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편’ 연재 8개월의 질주를 잠시 멈추고 2007년 7월부터 2008년 2월까지 8회에 걸쳐 ‘아 다르고 어 다른 우리말’에서는 ‘로-에’, ‘에-에서’, ‘조차-까지-마저’, ‘같이-처럼’, ‘와-랑’ 그리고 ‘관형격조사 의’까지 줄기차게 ‘조사’를 다루어왔다. 이제까지 다루어왔던 명사나 동사, 부사 등과는 달리 조사는 자립성도 없고 그렇다 할 뚜렷한 의미도 없다. 다만 말과 말의 관계를 나타낼 뿐이다. 한복이라면 옷고름이요 화학반응이라면 촉매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아 다르고 어 다른’ 말뜻을 다루는 데 다른 때보다 글쓰기가 훨씬 까다로웠다. 모자란 능력을 탓하기 일쑤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막상 글을 써놓고 보니 딱딱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까지 쓴 ‘조사 편’에 읽는 재미를 가미하려면 맛나고 곰삭은 글로 다듬어 내놓아야 할 것 같다. 8개월 동안 인내와 끈기로 졸고를 읽어주셨을 독자 여러분께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설날 연휴에 집안에 들어앉아 마음먹고 ‘조사 편’의 마지막 주자인 주격조사 ‘은/는-이/가’를 쓰려고 했었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머리만 아프고 도통 진척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높은 산에 오르기 전 숨고르기를 하는구나 하고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신성하고 정결한 희생양 오늘은 평소에 생각하던 ‘희생’과 ‘피해’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려 한다. ‘희생’과 ‘피해’라고? 어? 이건 ‘아 다르고 어 다른’ 정도가 아니라 뜻이 분명히 구별되는 말이잖아? 이렇게 반문하실 법하지만,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다음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원폭 희생자인가 원폭 피해자인가? 기름 유출 사고의 희생자인가 피해자인가? 만약 둘 다 성립한다면 과연 희생을 당하는 일과 피해를 입는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희생’과 ‘피해’는 둘 다 어떤 손실을 당하거나 해를 입는 상태를 가리키지만 그 대상의 성격이 좀 다르다. ‘희생’에는 본디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소, 양 따위의 산 짐승을 가리키는 뜻이 있다. 제의와 관련이 깊은 만큼 ‘희생’의 본질적인 요소는 신성함이다. 희생양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희생’의 대상은 신에게 바치는 신성하고 정결한 것이며 거기에는 혼이나 목숨이 깃들어 있다.
반면 ‘피해’의 대상은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아무리 소중한 것일망정 신성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희생물로 바친 돼지의 영혼은 신에게 기원을 전해주는 영물이 되지만, 홍수에 떠내려간 돼지는 재산의 피해를 가져다줄 뿐이다(돼지를 예로 든 것은 통상적인 돼지의 이미지와는 달리 돼지에게도 혼이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 뿐 결코 돼지를 폄하하려는 뜻은 없다).
자기피해는 있을 수 없다 희생은 자발적이고 의식적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가 특별하고 심오하다. 희생물로 삼으려고 짐승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결국 자기 목숨을 대신해서 바치기 위함이 아닐까. 원래 기독교에서는 소명에 따라 몸을 바치는 것을 ‘헌신’이라고 하여 가장 고귀한 자기희생으로 여겼다. 나아가 생명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공물이나 제물은 단순한 물질이나 소유물이라기보다 자신의 일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피해’의 대상은 자신의 일부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속한 것, 자기가 소유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자기희생’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희생’은 굳이 종교적인 토양에 뿌리를 내리지 않을지라도 다른 사람이나 어떤 일을 위해 자신의 몸이나 재물 같은 귀중한 것을 바치는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피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희생적’인 자세나 마음가짐, ‘희생정신’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피해적인’ 자세나 마음가짐, ‘피해정신’은 성립하지 않는다.
‘피해’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갖고 있는 재산, 명예, 신체 따위에 손해를 입는 일이다. 따라서 보험금을 노리는 것처럼 딴 뜻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자발적인 피해 같은 것은 애당초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희생하다’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로서 버젓이 사전에 올라 있지만 ‘피해하다’는 동사가 될 수 없다.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것 소유물은 어디까지나 나와는 별개의 물건(대상)일 뿐이기에 손해를 입거나 잃어버리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피해 보상’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그러나 ‘희생’은 스스로 남을 위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기 자신(혹은 그 일부)을 바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손해를 입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아무리 보상하려도 해도 보상할 수 없다. 따라서 돈으로 환산하는 것을 전제로 삼는 ‘피해액’이란 말은 두루 쓰이는 반면 ‘희생액’이란 계산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말 자체가 성립하지도 않는다.
물론 피해에는 정신적 피해도 있으므로 이것 역시 원칙적으로 보상할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법률의 테두리에서는 가시적인 형태로 쌍방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정신적 피해도 물질로 환산해서 판결을 내린다. 이를테면 스토커 갑은 피해자 을에게 정신적 피해로 입은 몇 백만 원을 주라는 식이다. 희생자의 경우는 이와 좀 다르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하기를 바랄 뿐이며 물질적 보상을 2차적인 것으로 여긴다.
앞에서 “원폭 희생자인가 원폭 피해자인가? 기름 유출 사고의 희생자인가 피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물론 두 가지 다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원폭이나 기름 유출 사고는 뜻밖에 벌어진 재난이므로 여기에 자발적인 ‘희생'이란 뜻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피해자'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피해자들 덕분에 전쟁이나 생존, 환경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과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을 '희생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물론 ‘희생’의 대상이 아무리 신성하고 정결하다고 해도 누구(혹은 무엇)를 위한 ‘희생’이냐에 따라 원통하고 억울한 ‘희생’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사는 늘 증언해주지만 말이다.
‘희생’타에 박수를 보내는 까닭 세상은 자발적인 ‘희생자’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이것은 피해를 입은 사람한테 표명하는 유감의 뜻과 차원이 좀 다르다. 여기서 희생자가 영웅이 되는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야구만큼 ‘희생’을 작전으로 구사하는 스포츠가 또 있을까 하는 인상마저 풍길 정도로 스포츠 중에서는 야구가 특히 ‘희생’과 친근한 듯싶다. 전체의 승리를 위해 희생구, 희생타, 희생 번트, 희생 플라이 등 ‘희생’이 빈번하게 활용된다. ‘희생’타를 날린 선수는 아웃을 당해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퇴장하지만, 덕분에 자기 팀 선수가 진루를 하거나 득점을 하게 되면 그 공을 인정받고 영웅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대의를 위해 ‘희생’을 한 사람은 만인의 존경을 받고 영웅으로 취급된다. 거꾸로 말하면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구절이야말로 ‘희생’의 진정한 의미를 나타낸다. 결국 희생은 본질적으로 무고한 희생이 될 수 없고, 반드시 희생의 당사자나 희생물이 지닌 원래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의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약속을 내포한다. 희생이 희생으로 끝나지 않고 언젠가 그 진정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예정이야말로 희생정신이 끊어놓은 천국행 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