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어떤 것이나 죽음을 또한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늘 염두에 두면서 살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단절로, 종말로, 아무 것도 없음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살면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산다는 것은 아예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도 합니다. 살면서 죽음을 목표로 살수는 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살되 아주 영원히 살듯이 살아야 그것이 삶다운 것이라고 여깁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리 짧고 험한 세상살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곳에서 나 자신이 빚는 삶의 의미가 언제든 사라지지 않고 지속하는 영원한 것이기를 바라며 살아야 비로소 나는 삶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진지한 삶을 살면 살수록 우리는 너나없이 죽음을 잊게 됩니다. 죽음을 간과하게 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반생명적인 무의미한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듯 죽음을 외면하면서 살아갈 수만은 없습니다. 누구나 알듯이 죽음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 의외성 때문에 가장 진지한 삶에의 몰입순간에도 나도 모르게 내 속으로 죽음의 현실성이 끼어드는 것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합니다. 비록 의식의 표층에서는 없는 듯 눈감을 수 있지만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조차 지워지는 그러한 것일 수 없는 것이 죽음에 대한 우리네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간과하면서 삶에 더 깊이 몰입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진정한 삶의 현실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질병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병은 살아있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병에 걸리면, 그리고 병들어 몸이 괴로우면,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예상합니다. 아예 죽음의 현실성을 지금 여기 내 삶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치유를 기다리고 의도하고 희망하는 간구와 악화된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비참한 종말을 응시하는 우울한 체념은 언제나 삶을 채색하는 두 빛깔입니다. 우리는 그 두 빛깔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죽음을 외면한다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삶을 속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상할 수 없던 죽음과의 만남이 아니더라도, 또 질병의 고통이 아니더라도, 삶은 죽음을 삶의 현실로 받아드려야 하는 엄연한 자연의 질서 속에 있습니다. 늙음이 그것입니다. 결국 삶은 늙어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생애를 얼마만큼 늘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명이 길어져도 죽음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다만 죽음을 유예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늙음은 죽음과 훨씬 가까워진 실은 죽음의 그늘에 담긴 세월입니다. 젊음의 패기나 장년의 성취나 노년의 지혜로도 가깝게 다가온 죽음현실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늙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삶을 이어간다고 해도 그르지 않은 그러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삶의 현실입니다. 죽음은 삶과 반대되는 것도 아니고, 삶을 파괴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 자체의 한 모습이고, 삶을 완성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죽음에 이르러 비로소 삶은 제 전체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그 삶다움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할 마땅한 일입니다. 이를 소홀히 한다든지 간과하는 것은 사람다운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2.
왜 죽음을 준비해야 하나 하는 까닭은 이제 더 말씀드릴 필요조차 없을 듯합니다. 당연하고 자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면 우리는 자기 삶을 되돌아보아 내 삶이 제대로 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 준비는 철저한 자기 삶에 대한 ‘회개’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은 자기 삶을 투명하게 다듬고 때 묻고 얼룩이진 삶을 깨끗하게 하도록 하는 마음입니다. 삶은 죽음을 초점으로 하여 조망할 때 비로소 그 됨됨이를 진실로 살필 수 있습니다. 죽음준비는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다.
첫째, 우리는 죽음을 전제할 때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더없이 진심으로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싫어 한 사람들과도 그 관계를 정상적인 것으로 회복하게 됩니다. 죽음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있는 시간도 화해할 수 있는 시간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알고 느끼게 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따뜻하고 착하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죽음을 전제할 때 게으름의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할 일을 미루어 놓는다는 것은 언제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생명이 지속하리라는 착각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나 자신의 게으름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부덕함이 죽음을 전제하는 삶 속에서는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다시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을 이겨내지 못한 삶은 지저분한 흔적을 남깁니다. 그것은 나에게 얼마나 큰 흠으로 남을지 모릅니다. 삶을 이럴 수 없습니다. 죽음이 언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게 할는지 모른다는 긴장은 내 삶을 건강하게 하는 필요한 요소입니다.
셋째, 죽음을 준비하면 우리는 내 가족, 내 혈연을 편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내 삶을 잘 다듬지 못하면 바로 그들이 가장 심각하게 상처를 입습니다. 이러저러한 감정의 얽힘도 늘 평소에 풀어야 하고, 내 죽음이후에 있을지 모르는 온갖 재산상의 문제나 법률적인 문제들도 잘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 유서도 합법적으로 잘 마련하고, 당부할 마지막 이야기도 어떤 형태로든 남겨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혈연은 나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게 된 내가 책임져야 할 내 분신들입니다. 그들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하는 일이 내 생전에 죽음을 앞두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넷째, 죽음을 잘 준비하면 내가 이제까지 이루지 못한 이른바 인류를 위한 공헌, 또는 사회를 위한 기여, 아니면 후손을 위한 봉사를 의미 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장기를 이식할 수 있게 하여 꿈도 꾸지 못한 ‘새로운 생명의 소생’을 내가 이룰 수도 있고, 시신을 기증하여 더 많은 고통 받는 환자들의 치유를 기하기 위한 연구에 내가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어떤 소유도 무의미한데, 바로 이 계기에서 평소에는 불가능했던 ‘희생과 봉사’를 실현하여 많은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내가 알지 못하지만 지금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공공의 선을 이루어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죽음만을 생각하며 죽음만이 삶의 전체인양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 우울하고 그늘진 불안한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부닥칠 내 삶의 또 하나의 현실이라면 우리는 그것은 참으로 삶을 삶답게 하려는 의지 속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그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일은, 이제 공연한 관념이 아니라 일상적인, 매우 일상적인, 우리 삶의 태도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참 잘 사는 일이기도 합니다.
3.
그런데 죽음을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지식을 가르친다면 힘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신념에 바탕을 둔 실존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 풍토나 역사적 경험 등을 아우르는 문화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두루 살피고 많은 생각을 기울이면서 어떤 태도로 죽음준비교육을 수행할 것인가 하는 것을 참으로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교육을 한다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의학적, 법률적 지식은 물론 종교를 포함한 관습이나 전통에 대해서도 상식 이상의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개개인의 생애와 가정의 분위기와 가정의 전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아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앎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한 깊은 천착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그것이 잘 전달되었는지 여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잘 갖추어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남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 인격을 지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면 상대방의 태도나 발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내 주장이나 내 앎을 강요하는 권위주의적인 교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배우는 사람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 오히려 상처를 입고 맙니다.
넷째,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관이 잘 다듬어져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죽음관을 가르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해와 의미부여를 하고 있지 못하다면 죽음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죽음을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은 삶 자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만 강조하기 위해 다시 항목화한다면 특정 종교의 신앙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죽음준비교육이 활용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것이 대상에 대한 사랑이나 자비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칫 상대방의 자존(自尊)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무릇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제시된 주제를 자기에게 적합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발전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친 주제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터득하게 하되 그 내용은 자기 스스로 채우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죽지만 죽음을 겪어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도 언제나 투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기에 서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자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의 죽음준비교육이 그렇게 이뤄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