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에 살면서 처음으로 기차 여행을 했다. 어제 (07.5.16) 밤 7시 이란 북부 도시 타브리즈로 출발하는 4인용 침대칸에 몸을 실었다. 전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 4인용 침대칸에서 일주일 정도 보낸 경험이 있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깨끗하고 사람들이 친절해 12시간의 여행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저녁과 아침이 제공되고 밤에 새 이부자리를 주는 등 기차를 잘 만 이용하면 버스 보다 훨씬 편하고 유익한 여행이 되겠다. 요금은 버스에 비해 한 3배 정도 비싼 편이다. 아침 7시경 도착해서 내리니 여전히 택시 호객꾼들이 따라 붙는다. 한 양반이 카도반까지 우리 돈 1만원을 부른다. 턱도 없이 비싼 요금이다. 외국인이라 봉을 잡을 참이었다. 한 젊은 양반이 4천원에 가겠단다. 뭔가 좀 열린 양반 같다. 필자가 이란어를 현지인만큼 구사하면 ‘아하’ 하고 알아차리면 될 텐데 모두가 그걸 모르고 손님을 놓치고 만다. 3천원에 가자니 중간을 잘라 3천 5백 원에 가잔다.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자기 통성명을 대며 가는 것만 하지 말고 오는 것 까지 자기 차를 이용해 달라고 한다. ‘ 호더 모바라크, 헤일리 호쉬 바크탐’ 오늘 하늘이 맺어준 기회인데 무척 반갑다고 호
2007-05-22 13:33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러 휴게실에 들렀다가 좋은 글귀를 발견했답니다. 누가 붙여놓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음미해 볼수록 좋은 내용이란 생각이 들어 우리 한교닷컴 독자분들께도 소개합니다. 임종을 앞둔 스승이 제자인 노자를 불렀다. 인생살이의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아직도 남아 있는 이유를 아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그것이 인생살이의 비결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네게 줄 가르침이 없구나." 어느 누구의 입에나 다 들어있는 세상사는 지혜. 딱딱함보다는 물 같은 부드러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모든 이를 포용해보면 어떨까를 생각해보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2007-05-21 11:51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에 있는 보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법주사의 말사로 567년에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이 창건해 청주시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충북도청 문화관광 사이트의 기록에 의하면 778년에 진표의 제자 융종 918년에는 고려 태조의 5번째 아들이자 당대의 고승이었던 증통이 3번째 중창했고, 1107년에 자정이 다시 중창했다. 보살사는 사바세계에서 고뇌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입구에서 운치가 있는 돌담이 반긴다. 고려 공민왕 때 토전이 하사 되고, 1458년 세조의 어명으로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보살사중수비에 있다. 또 1626년에는 벽암 각성의 제자 경특이 중수하고, 1683년에 일륜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며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등장할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현재 보살사에는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58호)이 있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할 때 법당 앞뜰에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화로 그중에서도 영산회상도는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길이 6.13m, 폭 4.26m의 보살사영산회괘불탱은 조선 인조 27년(1649)에 경기도·
2007-05-19 18:43시는 삶을 담아 놓은 그릇과 같다. 그것이 현실의 아픔을 노래하든 개인의 정서를 노래하든 말이다. 더구나 과거 숱한 투쟁과 현실의 질곡을 노래한 사람이 세월이 흘러 그 마음을 완곡한 곡선으로 그려 놓았어도 그 과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그래서 시이건 산문이건 어떤 사람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 사람의 마음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독자의 마음에도 젖어 공유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겨울 공화국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등을 비롯한 많은 시집을 낸 양성우 시인의 길에서 시를 줍다가 그렇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감정은 아침이슬에 젖은 풀잎처럼 낮아졌다. 소리를 낮추고 감정을 낮추면서 시대의 아픔이나 부조리를 직접 말하기보단 지나왔던 것에 대한 그리움과 가까운 것에 대한 사랑, 그리고 눈물 어린 마음을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다. 오늘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안에 넘치도록 가득 찬 너. 네가 있으므로 나는 너무나도 행복하다. 내가 네 안에서 모조리 부서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구나. 매우 짧은 만남도 기쁨이 된다면, 시간을 넘어서 이어지는 끝없는 만남은 그 기쁨이 얼마나 클까? 오늘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나고 돌아서도 언제
2007-05-18 12:335월 12일, 대전둘레산길잇기와 청주삼백리가 하나 되어 계족산을 답사했다. 내가 살고 있는 청주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 처음 청주삼백리와 인연을 맺던 날이 바로 작년 12월 17일이고 바로 그날이 청주삼백리와 대전둘레산길잇기가 청주의 옛길인 상봉재와 것대산ㆍ낙가산을 답사하며 처음 교류를 시작한 날이다. 그런 연유 때문에라도 이번 답사는 꼭 참석하고 싶었다. 그런데 기상청에서는 전날부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를 예보하며 외출이나 행사를 하지 말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매월 첫째, 셋째 일요일에 답사를 떠나는 청주삼백리와 달리 대전둘레산길잇기는 토요일에 행사를 주관해 몸이 불편한 어머님을 모시고 교회를 다니는 아내가 참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침에 일어나 비가 내리고 있는 밖의 날씨부터 확인했다. 기상청의 날씨 정보에도 대전과 청주의 날씨가 ‘강수확률 오전 80%에 흐리고 한두 차례 비후 밤에 갬’으로 나와 있다. 날씨가 요즘 몸이 아파 병원에 다니고 있는 아내와 함께 가는 것을 포기하게 했다. 김수녕 양궁장에서 맛있는 찌개로 뒤늦게 점심을 먹던 추운 겨울날이 생각난다. 그날은 대전둘레산길잇기 회원들과 만날 때부터 답사가 끝날 때까지 눈이 마구 퍼부
2007-05-17 08:40이란에는 도시 이름이 비슷한 곳이 많다. 그 대표적인 이름이 케르만(Kerman)과 케르만샤(Kermanshah)이다. 케르만샤는 이란 북서쪽에 케르만은 이란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도시 규모는 비슷하나 그 도시가 가진 특성은 판이하다. 케르만샤는 고대 도시로 구약성경의 다리오왕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케르만은 세계에서 가장 큰 진흙 성채 아르게 밤성이 있는 곳이다. 이번엔 아르게 밤성이 속해 있는 케르만를 찾았다. 케르만은 이란 지도를 펴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다시테 사막과 루트 사막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케르만은 그야말로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이곳 많은 도시들이 풀 한 포기 살지못하는 사막 한가운데가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야즈드, 타바스, 쿠르 등이 대표적인 도시이다. 케르만을 가려면 야즈드에서 남쪽으로 한 350여km 쯤 더 내려와야 한다. 필자가 이곳까지 버스로 탐방하면서 지루하리. 만큼 거대한 다시테, 루트 사막을 가로질러왔다. 사막이 펼쳐진 거리를 어림잡아보니 한 700여km 는 될 것 같았다. 넓이로 치자면 한반도 크기의 1.5배 쯤 되는 거대한 사막인 셈이다. 이란 사막은 아프리카 모래 사막과는 달리
2007-05-14 13:425월 8일 어버이날이 효경방학이었다. 혼자 문의문화재단지를 돌아보고 양성산과 작두산을 산행하기 위해 문화재단지로 차를 몰았다. 청원군에서 조성한 문의문화재단지는 대청댐 수몰지역의 민속자료로 사라져가는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해 선조들의 얼을 기리고 배우게 하는 역사교육장이다. 문화재단지 주차장에 있는 문의수몰유래비와 쉼터 뒤에 있는 조동마을탑을 보고 양성문을 들어섰다. 문 앞에서 고인돌과 돌탑, 다산과 번식을 상징하는 기자석이 맞이한다. 민화정, 문산리석교, 문화유물전시관, 부강리민가, 토담집, 김선복충신각, 양반가를 돌아보고 여막에서 시묘살이를 했던 조육형씨가 직접 상식을 올리는 모습도 봤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9호인 문산관에서 대청호와 미술관을 구경하고 양성산을 오르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대청댐과 문의문화재단지를 바라보고 있는 양성산은 역사와 전설이 깃든 명산으로 자연경관이 빼어나 등산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해발 378m의 양성산은 백제시대에는 일모산, 신라시대에는 연산과 고승 화은이 승병을 길렀던 곳이라 하여 양승산(養僧山)이라 불렸다. 양성산내의 일모산성은 삼국사기에 신라 자비왕 17년(474)에 축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은대사가 팠다
2007-05-14 08:22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는 여행작가이 며 시인인 백경훈씨가 사진가 이겸씨와 함께 은둔의 땅으로 알려진 네팔의 중북부, 히말라야 뒤편의 옛 왕국 무스탕을 20여일간 여행하면서 경험한, 빠듯한 행적과 느낌을 내면 깊숙이 적은 기록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방황을 한다. 특히 도시에 사는 현대인은 더욱더 그렇다. 꽉 짜인 일상에서 날마다 일에 허덕이다, 자신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살다가 잠시 짬이라도 나면 '내가 왜 이렇게 살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지?' '삶의 의미가 뭐지'하며 문득 삶에 회의가 들게 마련이다. 이 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스탕은 티베트의 남쪽 국경과 마주한 고원이며 협곡의 땅이다. 한해 내내 강풍이 부는 거친 땅이다. 해발 4천m를 넘나드는, 외지인은 숨쉬기도 곤란한 땅이다. 이 땅을 여행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삶이 무엇인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은 모두 나에게 있지만 무한한 대지를 보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있다. 무스탕은 네팔의 중북부 산악 지역 깊숙이 자리 잡은 옛 왕국이다. '가사'라는 곳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티베트로 향해 손톱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지역이다. 네팔 북부에 동서로 길
2007-05-13 06:42조선 후기 저명한 작가이자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 조선사회의 혼탁한 정치 현실과 양반들의 타락함을 혐오해서 과거를 보지 않고 재야학자로 지내며 젊은 선비들에게 꿈이 되었던 사람. 꽃망울이 툭툭 터지는 봄날에 그를 만났다. 그의 문학, 사상을 만났다. 내가 연암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읽었던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 (一夜九渡河記)'란 글에서다. 강물을 건너면서 느꼈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 글이 당시엔 어떤 감흥이나 느낌을 주진 못했다. 다만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다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읽는 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알야구도하기'뿐만 아니다. 이번에 새로 만난 연암의 글 엔 소설 10편, 서문·발문·기(記)·서간문·비문(碑文)·추도문·논설과 같은 산문 75편에 한시 15수 등 총 100여 편의 연암의 문학들이 들어있다. 이나 같은 소설 몇 편을 알고 있던 내게 이 책은 연암의 사상과 생각들을 조금이나마 맛볼 기회를 주었다. 연암의 글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한글로 번역되어 있어서도 그러하겠지만 연암은 스스로 살아있는 글을 참된 글이라 말하고 있다. 당·송의 글을 말하면서도 당·송의 글을 모방하
2007-05-10 21:37청주삼백리 청주사랑 한남금북정맥 5구간 답사는 지난 6일, 낭성면 현암리 수레너미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수레너미 마을은 산성이나 목련공원, 낭성으로 가는 사람들이 지나쳐가는 현암삼거리에 위치한다. 송태호 대장에 의하면 언덕 위에 있는 이 작은 마을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오솔길만 있던 시절 이곳을 지나던 스님 한 분이 장차 이곳으로 우마차가 넘어 다닐 것이라고 말했는데 진짜 길이 넓어지고 우마차가 다니게 되어 마을 이름을 수레너미라했단다. 마을 가운데에 있는 청원군 보호수 6호 느티나무는 청천의 화양동에 기거하던 우암 송시열이 이 마을을 지나다 심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오며, 한남금북정맥선상에 있는 유일한 마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물이 흘러가는 곳을 경계로 나눈다. 백두대간은 동과 서, 한남금북정맥은 한강과 금강으로 물이 흘러가는 능선이 경계다. 수레너미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은 한강, 남서쪽으로 흘러가는 물은 금강의 물줄기가 된다. 현암삼거리에서 산성쪽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고개가 홍고개다. 볼록한 모양이 홍두께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고개 바로 전 왼쪽 길가에 꽃밭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산으로 접어들면
2007-05-10 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