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야기에 빈정거리거나 틀렸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저 예, 맞습니다. 그래야만 된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주무시는 틈을 타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명령을 내렸다. 시골에서 올라오신 할머니의 엉뚱한 이야기에 가족들이 짜증을 내거나 얕볼까봐 미리 아버지는 단단히 주의를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해 2학년인 재웅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을 가족들은 안다. 왜냐하면 같이 방을 쓰고 있어서 말벗이 되는 재웅이가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박박 우기느라고 시끄러울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웅이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할머니가 잘못 알고 계신 것은 바르게 가르쳐주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조건 맞다고 하라니! 하지만 아버지의 염려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웅이는 할머니와 전혀 다툼이 없이 잘 지내었다. 재웅이는 할머니가 무척 좋았다. 집에 제일 먼저 오는 재웅이를 맞이하는 것은 늘 찬바람이 도는 빈집이었다. 너무 쓸쓸했었는데 이제 그렇지 않다. 언제나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 재웅이 인제 오는감? 공부하느라 힘들제?" "힘들긴요! 재미있는 걸요." "어서 온나. 내가 먹거리 해 놓았다." 그러시면서 뜨끈뜨끈한 부침개나 김이 솔솔 나는 죽을 내놓았다. 재웅이는 할머니가 해 주시는 요리들이 참 맛있었다. 그뿐 아니다. 할머니 이야기는 참 재미있는 것이 많다. 옛날 이야기도 그렇고, 처음으로 들어보는 이상한 낱말들도 참 재미있다. 놀러왔던 아이들도 그랬다. 그래서 자꾸 놀러 오려고 한다.
아이들이 돌아간 뒤에 할머니는 "너 동무들은 하나같이 모두 잘 생겼구나." 하며 흐뭇해하신다. 좋은 친구들을 사귀어서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그래서 재웅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여쭈어본다.
"그 중에서 누가 제일 잘 생겼어요?" "그래도 모두 너보다는 못하제. 재웅이가 제일 잘 생겼지." 하며 볼을 꼬집는다. 재웅이는 자기 반에서 공부는 잘한다. 하지만 이때껏 얼굴은 자신이 없었는데 할머니가 제일 잘 생겼다고 하시니까 기분이 삼삼하였다. 그런 할머니가 좋지만 특히 텔레비전 볼 때는 제일 마음이 맞다. 작은누나가 "채널 돌려. 연예가 중계 보자." 그러면 할머니가 나서서 "그냥 두어. 지금 이것이 더 재미있다."
할머니는 어린아이들이 보는 것을 좋아하신다. '혼자서도 잘해요' 같은 유치원 프로를 즐겨 보신다. 어른들 보는 것은 수준이 높아서 이해를 못하는 것이 있다. 때문에 가족들도 웃는 일이 많다. 오늘 저녁에도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던 할머니가 기가 찬다는 듯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저 제불암이는 또 각시를 바꾸었네. 세상에 각시가 몇갠고?" 그러자 어머니가 웃으며 "어머니, 저건 진짜 사는 이야기가 아니고 연극이에요. 극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이 바뀌는 거랍니다." "아무리 연극이라도 그렇지." 할머니는 불평이시다. 그런데 용하게 제불암이는 구별을 한다. 그게 신통해서 큰누나가 "어머, 할머니께서 제불암을 다 아시네. 호호호." 그러자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겠냐는 듯 "나를 바보로 아는감. 핸철이도 안다."
"우와, 우리 할머니 대단하시네." 작은누나가 감탄을 한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재웅이가 치켜세우는 바람에 할머니는 난처해졌다. "할머니는 배용중도 알고, 임창지도 아는데." 할머니는 듣도보도 못한 이름이다. 그러나 괜찮다. 대답을 안하는 수가 있다. 할머니는 잠잠히 있다가 위기를 벗어나려고 다른 곳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저 사람은 아까 많이 맞아 이마에 피가 흐르더니 금세 깨끗이 나았네." "에이, 할머니도. 저건 며칠 지난 거예요." "뭐? 며칠 지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작은누나와 옥신각신 다투기도 하신다. "아이가 저 사람은 어제 죽었는데 또 나왔다." "아이쿠, 할머니는 못 말려."
큰누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천장을 보고 소리 없이 웃는다. 그러나 재웅이와는 죽이 척척 맞다. "재웅아, 박첨지 나오는 것 틀어라." "박첨지가 뭐예요?" 작은누나와 큰누나는 호기심에서 눈이 동그래진다. "박첨지가 나오는 것이 이 시간대에 있나?" "글쎄 뭘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할머니를 바라보지만 재웅이는 서슴지 않고 채널을 뿅뿅 하고 누른다. "저기 나왔네." "하이고, 인형극을 말하는 구나."
누나들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할머니가 재웅이와 둘도 없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웅이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동생 같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는 가스 켤 줄도 몰랐으며, 변기 누를 줄도 몰랐다. 그걸 다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세탁기를 돌릴 줄 모르며 채널 바꾸는 것도 서툴다. 그것 보다 더 큰 문제는 한글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숫자도 모른다. 그래서 전화할 줄을 모를 수밖에.
"재웅아, 고모한테 전화걸어라." 재웅이의 날렵한 동작에 할머니는 흐뭇한 얼굴이 된다. 고모와 전화를 하는 동안 재웅이는 물끄러미 할머니를 바라본다. 어쩌다가 글자를 배우지 않았을까? 글자를 모르고 산다니 참 답답할 거다.
"할머니는 왜 학교를 안 다니셨어요?" "그때는 세상이 궂어서 어른들이 학교를 다니지 마라고 했다. 나만 다니지 않은 것이 아니고 순덕이, 섭섭이, 봉순이, 끝녀, 두레도 안 다녔지." "그 애들이 누구에요?" "애들이라니? 내 동무들이지." "그 할머니들도 글자를 몰라요?" "그중 순덕이는 글자를 알제. 나도 받침없는 글은 읽는다." "어디 봐요." 그러면서 재웅이는 가방 속에서 읽기책을 꺼내왔다. "이거 읽어보세요." 할머니는 부끄러운 듯 돋보기를 쓰시고 더듬거리며 읽는데 영 서툴다.
"우루누 사로 이하나이 도아다." "우리는 새로 이학년이 되었다예요." "전에는 잘 읽었는데 이제 까묵었다." 그러면서 책을 탁 덮는다. 재웅이는 할머니가 1학년 책은 잘 읽을 거라 생각을 해 봤다. 우리 할머니는 1학년이다. 훗훗 나는 2학년인데.
"그런데 할머니 신통해요. 버스는 어떻게 알고 타요?" "아는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탄다." "아는 사람 없으면요?" "그때는 운전기사를 보고 물어보면 되지. 입 놔두고 뭐하냐?" "그래도 여기 올 때는 복잡해서 어려웠을 텐데 혼자 찾아오셨잖아요?" "그래서 택시를 탄다."
재웅이는 할머니가 글자를 몰라도 슬기롭게 산다고 생각하였다. 할머니는 재웅이가 참 기특하다고 여겼다. 어떤 아이는 할머니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같이 방을 쓰지 않으려고 떼를 쓴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이 집에 오기까지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런데 재웅이는 불평은커녕 좋아하고 잘 때는 꼭 안고 잔다.
"재웅이는 학원에 안 다니나?" "학원 안다녀도 공부 잘해요. 할머니하고 지내는 것이 더 좋아요." 그러면서 오후는 할머니 손잡고 약수터도 가고, 공원에도 놀러간다. "할머니, 저곳은 경로당이어요. 나중 할머니도 저곳에 놀러 가세요." 하며 안내도 하고 "이것 돌릴 줄 아세요?" 그러면서 훌라후프 돌리기도 가르쳐 주기도 한다. 하루는 할머니와 밖으로 산보하러 나왔다가 재웅이는 짐짓 할머니를 놀려주고 싶어서 집에 다 올 무렵 숨어버렸다. 할머니가 집을 찾아가는지 알아보려고. 그런데 할머니는 머뭇거림 없이 층계를 올라갔다. 헐레벌떡 뒤따라오는 재웅이를 보고 ""너, 나를 놀리려고 숨은 것 내 다 안다." 하며 휘적휘적 자신 있게 올라갔다.
'와, 할머니는 우리 통로를 알고 계시구나. 숫자도 모르면서.' 재웅이는 신통방통하기만 했다. "아버지, 할머니는 숫자도 모르면서 어떻게 우리 집을 알까요?" "할머니는 요술할머니거든." 아버지는 그래놓고 웃었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가 담배를 많이 피우신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루는 "어머니, 담배 연기는 어머니에게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재웅이에게 해로워요. 담배를 끊으시면 안되겠어요?" 할머니께 참 어려운 부탁을 했다.
"안된다. 나는 담배 없이는 못 산다." 그 당장은 단호하게 거절을 하였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면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겠다. 얼마나 나쁜 것인지 모른다. 더구나 재웅이에게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재웅이는 "할머니, 담배 냄새는 고소해요." 하며 담배 연기를 맡으려고 코를 킁킁거리지 않는가! 할머니는 코끝이 찡해왔다.
'재웅이 마음을 내가 알지.' 할머니는 창문을 열고 담배 연기를 손으로 훠이훠이 쫓아내었다. 하늘에는 담배 연기를 닮은 하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