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씨앗을 가져다가 작은 화분에 직접 흙을 담고 씨앗을 심기로 했다. 넷째시간에 작업을 하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공부가 될 리 없다. 책상 위에 모종삽과 봉숭아 씨앗을 올려놓고는 수학문제 하나 풀고 들여다보고, 읽기 책 한 줄 읽고 들여다 보고, “내려 놓아라” 지적을 해도 내려놓았다가는 또 어느새 날름 책상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고.
그렇게 셋째시간까지를 보내고 넷째 시간이 되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인지라 아이들은 사뭇 들떠서 정신이 없다. 백엽상 옆 교재원 한 귀퉁이의 흙덩이를 부수어 화분에 채우면 그만인 것을, 한시간 내내 나를 괴롭히며 안달을 한다.
그래도 곧 바로 또 묻고 묻는다. 삼 십여명의 아이들이 내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소란을 떨고 있는가 했는데, 한 쪽 구석에 아주 조용한 모둠이 있었다. 널찍하니 자리를 잡고 제법 준비물이 그럴듯한 것이 다른 모둠과는 사뭇 비교가 되었다. 알고 보니 마음이 예쁜 하니가 온갖 필요한 준비물들을 다 갖춰 와 부족한 아이들에게 모두 배급하며 파종을 하고 있었다. 준비물뿐이 아니라 누나처럼 다른 아이들의 아픈 곳을 긁어주며 화분에 이름까지 그럴듯하게 붙여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아빠가 친구들 도와주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꼴딱 시간 반을 들였다. 다른 때 같으면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배고파 죽겠다던 아이들이 화분을 씻고 물을 주느라 배고픈 것도 잊고 5교시가 다 되어 점심을 먹어도 마냥 행복한 얼굴이다.
아이들이 가고 난 교실에는 아이들을 닮은 30여개의 화분들이 창틀과 사물함 위에 얌전히 자리잡고 있다. 새싹들이 꼬물꼬물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아이들의 소근거림처럼 봉숭아새싹의 옹알이도 들리는 듯하고, 흙더미를 위로 밀어 올리는 부시럭 소리도 간간히 들린다. 봉숭아 새싹들과 아이들과, 아직 성숙하지 못한 내가, 함께 이 교실에서 사계절을 나게 될 것이다. 여름이 되면 쑥쑥 자란 봉숭아 꽃으로 손톱에 물도 들이고 씨가 여물 가을쯤엔 또 다음 해의 새로운 탄생을 기대하며 씨앗을 모으게 될 것이다. 친구들을 도와준 예쁜 하니는 동시 한 편을 내게 남겼다.
<봉숭아 씨 심은 날>
꽃삽 한자루, 거름 흙 약간 목장갑 , 화분 한 개, 봉숭아 꽃 씨
내 봉숭화 꽃씨를 심었어요. 작은 화분에 까만 흙과 거름흙을 섞어 두 손으로 살살 비벼 돌을 고르고 새끼 손가락으로 구멍을 파서 까만 씨 알갱이 세개씩....
근데 넌 왜 거름흙을 이렇게 많이 가져왔니? 선생님, 아마도 혜인이랑 원지랑 세영이랑 같이 하려고 그랬나 봐요 그 아이들 흙을 비벼준 것도 거름흙을 나누어준 것도 모두 다 저이거든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냄새나는 거름흙도 비벼주고, 봉숭아씨가 들어갈 작은 구멍도 눌러 파 주라고 '장 한 이'라는 큰 이름을 주셨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