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들. 지도를 그려 놓은 논에 얼키설키 세워 놓은 볏단 사이를 오가는 참새 떼를 벗삼아 산길을 올라 턱에 숨이 찰쯤, 눈앞에 들어오는 곳이 바로 내가 다니던 전북 장수의 계북중학교다. 선배도 후배도 없는 첫 설립된 학교 신입생의 설레는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것일까. 입학식을 며칠 앞둔 예비소집일에 채병남 선생님은 우리를 따뜻한 눈빛으로 기다리고 계셨다. 그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첫 부임지가 되는 셈이었다. 다소 여윈 체구에 곱슬머리, 그러면서도 포근한 눈매에 매력이 묻어나는 총각, 채병남 선생님은 중학교 3년 동안 담임을 하시며 내 인생의 큰 방향을 설정해주신 분이었다. 선생님이기에 앞서 집안의 큰 형님이요, 아버지요, 한 가족처럼 정으로 다져온 아련한 추억에 지금도 가슴이 싸아하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신설된 학교라 미처 다져지지 않은 운동장 구석구석에 선생님과 함께 삽과 괭이질로 정지작업을 하니 운동장은 안방처럼 포근했다. 방과후에 그 운동장에서 선생님과 손발을 맞춰 배구시합을 하던 함성소리가 학교 앞에 우뚝 솟은 덕유산을 뒤흔들었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학교 뒷들녘의 오이 밭에서 오이를 따먹다 들켜 혼쭐났다.
"야, 이놈들아, 오이가 그냥 키워지는 거야? 너희들은 하찮은 거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세상에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어디 있니?"
회초리로 종아리를 얼마나 맞았는지 시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야릇한 친근감에 더 가까워졌다. 아이들이 가고 없는 텅 빈 교실에서 멍든 종아리에 약을 직접 발려 주시면서 한참을 다독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첫 만남의 소중함만큼이나 제자들이 티 없이 자라길 기대했던 선생님께서는 적지 않은 충격과 실망을 하신 것 같았다. 노력하지 않고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남에게 피해만 줄 뿐 사회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고 강조하신 선생님의 소중한 가르침은 나의 가슴속에서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
혹독하게 질타를 받은 우리는 후회와 반성의 눈물을 쏟아냈다. 오이 한 개에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쓰디쓴 인생의 경험담을 듣고는 한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손발이 짓무르도록 고생하는 농부들의 애달픈 삶을 선생님은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오이 한 개의 교훈'을 떠올리며 그 시절로 되돌아가곤 한다. 26년 전의 채병남 선생님, 보고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