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학교 동창인 친구 M과 나는 그날 서울 역삼동 근처 생맥주집에 있었다. 우리 둘 말고도 몇 명 친구들이 더 있었다. 오랜만에 모여 저녁 함께 먹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맥주 한 잔 나누자고 들어간 자리였다. 유수한 시중은행의 부행장으로 있다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M이 맥주 값은 자기가 내겠노라 선언을 한 터였다. 고향 친구들이 우르르 모이는 자리는 영락없이 시끄럽다. 자기들끼리의 친숙함과 격의 없음을 과시라도 하듯, 화끈한 직설법 농담들이 퍼질러진다. 때로는 형편없이 유치해지기도 해서 막무가내 우기기식의 화법도 등장한다. 이야기 중에 추억담이라도 실리면,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녀석들의 목소리는 높아진다. 이런 자리에서는 진지한 화두를 꺼내어 대화의 격조를 살리기는 어렵다. 그래 보았자 잘난 척하는 꼴로 오해받거나, 공연히 좌중을 썰렁하게 한 죄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밥 굶었던 이야기를 위시로, 누가 더 꽁보리밥을 많이 먹었다는 둥, 교복 기워서 입고 다닌 이야기, 교과서는 으레 헌 책으로 구입했다는 둥, 대학 3학년 때 맥주를 처음 얻어먹고서는 석
2010-02-01 09:001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가 있다. 박찬욱 감독이 2002년에 만든 작품이다. 송강호, 배두나, 신하균 등 개성파 배우들이 출연했던 영화로서, 개봉 당시 상당한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물론 평범한 복수 이야기로 그런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관객들 마음이 상당히 불편할 정도로 복수의 내용과 행위가 악마적이고 끔찍했었다. 특히 복수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끝없이 연장되는 복수의 악연에 질려버릴 것 같은 삶의 모진 인과들에 지치게 된다고나 할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주연 격인 배우 송강호씨도 시나리오를 받고서 출연을 세 번이나 망설였다고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을 극장 간판에서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이게 대단한 복수 이야기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한 선지식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영화 제목에서 느껴지는 언어적 직관 같은 것이었다. 우선 명사구 형태의 이 영화 제목이 주는 독특한 인상에서 복수 의지의 단호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복수는 내가 한다”라고 한다든지, 또는 “그 복수를 나에게 맡겨라” 라고 문장투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독하고 강한 복수 결의가 묻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2009-11-01 09:001 사람들 사는 풍속과 세상 변화가 빠르다 보니, 갑자기 새로 생겨나는 말들이 많다. 신조어 사전을 보면 낯설고 이상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미 사전에 항목으로 등장하기까지에는 그 말이 이미 상당히 널리 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러자면 그 말이 의미하는 어떤 현상이 세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PDA’라는 말이 신조어 사전에 올라 와 있었다. PDA가 뭐냐고 임의로 물어 보았더니, 내 또래들은 모르는 사람이 많아도, 학생들은 쉽사리 개인용 휴대 정보 단말기, 즉 PDA가 ‘Personal Digital Assistant’의 약칭이라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PDA’가 ‘공공영역에서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Public Displaying of Affection’의 약칭이라는 것이다. 사전에 따라서는 ‘Displaying Affection in Public’으로 풀이해 놓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젊은이들이 주변의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성 간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 않은 세태가 되었다. 그 ‘애정표현’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2009-08-01 09:001 한 방송사가 최근 며느리 1000명에게 시어머니에게 하는 흔한 거짓말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어머니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계시다 가세요”가 1위로 꼽혔다고 한다. 설문에서는 며느리의 이 말을 ‘거짓말’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것을 굳이 거짓말로 분류하고 싶지는 않다. 거짓말과는 좀 다른, ‘빈말’이라고 하고 싶다. 말에 별 악의가 없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빈말로 하는 인사를 듣는 시어머니들은 어떠한가. “너,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 말아라. 내가 네 속아지 모를 줄 알고!” 이런 시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이렇게 말하는 시어머니가 있다면, 그런 이야말로 죽다 깨어나도 어른 노릇을 할 수 없다. 시어머니 노릇 하기를 포기한 사람이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빈말의 보살핌에는 역시 빈말의 응대가 자연스럽고 평화롭다. “네가 해 주는 밥 먹고 있으니 날짜 가는 줄 모르겠다. 너무 편하고 좋구나. 마음 같아서는 더 있고 싶지만, 비라도 오면 고추 모종도 옮겨야 하고…. 내려갔다가 다음에 또 오마.” 물론 이 또한 빈말이다. 비 온다는 예보도 없었고, 고추 모종은 꼭 시어머니가 해야 할 일도 아니다. 이런 빈말 응대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빈말이 굳이…
2009-06-01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