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읍 옥림리 내 고향은 고3 때까지 석유 등잔불로 공부하던 시골 농촌이었다. 그곳에서 37년 전, 내가 중3일 때 겪은, 어찌 보면 가슴 아픈 얘기다.
당시 큰형은 성균관대학에 다녔고 작은형은 인천교대 1학년에 입학한 상태여서 농사를 지으며 학비를 대던 아버지는 무척이나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셋째인 내가 가업인 농사를 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지셨다. 그리고 내가 중3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이제 학교는 그만 다니고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해 6월부터 장기결석생이 돼버린 나는 학교 대신 논밭으로 나가야 했다. 모를 내면서 아버지가 어찌나 밉고 야속했던지 논두렁에 털썩 주저앉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학교도 미웠다. 내가 결석을 했는데도 아무 일 없듯 그대로인 학교 건물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8월 뙤약볕 아래에서 거친 논밭 일을 하면서 등이 새까맣게 타고 또 타 여러 번 허물을 벗고 나니 그야말로 검둥이가 다 돼 버렸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지난 9월초, 담임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시골 깡촌에 담임 선생님이 오셨으니 우리 집은 온통 난리가 났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단정한 양복을 입은 하철호 선생님은 귀한 신사의 모습이셨다.
부모님과 큰절을 나누신 선생님은 나직한 말투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부모님의 쩔쩔매는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그 땐 정말 선생님이 오신 것만으로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이 다녀가신 그 이튿날부터 난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강화고로 진학한 나는 천신만고 끝에 공주사범대학에 입학하게 됐고 졸업과 함께 서울로 발령을 받는 행운도 따랐다. 그 때 만약 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없었다면 난 어떤 모습이 됐을까. 중학교도 졸업 못한 시골 농사꾼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을 지 모를 일이다.
`선생님은 제 평생 은인이십니다. 전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찾아 뵐 날까지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