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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망상이란 병은 없다


희생 : 피해 (2)


‘희생’이라는 이름 붙이기
예전에 TV에서 인간이 취하는 뜻밖의 행동에 관해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를 얼핏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기 몸을 던지는 사람이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전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플랫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뛰어드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 사람의 타고난 성정과 그때까지 살아온 내력을 철저히 분석한다고 해도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신비한 정신작용이라고 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자기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 사람을 매스컴에서 보도할 때 마치 숭고한 ‘희생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한 것처럼 보도하곤 한다.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때 ‘희생정신’이라든지 ‘고귀한 신념’ 같은 말을 언급하기보다는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거나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어떤 행위를 가리켜 ‘희생의식’이나 ‘희생정신’과 연관 짓는 것은 ‘사후에’ 그 행위를 대상화하고 거기에 의미를 붙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도를 드러낼 뿐이다. ‘희생’이란 사람들이 ‘희생적’이라고 여기는 행동에 붙여주는 이름인 것이다.

‘희생양’에게는 말할 기회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순간적으로 취한 행동이라도 누가 시켜서 한 행동이 아닌 한 자발적인 ‘희생’이라 할 것이다. (지난 호에서 서술한 것처럼) ‘희생’은 의지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자발적이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원폭이나 기름 유출 사고처럼 반드시 자발적이고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희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희생’의 사전적인 뜻 중에는 “뜻밖의 재난이나 사회의 큰 세력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피해를 입는 일”도 포함된다. 이럴 때 ‘희생’은 ‘피해’와 의미상 겹치기도 한다.
 
자발적이기는커녕 타의에 의한 희생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말이 ‘희생양’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희생양’이란 공격하고 싶은 직접적인 대상을 대신하여 파괴적인 욕구를 발산하는 대상을 일컫는다. 정작 쳐부수고 싶은 놈은 힘이 세니까 대신 힘 약한 놈을 골라 분풀이를 하는 셈이니,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행위는 비겁하고 야비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 희생양이 되기 쉬운 것은 아이들이다. 위기에 빠진 사회는 대중조작을 통해 ‘희생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정부는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분노에 찬 일본국민은 조선인을 학살했다.

‘희생양’에게는 ‘희생’을 하겠다든지, 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선택을 당하는 처지이다 보니 어찌할 수 없는 힘의 논리에 휘둘릴 뿐이다. 희생자 본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발적이지 않은 ‘희생’은 ‘해를 입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피해’에 가깝다. 때로는 ‘피해자’로서 ‘피해’ 보상을 받는 것으로 끝내고 싶은데 ‘희생’이라는 딱지를 붙여주면서 고맙다느니, 고귀하다느니 하며 추어올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희생자’라는 칭호는 교활한 강자의 얄팍한 꼼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해’와 ‘피해’라는 대립쌍
‘희생’을 둘러싸고도 희생을 ‘당하는’ 사람과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 둘의 관계가 명료한 대립을 이루기는 어렵다. 자발적인 ‘희생’이라면 애초부터 적대관계가 있을 리 없고, 어쩔 수 없는 재난이나 사회적인 세력 대 희생자 사이에도 뚜렷한 갈등관계가 성립한다고 보기 어려울 때도 많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피해’에는 ‘가해’라는 상대가 따라다닌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 ‘가해’와 ‘피해’라는 대립구조는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연적인 요소가 되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일본은 ‘가해자’, 한국은 ‘피해자’라는 발상이 편협한 민족주의로 빠지는 예를 자주 볼 수 있듯이, ‘가해’와 ‘피해’라는 이분법을 들이대서 역사나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파악한다면 역사를 둘러싼 갈등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해’와 ‘피해’라는 갈등이 물질적인 해결로 해소될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문제는 정신적인 상처를 주고받았을 때다. 상처는 생겨서 앓는 동안도 아프지만 낫고 나서도 아픔이 가시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물론 상처자국 자체는 아픈 듯이 보여도 실제로 아프지는 않다. 다만 아팠다는 기억을 되살려줄 뿐이다. 그래서 상처를 치료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상처자국을 어루만지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해’의 기억은 ‘피해’의 기억만큼 끈질기지 않은 듯하고 때로는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가해’라고 깨닫지 못하는 경우조차 있다. 이 불균형이야말로 비극이자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다.

‘희생’망상이란 병은 없다
‘가해자’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피해자’에게 최선을 다해 보상하고자 하면 ‘피해자’가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 정성을 받아주는 것, 이것이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해소하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는 불성실한 태도를 취하고 ‘피해자’는 ‘피해’를 내세워 이익을 도모하려고 한다면, ‘가해’와 ‘피해’의 관계는 점점 더 뒤틀리고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피해의식’이다. ‘피해의식’은 지나치게 피해를 입었다고 느끼거나 입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심리상태다. 스스로 깨달아 자신을 희생하려는 ‘희생의식’이 주체적인 데 비해 ‘피해의식’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라고 여겨진다. 피해의식이 지나치면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부당하게 박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피해망상’ 증세로 발전한다. 누군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믿는 ‘피해망상’ 증세는 정신분열증이나 편집장애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하지만 무언가 위해 스스로 죽고자 마음먹는 ‘희생의식’은 아무리 지나쳐도 ‘희생망상’이란 병으로 간주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렇게 ‘희생의식’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사회나 주변의 칭찬과 인정을 한 몸에 받는 반면, ‘피해의식’은 거부와 비난의 대상이 된다.

‘희생’이 이념과 결부될 때
‘피해’나 ‘희생’이 어떤 과실이나 잘못 때문에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왜냐고 묻는다면 운이 나빴다거나 팔자 탓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피해’를 입은 사람보다는 ‘희생’을 당한 사람에게서 더 순진하달까 죄가 없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가령 피해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피해의식’이라는 딱지를 붙이면 마치 피해자가 고통을 실제보다 과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희생자’나 ‘희생의식’에는 순결하고 고귀한 이미지 이외의 불순물이 따라붙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가해자’든 ‘피해자’든 스스로를 ‘희생자’로 규정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의식보다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체험이나 중국 잔류고아(전후 만주에서 후퇴할 때 친족과 떨어져 중국에 남은 일본 어린이) 같은 ‘희생’을 중심으로 자기들의 역사를 기억해온 일본을 떠올릴 수 있다. 여러 나라나 민족이 자신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을 보면 자기 민족이 겪은 ‘희생’을 강조하여 민족주의를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심심치 않게 엿볼 수 있다.

‘피해’는 이념이나 사상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과 달리 ‘희생’은 충효, 애국, 혁명 같은 이념과 밀접하게 결부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를테면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독재자가 온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싶을 때 ‘피해’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위대한 희생으로 강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줍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애국심을 호소하는 이런 선동이 사람들에게 ‘희생망상’을 부추겨온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희생’이라는 면죄부를 방패막이 삼아 역사를 평가하게 되면 자칫 상대방 탓만 하고 자기반성에는 게을러지기 쉽다. 식민지 통치나 독재체제를 경험한 사람이 스스로를 ‘희생자’라고만 일방적으로 내세울 때 균형을 잃은 역사 해석이나 평가를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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