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체 안의 노 투사는 마치 어린이처럼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달래지도 못했다. 그 어느 누가 이 애국가를 울지 않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노래를 부르는 입모양인지, 웃음을 억누르는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발음을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노 혁명가의 감격.”
임시정부 주석이 아닌 단지 ‘한 사람의 임정요인’으로서의 환국을 하는 김구 선생의 감격은 비행기 창으로 한반도가 보이는 순간, 누구의 지휘도 없는 울음 섞인 애국가가 엄숙하게 울려퍼지는 상황으로 기록돼있다.
3.1운동 정신을 대표하는 가사
구한말로부터 3.1민족운동을 거치고 35년의 일제강점기를 격고 해방을 맞지 않은 이 시대 우리로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애국가의 사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절을 맞은 시점에서는 우리에게도 이 사연이 뜨겁게 다가온다.
애국가는 국기 태극기와 국화 무궁화와 국호 대한민국과 함께 4대 국가상징의 하나로 국가(國家)의 역사와 이상을 담아 일체감으로 부르는 노래다. 그런데 애국가는 명칭, 가사와 곡조의 이원적 형성 등으로 인해 다른 국가상징들과는 달리 정통성 논란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형성 과정은 정통성의 결함이 아니라 그만큼 애국가가 우리 민족수난사와 밀착돼 있기 때문이다.
명칭 문제만 해도 그렇다. 위태로운 나라를 사랑해 지키자는 취지에서 애국가라는 명칭이 사용됐고, 국가와 동일시됐다. 이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군주를 찬양하는 국가를 채택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우리 국민 모두의 염원을 담은 형태다. 1902년 고종의 명으로 제정된 ‘대한제국애국가’의 명칭에서부터 임시정부에서까지 일관되게 애국가로 불렀다.
가사의 탄생과 변이상황도 그렇다. 1896년 서대문 독립문정초식 기념식에서 불려진 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시작이었다. 그 가사를 기초로 1907년에 새롭게 ‘애국가’를 지었고 3.1운동 기간에 이 가사가 전국적으로 불렸다.
오늘의 곡조는 안익태가 1931년 자신이 작곡하겠다는 결심으로 5년의 각고 끝에 완성한 것이다. 1935년 11월에 작곡이 완료되고 악보가 출판돼 한인사회에서 연주되자 1940년 미주 ‘대한인국민회’가 임시정부에 ‘올드랭 사인’ 대신 안익태의 ‘신애국가’로 고쳐 부르는 것을 허가해 달라는 청원을 했고, 임시정부는 의정원회의에서 이를 가결하고 허가했다. 임시정부도 1941년 광복군 성립식에서 안익태 곡의 애국가를 부름으로서 이를 공식화했다. 이는 1945년 8월 1일 발행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한 참고문건’ 제1집 첫 면에서 확인된다.
교총, ‘애국가 부르기 운동’ 전개
이렇듯 윤치호의 작사와 안익태의 작곡이 국가나 어떤 단체에 의해 위촉돼 창작된 것이 아니고 순수한 개인의 애국열정으로 창작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애국가는 이들 개인 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 국민들의 필요에 의해 채택된 것이다. 결국 3.1운동 기간 전 민족 구성원이 태극기와 함께 항일구국의 염원을 표출할 노래로 애국가를 택했던 것이고, 상해임시정부가 애국가를 계승했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식에서 불려 오늘에 이른 것이다. 국민적 합의에 의해 채택되는 과정을 이어온 것이다.
작사자와 작곡자는 개인적 애국의지로 창작했지만, 이를 국가상징인 국가로 채택한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작곡가나 작사자의 성향이 애국가의 위상을 흔들 수 없는 것이다.
애국가는 우리 근대사의 애환을 함께한 역사의 노래요, 노래의 역사다. 그래서 애국가는 3. 1정신으로 탄생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한 대한민국, 그 정통성과 함께하는 당당하고 감격으로 불러야 하는 국가(國歌)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육자를 대표하는 한국교총이 ‘애국가 부르기 운동’의 전개를 통해 다음 세대에게 우리 국가(國歌)를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선택에 의해 지금의 위상을 갖게 된 애국가의 역사를 이어가는 일일 것이다. 애국가는 오늘도 우리 민족의 선택에 의해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