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학년 아이들은 몸을 고되게 하고 고학년 아이들은 마음을 고되게 한다. 때때로 애인처럼, 친구처럼 다가왔다가도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선생님을 할퀴려고 덤벼들기도 한다.
반 아이 중에 유난히 얄미운 아이가 있었다. 야리야리한 몸에 민첩한 동작으로 교실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는 한이라는 남자애였다. 한이는 나뿐아니라 학급 아이들 중 제법 많은 아이들에게 얄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하여도 전혀 소외되지 않은 것은 남이 무어라 하건 모든 학급일에 스스로 나서서 꼭 참여하며 자신의 입지를 나름대로 확고하게 마련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애는 말이 무척 빠르고 많았는데 특히 얌체같은 말을 많이 했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교사에게도 절대로 지지않고 자기 말을 따발총처럼 쏟아내기 일쑤였다.
"너 왜 숙제 않했어?" "학원가느라고 바빠서..."(매우 빠른 말소리) "학원만 다니고 학교는 끊을 참이야?" "그러고 싶지만 어머니가 싫어하셔서" "뒤에 서서 반성좀 해야겠다" "지난번에 용범이도 안해왔는데 용서해주셨잖아요" "그 애는 몸이 아팠잖아" "에이... 그럼, 나도.. 몸이 아팠어요 헤헤헤..." 뭐 이런식이었다. 그렇게 말꼬리를 잡고 대꾸하기가 일쑤였으니 친구들도 모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 수밖에.
수련회를 갔을 때의 일이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승차하려는데, 아이들이 머물던 자리를 점검하던 여자 아이가 한이의 점퍼를 들고 왔다. 짐 정리를 제대로 못하고 점퍼를 빠트린 것이다. 아이는 내게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선생님, 이거 한이에게 그냥 주지 말아요"
우린 금세 한 편이 되어 한이의 점퍼를 숨긴채 한시간쯤 왔을 때, 그제서야 점퍼가 없는 것을 깨달은 한이가 허겁지겁 앞으로 나왔다.
"야, 고속도로에서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선생님, 제 점퍼를 놓고 왔어요" "뭐야! 아까 그렇게 챙기라고 말했는데... 맨날 잘난척은 도맡아놓고 하면서 자기 점퍼도 못챙겨???"(이런 얘기쯤엔 전혀 끄떡도 안하는 아이다) "제 점퍼 어떻게 해요" "야, 그렇다고 서울이 코 앞인데 돌아갈 수도 없잖아. 그냥 잃어버렸다고 엄마께 말 해" "안되요.... " 그 애는 정말 슬프고 난감한 표정이었다. "글쎄.... 서울에 도착하면 선생님이 한 번 수련원에 연락해서 그 점퍼가 있으면 택배로 붙여달라고 할게.... 근데 될지 모르겠다" "선생님, 제발요. 그거 새거란 말이에요"
평소에 남의 실수를 꼬챙이같은 말로 후벼파는 그 아이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아이들과 나는 매우 고소해했다. 결국 서울에 도착해서도 한참동안 한이를 고생시킨 후 '선생님 말씀에 절대로 토달아 대꾸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큰 인심이라도 쓰듯 점퍼를 돌려주었다. 어찌보면 나도 참 심술장이선생이다.
그런데 한이와 난 사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고 있었다. 가끔씩 아침에 출근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곤 했는데 그 때마다 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것이다. 자전거 등교 금지라고 그렇게 여러번 이야기를 했는데도 말이다. 그 좁은 엘리베이터에, 그것도 출근시간에......
그 날도 왠지 한이를 만날 것 같은 예감에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면 꼭 한마디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정말로 한이가 올라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다행이도 그 날은 자전거 없이 홀가분한 몸이었다. 곧 바로 뒤 이어 젊은 아주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침에 종종 만나는 아주머니로 유모차에는 벌써 학교에 입학하고도 남을 만한 장애 아들이 타고 있다. 아침마다 아들을 특수교육기관에 데리고가는 모양이다. 아이가 괴성을 지르거나 손을 마구 휘젖는 딱한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아팠던 적이 여러번이었기에 나는 애잔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한켠으로 비켜섰다. 그 때, 갑자기 한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 선생님이세요" "어머나... 선생님 . 그 동안 얼굴도 모르고 인사도 못했네요. 이렇게 뵙게 되어서 정말 죄송해요.."
젊은 아주머니는 죄스런 표정과 몸짓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도 아들의 선생님이 뜻밖이었겠지만 사실은 내게도 한이의 어머니와 동생이 정말 뜻밖이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였고 엉거주춤 어색한 몸짓으로 그 옆에 서 있는 한이의 모습이 그 날은 정말 의젓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한이 동생이었구나'
그 날 이후 한이는 변했다. 아니, 한이가 변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한이를 보는 눈이 변한 것이다. 그저 그 아이의 동생과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안 것 뿐인데 한이는 내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빠른 말과 민첩한 행동과 항상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으려는 과잉스런 몸짓이 더이상 이상하게 보이지도 얄미워보이지도 않았다.
비로소 한이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랑은 그 대상에 대해 아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것, 한이를 통해 비로소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6학년의 남은 기간이 그 아이로 인해 따스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