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면서 해결해야 할 어려운 과제들이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 공통적으로 한국이나 미국이나, 학부모나 학생이나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 '공부"가 아닌가 싶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공부가 좋아서 하다 보니 결과가 잘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못하는 학생들은 “공부가 어려워 죽겠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이 “공부는 너무 어려워. 난 공부에 소질이 없나 봐”라고 자포자기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좀 이상하다. 사람은 다양하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키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사 공부의 ‘소질’이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정도의 차이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이같은 공부에 대한 경험은 성장과정에서 대부분이 누구나 해봤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주눅이 들 정도로 어렵다는 아이들의 호소를 듣기도 한다. 먼저 주눅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부를 하게 되면 간단하고 쉬운 문제부터, 복잡하고 창의적인 문제까지 단계적으로 다루게 된다. 공부하면서 계속 질문은 바뀌게 되고, 그 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수준에서는 돈이란 말로 대부분 통하지만 중학교에 들어서면 화폐란 단어로 바뀌는 것처럼 단계가 높아지는 것은 단순히 다루는 정보가 양적으로 늘어나는 게 아니라 더 깊이 있고 폭넓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규칙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아직 공부가 덜 된 상태에서 단계에 맞지 않는 문제를 푼다면 자신이 제대로 익히고 이해하지도 않은 규칙을 사용할 것을 요구받는 셈이다. 누구나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빨리 빨리 하면 성공할 것처럼 선행학습을 하게 된다. 그것이 곧 승리를 가져다 줄 것처럼…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보면, 작곡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린 주인공이 악보 사용법을 처음 익힌 후 척척 교향곡을 만들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모차르트 같은 천재는 한 번 만에 뭐든 잘하지. 그런데 저 아이도 엄청난 천재야”라고 주위 사람들이 감탄한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모차르트도 장시간 집중적으로 단계를 밟아 음악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동을 이끌어낼 작품을 작곡 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곧바로 작곡을 하는 사람은 지구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결국 공부란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서 새것을 배워 토대를 더 탄탄히 할수록 덜 어렵다. 속도는 교육에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조금 느리게 배운 사람이 더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훌륭한 교육 스케줄은 배우는 사람에게 흥미와 흥분을 끌어낼 정도로 조금은 어려워야 한다. 하지만 좌절이나 실망을 느낄 정도로는 어려운 것은 문제가 된다. 어린 아이에겐 죽을 먹인 후 충분히 소화가 이루어지면 밥을 먹이는 단계에 들어서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이치이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가 각자 흥미와 소질이 다르기 때문에, 배우는 분야마다 배우는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분야의 단계를 밟아나가는 속도가 같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성을 무시할 수 없어 같은 연도 출생이라는 이유로 같은 공간에 몰아넣고 동일한 시간 동안, 같은 진도로 여러 과목을 배우게 하면 당연히 ‘어려워서 죽겠다’고 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지금의 교육제도가 과연 구성원들이 잘 배우는 것에 정말 관심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학생들을 바쁘게 쪼아대는 겉모습 때문에 학교는 반복과 훈련의 장소라고 오해받고 있다. 실제로 학교는 반복 훈련을 많이 시켜주지 않는다. 어김없이 기계처럼 진도를 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진도를 나가야지만 ‘성적’을 매기는 중간평가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적 편의를 위해 마련된 장치가 부과하는 어려움은 공부 본연의 어려움이 아니다. 교육은 중간 평가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대신, 배움의 스케줄을 최대한 개별화시켜, 충분히 그리고 풍부하게 반복 훈련할 기회를 줘야 한다. 공부를 정말로 돕고자 한다면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