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교 3학년 때일 게다. 우리 학교에는 부임한 지 2년밖에 안 된, 유난히 큰 눈에 수심이 가득한 여 선생님이 계셨다. 그 선생님은 노래도 잘하고 풍금도 잘 치셔서 음악시간을 도맡았고 아이들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다.
선생님은 국화를 유난히 좋아하셨다. 그래서 교실 꽃병 속엔 아이들이 꺾어 온 싱싱한 들국화가 늘 피어있었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선생님은 유난히 들국화 무늬의 원피스를 즐겨 입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방과후 빈 교실에서 `고향의 봄' 노래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호기심에 찬 아이들은 조심스레 창가에 다가섰다. 그런데 노래는 곧 뚝 끊어지고 들국화 무늬의 좁은 어깨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며칠 후 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여 선생님은 6·25 직전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월남하셨다고 한다. 월남 당시 유달리 국화꽃을 좋아하시던 그의 어머니는 들국화가 필 때면 다시 만날 거라며 한줌의 들국화 꽃을 쥐어 주셨다고 한다. 하지만 꽃이 피고 지기를 몇 해…. 선생님의 가슴엔 분단의 원망만이 자랐고 단풍이 물들 때면 장롱 깊이 넣어 둔 들국화 옷을 꺼내 입고 눈 시리도록 하얀 들국화 언덕에 서 계셨다.
그러던 얼마 후 선생님은 우리의 애절한 기도도 저버린 채 도시 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더 이상 꽃을 꺾지 않아도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이 너무 짙어서였을까. 이젠 더 이상 꽃을 꺾을 필요가 없을 거라며 무던히 울어대던 우리 반 여자 아이는 머나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를 여위고 가난한 살림의 그 애는 선생님이 오시기 이태 전부터 결핵을 앓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그 아이는 잠시 자신의 병을 잊고 지냈다. 가끔 그 애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흠뻑 젖은 파리한 모습으로 국화꽃을 한아름 안아들고 교실로 들어섰었다.
그러던 그 아이는 선생님이 떠나시자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시름시름 앓다가 다음 해 한줌의 들국화 선물 속에 그렇게 떠났다. 그 여자아이의 자갈무덤 곁에는 오랫동안 빠알간 보따리가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무덤 곁에는 보따리가 사라지고 하얀 들국화 몇 송이가 함께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