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정신건강 팬데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는 반복되는 사건·사고 속에서 큰 심리적 충격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 역시 이러한 위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많은 학생이 심리·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위기상황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에 치유와 회복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위(Wee) 프로젝트 활성화, 다양한 상담 및 병원과 복지 서비스 연계 시스템 구축, 회복적 생활교육 실천과 더불어 최근에는 학생들의 감정조절능력과 대인관계향상을 위한 사회정서교육이 등장했습니다. 분명 이러한 노력이 교육현장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학생이 병들어간다고 느껴집니다. 실제로 교육부(2022)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만 12세~17세)의 현재 정신장애 유병률1은 9.5%, 평생 유병률2은 18.0%로 나타났습니다.
대체 어떤 이유로 이렇게 아이들이 병들고 위기에 빠지는 것일까요?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과 이유가 모두 다르고, 다양한 요인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명확한 원인을 규명하기 어렵습니다. 흔히 알려져 있듯 학생들의 이런 정서행동의 어려움은 유전적 요인과 신경화학적 이상, 정서적 학대 경험, 가족관계 갈등, 학업성취와 관련된 스트레스, 또래관계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상황에 놓인 학생들을 위해 학교현장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교육정책이나 행정적 차원의 접근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상담교사로서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학생 개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학교 분위기 조성이 필요합니다.
정서 위기는 조기 개입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시기를 놓쳐서 위기상황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던 학생이 충동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자살 시도를 하는 등 갑작스러운 문제행동을 보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사실 심각한 위기행동을 보이기 전에 조금씩 징후를 보일 가능성이 높기에 평소 학생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학생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관찰을 통한 예방 효과를 넘어서 교사와 학생 간의 신뢰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교사와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학생은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게 되거나, 문제행동을 줄이며, 교사의 기대에 반응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교사들이 서로 학생에 대해 관찰한 내용을 공유하고, 지도방안을 함께 논의하는 문화가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동료교사와의 협력을 통해 소진을 줄이고, 학생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통해 예기치 못한 위기 사안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다른 교사들로부터 학생에 대한 정보를 공유받은 덕분에 원활한 상담 개입을 할 수 있었던 경험과, 여러 교사의 관심과 지지 속에서 학생이 적응적으로 변화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사는 학생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업시수, 행정업무 등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어서 학생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교사들이 학생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업무 부담을 줄여주는 교육환경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학생들의 손상된 자기 가치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이 가치 조건에 얽매여 살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가치가 성적이나 친구관계 등과 같이 특정 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담 중 ‘굳이 뛰어나게 잘나거나 뭔가를 특출나게 잘하지 않아도, 너는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에 학생들의 눈물 버튼이 눌리곤 합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는 학생, 아무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학생, 머리로는 알지만 와닿지 않는다는 학생 등 반응도 제각각이지만, 어쩌면 학생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학교에 근무하며 만났던 한 학생은 고등학생 시절 반복된 자살 시도와 위기행동을 보였지만,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건강해진 모습으로 찾아와 자신의 과거 경험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학생일 때 당장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큰 벽이 너무나도 높고 거대해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인생이 이미 끝나고 망한 줄만 알았다고 했습니다. ‘
'왜 남들만큼 못 해. 왜 이렇게 느려’라고 다그치는 사람들 속에서 그 커다란 벽 외에 다른 길은 도저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괜찮다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고 인정해 주며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벽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법을 배웠고, 벽은 결국 작아져서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노력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때때로 어른들의 인정·인내·지지가 위기상황을 ‘지나갈 수 있는 길’로 안내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기 가치감의 훼손은 심각한 우울 등 내면화 문제를 겪는 학생들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외현화 문제를 보였던, 즉 항상 남 탓만 하며 주변 모든 사람이 다 잘못했고 나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학생도, 폭력과 일탈행위를 일삼는 학생도, 분노로 간혹 흉기를 소지했던 학생도, 깊은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훼손된 자기 가치와 깊이 깔린 자기혐오가 발견되고는 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제 경험으로는 분명 많은 학생이 그랬습니다.
그 학생들의 문제행동을 괜찮다고 용인하거나 정당화해야 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폭력성, 충동적인 행동, 갈등을 일으키는 행동을 단호하고 명확하게 지도하되 그 학생들 내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욕구, 즉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며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고 싶은 마음을 알아줄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 그 아이가 노력하고 있는 작은 부분이라도 찾아서 지지해 주며, 변화 가능성을 믿어주는 게 무엇보다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은 때때로 교묘하고 영악한 방식으로 좋은 교사 혹은 부모이고 싶은 어른들의 욕구를 마구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주고, 기다려주며, 중요한 존재로 인정해 주었을 때 더디더라도 분명 성장과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셋째, 교육공동체의 연대와 전문적 개입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합니다.
학생들의 회복은 학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가정은 학생 발달의 가장 중요한 환경이기에 보호자의 협조가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학교현장에서 위기관리위원회를 열어 학부모·관리자·교사들이 함께 모여 위기학생의 치유와 지원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이 협조적으로 잘 이루어졌을 때, 학생의 변화가 수월하게 이루어지고는 합니다.
그러나 교사가 객관적인 근거를 갖고 얘기해도 학부모가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민원의 소지가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교사 소진 원인 1위가 학부모의 민원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을 정도로 많은 교사가 학부모 민원에 대한 피로도가 쌓여있다 보니, 위기학생 지도와 지원을 위해 학부모의 협조를 구하는 것은 점점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해 교사의 전문성을 인정해 주며 기꺼이 협조하는 분위기, 교사에게 힘이 되어주는 학교문화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또한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건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부모와 같은 성인 역시 지치고 마음이 병들 수 있으며, 이런 고통은 서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악순환되고는 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전문적 개입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담 및 심리치료기관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도움을 받을 기회를 놓쳐버리는 일이 수두룩합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모두 마음이 병들 수 있음을 인정하고 개인 차원, 혹은 가정 차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전문적 개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심각한 정신적 질환으로 인한 문제는 주변 어른들의 도움만으로는 해결이 어렵기에 전문적인 치료와 상담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며, 그 효과는 이미 수많은 사례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 졸업생이 군복무 중 우울감이 심해져서 정신과 진료 및 상담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저 잘한 거 맞죠?”라는 메시지에 대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힘들고 괴로운 상태를 인지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 모두에게 필요한 중요한 삶의 기술일 것입니다.
교육공동체 구성원들이 협력하여 관심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학생을 대함으로써 서로의 마음이 병들어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적극적으로 상담 및 치료에 임할 때 비로소 학교와 사회가 안전해질 것입니다. 입시 중심의 문화 속에서도 개인의 가치감이 손상되지 않고 모든 구성원의 정신건강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길 바라며,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정서적 안정과 성장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든 분께 응원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