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은 1934년 일제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됐다. 광복 이후 1962년에 한국 정부가 국보와 보물을 지정하면서 일제가 부여했던 번호를 그대로 사용해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됐다.
이 때문에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숭례문의 가치는 국보 1호라는 일련번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숭례문이 가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가치에 의해 이뤄어지는 것이다. 숭례문의 역사적, 미학적, 건축사적인 가치에 대한 연구는 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국보 1호라는 상징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도성의 숭례문은 고려의 건축 기법과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여 발전된 조선 전기의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라고 서술돼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의미가 와 닿지 않는다. 숭례문의 가치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역사적으로 숭례문은 조선 초기인 1398년(태조7년)에 완공돼 1447년(세종29년)에 고쳐 지은 것으로 현존하는 도성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미학적으로는 흥인지문(동대문)이 과도한 장식과 기교에 치중하고 있는 데 비해 숭례문은 규모가 장중하고 절제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건축사적으로 숭례문은 고려 시대의 주심포식에서 조선 시대의 다포식으로 넘어가는 전통 목조 건축의 변화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한 가치가 있다. 1869년에 새로 지은 흥인지문은 이미 다포식이 정착된 조선 후기의 공포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숭례문보다는 상대적 가치가 덜 한 것이다.
이처럼 숭례문은 역사적, 미학적, 건축사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제 목조 건물을 지탱하던 석축을 그대로 사용하고 기존 나무와 같은 종류인 금강송을 베어다 숭례문을 복원한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전란의 위기 속에서도 의연하게 견디어 왔던 숭례문의 그 위엄까지는 온전히 되살리지 못할 것이다.
이 때문에 국보 1호로서의 지위마저 흔들리고 있다. 다행히도 문화재위원회에서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확실하게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중앙 정부나 서울시는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여 숭례문 복원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서울시는 일제 강점기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성곽까지 복원하여 숭례문에 연결시킬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숭례문 혼자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이 아닌 남산의 성곽과 연결된 도성의 남문 모습이 제대로 재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숭례문의 소실을 계기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살아나고 있다. 숭례문은 비록 처참하게 불타 무너져 내리고 말았지만 이를 계기로 그동안 화재에 무방비 상태였던 국보급 목조 건축물에 대한 보완책이 마련된다면, 숭례문의 전소가 허망함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들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 속에서 진정한 우리 국보1호로 숭례문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