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만난 아이들에게 약간의 시간 여유와 돈이 생기면 뭘 하겠는냐고 묻곤한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여행을 꼽았다. 이처럼 사람들은 왜 여행을 좋아할까? 여행은 우리에게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탈출하는 기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또한 시간과 돈과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일이 있는데 이를 남겨 두고 온다면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인간 마음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아름다운 장면뿐 아니라 힘겨운 삶의 모습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 장면들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집시들이 어린 자식들의 손을 잡고 하루종일 구걸하는 모습, 어린아이에게 광장에서 악기 연주를 시켜 돈을 버는 어른들, 쓰레기통에 버려진 페트병과 캔을 뒤져 연명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만, 막상 우리 힘으로 열심히 길을 찾아 떠나는 여행 중에 만날 확률이 더욱 높은 것은 비참한 존재들, 두려운 존재들, 가슴 시린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편안한 패키지 여행이 아닌 온갖 고생문이 활짝 열린 자유여행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삶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리라. 원하는 것, 입맛에 딱 맞는 것, 유명한 것, 대단한 것들만 콕콕 집어 만든 맞춤상품이 장소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여쁘고 눈부신 부분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없듯이, 자기 자신이 지닌 최고의 장점들만 골라 살아갈 수 없듯이, 여행 또한 그 사람들이 애써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까지 모두 끌어안아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잠들어 있던 오감을 활짝 깨울 만한 자극적인 것, 견문의 폭과 깊이를 한꺼번에 확장할 수 있는 경이로운 존재들을 본다. 하지만 빛나는 존재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불가피한 어둠과 그림자들 또한 만나게 된다. 루브르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은 물론 1년에 수백만명 이상의 여행자를 끌어 모으는 수많은 박물관들 중 약탈과 제국주의, 상업주의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박물관은 거의 없다.
그 유구한 문화유산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인력이 동원되는지, 그 수많은 유물들의 아우라에 기생하는 수많은 관광상품들과 기념품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착취와 부당거래가 이루어지는지, 모두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어쩌면 동경으로 가득찬 유럽여행 버킷리스트를 짜는 일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 문화유산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상품으로 소비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부조리와 불합리의 씨실과 날실 속을 헤매게 된다.
취미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린 유럽여행은 날이 갈수록 공격적인 마케팅을 구사하는 여행산업의 강력한 마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럴수록 나는 아주 작은 몸짓으로 거대한 자본의 시스템에 포획되지 않는 우리만의 소박한 여행방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전 지구를 자신들의 상표로 뒤덮는 데 성공한 대형 프랜차이즈점보다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작은 가게들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그 지방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여행자의 윤리가 아닐까.
그 장소의 진정한 매력을 알기 위해서는 더 강한 체력을 길러야 하고, 더 의젓하게 욕구를 누를 줄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나만 생각하는 여행'의 자기 중심성을 깨뜨려야만 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많으니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 밨에 없다.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사람들이 다가온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해마다 때로는 숙제처럼, 때로는 구도의 과정처럼 여행을 계속하다보면, 점점 ‘여행의 달인’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들이 많다. 나를 여행 전문가로 착각하고 여행정보를 물어보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다. 정작 내가 여행을 할 때마다 깨닫는 것은 점점 더 똑똑해지는 나 자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무지다. 나는 아직도 터무니없이 모르는 것, 아는 줄로 착각하는 것, 어렴풋이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좌충우돌하는 여행의 과정 속에서 아프게 깨닫는 것이다.
공자님은 샌님처럼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은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천하를 돌아다녔다. 그런 여행이 그의 삶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동산에 올라보니 노나라가 작다는 것을 알고, 태산에 올라보니 천하가 작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여행은 나 자신을 늘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놓아두는 연습을 통해 다른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행은 나를 다른 자리에 놓게 하는 것으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만나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다 보면 예쁜 장면만 수집해 그 장소의 좋은 것들만 취합하는 박제된 여행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하게 포장된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나 자신의 꿈과 희망과 미래와 접속하는 나만의 스토리텔링을 담은 여행을 할 수만 있다면. 내 몸과 내 삶을 내던져 조금씩 나를 바꾸는 여행의 온기를 마음이라는 가장 오래가는 뚝배기에 가득 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