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단 일생을 살고 퇴임한 지 만 2년이 됐다. 이제는 그 많은 세월, 날들의 엄격한 출근을 어찌 감당했었나 하는 가벼운 의구심과 다시는 오를 수 없는 교단에 대한 회한만이 가슴에 남아 있다. 사실 교단처럼 보람되고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어디 또 있을까. 바닷가, 산간마을, 시골학교 그 대자연속, 동화 속의 그림자 같은 교단에서 내 꿈을 키우고 남의 꿈을 심어주고, 천진무구한 동심에 녹아 청춘도 잊고 인생을 잊고 산 곳.
바라만 보아도, 말 한마디에도, 조금만 쓰다듬어 주어도 울던 동심이 활짝 웃던 교실. 엄마 몰래 숨겨 온 오징어 한 마리 달랑달랑 흔들며 쫓아와 헉헉대며 내미는 그 고사리 손들이 그립다. 부임 초창기의 가정방문은 또 얼마나 행복했던가. 온갖 새들의 노래를 감상하며 연무 자옥한 산등성이를 넘어 복숭아꽃 살구꽃의 마을을 찾아 사립을 밀치고 들어서면 '아이고 선생님' 하며 촌부 아낙이 내미는 삶은 계란, 감자, 옥수수….
처음에는 '자아실현' '적성과 진로' 운운해 보지만 학부모는 고개만 끄덕일 뿐, 깜빡이는 눈동자에는 '모르겠다'는 메시지가 역역하기에 할 수 없이 '상록수'의 그녀처럼 "배워야 잘 산다"는 말만 속삭여 주었었다.
다시 오를 수 없는 교단. 도연명의 시에 '세월은 不待人'이란 시구가 있다. 기다려 주지 않는 교단을 영원한 내 자리인양, 얼마나 방자하고 무심했으며 또 얼마나 무성의했던가. 가정 환경이 버거워 울거나 우울한 놈을 보면 슬그머니 피하던 나.
남의 반보다 성적이 뒤지면 학생의 학력보다는 승부욕에 더 집착하던 나. 학생과 함께 이해하고 대화하고 교감하면서 도 내적으로는 일방통행을 하던 나. 그 성역에서 내가 범한 우를 무엇으로 다 논할 수 있을까. 다시는 오를 수 없는 진정, 아쉽고 안타까운 교단에 대한 자책감이 이렇게 인생의 여울목에 걸려 있다.
다시 오를 수 없기에, 젊은 교사들에게 간원하며 기대한다. 어차피 우리는 富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기에 교사들은 어항 속 금붕어의 삶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보호된 공간에서 일정량의 먹이에 감사하며 건강한 생존과 활동을 통해 만인을 즐겁게 해준다. 단조로운 생활이지만 불결한 어항 밖의 삶과는 유리돼 유유자적하며 즐기는 삶의 진수를 보여준다.
교사도 건전한 삶을 위한 먹이는 보장된다. 어항 밖의 혼탁하고 부패한 세상을 탐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어항 속에서 세상을 엿본들, 고작해야 독이 묻은 얄팍한 학부모의 봉투나 아니면 쇠고랑과 연결되는 업체들의 때묻은 엽전정도가 아닌가. 어항 속 곁눈질의 운명이, 한없는 몰골로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된다면 세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만인을 위해 교단을 지키는 그 일이야말로 얼마나 보람되고 성공적인 삶인가.
물론 교육은 사회교육이며 학교는 사회의 중심인물을 배양하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는 사회 속에 존재하나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보호되는 내밀한 곳이다. 이 특수성 때문에 교사의 자질과 금붕어의 삶이 연계된다. 학교는 2세들의 교육을 위해 온 공간이 '모범'이라는 족쇄로 묶인 곳이기에 그 '족쇄'와 '어항'의 역할이 같다면 교사가 금붕어의 삶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교단.' 가장 보람되고 아름답고 행복한 곳. 신이 특별히 선택한 자에게만 허여한 존귀한 가치의 신성한 성역. 내가 교단을 내려와서야 깨달은 소중한 진리가 배태된 곳. 그 진리의 가치를 만개시키는 교사는 진정, 참 삶의 영원한 행복자다. 비록 남의 발길에 짓밟히는 이름 모를 들꽃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