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기라는 정신활동은 그 자체가 아니라 '잘못된 방법에 의한 암기'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근래 들어 창의력이 큰 각광을 받고 있다. 예전부터 그러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여러 부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강조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작년의 월드컵을 대비하면서 히딩크 감독이 '창의적인 축구'를 부르짖은 것은 이런 추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이를 중요시해왔던 학습 분야는 물론, 스포츠와 예술, 그리고 기업 등에서의 능력 평가 기준 가운데서도 높은 우선 순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지속되다 보니 은연중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기억력은 창의력보다 낮은 차원의 정신활동"이라는 생각이 스며들고 있다. 기계적인 암기와 암기 위주의 학습은 창의력의 발달을 가로막는 큰 장애로 여기기도 한다. 분명 이런 생각에는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다. 하지만 기억력도 창의력 못지 않은 중요한 능력임을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머레이 겔만은 쿼크(quark)의 개념을 처음 제안했을 뿐 아니라, '쿼크'란 명칭도 손수 만들어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쿼크 이론은 20세기 후반의 물리학에서 가장 혁신적이고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기억력으로 더 유명했다. 어린 시절 그는 뉴욕의 센트랄 파크에서 즐겨 놀았는데, 눈에 띄는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샅샅이 조사하고 암기했다.
그는 또한 언어 공부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단어들의 어원과 배경을 자세히 꿰뚫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도 본인들보다 더 깊이 아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그 발음을 교정해주기도 했다. 쿼크란 말도 어렸을 때 형이 사와서 함께 읽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한 구절에서 따왔다. 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는 쿼크란 말 자체를 따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겔만은 '쿼크'라는 '음'을 먼저 창안하고, 나중에 거기에 맞는 '철자'만 따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 일화는 기억력과 창의력이 잘 어우러진 대표적인 예로 여길 만하다.
방향을 약간 돌려 불확정성원리로 널리 알려진 하이젠베르크를 보자. 그는 우선 불확정성원리로 가장 유명한데, 양자역학의 한 갈래로서 스스로 창안한 행렬역학도 그에 못지 않은 위업이다. 그런데 처음 행렬역학을 완성했을 때 정작 그는 행렬이 무엇인지, 또 행렬의 곱셈을 어찌 하는지도 몰랐다.
말하자면 행렬의 개념과 연산을 순전히 그의 이론적 필요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발명해낸 셈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창의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그가 행렬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미리 배웠더라면 그의 수고와 노력은 훨씬 절감되었을 것이란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수학은 잘했는데 암기 과목에 약했으며, 이 때문에 대학도 재수를 해서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천재의 창의력과 기억력은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이해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노인이 된 후에도 어렸을 때 보았던 그림을 정확히 재현했다고 한다.
이 점에서 볼 때 암기라는 정신활동은 그 자체가 아니라 '잘못된 방법에 의한 암기'가 문제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실제로 영재성의 한 특징으로서 '폭넓은 관심'을 든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에서 보듯, 창의력의 근간은 기존의 지식이다. 올바른 방법을 통하여 창의력이 제대로 꽃필 기억의 텃밭을 잘 일궈야 한다.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애크론 대학교에서 레이저 분광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순천대학교 과학교육과에 재직중이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과학 현상을 쉽게 풀어쓰기와 잘못 알고 있는 과학 상식을 바로 잡는 일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수학공부 개념 있게>, <내 머리로 이해하는 >, <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옮긴 책으로는 <무 영 진공>, <우주 또 하나의 컴퓨터> 등이 있다. email : jsg@sunch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