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리 꼴레리 李서방'. 그렇다. 이 시는 하나의 풍자다. 풍자를 통해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만 '심증'만 제공할 뿐 풍자의 대상을 공개하지는 않는다. 풍자의 본질과 묘미는 여기에 있으며 상황을 아는 독자에게 주는 공감과 쾌감의 깊이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풍자. 불행하게도 우리의 사회와 역사는 끊임없이 풍자가 아니고는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없는 많은 어지러운 일들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 자부하는 그간의 많은 인물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끝없는 풍자의 요인을 만들어 내었고 이 정권 저 정권이 모두 한 패거리처럼 끊임없이 풍자의 요인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풍자의 요인들이 곧 사회 발전과 행복한 세상살이를 방해하는 극심한 현실 문제이고 그 속에서 울분을 토하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문학은 다행스럽게 풍자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통쾌하게 그 문제의 본질을 찌르고 그리하여 분을 삭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새삼 문학에서의 풍자야말로 카타르시스를 위한 최적의 도구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최근 구경분 선생님이 써 내신 "얼레리 꼴레리"는 우리 시대의 교육정책을 이끌어 가는 최고 책임자를 우회적으로 빗대어 그 판단의 오류와 어리석음을 통쾌히 꼬집은 풍자시의 하나이다. 여기에서 이 시는 그 판단의 오류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받는 많은 이해 당사자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 주는 청량제의 노릇을 하게 된다. 풍자시의 최대 성과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최근 우리 교단에 던져진 커다란 문학적 사건의 하나이며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얼레리 꼴레리 李서방'. 그렇다. 이 시는 하나의 풍자이다. 그 풍자를 통해 시인은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대놓고 하면 인격모독이라는 둥, 인신공격이라는 둥, 또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둥 전통적 관점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시인은 '심증'만 제공할 뿐 그 풍자의 대상을 사실적으로 공개하지는 않는다. 풍자의 본질과 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가 상황을 아는 독자들에게 주는 공감과 쾌감의 깊이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른바 '민주주의 시대'에 그 우회적인 것을 문제삼을 수 없으니 풍자 대상으로서의 당사자는 속만 쓰리고 그것을 아는 독자들은 그만큼 상승되는 공감과 통쾌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당장은 정책입안자들의 사고의 오류에 의해 분별없는 갈등 상황이 빚어지고 있지만 이제 우리의 교원들은 교육을 향한 헌신의 의지를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이 시집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으니 부디 그 생명력의 강인한 창조성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시집의 출판을 함께 기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