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한 1848년, 22살인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은 천신만고 끝에 애인과 함께 미국행 배를 탔다. 여비가 없어 남의 돈을 사취(詐取)해 비용을 마련한 것이 부끄러웠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흉년으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등 아일랜드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차라리 신대륙에 가기로 작정하고 2개월이나 걸리는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보스턴은 이미 영국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아일랜드인은 흑인보다 더 굴종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미국에서도 아일랜드인의 처지는 바뀌지 않은 것이다. 22살이던 농부의 아들은 술집을 시작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인지 그 청년은 미국에 온 지 10년 만에 그만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이 정도의 이야기만으로는 이 가문의 앞날도 그리 밝지 않을 것으로 지레짐작할 수 있다. 구한말 가난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우리 선조들의 처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조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미국행 배에 몸을 실은 지 110년 만에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을 배출해낸 가문이 된 것이다. 다름 아닌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회자되는 케네디 가문이다.
이웃의 신망은 무형의 자산 케네디 가문이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비단 미국 대통령을 탄생시켰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케네디 가문은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수 있고 부자가 돼 가문을 일으킬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는 데 있다. 희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희망은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다시 일어나 살아가게 하고, 열정을 다해 꿈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요즘도 케네디 가문은 미국 이민자들이 꿈꾸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먼저 가문의 내력을 살펴보면, 케네디 대통령 가문은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삼 형제 중 막내아들 패트릭 케네디에서 출발한다.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인 패트릭은 22살 때 당시 흉년으로 인해 아일랜드를 휩쓸었던 기근으로 앉아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신대륙에 가기로 작정하고 미국행을 결정했다. 그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패트릭 케네디 역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도 일명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봄에는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더욱이 흉년이 들면 더 심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것은 아일랜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가 1848년으로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내세웠던 바로 그 역사적인 해였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었다. 패트릭은 영국 지배하에 있던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촌에서는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 없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2개월이나 걸리는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것도 돈을 사취(詐取)해 애인과 함께 조국을 떠났다. 요즘 우리말로 하자면 야반도주한 셈이다.
미국 보스턴에 정착한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인 패트릭은 위스키 통을 만들어 팔면서 점차 재산을 늘려 갔다. 그는 외아들 패트릭 조셉 케네디(P. J. 케네디)과 세 명의 딸을 두었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만 이민 온 지 10년 만인 32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조셉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자 문방구점을 차려 생계를 꾸려갔다. 아들은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 졸지에 소년가장이 된 어린 조셉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벌었다. 조셉은 술장사를 하면서도 이민 온 아일랜드인들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차츰 이웃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어나갔다. 술장사를 하면서도 선행을 베풀고 어려운 이웃사람들을 앞장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자 아일랜드계 이민사회에서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민사회에서 신망을 얻은 조셉은 주의회의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주의회 의원은 우리나라로 보면 경기도 도의원 정도에 해당한다.
1등을 위한 경쟁을 즐겨라그의 정치인 변신은 케네디 가문이 처음으로 정치가의 가문이 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훗날 사돈지간으로 하원의원과 보스턴시장을 역임한 존 프란시스 피츠제랄드 가문과 함께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성공모델이 되었다.
케네디 가문과 피츠제럴드 가문은 처음에는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더욱이 미래에 자신의 아들 딸이 결혼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정적의 가문끼리 결혼을 했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외손자 케네디에게 존 피츠제럴드라는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면서 정치가로 큰 인물이 되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이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존 F. 케네디)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 가문은 영국에서 먼저 미국에 이민을 와 부와 명성을 쌓은 보스턴의 영국계 명문가들로부터 늘 배척을 당했다. 다 같이 부와 명성,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아일랜드계 가문은 영국계 가문들로부터 무시를 당했던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아일랜드를 지배한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열등민족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보스턴에 살고 있는 영국계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제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을 열등한 민족이라며 탄압한 일본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인은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문화를 전수받은 민족이지만 식민지로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자신들이 더 우수한 민족이라고 강변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무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케네디 가문이 채택한 자녀교육의 첫 번째 원칙이 다름 아닌 ‘일등주의’이다. 즉, “이등은 없다. 오직 일등만이 있다”는 원칙이다. 케네디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계 후손이 미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영국인들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항상 1등이 되어야 한다고 자녀들에게 강조했다. 1등을 해야 아일랜드계 사람들을 열등민족 취급하는 영국계 사람들의 콧대를 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1등이 돼라”는 원칙은 민족적 설움을 이겨내기 위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케네디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인이 미국 사회의 명문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먼저 늘 영국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아일랜드계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만큼은 명문대에 들어가 당당하게 영국계 명문가 자녀들을 친구로 사귀며 공부하게 하고 싶었다. 아일랜드 사람들끼리만 공부해서는 큰 인물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하버드대학에 입학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행히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하버드에 들어갔다. 아들은 모든 면에서 경쟁하기를 즐겼고 또 경쟁을 통해 이겨야만 직성이 풀렸다.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아들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도 아들 뒷바라지에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서로 잘 따라주어야 아버지도 신이 나서 더욱 뒷바라지에 열성을 올리는 것이다. 이때부터 하버드대학은 케네디 가문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고 케네디 아버지-케네디 4형제 등 5부자가 하버드대의 동문이 되었다.
독특한 밥상머리 가정교육둘째, 좋은 인맥만들기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일등주의 원칙은 결과적으로 자녀들에게 더없는 인맥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끔 인연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조셉이 은행장이 된 사연을 보면 명문대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하버드대학에 다녔고 은행에 근무한 것도 아버지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이 역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세상살이의 철학을 아들이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사업을 해서 돈을 벌려면 은행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당시 보스턴에서 대부분 은행들은 영국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 호랑이굴에 들여보냈다. 때마침 아들이 다니던 은행이 재정난으로 영국계 은행에 팔릴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는 하버드대학 인맥을 활용해 돈을 끌어모아 은행을 위기에서 구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입사 3년 만에 은행장으로 추대되면서 아일랜드계로서는 최초의 은행장이 될 수 있었다.
은행장으로 성공한 조셉은 사업가로서 수완도 탁월했다. 그는 일찍 부동산에 눈을 돌려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재테크의 귀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남들이 살 때는 사지 않았고 남들이 사지 않을 때 매입하는 방법을 썼다. 그게 비결이었다. 예컨대 그는 플로리다가 강풍으로 쑥대밭이 되어 땅값이 폭락하면 그때 땅을 헐값으로 매입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식이나 부동산은 남들이 살 때는 이미 거품이 일기 시작한 이후다. 값은 오를 대로 올라 잘못하면 상투를 잡기 일쑤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배운 일등주의가 몸에 밴 그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큰 돈을 벌었다. 또 영화와 경마 등 신흥산업에도 눈을 돌려 재벌이 되었다.
셋째, 아버지는 바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식사시간에 반드시 자녀들에게 들려주었다. 이는 자녀들이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시간이다. 케네디 아버지(조셉 패트릭 케네디)는 당대의 재벌 회장이었고 나중에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의 후원회장을 지낼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갖고 있었다. 한때 대통령 후보 물망에도 오를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했다. 그렇지만 그는 바쁜 와중에도 식사 때에는 바깥에서 일어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만난 사람이나 사업과 관련된 부모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출장 중에도 자녀와 전화통화를 하며 수시로 관심을 보이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넷째,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철저하고 계획적으로 자녀교육에 나섰다. 그중에서 식사시간을 자녀교육의 장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오늘날에도 가족 간의 대화 위해서는 식사시간에 TV 안 보기가 필수적이다. 케네디의 어머니 로즈 여사는 식사시간을 엄수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다. 이는 아이들에게 약속과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또 식사시간에는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읽고 토론할 수 있도록 이끌었는데, 이는 훗날 케네디가 닉슨과의 토론에서 압도하는 결정적인 무기가 되었다.
자녀들이 자녀들이 처음부터 일등을 할 수 없고 처음부터 토론을 잘할 수 없는 일이다. 이때 로즈 여사는 자녀들에게 “처음에는 서툴러도 열심히 반복 하다 보면 나중에는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자녀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끝으로, 케네디가의 자녀교육의 특징은 목표를 정하고 세대를 이어 단계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케네디 할아버지는 사업을 하면서 신망을 얻어 주의회에 진출해 정치 가문의 초석을 쌓았다. 케네디 아버지는 하버드대에 들어가 인적네트워크를 확대했고 재벌회장에다 대통령후보 물망에 오를 정도로 정치가로서의 야망도 컸다. 마침내 그의 아들인 존 F. 케네디는 국회의원에 이어 최연소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아일랜드 농부가 미국에 이민 온 지 4대 110년 만의 일이었다.
대를 이어 이룩한 명문가의 꿈세계적인 명문가들은 부모의 힘만으로, 또는 자녀의 힘만으로 명문가가 된 경우는 결코 없다. 부모와 자녀, 세대 간에 힘을 모으고 의기투합을 해야 명문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명문가는 궁합이 잘 맞는 부모와 자녀, 세대 간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케네디 대통령을 배출한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는 치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명문가가 된다는 것은 결코 한 세대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한 세대에서 부자가 된다고 명문가로 대접해주지도 않는다. 케네디가는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케네디가는 4대에 걸쳐 단계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명문가를 이룬다는 것은 한 세대와 다음 세대의 공동작업이지 결코 한 세대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한 세대에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하면 조급증에 의해 스트레스를 받고, 자칫 모든 것을 이룰 수 없게 된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 간에 목표를 공유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명문가를 만들기 위해,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자녀가 이를 따라주지 않으면 뜬구름과 같이 부질없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목표를 세우고 세대를 이어면서 노력할 때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미국 이민이 100여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미국 주류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계 이민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성공신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도전정신과 함께 세대에 걸친 치밀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미국의 케네디가만큼 교훈을 주는 가문도 없다. 보잘것없는 농부출신의 가문에서 100여 년 만에 대통령을 만든 케네디가는 우리에게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워준다. 가난을 딛고 4대, 110년에 걸쳐 완벽하게 세계 최고의 자녀교육 성공모델을 만들어낸 가문.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케네디 가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가슴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해도 세대를 이어 노력하면 누구도 숭고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