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학과 취업률이 저조해 매년 신입생이 미달되는 등 자생력을 잃어가던 인문, 실업고가 진학·취업교육과정을 함께 운영하는 통합형 고교(이하 통합고)로 전환한 뒤 명문고로 거듭나 화제다.
9일 충남 천안 병천고에서 열린 '통합고 시범운영 합동보고회'에서 병천고 등 5개 통합고는 "1년의 진로탐색 프로그램을 거쳐 2학년 때부터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진학과정과 취업과정을 선택 이수하면서 대학 진학은 물론 취업률도 껑충 뛰어오르고 신입생마저 몰리고 있다"며 "통합고가 고사 직전의 실업고를 되살릴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2001년부터 3년째 통합고 체제를 운영한 이들 학교의 유형은 크게 계열분리형(병천고, 장성실고), 계열통합형(성주고, 강남종고, 증평정보고) 2가지다. 1학년 때는 계열 구분 없이 국민공통교육과정을 배우고 다양한 진로탐색과정을 거쳐 2학년 진급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같다.
다만 계열분리형은 2학년 때 학생 선택에 따라 문과, 이과, 미용과, 정보과 등으로 과가 분리되는 반면, 계열통합형은 과로 분리되지 않고 인문사회코스, 자동차정비코스, 정보전자코스 등 다양한 코스를 선택하고 관련 교과들을 이동수업을 통해 이수하는 점에서 다르다.
20%대의 진학률로 침체의 늪을 걷던 병천고(26학급)는 문·이과를 종전의 절반인 4개 반으로 정예화하고 대신 직업과정인 조리(2)-미용(2)-애니메이션과(1)를 개설해 진학·취업에서 모두 주목받는 학교로 탈바꿈했다. 충분한 진로탐색 기회를 주고, 일단 자신의 길을 선택하면 전문 교육과정을 운영한 것이 비결.
모든 통합고가 그렇듯이 병천고는 1학년 때 '진로와 직업' 교과를 이수케 하고 조리-미용-애니메이션 관련 학과를 둔 18개 대학, 6개 산업체와 연계해 각각 10여 회 이상의 현장 견학, 초청 강연을 가졌다. 이들 대학-업체와의 연계는 진로탐색은 물론 학생들의 취업과 동일계 진학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이밖에 각 과에서 실습을 해보는 진로체험의 날 운영, 다양한 적성검사 실시, 계열간 과목 교차이수제, 진로판단권고제 도입 등으로 학생들의 '제 길 찾기'를 도왔다.
병천고는 각 과를 선택한 학생들의 전문 교육을 위해 메이컵실, 창작애니메이션실, 한식실습실 등 12개 첨단 실습실을 갖춘 실습동과 100명 수용의 기숙사를 마련했다. 여기에 27억원의 예산이 지원됐다.
또 각 과 정규교사 외에 산학겸임교사(총 8명)가 채용돼 전문적인 실기교육(교육과정의 70%)에 나서고 헤어미용, 한국조리, 만화창작 등 총 20권의 학습보조교재도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미용과 유병욱(2학년) 군은 "병천고가 인문고였다면 일단 학교에 진학한 후 미용학원에 다닐 생각이었는데 미용과가 생겨 헤어디자이너의 꿈을 펼 수 있게 됐다"며 "시설이나 교육내용이 실질적이어서 맘에 든다"고 말했다.
선택이 잘못됐다면 진로를 수정할 기회가 2번 더 있는 것도 통합고만의 장점이다. 2학년 1학기말과 3학년 진급시 학과 정원의 10% 내에서 계열간, 학과간 이동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1일 애니메이션과에서 조리과로 옮긴 정영선(2학년) 군은 "한 학기 동안 제가 만화실기에 소질이 없다는 걸 느껴 옮기게 됐다"며 "예전부터 조리에도 관심이 있던 만큼 열심히 배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통합고 3년만에 병천고가 거둔 성과는 대단하다. 2000년 0.4대 1이던 입학 경쟁률이 2001년 이후 평균 1.5대 1을 넘어섰고 연도별 대학 합격자수는 1999년 43명에서 2002년에는 183명으로 네 배나 급증했다. 3학년의 경우 현재 78%가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65%가 미용사 자격증을 따 결연 호텔, 업체에 취업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 교사는 "예전에는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한 반에서 대학 진학에만 매달려 면학분위기가 떨어졌지만 지금은 각자 원하는 길을 선택해 공부하는 점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계열통합형인 강남종고(10학급)는 2, 3학년 과정으로 정보전자·방송멀티미디어·인터넷정보처리코스를 개설, 별도의 인문계 코스가 없다. 하지만 각 코스 별로 학생들이 다시 진학·취업중심 교육과정을 선택해 보통·전문교과 이수단위를 조절하는 게 특징이다.
조민호 교사는 "진학을 원하는 학생은 보통교과 120단위, 전문교과 82단위를 이수하고 취업을 원하면 보통교과 82시간, 전문교과 120시간을 선택 이수해 진로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존 실업고들이 보통교과를 75단위까지 이수할 수 있는 것과는 크게 대별된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률이 2000년 29%에서 2002년 59.6%로 크게 증가했다.
또 1학년 때 전공코스별 기초과목인 '정보기술기초' '멀티미디어' '컴퓨터 일반' 교과를 공통필수로 해 진로탐색 기회를 주는 것도 특징이다. 성주고(12학급)는 인문사회, 인문자연, 생명정보, 산업기계, 자동차정비코스를 개설하고 여타 통합고와는 달리 국어실, 사회실, 캐드실, 멀티미디어실, 생명과학실, 자동차관 등 1교사 1전담교실을 두고 학생들이 이동수업을 하고 있다. 또 3개 대학, 4개 산업체와 결연을 맺고 현지에서 실업계 코스 3학년을 대상으로 전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 결과 성주고는 2002학년도 인문과정 4년제 대학 진학률 100%, 실업과정 취업희망자 100% 취업이라는 결과 외에도 0.65대 1(2000년)에 불과하던 신입생 경쟁률이 2003년에는 1.35대 1로 높아져 각종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발표회에서 5개 통합고는 모두 진학을 위한 인문반(코스) 선호현상이 나타난다며 우려했다. 지난해 61명이던 인문과정 신청자가 올해는 96명으로 급증해 산업기계코스와 자동차정비코스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성주고의 고민은 나머지 통합고도 마찬가지다.
또 지금까지 5억원의 국고와 수십억원의 시도교육청 지원금이 투입됐다는 점에서 통합고의 성공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뿐, 오히려 이 같은 재정부담이 통합고의 일반화 가능성을 낮출 것이라는 참석자들의 지적도 나왔다. 직능원 김선태 박사는 "시도로서는 부담을 갖고 꺼릴 만한 액수다. 하지만 현재 35%를 차지하는 실업고를 줄여나가면서 통합고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밖에 통합고 운영 담당 교사들은 "통합고 운영에 필요한 교사에 대해 학교장의 요청권과 전보유예 내신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3년 양평고 등 5개 학교가 추가 지정돼 현재 전국적으로 10개로 늘어난 통합고는 2006년까지 시범운영을 거치며 일반화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