터 단발머리 모양으로 행해졌던 것은 아니다. 1930년대 여자의 단발이 보편화될 때까지 많은 여학생이 선망한 머리 모양은 서양식 트레머리였다. 가르마를 타지 않고 뒤통수 한복판에 머리를 틀어 붙인 이 머리 모양은 쇠똥머리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기 일쑤였는데, 일반적으로는 ‘히사시가미’라는 일본어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선영을 만나러 가는 형식이 상상하는 머리 모양도 바로 이것이었다. “가운데 책상을 하나 놓고 거기 마주 앉아서 가르칠까. 그러면 입김과 입김이 서로 마주치렷다. 혹 저편 히사시가미가 내 이마에 스칠 때도 있으렷다. 책상 아래에서 무릎과 무릎이 가만히 마주 닿기도 하렷다.” 여기서 연애 감정에 달뜬 젊은 남성이 아름다운 신여성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연스레 히사시가미의 머리 모양을 떠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식의 눈에 히사시가미는 신선하고 보기 좋은 헤어스타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사회투쟁으로서 여자의 단발 그러나 당시에는 여자의 단발을 곱지 않게 보는 남자의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근대의 중심을 차지한 남성이 보기에 여성해방을 표방하며 남성 지배적 질서를 비판하는 여자의 단발은 고깝고 위태로운 발상에 속했다. 단발머리는 기존 질서에 반항해 서양과 근대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 자세의 표현이었으나, 남자들이 보기에 여자의 단발은 허영심과 모방 심리의 발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던 일반 부녀자들 역시 여자의 단발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여성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펼치고자 한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다시 전통적인 머리 모양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이런 시대인 만큼, 간편하고 위생적이며 미관상 보기 좋으니까 단발을 하겠다는 소박한 취향이 통할 리 없었다. 여자가 거리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희한한 구경거리가 되는 시대였다. 장옷의 역할은 양산으로 넘어갔지만, 단발을 하고 거리에 나간 ‘신여성’이 감당해야 할 따가운 시선 때문에 여자의 단발은 그 자체로 사회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때때로 전통이나 상식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과 거부감이 짐작하거나 각오한 바에 비해 훨씬 강고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여자의 단발은 남보다 시대를 앞서 살아가는 일에 얼마나 용기가 필요하며 또한 그것이 얼마나 고단한 길인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