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공기업, 학교 조직, 회사는 목표를 가진 조직이다. 조직에는 반드시 최고 경영자가 존재한다. 최고 경영자의 수준은 조직의 성패와 관련이 깊다. “경영자는 현장을 떠나면 안 된다. 현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느 곳이든 보고 받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은 지난 9월 17일 향년 100세로 별세한 도요다 에이지이다. 그는 도요타자동차(이하 도요타) 최고 고문은 현장을 중시한 경영자이다. 그는 일본 1위인 도요타의 해외 진출을 이끌며 세계 1위 자동차 회사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았다. 특히 1980년대 사장으로 근무할 때 고급차인 렉서스 브랜드를 만들어 미국에서 성공시켰다.
그는 도요타 그룹의 창업자인 도요다 사키치의 조카이자 도요타자동차 설립자인 기이치로의 사촌이다. 도쿄제국대(현 도쿄대) 공학부를 졸업한 뒤 1936년 도요타 그룹의 모기업인 도요타방직기에 입사하여, 기술담당 부사장을 거쳐 사장으로 15년(1967~1982) 일했다. 이후 회장(1982~1992), 명예회장(1992~1999)을 지냈다.
자동차를 애인처럼 여겨 그의 별명은 ‘카 가이(car guy)’였다. 그는 일본 최고 훈장을 받았고 1994년에는 혼다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에 이어 일본인으로 두 번째로 ‘미국 자동차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와같이 일본 자동차 업계는 물론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도 인정한 인물이다.
에이지의 업적은 도요타가 당장 망할지도 모르는 어려울 때 사장을 맡아 수많은 역경을 돌파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도요다 일가라 사장이 된 게 아니다. 1967년 그가 사장에 취임할 때 일본 언론은 ‘기이치로에 이어 도요다 일가라 사장이 된 것이 아니냐’며 기대를 모았다. 그러자 에이지는 “나는 적임자이기 때문에 선택됐다고 생각한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경험이나 능력이나 어느 면에서 보아도 도요타의 사장으로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장 재임 기간에 원가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독자 생산방식인 ‘저스트 인 타임(JIT)’을 완성했다. 에이지는 “최고경영자가 손에 기름때를 묻히는 것은 당연하다”는 현장주의로 유명했다. 1980년대 도요타가 일본 1위 자동차 업체로 자리 잡으면서 ‘도쿄로 본사를 옮겨달라’고 정부에서 의견을 냈다. 아울러 내부 경영진도 “우수 인재를 유치하려면 도쿄 본사가 낫다”며 동조했다. 그러자 그는 “경영자가 현장에서 멀어지면 자동차 회사는 망한다”며 촌구석 도요타시 본사를 고집했다. 그리곤 툭 하면 예고 없이 본사 근처 30분 이내에 산재한 자동차 공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문제를 발견하면 소매를 걷어 붙이고 기름때를 묻히곤 했다. 당연히 현장 작업자와 관리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또 “마른 수건일지라도 지혜를 짜내면 물이 나온다”며 종업원들의 자발적인 업무 혁신 ‘가이젠(改善)’을 강조했다. 타계 이전 병원에서 요양생활을 하면서도 최고 고문으로서 회사 간부들의 상담에 응하는 등 도요타그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사장·회장을 포함해 임원 재임기간만 50년이 넘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카리스마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경제신문 기자 출신의 사토 마사히로는 일본 경제 주간지 동양경제에서 ‘에이지는 카리스마 리더십과는 맞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부하에게 절대로 강요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의도한 대로 결과를 유도해 내는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회고했다.
에이지는 한국과의 인연도 깊은 사람이다. 도요타는 1966년 신진자동차와 합작해 크라운과 코로나를 판매했지만 1971년 돌연 한국에서 철수했다. 에이지는 “중국 정부가 한국·대만과 거래하는 기업의 중국 진출을 봉쇄하겠다고 선언해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을 믿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에 적극적으로 기술 이전을 하면 곁에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우려를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전해진다.
필자는 1988년 일본에서 유학할 때 나고야 대학에서 공부를 하여 초청을 받아 토요타 본사를 방문하여 회장을 직접 만나 환영을 받고 숙박하면서 견학을 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 그가 한 말은 '지금 매년 자동차 생산량은 360만대를 넘어서고 있으며, 현재의 간부들은 5년 후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여 작업에 임하고 있다'는 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때로는 한국인을 안내하면서 본사를 5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는데 이때 나에게 준 충격은 우리도 언제 저런 자동차를 만들어 탈 수 있을까 꿈을 꾸었는데 이제 우리도 노력 끝에 렉서스에 버금가는 자동차를 탈 수 있는 선진화된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