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의 학교는 우울한 소식이 흘러나오는 저수지가 된 느낌이 든다. 누군가가 흘린 학교의 눈물이 가득 차 있어서인가? 어린 학생들이 자기 삶을 꽃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스스로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안타까운 사건도 들려 온다. 이같은 결과는 어른 세대의 어떤 사고와 행위들이 틀을 만들어 내고 집적돼 그 속에서 주조되어 나타난 현상일 수 있다. 이 점에서 학교 현장에 ‘희망’의 푸른 물감을 입히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아야 마땅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요즘엔 선생님도 가끔 눈물을 흘리는 곳이 되고 있다. 아이들로부터 파손된 권위가 입은 상처는 삶을 살아가는 용기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리라.
10월의 문턱에서 텃밭에 심어 놓은 방울 토마토에 열매가 거의 사라진 시점인데도 꽃이 피어나고 있다. 과연 이 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을런지 의문스럽다. 같은 나무에서도 일찍 핀 꽃과 늦게 핀 꽃이 다르다. 처음 꽃은 좋은 열매가 되리라 기대하면서 자주 바라본다. 그러나 늦게 핀 꽃은 열매가 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탓 때문인지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도 하나, 둘 열매가 맺힌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꽃’이다. 어떤 꽃은 봄에 피고 어떤 꽃은 여름에 핀다. 꽃은 이꽃이 피는 시기가 아닌데라고 생각을 할 때 피는 꽃도 있다. 이 세상의 아이들 모습도 이렇게 피어나는 것은 아닐런지!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다 저마다 꽃씨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만 어느 시기에 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이 이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꽃씨 하나씩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같이 피어야 할 시기에 같이 피우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피어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일이다.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 수석 부총장 로버트 스턴버그는 예일대 입학처 특별자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특별한 생각’을 갖게 된다. 고등학교 내신성적과 시험 점수가 지원자를 ‘한정시킨다’는 것을 거듭 확인했던 것이다. 표준화된 시험을 통해 확인한 학생의 성적이 아닌 학생들이 지녔을 갖가지 잠재력이나 기능과 소질 등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처음부터 제한됐다. 그래서 그는 학업성적 이외의 요소까지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성적이 아니어도 학생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희망은 깃털을 가진 것 / 영혼의 횃대에 앉아 / 말 없는 음률을 노래하며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망(hope)과 도약(hop)의 어원이 같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기대감을 갖고 뛰어오르다’라는 말이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어떤 기대감을 갖고 뛰어나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 행복하게 자신의 미래를 직시할 수 있는 자기 발견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학교를 ‘희망의 공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지금 곳곳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소중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교육을 ‘경쟁’의 도구로 삼지 않고,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관계 맺음’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창의력을 키워주고 멘토를 만나 ‘내일의 내 모습’을 구체화하기도 하며,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한 식구로 서로를 배워가는 작은 실천, 생명 존중과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은 커다란 숲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학교가 희망을 배우고 나누고 북돋아주는 곳이 되려면 학생들이 지닌 다양한 꿈과 끼를 장려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흔히 저지르는 잘못 가운데 하나가 ‘선생님’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다. 기존 교육정책들은 교사를 개혁 대상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풀어왔다. 교사는 어느 누구보다 자율적인 존재로 살아갈 책임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자율적인 존재는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기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통해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거울’이 되는 많은 선생님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하고, 어린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아픈 곳과 가려운 곳을 직접 어루만지는 교사들의 능동적인 제안과 변화가 중요하다. 학교는 눈물이 흐르는 수원지가 아닌 즐거운 희망의 노래가 퍼져 울리는 근원지가 되어야 하고, 학생들이 올라가야 할 곳은 ‘아파트 옥상’이 아니라 바로 저 ‘영혼의 횃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