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정부는 만성적인 교직 기피와 관련해 2001년 교직의 근무조건, 특히 교사들의 업무시간과 업무내용에 대한 전국적 규모의 심층적인 조사 연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영국의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이 주당 평균 45시간을 일하는데 비해 교원은 학기 중에 주당 평균 51.3시간(중등 평교사)에서 60.8시간(중등교장)까지 일하는 등 근무부담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교사들의 그 엄청난 업무시간의 3분의 2가 교수-학습활동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행정사무업무라는 점이다. 다른 직종에 비해 장시간 근무해야 하고 가르치는 일 외에 더 많은 시간을 행정업무에 바쳐야 한다는 현실이 전문직으로서의 교직의 매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영국 교육의 질과 수준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사회가 교직에 보내온 존경심의 정도는 미국과는 달리 80년대 이전의 우리 사회처럼 상당히 높은 것이었다. 대졸학력자가 극히 제한돼 있던 60년대 이전의 영국사회에서는 물론, 지금도 교직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감과 자질을 가진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전문직'의 대명사였다.
그 만큼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어떤 식으로 평가해야 할 지에 대한 교사들의 결정권과 자율권도 컸고, 모든 학년에서 주관식, 논술식 평가를 기본으로 하는 평가체제 하에서도 공정성 시비 따위는 거의 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교사들의 업무시간의 절반 이상이 가르치는 일과 관련이 없다는 현실 앞에서 영국교육의 위기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영국정부는 위 보고서를 기초로 교원의 근무조건을 개선하고 교육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전국 수준의 협약안을 마련, 지난 1월 중순 관련 당사자간에 협약을 체결했다. 'Raising standards and tackling workload : a national agreement'라는 이름의 이 협정은 올해부터 영국의 학교 운영에 기본적인 지침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정부(교육기술부), 다양한 형태의 교원조합과 직능별 교직원 단체, 교사들을 고용하는 사용자 단체 등이 함께 서명했다.
이 협약안에는 ▲교사들의 과다한 업무를 보조해 줄 '보조교사제'(teaching assistants)의 활용 ▲일주일 중 일정 시간만큼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수업준비나 채점 등에 쓸 수 있는 시간(guaranteed time-table) 확보 ▲ICT 등을 적극 활용해 교사들의 업무처리를 보다 쉽게 하도록 하는 조치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협정에 영국 최대의 교원노조조직인 전국교원조합(NUT:National Union of Teachers)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과, 보조교사활용 문제에서 양대 교원조직인 NUT와 NASUWT(National Association of Schoolmasters/Union of Women Teachers)가 심각한 이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교원노조인 NUT는 "보조교사 활용이 현재의 교원부족 문제에 대한 장기적인 해결책도, 교육의 질을 끌어올리는 방안도 못되면서 교직의 장에 값싼 인력과 그렇지 않은 인력의 이중구조를 초래한다" "이들 보조인력에 수업을 일정 부분 맡기는 것은 교직의 전문성을 해친다"며 협정에 반대했다.
NUT는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교직근무조건 관련 협약안에 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다른 단체들을 끌어들여 서명을 하게 하고, 이를 현장에 바로 적용하려는 것을 두고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이런 NUT에 대해, 이 협정에 서명했던 NASUWT의 의장은 깊은 불쾌감을 표시했다. Eamoon O'Kane 의장은 "정부의 새로운 조치를 지지하는 것이 마치 '자유로운 발언권'을 포기하는 것인 양 주장하는 것은 위 협정에 조인한 다른 많은 단체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보조교사 등을 늘려서 교원의 업무부담을 줄여달라는 것은 지난 몇 년간 지속적으로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해왔던 사항이며 오히려 예산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제도가 무산될 지를 걱정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조교사의 활용을 둘러싼 두 기구의 대립으로 현재 영국 교육계는 점차 갈등의 골이 심화될 조짐이다. 협정에 참여한 NASUWT측에서는 "일반교사들의 직업생활을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되는 이 조치의 이행을 무산시키는 시도가 발견되면 단체행동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NUT는 대의원 회의를 소집해 '교실에서 보조교사들에게 수업을 맡기는 사태를 어떤 식으로 반대할지' 그 방법을 찾도록 했다.
이번처럼 양대 교원단체간의 갈등이 학교현장의 안정성을 위협하게 된 데에는 두 조직간의 이념적 지향의 차이문제도 있지만, 정부가 현장의 당면과제를 풀어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입장을 골고루 듣고 각각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두루 살피기 보다 쉬운 방향에 치우쳐 결정을 내리고 동참을 요구한 데에도 원인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