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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형용사를 찾아서-금강산 탐방기-


여행은 설렘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먼 곳이 되어버린 조국의 슬픈 반쪽, 그 곳을 여행하는 일에 대한 기대는 설렘을 넘어선다. 그 중에서도 금강산을 찾아가는 길이라 모두들 들떴다. 형용사로 치장하는 것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신령한 곳, 조물주가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마지막 날 남은 모든 힘을 쏟아 부어 만들었다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8월 22일
여섯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출발하였다. 교총회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기에 모르는 얼굴이지만 서먹하지는 않았다. 울진에 들러 신선한 회를 먹었다. 설악산 금호리조트에 도착하여 첫날 여장을 풀었다. 여행의 묘미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도 있지 않을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같은 인생여정을 걷는 이들이기에 마음을 트기가 수월하였다.

8월 23일
5시에 고성으로 이동하였다. 남북한 한계선 철책을 넘어 좀처럼 열리지 않으리라는 비무장지대를 당당히 넘어 북녘땅을 밟았다. 남측 출입사무소의 위용과 북측 출입사무소의 허술함의 대비가 돋보이기도 하였지만 정작 안타까운 것은 복잡한 입국과 출국 수속을 동족끼리 오랜 시간 치러내야 하는 일이었다. 북측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안내조장들로 부터 주의사항을 무척이나 길게 들었는데 주의할 것은 이동 중에 버스차창으로 사진을 촬영하지 말 것과 북한과 남한을 공식적으로 지칭할 때에는 <북측> <남측> 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서 구룡폭포를 찾아 나섰다. 신계천을 끼고 미인송이 울창한 창터솔밭 사이로 술기넘이 고개를 넘으면 신계사가 나타난다. 산길을 굽이굽이 넘을 때마다 새로운 화첩이 한 폭씩 열린다. 금강산의 물은 녹색을 띤다. 비취빛 물은 명경지수라 깊이를 가늠하기조차 힘이 든다. 보자마자 모두의 마음속에 생명수로 들앉았으나 손 한 번 담글 수 없는 영롱한 물빛이 고왔다. 높이 139m, 너비 4m의 비봉폭포에 다다르니 물 소리가 천둥소리다. 전날부터 내린 비가 지금도 오락가락하니 그 위용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물안개가 사방을 덮고 구름이 자유자재로 움직여대니 폭포의 모습은 정확히 새길 수 없다. 봉황이 날아갔다면 아무도 볼 수 없었으리라. 휘모리 장단 속에 사뿐사뿐 춤을 추더라도 속인의 눈에 그게 보일 것인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옥류동, 연주담을 거쳐 드디어 관폭정에 올랐다. 관폭정은 앞면 3간, 옆면 2간의 합각 건물로 선비의 풍모를 지닌 의젓한 모습이었다. 이런 날씨에는 아홉 마리 용이 모습을 드러낼 법도 하건만. 구룡폭포의 모습조차 뿌연 안개 속에 가늘게 구불거린다. 폭포절벽과 바닥이 한 덩어리의 화강암 암괴로 이루어진 이 폭포 아래 구룡연은 깊이가 13m나 된다고 한다. 단청이 여기저기 벗겨진 모습에서 먼저 왔던 사람들의 자취를 느끼게 하는데 북한 안내원들이 특산물을 판다.

내려오는 길에 구룡폭포 위쪽에 위치한 상팔담으로 오르고 싶었다. 금강의 풍취에 홀려 머뭇거린 시간이 길어 내려갈 시간이 급하였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상팔담의 구슬처럼 동그란 여덟 개의 초록담潭을 다시 보고 싶었다.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떠올리며 다음을 기약하였다.

신계사는 한국동란 때 파괴되었다. 그것을 남한의 조계종 종단의 협력으로 지금 재건하고 있는 중이었다. 옛 모습을 찾으면 기원들이 모여 번성하던 그 때처럼 한 나라, 한 민족으로 어우러질 수 있을까. 각이 잘려버린 탑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앞쪽 문필봉을 사진으로 남겼다. 자식의 학문에 영험을 끼칠 수 있다는 안내원의 설명에 대학입시가 목전에 닥친 아들아이가 생각나서다.

온정각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삼일포로 향했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이곳은 36개의 봉우리가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웅장하면서도 아늑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솔숲이 우거진 가운데 쭉 뻗은 흙길을 제법 걸어 전망대에 도착했다.

신라시대 때 영랑(永郎)·술랑(述郎)·남석랑(南石郎)·안상랑(安祥郎)의 네 신선이 3일 동안 이 호수에서 놀다갔다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옛날에 어떤 왕이 관동팔경을 하루에 한 군데씩 유람하기로 했는데 이 곳에 와서 삼일을 묵어 삼일포라 한다고도 한다. 백두산의 삼지연, 인근의 시중호와 함께 북한의 3대 호수로 꼽히는데 물이 맑아 마치 선녀가 떨어뜨린 거울과 같다는 말을 듣는 곳이다. 호수 가운데에 소가 누워있는 형용을 한 와우도의 소나무 숲이 멋졌다. 사진 한 장으로 둘레가 8㎞나 되는 호수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니 앵글이 부담스럽다. 석 장을 찍어 파노라마로 이어 붙였다. 막걸리 한 잔을 맛보며 한량다운 멋을 부려보았다. 주량이 형편없지만 긴장을 적절히 풀어놓는 것이 이런 수려한 자연 속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장군대를 돌아나오다 북한 안내원의 노래를 들었다. 졸랐더니 스스럼없이 노래를 들려주었다. 소박한 노랫소리와 우리들의 손뼉장단이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온정각으로 다시 돌아와 평양 모란봉 교예단 공연을 보았다. 세계 최정상급의 묘기를 연출하였는데 가슴이 울컥하였다. 북한에서는 연예인을 대중예술인이라고 한다. 남한의 장관급, 차관급에 해당하는 대단한 지위와 대우를 받는 인민배우와 공훈배우들의 묘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불가능의 세계를 가능케 하기 위해 그들이 흘린 땀은 어느 정도일지. 교예의 초보 수준인 서커스조차 남한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지 않은가. 공연 내내 박수를 치느라 손바닥이 아팠다. 혹시나 잘못될까 마음 조렸기에 가슴이 뻐근하였다. 동포 앞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눈이 시렸다.

금강산 온천은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 온천물이 워낙 깨끗하고 무색투명하여 대중탕 안에 들어가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몸이 훤히 비칠 정도였다. 매바위산을 건너다보며 즐기는 노천탕이 단연 백미다. 옥류탕, 연주탕, 폭포탕, 옥돌보행탕, 황토방을 두루 다니며 몸을 금강산 버전으로 정화하였다. 금강산페밀리비치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8월 24일
오늘은 만물상 코스로 도는 날이다. 버스로 굽이굽이 고갯길을 660m 쯤 올라가 주차장에서 내린 뒤 산행을 시작했다.

몇 번을 쉬어가며 망양대에 올랐다. 기암협곡을 타 올라 제1망양대에 올랐다. 외금강의 위용을 내려다보고 먼 동해바다에 눈길을 주었다. 제3망양대까지 두루 둘러보고 비로봉이 어딜까 짐작해 보았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천선대로 오르는 갈림길에 섰다.

육년 전에 아들아이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올랐던 적이 있다. 여러 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나름의 과제가 있어서이다. 가슴을 울리는 그 아름다움을 글 한 편으로 나타내보려는 것. 육 년 동안 떠올려보았으나 도저히 필설로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계속 오르막이라 힘든 편이다. 가파른 오르막을 타 오르니 첩첩 능선들이 바위를 액자 삼아 걸쳐진다. 드디어 수직 벽에 박혀있는 철계단을 올라야 한다. 경사 80도의 계단에 붙어 뒤돌아볼 념도 내지 못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오른다. 드디어 천선대에 올랐다. 해발 936m,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216호라고 쓰인 표석이 우리를 맞는다.

전에 앉았던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가슴은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한 줄의 글조차 쓸 수 없었던 시간이 아득하다. 다시 찾기 위해 그랬던 것일까. 적절한 형용사 낙점에 그토록 망설였던 것은. 문득 자살을 떠올렸다. 세상사 힘들어 죽기를 마음먹는다면, 이 정도의 아름다움 속에서 접는 것은 어떨까. 두 팔을 벌리고 한참을 활강하다보면 활수 같은 구름이 금세 싸안아 안전하게 삼선봉 병풍 두른 너럭바위에 착 앉혀줄 지 누가 알겠는가. 그 순간 신선이 되어,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대기 중에 흩어진들 어떨까 싶었다. 행여 눈물 어려 영롱해진 사리 몇 알 있다면 녹색 옥계에 잠겨 수정으로 굳으리라. 천 년 후에 우연히 세상에 나가 아름다운 여인의 총애를 받는다면 세월만큼 쟁여진 금강산 정기로 인해 그녀도, 수정도 행복하지 않을까.

이곳은 이름 그대로 금강산의 절경에 취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놀다 갔다는 자리다. 바위로 뒤덮여 서너 명이 서 있으면 꽉 찰 정도로 비좁다. 우리가 가는 곳곳에 북한 안내원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우리를 지켜본다. 북한안내원과 인사를 트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심스러웠지만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졌다. 우리 일행이 부산교총 회원들이며 나는 부산교육신문 기자 자격으로 왔다고 소개를 했더니 전교조, 한교조, 교총의 특징에 대해 그가 물었다. 남한의 교육이나 교사단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의아하였으나 어쩌면 그는 북한에서 남한 관광객들과 많이 접촉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인 정주영의 고마움을 말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바로 옆 하늘문바위가 웅장하게 보일 수 있도록 세로컷 사진을 찍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조금 내려오니 망장천忘杖泉에 다다랐다. 이 샘물을 마시면 기운이 솟아 지팡이를 잊고 간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일찍 집을 나서는 나를 전송하며 아들아이가 내게 원했던 선물은 금강산 물 한 병이었다. 수량이 적었지만 물병을 가득 채워 소중히 간직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귀신의 얼굴을 닮은 귀면암에 놀라고 세 개의 기암으로 형성된 삼선암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온정령 일흔 일곱 구비를 돌아 내려왔다.

우리가 이동하는 지역의 마을 주민들은 우리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도록 이동시간에 제약을 받는다. 우리가 지나가기를 멀찍이 모여서서 기다리는 그들을 보며 괜히 미안하였다. 옥류관에서 랭면을 먹었다. 면발이 부드러워 자르지 않아도 되고 맛이 단촐하여 먹을 만하였다. 10분을 걸어 온정각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특산품을 샀다.

금강산이 신의 땅이라면 우리가 지나쳐 온 북측의 산은 배고픈 인간의 땅이었다. 되돌아오는 길에 차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언제 다시 이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인가. 바위산과 민둥산 능선이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남한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산하는 변하였다. 무성한 숲, 풍성한 들판, 곡식의 때깔이 달라진 그 모습을 영화처럼 이어 보며 북한 안내원의 말을 떠올렸다. ‘남측 사람들, 운동 좀 하시라요.’ 하나같이 날씬하고 마른 그들에게 잘 먹고 잘 노는 듯한 우리들이 어떻게 비쳤을까. 아마 그 말은 걷기 힘들어하는 우리를 격려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먹을 것이 없어 허덕이는 북한 동포들의 안타까움을 마음에 실어서 하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던 북한 군인들은 하나같이 여위고 키도 작아 큰 군모에 눌린 모습을 한 채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땡볕에 길에서, 산에서, 건물 뒤편에서.

설악산 금호리조트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 잔디밭에 나가 맥주 한 잔으로 여정을 정리하였다. 부산 교대 15기 팀과 함께 어울려 탁구장에 갔다. 노래방에, 펍에, 어떤 이들은 대포항까지 나가 낭만을 만끽하는 가운데 설악의 밤이 깊어갔다.

8월 25일
고즈넉한 아침이 열렸다. 리조트 옆길로 도는 산길을 산책하고 조깅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양 교수님과 최 교육장님을 만났다. 부부가 함께 한 여행이라 더욱 행복하셨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짐은 쓸쓸하다. 가슴속에 추억을 안고 모두들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하였다.

여행은 끝났다. 사진이 남고 느낌이 남았다. 일본의 유명작가가 금강산에 오르고는 “아, 아름답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피요르드와 파푸아뉴기니까지 여행을 하였다는 어떤 이도 천선대에 올라 ‘아!’하는 짧은 감탄사 밖에 할 말을 찾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번에도 나는 한 편의 수필을 쓸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 여정을 다시 밟아 천선대에, 관폭정에 한 번 더 오르기를 소원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노력해 볼 것이다. 금강, 너에게 적절한 형용사를 찾아주고 싶다.

원활한 일정을 위해 수고해주신 교총 관계자들 외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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