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 생활을 하다보면 주말부부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부모님과 남편이 아이를 도아 기르고 있는 상황이 되면, 엄마는 자기 아이가 교육을 제대로 못 받고 점점 버릇없는 아이로 클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는 엄마 곁에 오는 것을 꺼려하고,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아빠를 더 따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내 아이의 버릇을 고친다는 이유로 가끔 야단치고 화를 내는 엄마가 무서웠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엄마가 왜 자기에게 화를 내고 야단을 치는지 몰라서 두려움에 떨며 우는 아이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의하면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두려움’이라고 한다. 공포는 정체를 알 수 있는 무서움인 데 반해, 두려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움이다. 즉 공포는 그것을 일으키는 대상이나 원인이 있는 반면에, 두려움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공포보다 두려움이 더 무서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 아이는 엄마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아이는 엄마가 왜 화를 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에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영문도 모르는 채 점점 가혹해지는 엄마의 폭력을 꼼짝없이 당하면서 살게 된 셈이다. 아이에게 두려움을 안기는 평소 습관에서 나를 바꾼다는 것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와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게 분명하다. 아이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하는 데 있어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수긍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관계를 하는 데 있어 일어나는 자신의 감정 상태들을 '너 때문이야'라며 상대에게 떠넘기곤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유를 들고 있다가 엎질렀다고 하자. 이때 감정의 상태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엄마는 아이에게 화를 내며 “그러니까 엄마가 조심하라고 했지!”라고 말할 것이다. 반면에, 또 다른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심해야지. 엄마가 닦아 줄게. 이리와 봐”라고 반응할 수도 있다. 이때 두 엄마의 감정은 다르다. 똑같은 상황인데 왜 한 엄마는 화내는 감정을, 다른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감정을 보였을까?
이는 엄마의 감정과 평소의 생각, 생활태도가 반영되어 생긴 감정의 결과이다. 아이가 엄마를 일부러 화나게 하려고 우유를 엎지른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가 우유를 엎질러서 치우는 것이 번거롭고 우유를 낭비해서 화가 난 것이다. 또한 그 당시에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았을 확률도 높을 것이다. 결국 어떠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감정은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성격이나 사고방식, 그 당시의 자신의 감정 상태와 컨디션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친 교사나 엄마는 항상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아이를 대할 때에 우선 아이가 못마땅해 화가 나더라도 일단 참아보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두려움보다는 사랑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자신부터 변화해야 아이에게도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이의 변화는 어른의 변화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