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것 같던 징글징글한 무더위를 저만치 몰아내고 우리들 곁에 사뿐히 내려앉은 가을. 청명한 파란 하늘과 시원한 바람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그 가을은 그러나 너무도 짧다. 한 잎, 두 잎 낙엽이 진다 싶으면 어느새 쌀쌀한 바람을 앞세운 겨울에게 자리를 내주고 쓸쓸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만다. 하지만 그 짧디짧은 가을은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난다. 마음을 살찌우는 수많은 책들, 농부의 가슴을 물들이는 황금 이삭들, 그리고 스포츠팬들을 열광하게 하는 프로야구의 멋진 승부사(史)!
실존 인물 감사용 골수팬은 아니지만 자칭 ‘가늘고 긴’ 야구팬인 필자에게, 해마다 찾아오는 가을은 ‘한 해를 결산하는 한국시리즈’라는 대작을 통해 늘 짜릿한 기억을 남겨 준다. 올해는 특히 정규 시즌 내내 하위권을 맴돌던 ‘롯데 자이언츠’가 하반기에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보이며 8년 만에 ‘포스트 시즌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해라 더 흥미진진했다.
어렵사리 4강에 진입했지만 더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무릎을 꿇은 롯데팀의 경기를 지켜보는 내내 머릿속에 영화 한 편이 맴돌았다. 2004년 가을, ‘한국 스포츠 영화의 편견을 무너뜨린 수작’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상영된 <슈퍼스타 감사용>. 실존 인물인 전직 야구 선수 ‘감사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재 자체가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80년대 이후에 출생한 세대들에게는 그 이름조차 낯선 ‘감사용’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단 ‘삼미 슈퍼스타즈’는 16연패라는 무시무시한 대기록(?)을 남긴 팀이다. 그 엄청난 기록에 일조한 ‘패전 처리 전문’ 투수 감사용, 프로야구 초창기 5년 동안 1승 15패 1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마운드를 떠난 그를 스크린에 불러들인 이는 ‘김종현’이라는 신인 감독이었다.
춥고 배고픈 연출부 생활을 거쳐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데뷔 준비를 하던 김종현 감독은 지갑에 ‘리틀 OB 베어스’ 회원증을 꼭 넣고 다녔다고 한다. 할리우드 키드이자 골수 야구팬인 김종현 감독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꿈을 던진 패전 투수’ 감사용에게 빠져들었다. 패자에 대한 측은지심을 넘어 존경하게 된 감사용 선수.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감독은 아는 연줄을 다 동원,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던 감사용 선수를 찾아내 기어코 승낙을 받아 냈다.
올곧은 직구로 승부하다 도박을 일삼는 감삼용(조희봉 분)의 동생 감사용(이범수 분)은 삼미특수강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는 홀어머니는 형보다 나은 아우가 기특하다. 직장 일보다 야구를 좋아해 직장인 야구 대회에서 우승까지 한 사용은 남몰래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키우고, 결국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단 삼미 슈퍼스타즈로 파견 근무를 나간다.
171㎝의 작은 키에 야구를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못했지만, 좌완 투수라는 이유로 운 좋게 발탁된 감사용은 상대팀은 물론 소속팀에서도 선수 대접을 받지 못한다. ‘프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소리 없는 눈물을 삼키며 연습에 매진하던 감사용. 꼴찌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 처리 전문 투수로 1승을 하는 게 소원이었던 그에게 드디어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작은 키에 왼손잡이, 직장인 야구 출신, 가난한 집안이라는 배경은 늘 감사용을 짓누른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남부럽지 않지만 아무도 그 꿈을 알아주지 않기에 그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패배자’다. 오직 야구에 대한 애정과 성실함으로 매일매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을 던지지만, 16연패를 기록한 꼴찌팀 내에서도 지는 경기 마무리 전문이었던 감사용에게 희망이란 너무 먼 단어처럼 느껴진다. 너무나 소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 앞에서 매번 쓰라린 눈물을 흘려야 하는 그의 이야기는 저마다 사연을 가진 평범한 관객들에게 공감을 이끌어 낸다. “인간 승리 드라마가 아닌, 그저 꿈을 위해 묵묵히 노력한 한 젊은이의 진심을 그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 감사용의 고군분투는 가식도 미화도 없이 올곧은 직구로 가슴을 파고든다.
패자에게도 꿈은 있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힘겨운 시절을 겪게 마련이다. 간절히 바라던 꿈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지만 행운의 여신은 냉담한 등을 보이며 나를 외면하고, 주위 사람들의 무시와 질타는 커져만 간다. 이를 악물고 다시 도전하지만 손이 닿으려 하면 성공은 저만치 멀리 도망간다.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우리는, 어느 순간 인생이라는 괴물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그렇게 평범한, 아니 무능력한 패배자들의 심금을 울리며 감사용의 인생에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 무명의 패전 투수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그가 간절히 바라던 1승을 진심으로 기원하게 된다. 하지만 감독은 누구나 예상 가능한 신파조의 드라마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해피엔딩을 바라는 관객들의 염원을 외면함으로써 휴먼 드라마의 묵직한 감동을 이끌어 낸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우리의 감사용은 20연승을 앞두고 있는 박철순(당대 최고의 스타 투수)이 선발로 등판하게 될 OB와의 경기에서 마운드에 선다. 천신만고의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9회 말 투 아웃, 과연 감사용의 꿈은 이루어질까? 가족과 동료들이 감사용의 투혼에 못다 이룬 자신들의 꿈을 대입시키며 ‘딱 한 번만’이라고 기도할 때, 카메라는 승리의 함성 대신 쓸쓸한 마운드를 비춘다.
1승 15패 1무승부의 기록을 남겼다는 감사용의 그 ‘1승’은 에필로그에 자막으로만 처리된다(이후 감사용은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벌어진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그토록 원했던 첫 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한 줄의 자막을 읽는데 코끝이 찡해 온다. 오직 승패만 있는 줄 알았던 스포츠에서,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하게 한 영화. 승자가 아닌 패자에게도 꿈은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면서, 그렇게 따뜻하게 우리의 등을 토닥이는 영화의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름을 갖게 된 그대 <슈퍼스타 감사용>은 한국 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완성도 높은 야구 장면을 연출하며 ‘한국에서 스포츠 영화는 흥행이 안 된다’는 금기에 당당히 도전했다. 감독의 진심이 배우들의 호연을 이끌어 내면서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성실한 드라마를 직조했다. 한 신인 감독의 패기만만한 열정과 야구에 대한 애정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 영화는 또한, 요즘처럼 다양한 놀이 기구나 게임이 없던 80년대의 아이들, 그래서 어쩌면 더 프로야구에 열광했을지도 모를 그들에게 지난 시절에 대한 추억을 선사해 준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 모으던 프로야구 선수들의 딱지, 아이스크림콘을 사면 덤으로 들어 있던 야구 스티커 등등. 이 영화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본 관객들의 상당수는 아마도 이러한 연대감을 빚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슈퍼스타 감사용>이 단지 그뿐이었다면, 사람들에게 지나간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그쳤다면, 관객들의 마음속에 그렇게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들판의 잡초에 이름을 붙여 준 따스한 눈길과 성실한 손길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프로야구 20년 역사상 은퇴 투수는 총 700여 명이다. 그중 10승 이상 거둔 투수는 120여 명뿐이며 1승 이상 거둔 투수는 430여 명이다. 나머지 투수들은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야구계를 떠났다고 한다. 한때 운동장을 찬란하게 빛내 주던, 혹은 벤치에 앉아 얼굴 한 번 내밀지 못했던 그 많은 선수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현재 지방의 한 마트에서 일하고 있다는 감사용 씨는 이 영화를 본 후 감독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고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프로야구 초창기 이름 없이 사라져 간 그 많은 선수 중 감사용이란 이름을 용케도 찾아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새겨 주었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진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