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책가방을 들지 않고 학교에 갔다. 머리에는 청색 머리띠를 두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들어섰다. 책가방 없는 등굣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했다. 운동회는 대개 추석 무렵에 열렸다. 타지에 나가 있던 가족들이 고향을 찾아오는 때라 온 가족이 함께 운동회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한 달 전부터 달리기와 무용, 응원 연습을 했다. 운동장은 아이들의 구령과 발소리로 가득했고, 청군과 백군의 함성은 가을 하늘 높이 퍼져 나갔다. 초등 1학년 때 나는 여섯 명이 함께하는 현대무용 공연에 뽑혔다. 키가 작아 맨 앞줄 가운데에 섰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자리는 어린 나에게 무척 무담되었을까, 아니면 철없어 담담 했을까?돌이켜 보면 그때 받은 관심과 칭찬 속에서 내 자존감도 작은 싹을 틔웠을 것이다.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던 날 추석에 큰언니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가 날마다 기다렸다. 연습을 마친 뒤에도 언니가 타고 올 저녁 버스를 기다리는그리움은 지금의 표현으로 사무침 같은 것이었다. 인내가 어려운 시기 지금의 손녀손자가 초1학년 또래의 정서였다.‘오늘은 언니가 올까.’ 어린 마음에 품었던 그리움은 해마다 추석
2026-09-21 13:09“안녕하세요, 교수님. 지난번 자기소개서와 면접 준비를 도와주신 덕분에 합격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 학생에게서 반가운 문자가 도착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흘린 땀과 새로운 출발을 앞둔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에게도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귀한 선물이었다.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취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전공과목을 다룬후 자기소개서 작성과 면접 준비에 관한 내용을 미니 특강으로 하였다. 취업을 앞둔 학생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는 일부터 어려워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몇 장의 서류에 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학생들에게 자기소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표현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진솔함’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구체적인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글의 힘이 약해진다. 반면 작고 평범해 보이는 경험이라도 그때의 생각과 행동, 그로 인해 달라진 점을 진솔하게 담아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된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보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정작
2026-09-21 13:08최근 우연히 달력을 넘기다 순간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내 나이 어느덧 우리 나이로 예순일곱, 주민등록상 정년이 만 62세였으니, 벌써 몇 해가 흐른 것이다. 교단을 떠난 뒤의 시간은 교단에 있을 때보다 이상하게도 훨씬 빠르게 흐른 것 같다. 그래서 삶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해 달려간다고 하는가 보다. 속도 계기판에 찍힌 속도가 시속 67km였으니 말이다. 학교에 있을 때는 시속 40~50km로 하루가 그렇게 천천히 지난다 싶더니, 학교를 떠나고 나니 이젠 “세월이 유수(流水)처럼” 한 해가 한 계절처럼 지나가고 있다. 40년. 참 긴 세월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인생의 가장 싱싱한 시절을 학교에서 보내며 정열과 사도(師道) 실천의 거룩한 임무를 다했다. 아직은 앳된 청년의 얼굴로 교단에 들어가 어느덧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어 순백의 머리칼로 치장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 사이 대한민국 교육은 몇 번이나 얼굴을 바꾸었다. 교과서가 바뀌고, 입시제도가 바뀌고, 교육과정이 바뀌고, 컴퓨터가 교실에 들어오더니 스마트폰과 인공지능까지 학생들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순수한 꿈을 꾸었고, 나는 교사로서 여전히 그 꿈을…
2026-09-21 13:07앞판과 뒤판을 정성껏 깎고 붙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바이올린 소리통을 완성했다. 아직 현을 얹지도 않았는데 나무를 쓸어보는 손끝에서 벌써 맑은 선율이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에는 바이올린제작학과가 있다. 강의 일정을 고려해 학부에 입학하면서 나는 가르치는 교수인 동시에 배우는 학생이 되었다. 건물과 건물을오가며 가르치고 배우는 생활은 낯설지만 설레는 도전이었다. 다시 학생의 자리에 앉으니 미처 보지 못했던 교육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바이올린 제작은 날카로운 도구를 익히는 일에서 시작된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붙이는 모든 과정이 새로운 세계였다. 처음에는 칼을 쥔 손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나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깎이기도 했다. 마음이 앞선다고 나무가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었다. 서두르면 흠집이 생기고, 작은 실수 하나가 다음 공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나무 앞에서는 기다림과 집중이 필요했다. 호기심은 열정으로 바뀌었고, 그 열정은 오랫동안 작업대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바이올린 제작의 역사에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특히 1700년부터 1720년대 중반까지는 그의 ‘황금기’로 불린다. 이
2026-09-20 20:48딸이 20년 만의 대학 동창회에 간다고 했다.초등학교 1학년인 쌍둥이와 함께 여행을 겸해 1박으로 다녀올 계획이었다. 금요일 하루는 학교에 체험학습도 신청했다.‘아이들까지 학교를 쉬게 하면서 꼭 가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딸에게 이번 동창회는 단순히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었다. 결혼 10년 동안 쌍둥이를 키우며 가사와 육아에 온 힘을 쏟아온 딸이었다. 잠시나마 ‘누구의 엄마’와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오랜 친구들 앞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나는 두 아이가 엄마에게 쓴 편지를 보고서야 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게 되었다. 글씨가 반듯한 아이는 편지지를 가득 채웠다.“엄마, 매일 행복하게 지내자. 언제나 엄마가 슬프면 말해. 사랑해.”동그랗게 그린 엄마 얼굴 주위에는 사랑의 표시도 가득했다. 다른 아이는 이렇게 썼다.“엄마, 언제나 기쁘게 살아. 엄마 슬픔 다 알고 있어. 용기 내. 사랑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쓴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깊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와 표정 속에서 엄마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까지는 몰랐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방법으로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2026-09-17 10:18이번 교육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방송교육이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보건선생님께 한 가지를 부탁했다.“방송실에 학생 몇 명만 앉혀 주세요.” 교육은 상호작용이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강당에서 학생들과 얼굴을 마주하면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강의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 보이면 다시 설명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질문을 던진다. 웃음이 터지면 잠시 기다렸다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것이 살아 있는 수업이다. 하지만 방송교육은 다르다. 한 번에 천여 명에게 같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강사에게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교실의 학생들이 집중하고 있는지, 내 말을 이해했는지, 어느 대목에서 마음이 움직였는지 알기 어렵다. 자칫 40~50분 동안 강사 혼자 화면을 향해 말하는 일방적인 교육이 되기 쉽다.그래서 나는 방송실 안에 ‘작은 교실’을 만들기로 했다. 여섯 명의 학생이 의자를 펴고 내 앞에 앉았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 선생님이 여러분을 보면서 이야기할 거예요. 여러분 얼굴은 방송에 나오지 않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친구들에게 들릴 수 있으니 잘 듣고 대답해 주
2026-09-15 09:48강원도의 한 교육지청에서 연락이 왔다. 오전에는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오후에는 교육청으로 이동해 관리자 연수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때 나는 40대였다. 에너지와 열정으로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교육계가 기억하는 나와 내가 기억하는 나는 아마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 열정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이제는 학교 현장 밖에서 그동안 쌓은 경험과 전문성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 시절 강원도로 가는 길은 지금처럼 편하지 않았다. 하루 전에 출발하거나 밤차를 타야 했다. 마침 밤 12시 반에 출발해 원주에 새벽 5시쯤 도착하는 야간열차가 있었다. 학생들 눈높이에 맞춘 교육을 준비하려면 일주일 전부터 움직여야 했다. 특히 흡연예방교육을 위해 콩나물을 직접 키웠다. 생수병에 담배를 다섯 개비, 일곱 개비씩 풀어 넣고 조건을 달리해 콩나물을 키웠다. 담배에 노출된 정도에 따라 콩나물의 성장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담배가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기 위한 교육자료였다. PPT만 들고 가는 강의가 아니었다. 담배, 모형담배, 살아 움직이는 금붕어, 타르실험용 빈생수병을 비롯해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2026-09-14 13:27저녁마다 숙제를 두고 같은 실랑이를 반복하는 집이 있다.아이는 학교와 학원을 다녀오면 소파에 눕고 스마트폰부터 찾는다. 부모가 숙제를 하라고 말하면 “조금만 있다가요”라고 대답한다. 처음에는 정말 잠깐 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몇 번 더 말하면 아이도 짜증을 낸다.“알아서 한다니까요.”그러다 밤이 늦어서야 책상에 앉는다. 몇 문제 풀다가 막히면 부모를 부르고, 시간이 부족해지면 부모도 마음이 급해진다. 설명만 해주려고 앉았다가 어느새 남은 숙제까지 함께 보고, 다음 날 준비물이 있는지 가방까지 확인하게 된다.이렇게 하루가 마무리되면 부모는 답답하다. 해야 할 일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매번 미루는지, 왜 몇 번씩 말해야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이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학교와 학원을 다녀오고 나면 피곤하고, 집에 와서까지 바로 책상에 앉는 것이 싫다. 잠깐 쉬려고 스마트폰을 들었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기도 한다.그 마음을 모르기는 어렵다. 그런데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데에는 피곤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아이가 늦게 시작해도 결국 숙제는 끝난다. 막히는 문제가 나오면 부모가 와
2026-09-14 13:21살면서 예기치 않은 위기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당황이 아니라 지혜일 것이다.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날이 있다. 그날의 긴박함이 내 기억 속에 아주 강하게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교사 연수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달력과 수첩에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 교육을 하루 앞둔 날이라고 생각하며 차 시간표까지 확인해 놓고 있던 아침,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선생님, 지금 오고 계시는 거죠?” 담당 장학사의 전화였다.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만요.” 전화를 내려놓고 급히 공문을 확인했다. 세상에, 연수일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그날이었다. 달력에 날짜를 잘못 적어 놓은 것이다. 더구나 내 강의는 오후 시간 전체를 맡고 있어 다른 강사와 순서를 바꿀 수도 없었다. 그때부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노트북을 챙기고 머리를 감은 뒤 화장품 몇 가지를 가방에 쓸어 담았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 택시를 잡아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간곡하게 세웠다. 다행히 기사님이 내 절박한…
2026-09-10 16:04내가 사는 광역시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흡연·마약·음주 예방 특강을 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랫동안 학교와 보건 현장에서 쌓아 온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이라 흔쾌히 수락했다. 강의를 준비하기에 앞서 학교 홈페이지부터 둘러보았다. 학생 수는 1000여명, 남녀공학의 큰 학교였다. 화면 속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야 마음이 움직일까?’먼저 제목부터 고민없이 정했다. '뇌는 한번을 기억 한다' “담배 피우면 안 된다”, “마약은 위험하다”, “술은 몸에 나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이미 수없이 들어 온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는 ‘하지 마라’는 금지보다 왜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고 스스로 선택하는 근육을 길러 주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이 지향하는 중요한 목표도 건강수명을 늘리는 것이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질병에 걸리지 않고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그러기 위해 청소년기에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건강 습관 가운데 하나는 우리 몸과 뇌를 해치는 물질을 처음부터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흡연 교육의 방향을
2026-09-09 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