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자극 속에서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고 사물에 대한 판단을 하면서 이에 반응한다. 그만큼 자극은 인지를 형성하는데 중요하며 행동 변화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적절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신뢰하게 될 때 바른 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요즈음은 한일간 갈등이 어느 때보다 심한 파고를 만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에 관해 정보를 얻을 때 방송이 가장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다음이 신문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방송은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행동에 옮기는 것은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본의 우익 인사 발언이나 충돌 현상은 쉽게 자주 보고 들을 수 있으나 많은 일본인 자원봉사자들이 과거 일본이 저지른 부끄러운 과거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피해자들을 돕는 활동을 하는 것은 거의 전달하여 주지 않는 형편이기에 모든 일본 국민이 우경화로 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기 쉽다.
일본 전국 곳곳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돕는 모임이 있고,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과 한일조약 문서 공개 소송을 돕는 모임, 원폭 피해자들을 돕는 모임, 한국인으로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전범이 돼버렸던 사람들을 돕는 모임도 있다. 그리고 필자가 일본 근무시 전국 네트워크를 가진 역사왜곡 교과서 채택을 막기 위한 모임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재일동포 양심수들의 명예 회복을 돕는 모임 등 실로 수많은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올해 들어 도쿄 신주쿠에서 우익집회가 벌어지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에 맞서 항의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우익 시위대의 수를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활동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시간을 쪼개고 자기 돈을 써야 할 뿐 아니라, 일본인 일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우 진지하고 정성스레 그 활동들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활동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 견주면 한국에는 거의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최근 ‘우경화 일본’에 대한 커져가는 우려가 자칫 모든 일본인을 ‘일본’이란 이름 아래 뭉뚱그려 비판·비난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보수 우익 인사들로 가득 차버린 것은 사실이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처럼 인권에 대한 기본 소양조차 부족한 철없는 우익도 있다.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처럼 외국인에게 혐오감을 표출하는 식으로 자신의 좌절에 대한 위안을 찾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의 전부는 아니다.
일본 정치권은 이번 선거에서 보수 우익이 엄청난 의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일본인 다수는 여전히 일본이 평화주의 노선을 버리는 것을 강하게 경계한다. 하시모토의 망언에 화를 낼 줄 알며,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언어에 저항할 줄 안다. 그래서 지금 하시모토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일본이 가야 할 길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이들의 오랜 활동은 아직 힘을 다 잃지 않았다. 우리 한국인들은 정이 많아서 현상의 사실 해석마저도 그들을 ‘우리를 돕는 착한 일본인’으로 본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평화와 인권을 위해, 인류애로 연대하는 세상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가들은 국민의 불만이 커질 때마다, 불만의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낸다. 한국·중국·일본의 정치가들은 ‘국가 대 국가’의 대결 구도를 조장해, 모든 국민을 그 안에 일렬종대로 세우려고 한다. 민족주의에 불을 붙여 국기가 올라가고 국가 앞에서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얹을 때, 평화와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가 ‘애국심’에 짓눌리면 비극을 낳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깨어 있는 지성인이라면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일본이 아시아 평화를 깨는 길로 전진하는 것은 우리로선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지혜가 요구된다.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일본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최소한 그들이 위축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본이란 이름 아래 일본인을 싸잡아 적대시하곤 하는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