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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젊은 선생님들은 수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컨설팅을 의뢰한다. 그리고 새로운 수업 기술을 배우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선생님 수업 기술에 이러이러한 것이 좋다고 일러준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감을 갖는다. 어떤 선생님들은 마음속에 담고 있는 어려움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때도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그냥 한참 들어준다. 그 선생님은 미안해하다가도 응어리가 풀렸다고 고마워한다. 그런데 며칠 전에 나이 지긋한 선생님을 만났다. 경력도 제법 많은 선생님이 컨설팅을 의뢰해서 놀랐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조심스럽게 정보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컨설팅 끝물에 내 손을 붙잡고 애원하듯 질문한다. 수석교사 생활이 궁금하다고 한다. ‘어떻게 힘든 것은 없나요. 저도 수석교사를 하고 싶어서요’ 하면서 속내를 털어놓는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이런 질문을 하는 선생님들을 몇 번 만났다. 대개 이런 선생님들은 본인 신상과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명확한 답을 원한다. ‘편하다, 힘들다’ 둘 중에 하나를 요구한다. 아니 은근히 편한 길이니 들어오라고 권유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나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답을 알 수도 없어 그렇겠지만, 세상일이 두부 자르듯 구분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라지는 것이지,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현 상황을 말하고 싶다. 수석교사제는 교육계에서 1981년부터 30여 년간 간절하게 원하던 제도다. 수업 전문성을 지닌 교사가 우대받는 교직 분위기 조정을 위해 법안이 만들어졌다. 교육부(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현행 1원화된 교원 승진체제를 교수 경로와 행정 관리 경로로 2원화 체제로 개편한 것이라고 홍보했다. 수석교사(master teacher)는 경력 15년 이상의 교사들이 지원하고, 선생님들의 교수·학습 지도 지원을 맡도록 했다. 올해로 도입 3년차다. 그러나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교육 당국의 지원 미비로 지위가 불확실하고 역할이 모호하다. 그러다보니 기존 학교 시스템에서 융화되지 못한 채 부유하는 모양새다. 가슴앓이를 심하게 하는 수석선생님은 학교에서 하루하루가 버겁다고 한다. 교수·학습 지도 지원의 업무 구조가 없으니, 일도 없고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학교의 수직적 구조에 끼어들지 못하니, 하루 종일 침묵 모드로 지낸다. 소통이 단절되니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든다. 가슴은 답답하고, 어디 기댈 데도 없다. 그저 왕따 당하는 느낌이라고 한다. 이런 문제는 수석선생님이 업무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생긴다. 한직에 몰려 있고, 조직에서 존재감이 없다. 당연히 영향력이 줄어들고 급기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이다. 반면에 수석교사로 훌륭한 길을 가는 분도 있다. 높은 식견과 인자한 인품을 지니고 선생님들의 교육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교육적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을 보면 우리 교육계의 발전 동력을 느끼게 한다. 사실 나도 수석교사의 길에 망설이다가 뛰어들었다. 이유는 내가 선생님들을 지원할 수 있는 자격과 역량을 갖추었는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조건이나 환경을 모두 갖추고 시작하는 것은 거의 없다. 목적을 갖고 떠나는 여행보다 정처 없이 떠나는 여행에서 많은 것을 느낄 때가 있듯이, 수석교사라는 길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수석교사로 늘 교직 생활을 성찰하며 가는 긴장감이 행복하다. 마찬가지다. 지금 수석교사가 되고 싶어 하는 선생님들은 혹독한 현실의 들판에 나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고난의 짐을 짊어지려고 해야 한다. 수석교사는 상시 수업 공개 등으로 누군가에게 보이고, 새로운 면류관의 무게도 감당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본능적으로 더 긴장하고 위축된다. 꽃방석인 줄 알았다가 가시방서임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역할은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초라한 조연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내 생각은 다른 구석도 있다. 수석교사제는 현재는 법령의 일부 미비한 시행으로 아픔이 있지만, 우리나라 교육계에 발전의 동력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근대교육 이후 교직 체계의 변화로 미래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핵심 리더 역할이 기대된다. 그렇다면 막중한 사명감과 비전이 함께 해야 한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명성을 얻고 편리함을 보장받기 위한 선택한 것이라면 수석교사의 길을 말린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동료 선생님들과 희망을 만들어가겠다면 기꺼이 선택을 권한다. 새로운 교직 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열정만 있다면 지금 망설임 없이 선택하기를 바란다.
현대는 '생각의 시대'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모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로댕(1840~1917)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 유명한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 수 있었을까. 아마 턱을 괸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아마도 퀭한 눈은 꺼질 줄 모르는 액정을 향하고 다른 한 손은 관성적으로 스크롤을 내리고 있을 터다. 이미 인간의 기억과 계산 능력을 뛰어넘은 기기가 우리 모두의 손에 들려 있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란 칭찬이 더는 미덕이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이같은 시대에 우리의 두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거에도 생각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최근 김용규가 쓴 '생각의 시대'는 ‘생각’에 경쟁력이 있다고 말한다. ‘지식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이제 ‘생각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선언이다. 남과 다른 발상, 고정관념을 뒤집는 독창성, 나열된 지식의 이면을 꿰뚫는 혜안이 필요하다. 사실 여기까진 좀 뻔하다. 이미 정보화 시대에 ‘Think different!’가 경쟁력이란 것은 수 많은 사람들이 떠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생각을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답은 고대 그리스에 있다. 야생의 인간이 생각을 발명한 시기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인류 정신사의 거대한 축이 이동했다고 해서 ‘축의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저자가 이 시기를 지목한 이유는 이 때 발명된 생각의 도구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 책으 주요 내용은 지식과 생각의 탄생 과정을, 그리고 책의 3분의 2에 달하는 3장은 다섯 가지 생각의 도구, 즉 메타포라(은유), 아르케(원리), 로고스(문장), 아리스모스(수), 레토리케(수사)의 개념과 사용법을 상세히 설명했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발상의 전환을 돕는 ‘은유’,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원리’, 정신을 구조화하는 ‘문장’, 만물의 현상을 쉽게 패턴화하는 ‘수’, 설득의 수단인 ‘수사’를 잘 쓸 수 있다면 생각에 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방법도 적었다. 은유와 수사의 응축인 시(詩)를 암송하고, 원리를 탐색하는데 적격인 추리소설을 읽으라고 권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는 것도 일찍부터 생각의 근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니 한번쯤 실행해 볼 일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아직 생각 도구를 쓰기 전인데도 녹슨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철학과 신학, 문학을 오가며 방대한 이야기를 요리조리 꿰는 솜씨가 너무 탁월하기 때문이다. 로댕이 만일 지금 태어나 이 책을 읽었다면 2개의 뇌, 즉 지식 창고인 스마트폰과 생각도구를 장착한 두뇌를 조각하지 않았을까라는 가정을 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 같다. 젊은이들이 어려운 시대에 이 '생각의 시대'를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신세대젊은이들의 잦은 비행과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마음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문명의 발달로 살기가 너무 편리하고 좋아졌는데도 일부 청소년들의 마음과 영혼이 너무 나약하고 사람의 본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학교에서는 집단 따돌림과 인성을 저버린 행동으로 자살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가장 안타깝다. 군에서 병영생활을 하면서도 그대로 연장되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군 생활을 견뎌내지 못하고 우울증까지 겹쳐 자살하거나 총기사고로 국민을 놀라게 하더니 집단구타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건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문제의 원인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첫째,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교육을 소홀히 해 온 것 같다. 유치원에서 글자를 가르치거나 영어를 가르치기보다 자연 속에서 인성을 배우도록 해야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숲속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꽃과 곤충을 관찰하고, 시냇물에서 노니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모래성을 쌓으며 자연을 배우는 교육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위대한 스승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화로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생존경쟁과 황금만능사상을 우선시 하는 어른들의 삶을 그대로 배우고 있다. 친구를 경쟁자로만 여기고 1등만 강요받으며 자랐지 않았는가? 같이 자라는 세대들을 적대시하는 마음이 은연중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컴퓨터, TV,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가 사람사이의 정을 멀게 하고 비인간화로 가는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문명을 잘 이용하며 살아가려면 인간성을 회복하고 사람의 정을 그리워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성현들의 말씀이 담긴 고전을 가르치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은 옛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가느라 옛것을 무시하고 버리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아이들의 마음을 살찌우는 교육에 소홀히 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비슷하다.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간 조상의 지혜가 담겨져 있는 주옥같은 고전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우리조상들의 삶에서 우러나온 사자소학이나 명심보감 같은 문장하나라도 가르치는 정책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심보감의 문구를 가르쳤더니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필자 앞에서 머리 숙여 반성하는 학생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경험이 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해야 인성이 싹트고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주위사람에게 시키지 마라! (己所不欲 勿施於人)만 가르쳤어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성을 간직하지 않았을까?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마음이 황량해져가는 신세대들에게 부족한 마음공부를 시켜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생각이 긍정적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도박꾼과 선거꾼이 지닌 공통점이 있다. 노름꾼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잃어도 자기만은 딸 것이라 믿는다. 이같은 터무니없는 망상에 이끌려 도박판에 계속하여 들어간다. 선거에 중독된 사람들도 밑도 끝도 없이 당선 100% 확신으로 선거판에 뛰어든다. 이번에는 자기 차례라고 확신한다.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통이 따르게 된다. 이 두 부류는 영국 출신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로저 스크루턴이 대표로 꼽는 비양심적인 낙관주의자의 상징이다. 스크루턴은 최근 발간된 '긍정의 오류'를 통하여 지금 세계 경제의 목을 죄고 있는 ‘신용 경색’이야말로 이런 양심에 털 난 낙천주의자들이 꾸민 ‘최상의 시나리오 오류’라고 지적하다. 그러기에 몇 년 후에 우리 나라도 외환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하는 전문가도 있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인간도 살아가는데 문제지만 너무 낙관적인 인간은 더 큰 재앙이라는 것이 스크루턴이 주장하는 요지이다. 특히 입으로는 소통이라면서 마음으로는 불통인 지도자들을 향해 그는 “헛된 희망의 자리에 진정한 희망을, 복수의 자리에 용서를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세월호 사건 이후 갈등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거짓 희망을 유포하는 자들, 자유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 주장하는 도식적 의회주의자들은 염세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한 낙천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눈꼽만큼도 믿어 의심치 않는 오류가 저지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절대 지지 않는다. 그 위험에 대해서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철저한 자기 확신과 무책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물 유형 아닌가. 인간 집단이 저지르고 있는 낙천주의적 오류를 스크루턴은 여섯 가지로 분류하여 잘 정리했다. 첫째,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난다는 주장의 오류, 둘째, 유토피아 오류, 셋째, 제로섬 오류, 넷째, 계획의 오류, 다섯째, 움직이는 정신의 오류, 여섯째, 총합의 오류다. ‘오류’란 단어 앞쪽의 명제들은 대부분 인류 발전의 원동력으로 제시돼 온 것들이지만 파란불을 빨간불로 바꿔놓고 들여다보면 180도 거꾸로 해석할 수 있는 대뇌 속 ‘씽크 홀(Think Hole)’이다. 세상을 너무 쉽게 살아왔다거나, 대체로 건전하고 온건한 방향으로 세계 발전을 내다본 사람이라면 ‘나는 혹시 낙관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 볼 일이다. 지구를 덮어오며 점점 커질 거대 권력, 질병과 고령과 무능력과 죽음 같은 인류의 오랜 적들을 정복할 능력을 키워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에둘러서 조언한다. “약간의 염세주의는 온갖 소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지혜의 목소리 역할을 할 것이다.” 이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제발 적절한 비관의 효용을 숙고하시라고 말하는 쓴 약 같은 책이 바로 '긍정의 오류'이다.
학교에 아이들의 9시 등교를 강행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먼저 수업시간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할 것이다. 현행 교육과정에서의 단위 수업 시간은 학생 발단단계를 고려해 초등학교 40분, 중학교 45분, 고등학교 50분을 기준으로 정했다. 점심시간, 아침활동시간등 파행 필자가 전에 재직하던 학교 수업 운영방식은 8시 40분 등교, 9시에 1교시 시작이다. 20여 분 간 담임교사의 출석 점검, 간단한 아침 훈화 등을 하고 수업에 들어간다. 이는 학생 가정환경, 즉 도시와 농촌, 맞벌이 부모 비율, 교통난 등에 따라 편차가 많기에 확인 차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9시 등교를 한다면 이러한 시간을 포함해 9시 30분 정도 1교시 수업을 들어갈 수밖에 없다. 9시 30분에 1교시를 운영하면 초교는 1 단위 교과 시간 40분, 10분 휴식 3번, 4 교과 시간 운영을 하도록 돼있어 190분을 오전 시간에 사용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점심 식사는 12시 40분이 된다. 중학교의 경우 1 단위 수업시간 45분이니까 오후 1시, 고등학교의 경우 오후 1시 20분에 점심식사를 하게 된다. 학생이 원한다 해서 9시 등교를 해야 한다는 말은 그럴 듯하나, 그 학생들에게 점심시간 여부를 놓고 질문을 다시 던져봐라. 어떤 반응이 나올까? 점심시간 마친 뒤 쉬는 시간 없애도 되겠니? 마지막 수업 시간 늦춰도 되겠니?’ 등에 대해 같은 반응이 나올지 의문이다. 학교는 교과수업 시간이 점심시간 이상으로 충실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점심을 먹이기 위해 수업시간을 조정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교실배식을 하는 학교보다 급식실 배식을 하는 학교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현재는 이른 등교로 무리 없이 급식실 배식이 가능하다. 하지만 9시 등교를 강행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교육과정 단위시간 준수라는 고민과 점심시간 확보라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 학교의 아침시간은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프로그램이 있다. 독서활동, 건강달리기, 자치활동, 교내봉사, 한자공부, 방송영어 등 다양하다. 그런데 학교가 9시 등교를 강행한다면 기초교육과 인성교육이 가능한 이런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9시 등교 강행으로 인해 교과 수업시간을 위한 획일적 학교운영이 될 것은 뻔하다. 학생 수면부족 문제도 못 풀어 9시 등교를 주장하는 사람은 청소년기 수면부족이 정서적인 면과 학습 효율적인 면에서 나쁘다는 연구 이론을 들어서 합리화한다. 10대들의 뇌는 9시간 이상 잠을 자야 학생들이 최상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수면시간과 패턴은 가정환경, 학습 부담, 인터넷과 스마트기기 중독, 운동 습관 등에 따라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아이들의 수면을 방해하는 것은 등교시간이 아니라 부모의 공부 강요, 방과 후 학원 및 과외공부, 스마트폰, 게임 등이 더 큰 이유인 것이다. 진정 학생들에게 공부라는 굴레를 벗겨주려면 사교육에 몰입하는 제도를 바꿔줘야 한다. 주지교과 점수 위주의 줄 세우기 입시 제도를 바꾸면 저절로 해결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학교 스포츠, 예술 활동, 자치활동 등 학교 활동의 성과를 반영하고 교과 수업 시간을 줄여주는 제도적 뒷받침 마련이 훨씬 필요하다.
올해 대입전형이 6일 수시모집을 시작으로 막을 올린다. 60만 명 수험생들은 초등학교 입학 후 12년간의 기나긴 여행 끝에 목적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된다. 서울대 정책방향에 모두가 흔들려 그러나 학생들은 ‘스카이, 서성한이, 중경외시’ 등 전국 200여개 대학 서열부터 생각하게 된다. 대학 서열화는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박혀 갖은 폐단을 낳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지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실제 그동안 고교 현장에서는 3500여 명을 선발하는 서울대의 대입 정책 방향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국 대학교 모집인원의 1% 정도의 서울대가 수능에서 제2외국어 반영과 한국사 필수 등을 이야기 할 때 고교 교육과정은 소수 학생들을 위해 1학년 때 배웠던 교과를 3학년으로 변경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현 대입전형은 일부학생들을 위한 방식이며, 고교 교육현장에서 학생 선택을 제한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3학년도부터 도입된 수시지원 횟수 6회 제한 문제만 봐도 그렇다. 물론 지난 2010학년도 한 수험생이 61회나 지원하는 등의 문제를 경감하고 실질적인 경쟁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부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복수 지원한 학생이 여러 곳 합격한 경우 합격날짜에 따라 이동할 수 있는데, 상대적으로 서열에서 밀리는 학교는 최초 합격자보다 예비 합격자가 더 많이 나오는 일이 생기고 있다. 이 학생들은 시작부터 패배감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 또 현재 일반 고등학교는 비평준화 또는 평준화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비평준화지역 소재 고교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교육과정과 교육환경을 고려해 입학이 가능하지만, 더 많은 수를 차지하는 평준화지역 소재 고교 학생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결정된 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이런 경우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교과가 다양하지 못하고 정해진 일부 교과를 이수할 수밖에 없다. 학교 상황에 따라 교과이외 활동으로 자율활동,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진로활동 등이 매우 차이가 크게 발생하고 있다. 일부 고교의 경우 상위 10% 학생들이 주요활동들을 주도하고 수상 실적에서도 각종 교내 경시대회 수상을 독점하고 있다. 이처럼 고교 교육현장은 여건에 따라 많은 차이가 발생하고 있지만 학생선택은 매우 제한적이고 무시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대입전형과 학교 교육에서 대다수 학생들은 소외되고 일부 상위권 학생들이 교육의 과정과 결과를 독점하는 문제는 하루빨리 해결되야 한다. 대학 서열화가 더욱 강화될수록 학생들은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한 진로 결정보다는 대학의 이름을 보고 진학을 결정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진로진학상담교사 역할에 큰 기대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학교 교육이 정상화 돼서 학생들이 개개인에 적합한 진로를 계획하고 고민할 수 있도록 꿈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데 있다고 사료된다. 다행히 지난 해 전국 중고등학교 5520개교 중 5215개교(95.4%)에 진로진학상담교사가 배치됐다. 각 학교는 진로진학상담교사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그 성과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이제라도 학생들을 교육의 패배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꿈과 끼를 생각하고 자신이 결정하는 미래를 일궈갈 ‘꿈의 디자이너’로 양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 사회과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개념 중에 거래비용이라는 개념이 있다. 통상적으로 거래비용이란 시장에서 재화나 서비스를 거래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일컫는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재화를 생산할 때 발생하는 생산비용에만 초점을 맞추었지만,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재화의 생산 외에 교환 당사자를 찾아 거래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때 발생하는 모든 비용이 바로 거래비용이다. 여기에는 생산자나 소비자가 적당한 거래 당사자를 찾는 데 소요되는 비용, 사고 싶은 적당한 물건을 찾는 데 들어가는 비용, 거래 당사자들이 협상을 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 계약 체결 후 이를 어기지 못하도록 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등이 모두 포함된다. 우리가 거래비용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거래비용이 높은 나라는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도 부쩍 많이 사용되고 있다. 사회적 자본이란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신뢰는 궁극적으로 한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거래비용을 낮춰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이렇듯 한 나라의 발전에 있어서 거래비용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래비용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왜일까? 생산비용과 달리 거래비용은 측정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래를 하는 한 거래비용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거래비용이 높게 되면 한 사회의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잦은 정책변화와 복잡한 제도, 사회적 비효율 초래해 거래비용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를 둘러싸고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정책은 거래비용을 발생시킨다. 정부가 만든 새로운 정책에 대처하기 위해 사람들이 유형·무형으로 지불해야 하는 모든 비용이 거래비용인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고려하는 비용은 실제 사업을 추진하는 데 소요되는 예산일 뿐, 사회 구성원들이 지불해야 되는 다양한 형태의 거래비용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해서, 정책 입안자들의 시각에서는 거래비용이 ‘0’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상당한 비효율이 발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의 입시제도이다. 정부가 입시제도를 바꾸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용역비, 회의비, 정책홍보비, 관련 인건비 등 그리 높지 않다. 그렇지만 한번 입시제도가 바뀌게 되면 여기에 적응하기 위해서 학부모와 학생들은 엄청난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이는 정책변화가 야기하는 거래비용이다. 제도 변화가 잦으면 잦을수록 거래비용은 올라가게 된다. 따라서 정책을 변경시킬 필연적인 이유가 없는 한, 정책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거래비용을 ‘0’로 가정하면 정책변화가 낳는 효과만 눈에 보이기 때문에 잦은 정책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실제 거래비용이 엄청난 규모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제도가 복잡해도 거래비용은 올라간다. 입시제도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사회가 지불하는 거래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입시전형에 대한 정보획득비용, 각각의 전형에 대비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 등의 규모는 엄청나다. 이는 공교육 예산과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사교육 비용 외에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정책의 입안과정에서 이러한 거래비용이 거의 ‘0’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입장에서도 거래비용을 신경 쓸 이유가 없으므로 갖가지 이유로 입시제도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입시제도는 단순할수록 좋다. 교육 불평등 심화시키는 거래비용[PART VIEW] 복잡한 입시제도가 야기하는 높은 거래비용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보획득비용을 포함한 거래비용 지불 능력이 계층 간 매우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복잡한 입시제도는 거래비용을 통해서 계층 간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입시제도를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입시제도만 거래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교육개혁 정책은 거래비용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거래비용은 정부가 지불하는 비용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는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정부가 너무 많은 교육개혁을 시도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거래비용이 높아질수록 그 나라의 사회경제 발전은 뒤쳐질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교육정책을 만드는 데 거래비용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길 바란다. 프로필 _ 하연섭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와 정책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교육부총리 정책보좌관, 연세대학교 국제처장을 역임한 바 있다. 재무행정, 제도분석, 비교정책, 교육정책이 주요 관심 분야이며, 저서로 제도분석: 이론과 재정, 재정학의 이해등이 있다.
첫째 “언제 밥이나 한번 합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 말을 한두 번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말을 하는 쪽에서는 이 말의 친화적 효능을 상당히 믿는 눈치이다. 그러니까 이 인사법이 이처럼 널리 만연되어 있는 것 아닐까. 그런데 듣는 쪽에서는 이 말에 대한 신뢰가 그다지 높지는 않다. 그저 말로만 던져 보는 립 서비스(lip service) 정도의 관심일 뿐, 실제로 밥을 먹자고 연락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처럼 맥 빠지는 거짓말이 없다고 한다. 이를테면 ‘빈말 인사’라는 것이다. 서로가 그렇게 되지 않을 줄 다 알면서 주고받는 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유독 한국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얼마 전 어떤 영어 신문의 칼럼 (editorial)에서 보았는데, 미국인들도 친밀해지려는 의도를 이런 표현으로 한다고 한다. “Let’s have lunch someday” 하고 당장이라도 같이 밥 먹을 듯 말해도, 그 someday는 언제일지 모르는 someday일 뿐이라는 것이다. “We’ll have to do lunch someday”라고 말하면 제법 강한 의지가 표명된 것 같지만, 이 경우도 실제로 함께 밥을 먹게 되는 장면에 이르게 되는 것을 크게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친화적 매력을 주는 인사말로 다가오는 것은 ‘밥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특별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 한번 봅시다”라고 하거나 “언제 한번 연락합시다”라고 하는 것에 비해서 ‘언제 한번 밥을 먹자’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서로 공유하게 되는 일, 즉 ‘밥을 같이 먹는다’는 일이 암시하는 ‘상대와의 진한 일체감’, ‘상대에 대한 강력한 대화지향의 태도’가 각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제 밥이나 한번 합시다”라는 인사말대로 실제 식사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런 장면을 상정해 보면 이 말의 친화적 효과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이 잘 지켜지지 않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 이 인사말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상대가 믿음을 주는지 안 주는지 살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내 진정성만 강조하여 ‘언제 밥이나 한번 하자’는 인사를 오늘도 남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빈말로서도 일정한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인사말을 버리지 않고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요컨대 ‘밥’이 소통이나 대화에 어떤 활성 효과를 불어넣는 힘은 크고 중요하다. 그런 뜻에서 밥의 힘을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 둘째 인문학적 물음으로 바꾸어 보자. ‘밥’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밥을 먹어야 산다. 우리들의 생물학적 삶을 담보하는 ‘밥’의 가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아니, 그 이상의 가치로 밥은 하나의 이데아를 이룬다. 밥은 소중하다. 배가 고플 때는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소중하고, 배가 부를 때에 밥에 관해서 명상을 해 보아도, 밥은 나의 욕구와 상관없이 소중하다. 이런 인식은 인간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아이들이 먹을 것(밥) 가지고서 장난치면, 철이 나지 않았다고, 철딱서니 없는 짓이라고 야단을 쳤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을 웃긴답시고 출연자로 하여금 밥에 얼굴을 처박게 하거나, 밥으로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오면 어르신들은 혀를 찬다. 그뿐인가. 밥은 먹거리 그 이상의 가치, 영양 효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그래서 이렇게 믿었다. 밥을 남겨서 버리게 하면 죽어서 아귀가 있는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밥은 어쩔 수 없이 사회성을 띠기도 한다. 보릿고개 허기 기운으로 가물가물하던 그 가난하던 시절에 “밥 먹었니?”, “밥 먹었느냐?”, “진지 드셨습니까?” 하고 오로지 밥으로만 인사나 안부를 묻던 관습이 바로 그러하다. 밥 먹고 사는 일이 쉽지 않던 때의 인사말이다. 지금도 경상도 사투리로 “니, 밥 묵었나?” 하고 말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밥 안부를 인사로 앞세우던 그 배경에는 밥 못 먹은 사람에 대한 밥 대접을(비록 한 덩어리의 찬밥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사회적 실천 덕목으로 여기던 우리네 가치관이 스며있는 것이다. 이처럼 밥은 사회적 나눔의 의미를 강렬하게 표상하는 것이었다. 움치고 뛰어도 우리는 밥의 영토를 벗어날 수 없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밥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비루하게 여기는 것은 허영심의 일종이다. 밥은 삶의 굴레이기도 하지만, 밥이야말로 삶의 실존을 담보하는 매우 거룩한 조건이다. 누가 밥을 무시하랴. 그럴듯한 위엄도, 명예로운 의식(儀式)도, 강렬한 이념의 실천도, 그 어떤 거룩한 전쟁(聖戰)도, 그것을 막아내는 지혜로운 외교도, 아주 고상한 교육도, ‘밥’으로 지켜지는 삶이 있고서야 가능하다. 이렇게 밥의 총체성을 좀 너그럽고 따뜻하게 이해하려고 든다면, 즉 우리들 삶과 밥의 상관성을 좀 더 다채롭게 연결하고 이해하면서, 삶과 밥 사이를 상호 통섭의 생각으로 다가가면, 먹기 위해서 사느냐, 살기 위해서 먹느냐 하는 이분법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전자 안에 후자가 들어 있고, 후자 안에 전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의 결정적 경지란 무엇일까. 밥으로 소통을 삼고, 밥으로 감사를 느끼고, 밥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경지이어야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라도 밥을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셋째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선생님은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갓 스무 살의 총각 선생님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가난한 시골 농촌학교였는데,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마음에 품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진학률이 30% 정도 되었을까. 선생님은 가끔 저녁 무렵에 어린 제자들을 당신의 하숙집으로 불러서 저녁상을 차리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책도 읽어 주고, 역사 이야기도 해주고, 수학공부도 가르쳐 주며, 우리의 공부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이 여의치 않던 우리에게 실력을 길러 어떻게 해서든 중학교를 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나는 공부도 공부지만 선생님과 함께 밥상에 앉아서 먹은 저녁 밥맛이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선생님은 하숙집 주인에게 별도의 부탁을 하여 어린 제자들의 밥상을 차리게 했을 것이다. 그 해 늦가을 선생님이 군대에 가던 날, 우리들 모두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런 이별 경험은 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PART VIEW] 대학시절 은사이던 K 교수님은 당신의 ‘문학’ 강의가 종강되는 날, 대학생 제자들을 학교 앞 음식점으로 불러서 밥 한 끼를 사주셨다. 우리는 큰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화답을 드리며 그 밥을 먹었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 놓인 밥이란 무엇인가. 그 밥을 매개로 사제가 서로 자유로운 인격으로 친화하여 무언가를 나누게 하는 것이다. 훗날 제자들의 마음에 흘러갈 풍경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때 우리가 느꼈던 선생님에 대한 그 친숙함이란 얼마나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었는지,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그날 선생님과 나눈 대화의 자유로움은 우리들의 자존을 저만큼 고양시켰다. 나도 선생 된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선배 교수 중에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노모에게 드릴 용돈과 제자들에게 밥 사줄 돈은 내 벌이에서 미리 떼어 놓아야 한다. 내가 아껴 쓰고 남으면 그때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될 것 같지만, 이 두 가지 일은 그렇게 해서는 좀체 이뤄지기 어렵다.” 얼마나 아름다운 실천의 지혜가 담긴 말인지. 제자에게 대접한 한 그릇의 밥은 나중에 열 그릇도 넘게 나에게 돌아온다. 제자에게 열 그릇의 밥을 되돌려 대접받았다는 뜻이 아님은 누구나 이해하리라. 제자를 위해 베푸는 밥 한 그릇, 그것이 스승과 제자의 일생을 아름다운 소통으로 묶어 주는 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노년의 스승과 장년의 제자가, 가르치고 배웠던 세월을 까마득히 뛰어넘어, 밥상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풍경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인생 전체로 보면, 이렇게 세월을 더해가며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제자는 오로지 스승의 복이다. 그 복을 감사히 여기는 스승은 제자에겐들 복이 아니 될 수 없다. 전통사회에서와는 다른 현대사회에서의 바람직한 사제 모델을 이렇게 만들어 갈 수는 없을까. 밥의 힘은 이래저래 위대하다.
“대학 구조개혁 필요하지요. 하지만 방법이 문젭니다. 교육부가 획일적인 잣대로 대학을 평가한다면 대학의 자율성은 오히려 더 위축될 것입니다. 대학 유형별로 특성을 살린 다양한 형태의 평가가 이뤄질 때 대학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 201개 4년제 대학의 실질적 대의기구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이원근 사무총장은 새교육과 가진 인터뷰에서 “현재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학구조개혁 추진 방안은 대학 정원을 줄이는 데는 성공할지 몰라도 대학의 자율성을 죽이고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교육부가 마련한 대학구조개혁안은 전국의 모든 대학을 5등급으로 나눠 최우수 등급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의 정원을 감축하는 게 골자다. 이를 통해 2013학년도까지 입학정원 16만 명을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학생 수 감소로 정원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대학들로서는 사활을 건 레이스가 시작된 셈이다. 획일적 대학평가, 대학교육 경쟁력 오히려 약화시켜 “대학구조개혁을 통해 대학교육을 특성화해보자는 이야기인데, 좋다 이겁니다. 그러면 국립대와 사립대, 연구중심 대학과 교육중심 대학 등 특성별로 평가를 해야지요. 그래야 신뢰성도 높이고 평가의 효과성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사무총장은 “교육부가 무소불위의 획일적 평가 잣대를 모든 대학에 들이대는 바람에 대학총장들은 지금 단두대에 서 있는 심정”이라며 “한줄 세우기 평가 방식은 대학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 출발점은 학생 수 감소에서 시작됐다. 여기에 부실대학 퇴출 문제가 겹치면서 강화됐다. 2016년부터 고교 졸업생이 대학 입학정원보다 적은 ‘역전 현상’이 발생하는데다 연구비 횡령과 회계부정 및 부실 경영 등 일부 대학들의 방만한 운영을 바로잡기 위해 메스를 댄 것이다. 지방대학 지원확대… 교수들 연구여건 개선 서둘러야 “지금 대학들은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어요. 스스로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채찍보다 대학을 믿고 지원해 주는 투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대학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잖아요.” 교육부가 인위적인 칼질을 하기보다는 대학들이 제대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과감한 정책적 결단이 아쉽다는 것이다. 이 사무총장은 또 대학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방대학에 대한 파격적 지원과 교수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대학들이 세계 유수의 명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방대학의 힘입니다. 규슈대학이나 북해도대학 등은 세계 300대 대학에 들어갈 만큼 국제적 경쟁력을 갖고 있죠. 일본에서 수도권 집중 현상이 발생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지방대학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정부의 관심과 배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낡은 실험 실습실 개선 등 교수들이 마음 놓고 연구할 수 있는 여건 마련”을 강조했다. 논문표절 등 연구윤리 논란 안타까워… 실태조사 나설 것 김명수 교육부장관 후보자 낙마를 계기로 다시 불거진 논문표절 등 대학사회의 도덕성 논란에 대해 대교협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 사무총장은 “교수들의 연구윤리에 대해 각 학문 분야별로 자세한 실태 조사를 벌인 뒤 대책을 강구해볼 계획”이라며 조심스런 입장을 밝혔다. 지난 2007년 황우석 사태 이후 본격적으로 불붙은 논문표절 등 연구윤리 부분은 대학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학계에서는 엄격하게 심사하자는 강경론과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온건론이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실정이다. “젊은 교수들일수록 강경합니다. 면죄부를 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일각에서는 너무 가혹하다는 주장도 합니다. 이들은 황우석 사태 이전과 이후로 나눠 일종의 경과규정을 두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무총장은 “연구 활동을 많이 한 교수들은 혹시 표절에 걸릴까봐 노심초사하고 논문 몇 편 안 쓴 분들은 오히려 큰소리치는 묘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대학가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진보 교육감들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서울대 폐지론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도 “서울대만 가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잘못된 인식은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를 없애자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서울대 독식주의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 폐지論’ 반대지만 서울대 독식구조 개편은 필요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서울대 입학자격을 수능시험 1등급 또는 2등급 이상으로 정해놓고 응시한 학생들을 추첨으로 선발하는 방안은 어떨까 싶어요. 말 그대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니까 서울대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학생이라면 그들 모두에게 기회를 주자는 거죠. 물론 운이 좋으면 합격하고 나쁘면 떨어지는 복불복이지만 이 같은 추첨입학제는 우수한 학생만 뽑자는 ‘선발경쟁’에서 잘 가르치자는 ‘교육경쟁’으로 대학교육이 달라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사무총장은 또 박근혜 정부 입시정책에 대해서는 “대입전형 간소화와 입학원서 일원화 등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정책들을 곧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교협은 대입 전형료 완화와 수험생들의 부담 감소를 위해 대입공통원서접수시스템을 구축, 2016학년도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그는 “수험생들의 전형료 부담은 물론 편의성을 도모한 생활밀착형 정책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조희연 서울교육감 취임 후 가장 ‘핫’한 일을 꼽으라면 자율형 사립고(자사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25개 자사고 중 14개가 올해 5년째를 맞아 평가를 받고, 평가 결과가 미흡한 자사고는 퇴출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조 교육감이 취임하기 전 이미 자사고에 대한 평가(1차 평가)가 거의 끝났다는 것이었다. 조 교육감이 “자사고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면서 예정에도 없던 평가(2차 평가)를 추진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자사고들의 반발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 교육감이 후보 시절 “자사고가 일반고를 황폐화하고 있다”면서 자사고를 폐지할 뜻을 이미 밝힌 터라 이들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조 교육감이 “올해 일반고로 전환 신청을 하는 자사고에는 5년에 걸쳐 학교당 10억~14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당근책은 먹혀들지 않았다. 정책의 정당성을 제대로 확보하기도 전에 꺼낸 설익은 당근을 덥석 무는 자사고는 없었다. 결국 전국자사고교장연합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조 교육감을 비롯한 진보 교육감은 자사고 말살 정책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기에 이르렀다. 자사고 학부모들이 “우리 애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며 거리로 나섰고, 일은 점점 ‘핫’해졌다. 진보와 보수 언론이 각자 목소리를 냈다. 교육계는 패로 나뉘어 ‘자사고를 없애야 한다’, ‘자사고를 없애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조 교육감이 여기에 ‘3차 평가’와 ‘선발권 폐지’ 카드를 꺼내면서 자사고 논란은 더 커졌다. 문용린 교육감 시절 했던 1차 평가에서는 자사고가 모두 통과했는데, 조 교육감이 온 뒤 실시한 2차 평가에서는 모두 탈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3차 평가를 해서 공정하게 평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어설픈 민낯 드러낸 ‘자사고 폐지’ 정책 자사고들이 이를 곧이들을 리가 없다. 활활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자사고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1차 평가는 3개월에 걸쳐 이뤄졌지만 조 교육감이 온 뒤 실시한 2차 평가는 달랑 한 페이지짜리 허술한 설문으로만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3차 평가는 전체 탈락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하는 요식행위여서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성난 자사고 학부모들이 시 교육청을 찾아 조 교육감과 마주 앉아 격정 토로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며 조 교육감의 ‘헛발질’이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학부모들이 “왜 우리 아이들이 피해를 봐야 하느냐”고 했지만 조 교육감은 변변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선거에 이겨 입성(入城)한 진보 교육감의 갈지자 행보에 그동안 조 교육감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진보 언론들도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한 진보 언론사 기자는 “솔직히 조 교육감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무 서두르다가 체했다”고도 했다. 한 달 동안 시교육청 출입기자로서 조 교육감의 자사고 행보를 지켜본 바, 가장 큰 문제를 꼽으라면 ‘이론’의 부재를 들고 싶다. 자사고의 정당함과 부당함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정책 추진 이유가 제대로 설득력을 얻지 못했으며, 자사고에 대한 평가를 왜 하는지 이유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자사고가 일반고를 황폐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근거가 명확했어야 했다. 2차 평가는 이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지만, 주변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몇 개를 설문한 결과는 ‘자사고는 나쁜 놈’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되지 못했다. 자사고에 왜 5년 동안 10억~14억을 지원해야 하는지도 명쾌한 설명이 없었다. 자사고와 대화를 한 뒤 타협점을 찾아야 했는데 일방적으로 지원책을 마련했다. 선발권 폐지 카드라는 강공책은 더 문제였다. 조 교육감이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뽑는 근거”라고 했지만, 면접으로 학생을 뽑는 이 선발방식은 올해부터 진행될 예정이었다.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던 면접에 따른 선발권을 “나쁘다”고 몰아붙였으니 먹힐 리가 없다. 정책추진은 이념을 버리고 냉정하고 철저하게 [PART VIEW] ‘이론’이 없다 보니 결국 ‘이념’이 두드러졌다. 자사고의 해악을 철저하게 따지고 문용린 시절의 1차 평가가 얼마나 허술하게 진행됐는지 제대로 따졌어야 했다. 자사고에 지원금을 주는 이유는 1원 단위까지 철저하게 계산이 돼야 했다. 자사고 재학생과 학부모들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아니어도, 고개를 저을만한 정책을 내놔선 안 됐다. 조 교육감은 학부모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개혁에는 피해자가 따른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피해자들이 “왜 우리가 손해를 입어야 하느냐”고 따지면 할 말이 없게 된다. “개혁에는 피해자가 따르지만, 이런 지원을 할 테니 양해해달라”는 태도가 옳다. 이론과 이념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이론이다. 이념이 다분히 감성에 호소한다면 이론은 이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진보 세력(혹은 중도 세력을 포함해서)을 업고 당선됐다 하더라도 이론을 저버리면 결국 진보 세력도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조 교육감이 이렇게 일을 추진한 까닭은 아마 너무나 촉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강경책을 선택했다’는 것은 7조에 달하는 교육예산을 쥔 교육감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철저하고 냉정하게, 이념을 버리고 이론에 따라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게 바로 교육감의 기본 덕목이다. 이미 일이 커져 버린 자사고 평가 뒤에 내년에는 특목고와 국제중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이와 관련한 입법안이 7월 말 예고됐다. 서울시교육청은 연말부터 지표를 만들고 내년에 평가에 돌입한다. 진보 세력을 업고 당선된 조 교육감의 행정가로서의 실력을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프로필 김기중_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부(학사), 카이스트 대학원(석사)에서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래창조과학부, 교육부, 서울시교육청 출입기자로 서울일보에 재직 중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학교교육과 관련하여 가장 큰 도전은 저출산으로 인한 학생 수 급감이다. 세계 최저 합계출산률로 연간 신생아 수는 40만 명대로 떨어졌고, 이 추세대로라면 2060년에는 약 20만 명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읍·면지역, 농·산·어촌 지역의 출생아 수는 아주 적어 지역 생활 및 교육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심각하다. 최근에는 도시에서도 도심 공동화 및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인해 소규모학교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소규모학교가 생기는 근본 원인은 출생아 수 급감에 있으나, 인구 유출과 전출생 증가, 관할 경계지역 학생들의 학교선택권 제한, 학구 설정의 경직성, 민선 교육감들의 인사 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소규모학교 유지 정책, 지역주민과 동창회의 학교 통폐합 반대, 학제와 교원양성 운용제의 불일치 등 인위적인 요소도 적지 않다. 2013년 우리나라 초·중·고 학교 수는 11,408개인데, 전교생 60명 이하 초등학교는 1,200개교, 100명 이하 중등학교는 700개가 넘는다. 지난해 전국 6,203개 초등학교 가운데 입학생이 1명도 없는 학교는 121곳이었다. 초등학생 1인당 연간교육비를 비교해보면 서울의 경우 508.2만 원인데 반해 소규모학교가 많은 전라남도의 경우에는 874.2만 원이다. 학생 수가 적을수록 학교시설 유지비, 교원 인건비 등의 지출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소규모학교 정책, 근본적 인식 전환과 대책 마련 필요 각 학교 급의 20% 정도는 학교를 꾸려가기에 규모가 너무 작다. 소집단 협동수업이 중요한 교과수업은 학급당 학생 수가 결정적이고, 대집단 협동학습이 중요한 교과외 활동(단체행사활동, 예체능활동, 체험활동 등)은 학년당·학교당 학생 수가 적정 규모가 되어야 제대로 이루어진다. 특히 의무교육 시기에 해당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공통필수 교육과정을 적용받는 시기로, 이들 기초기본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학교의 시설과 설비가 완비되어야 하고, 교사 수급이 원활해야 하며, 교육과정 운영이 충실해야 한다. 기초기본교육은 누구나 차별 없이 균등하게 교육 복지적으로 책임 운영되어야 한다. 도서지역은 학생이 한 명만 있더라도 교사를 파견해 이를 뒷받침해야 하지만, 육지로 연결된 학교는 근본적으로 소규모학교가 없어야 한다. 특히 진학과 직업 등 진로별 교육을 하는 고교는 학생들의 장거리 통학이나 기숙사 운영이 가능하므로 소규모학교 자체가 생기지 않도록 학생 수용과 적절한 학습기회 제공에 유념해야할 것이다. 소규모학교에 대한 정부정책은 1982년 이후 상당기간 동안 학생 수 감소, 분교장 격하, 재정지원과 통폐합을 통한 적정규모 학교 육성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됐지만, 최근 들어 정부는 연중돌봄학교, 전원학교, 기숙형고교, 통합운영학교 등 교육 복지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소규모학교 살리기 운동이나 작은 학교 희망 찾기, 혁신학교 지정 등으로 극히 일부 학교는 활력을 되찾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소규모학교 정책에 대한 정부와 교육계의 보다 근본적인 인식 전환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소규모학교의 대안, 마을학교와 기본학교 취학 전 3년과 초·중학교 9년의 교육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일관교육을 지향하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6-3-3제의 학제, 6-6제의 교사 양성 운용제, 9-3제의 의무교육제 등 기본교육제도 간 불일치 상황을 끝내야 한다. 어느 나라가 국가의 기본교육제도를 이렇게 서로 어긋나게 운영하도록 방치하면서 교육이 잘 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소규모학교가 힘든 것은 이런 기본교육제도 자체가 잘못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의무교육, 무상교육을 확장하면서 진작 바꾸었어야 할 불합리한 제도가 지속되고 있다. 결국 소규모학교를 개선하려면 기본적으로 학제 등 학생수용정책을 바꾸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초중, 중고, 초중고, 유초중고 등의 통합운영학교는 학생의 발달단계나 교육과정의 계열상 상당히 어긋난 정책이다. 가령 초중통합은 학생발달상, 중고통합은 교육과정상 잘못된 이종결합이다. 급성장기에 어린이와 사춘기 학생을 한 울타리에 두는 것이 잘못이고, 공통필수 교육과정기와 진로별 상이선택 교육과정기를 한 울타리 내에서 해결하려는 것은 교육적으로 매우 무모하다. 결국 소규모학교 문제는 육지로 연결된 학교들에서 취학 전 3년과 초중학교 9년, 총 12년에 걸쳐 학생들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현행 초등학교 6년제가 아니라, 취학 전 3년의 누리과정을 공교육화하면서 초등 저학년 3년과 합쳐서 6년제 ‘마을학교’를 새로이 도입 육성해야 한다. 마을학교는 멀리 통학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다니는 6년제 작은 학교, 기초학교를 말한다. 부모가 취학을 늦춘 어린이들에게는 4~5년제 학교가 될 수도 있다. 이런 학교는 30명이어도 괜찮다. 학교가 수용하는 어린이들의 발달단계도 유사하다. 교육과정도 활동 중심, 미분화 통합 중심, 교과학습보다 돌봄 중심이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규모를 보면 이해할 수 있듯이, 어느 누구도 마을학교를 소규모학교니까 폐지하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부 아이들을 위해서 마을간 통학용 미니버스를 교육청에서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런 작은 마을학교가 3~4개 모여서 조금 먼 거리를 통학할 수 있는 초등 고학년 3년과 중학교 3년을 수용하는 6년제 기본학교(basic school)를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읍지역이나 중소도시의 일부를 포함하는 생활권으로 큰 학구를 잘 규정하면 일정 규모를 항상 유지할 수 있다. 기본학교는 마을학교와 달리 학년단위, 학교단위 단체 활동이 늘어나므로 규모가 더 중요해진다. 9학년 기본학교 졸업까지는 생활인, 교양인, 상식인 육성에 집중해 공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자유학기제 같은 취지의 교육과정의 획기적 개선도 필요하다.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올 마을학교[PART VIEW] 취학 전 3년과 초등 3년의 6년제 작은 마을학교, 초등 고학년 3년과 중학 3년의 6년제 적정 규모 기본학교가 수립되면, 정부의 소규모학교의 정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를 위해 중학교까지 학생들은 시·도간, 시·군 구간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로 취학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도 필요하다. 경계지역 거주 학부모와 학생들에게는 학교선택권을 부여하여 최근거리 취학이 가능하도록 해야 소규모학교도 줄어든다. 이런 학교제도의 도입은 교육공동체의 분열을 낳고 있는 소규모학교 통폐합정책을 개선하고, 취학전 교육을 교육복지 차원에서 공교육화하여 그 질을 개선하며, 국가의 기본교육제도간 불합치 상황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마을학교 개념 도입은 산업사회 대규모 공장식 대량 획일 생산모델인 프러시안 학교체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프러시안 학교체제는 클수록 효율이 높다고 보지만, 마을학교는 그렇지 않다. 마을학교는 학생 수도 적지만 교실, 각종 시설과 설비, 운동장, 체육관 등이 작고 아기자기해도 된다. 이를 위한 새로운 학교건축모델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정부는 어린이집, 유치원 등을 민간에 맡기지 말고 교육복지 차원에서 취학 전 3년의 공교육화를 서둘러 마을학교로 흡수해야 한다. 취학전 교육의 공교육화는 계층 간 교육출발점 격차를 줄이는 데 첫걸음이 된다. 마을학교에서 아이들은 가까운 집에서 부모님의 돌봄을 받고 자연생태친화적 체험을 할 수 있으며, 또래들과 평화롭게 어울리며 생애 첫 공동체를 왕따 없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학교에서는 아이들의 활동성, 운동성을 존중하고 자연 속의 직접경험을 통해 오감을 발달시키도록 복지형 교육과정의 혁신이 요청된다. ‘넘나들이형’ 교사양성제도로의 전환 절실 무엇보다 제도적으로 교사양성제도를 일관교육이 가능하도록 넘나들이형으로 바꾸어야 한다. 취학 전과 초등 저학년, 초등 고학년과 중학교를 넘나들면서 가르치는 두 가지의 6년제 교사자격증제를 신설 도입해야 학교급 간·학년 간 연결이 원활하게 된다. 교원대나 이화여대 등에서는 이런 자격증제를 당장 도입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런 교사들은 농산어촌 소규모학교 운영에 단비가 될 것이다. 마을학교는 교장공모제, 교사초빙제 등을 활용하여 뜻있는 교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감, 교장을 모두 배치할 필요 없이 수석교사, 교감, 교장 중 한 사람이 학교를 책임지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이런 학교는 지역주민들의 자치학교로 뜻있는 교사들이 오래 머물도록 하고, 오직 학생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각종 공문 작성 등 잡무에서 교사들이 자유롭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마을학교나 그 다음 단계인 기본학교가 성공적인 학교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학교구성원의 자구적 노력에 더해 정부나 지자체는 전원학교, 온종일돌봄학교, 공동체학교, 혁신학교 등에 추가적인 행·재정적 지원, 인적?물적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소규모학교 문제를 새로이 꾸리는 거점형·복지형 마을학교로 접근할 때 이 문제는 해결 가능성이 보인다.
나는 작은 농촌학교에 근무한다. 2012년 3월, 폐교 위기에 처해있던 학교였는데 불과 2년 사이에 학생 수가 34명에서 78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아이가 친구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여 전학을 시켜야 될지 고민했었는데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학교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학부모들은 감사해한다. 지역사회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지난 해 폭력 없는 학교로 선정되었다. 학생들이 몰려오는 이유 중 하나이다. 교사가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며 가능한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학교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 진심어린 상담을 통해 신뢰를 쌓고, 생활지도와 인성교육을 지속적으로 함께 해나가다 보면, 학부모와의 관계도 두터워지고 학생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학교에서의 교사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책임감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교사는 학생들과 눈을 맞추며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학생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 한다. 화장실 갈 틈도 없는 소규모학교 교사의 열악한 현실 일반적으로 소규모학교는 학생 수가 적어서 교사들이 시간 여유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소규모학교라고 해서 일이 종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서 개별 교사에게 주어지는 평균 업무량은 학교의 규모에 반비례해 많아진다. 업무량이 방대한 방과후학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대규모학교에서는 돌봄교실, 강사 관리 등 영역을 나눠서 여러 교사가 업무를 분담한다. 그러나 전체 교사 수가 적은 소규모학교에서는 방과후학교 업무 외에 다른 업무들이 더 추가된다. 대규모학교 교사 5~6명이 담당할 일을 소규모학교에서는 한 명의 교사가 맡아서 처리하다보니 언제나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다. 아침에 출근하여 업무포털에 접속하면 결재 대기, 공람 공문이 나를 기다린다. 학생들이 통학버스에서 내릴 시간, 운동장으로 마중을 나가면 바람처럼 달려와 품에 와락 안기는 아이들을 보며 ‘쉬는 시간에 함께 놀아줘야지’ 다짐해보지만 산재한 일들이 허락하지 않는다. 일기장, 과제물을 꼼꼼히 읽어보고 칭찬과 격려의 댓글을 달아주는 일만 하는데도 쉬는 시간 10분이 쏜살같이 가버린다.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마음에 수업에 몰입하고 나면, 4교시가 끝난 후엔 온 몸에 힘이 다 빠지는 듯하다. 점심시간이면 편식이 심한 학생들 급식 지도하느라 밥맛도 제대로 못 느끼고 급하게 먹을 때가 많다. 방과 후 학급업무를 비롯한 각종 업무와 공문처리를 하느라 퇴근시각을 지켜본 날이 거의 없다. 교사가 학생에게 몰입할 수 있어야 학교가 산다 [PART VIEW] 이것이 소규모학교 교사의 현실이다. 학부모들은 공문서 작성과 각종 업무처리에 온갖 에너지를 다 써버려, 정작 중요한 수업의 질은 저하되고 있는 소규모학교의 교육환경을 알고 있을까? 만약 알게 된다면 자녀를 소규모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다. 교사들은 업무에 대한 부담 때문에 소규모학교에 부임하게 될까 두려워한다. 나 역시 50학급의 대규모학교에 근무할 때는 업무가 적어서 수업과 생활지도에 몰입할 수 있었고, 방과 후에도 학력이 낮은 학생들의 학습지도와 상담으로 뜻 깊은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작은 학교에 근무하니 화장실에 갈 여유도 없을 만큼 분주한 일상이 계속되어 학생들과 마음을 나눌 겨를이 없다. 교사가 학생에게 몰입할 수 있고, 수업준비에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 교육환경이 조성되어야 학생이 살고 학교가 산다. 소규모학교일수록 교사의 업무가 경감되어야 학생들의 학력향상과 생활지도, 인성교육에 전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선 학교에 연차적으로 배치될 계획인 교무행정사는 대규모학교가 아니라 소규모학교부터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교사들이 잡무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수업과 생활지도에 몰입할 수 있다면,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많은 학교교육 관련 문제는 쉬이 해결될 것이다. 아이들이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머무르는 교실을 둥지처럼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끼면서 행복해한다면,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학부모 역시 아무 걱정 없이 아이를 선생님께 맡긴 채,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다면 통학시간이 다소 길고 불편하더라도 그 학교에 보내고 싶을 것이다. 야생화와 수목, 초록잔디로 어우러진 농?산?어촌 작은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며 행복물결에 가슴 출렁이는 해맑은 동심을 그려본다. 교정 여기저기에 움트는 사랑의 싹이 소규모학교를 살리는 숨이 되고, 노래가 되어 방황하는 학생들의 영혼을 안식케 하는 둥지로 자리매김하길 빌어본다.
그라우어 스쿨 교장이자 소규모학교연맹(Small School Coalition)의 설립자인 스튜어트 그라우어 박사는 그의 고향 캘리포니아 엔씨니타스 (Encinitas, CA)에서 ‘지역의 전설’로 통한다. 1991년 그라우어 스쿨을 세운 그는 소규모학교 운동을 전개해 디스커버리 채널, 뉴욕타임즈 등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소규모학교 분야의 권위자로서 그라우어 박사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작은 학교의 장점을 알리고자 자문에 응하고 강연에 나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소규모학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까지 대규모학교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연구가 전무하며 매년 10억 달러에 달하는 정부예산이 대규모학교 연구에 투입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소규모학교 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 계기다. 파벌 없는 부족사회처럼 그라우어 박사는 소규모학교가 ‘진정한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는 4년여에 걸친 연구로 150명에서 최대 230명 정도의 그룹에 속했을 때 사람들이 더욱 연대감을 느낀다는 것을 밝혀냈다. 7개 학교에서의 교직생활과 소규모학교연맹 회장으로서 수년 간 학교 설립 인가를 내주는 작업을 통해 그는 소규모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부족과 같습니다. 파벌 없이 다 함께 어울리죠.” 그라우어 박사는 학교의 규모가 작으면 학생들의 학습의욕과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진정한 공동체로서 소규모학교의 장점은 단연 ‘안전’과 ‘유대감의 정서’다. ‘낮은 위협’과 ‘강한 신뢰’는 학생과 교사에게 강력한 동기요인이며 이는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높인다는 것이다. “소규모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는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들은 관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서로에게 헌신하죠. 소규모학교 학생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의욕이 넘칩니다.” 소규모학교 통폐합, 사회적 비용 고려해야 운영비와 인건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소규모학교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 교육당국의 방침에 대해 그라우어 박사는 “학교 통폐합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높은 중도탈락률, 우울증, 자살, 폭력문제 등 사회적 비용을 고려한다면 학교 통폐합은 국가예산을 절감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규모학교는 정부의 기대와 달리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재학생의 수가 1,200명을 초과하는 대규모학교는 재학생 수가 300명이 안 되는 작은 학교에 비해 △ 폭력범죄 825% △ 반달리즘 270% △ 절도 378% △ 물리적 싸움이나 공격 394% △ 강도 3,200% △ 총기사고가 1,000% 더 많이 일어난다. U.S. Department of Education, 1999 소규모학교를 효과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라우어 박사는 ‘테마가 있는 학교’를 제안한다. 그는 “효율적인 소규모학교는 테마가 있다”며 “소규모학교가 각각 첨단기술, 예술, 스포츠, 직업교육 등 특색있는 교육 커리큘럼을 제공한다면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규모학교들은 저마다 특별해야 하며 지역사회와 연계되어야 한다. 관계가 모든 것이다 그라우어 스쿨은 대학진학률이 89%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은 대학에서 평균 30만 달러 이상의 성적우수장학금을 받는다. 그라우어 박사는 놀라운 학업성취도 달성 비결로 ‘관계’를 꼽았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그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인다는 것이다. 교사 1인당 평균 7명의 학생을 담당하는 그라우어 스쿨은 멘토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그라우어 스쿨은 다양한 교수법을 도입해 학생들의 내적 동기를 유발한다.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여행을 떠나거나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통해 심도 있는 토론 문화를 형성했다. 과학시간에 실험 결과가 잘 나오지 않으면 모범답안을 참고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대조군 실험에 새로 돌입한다. “그라우어 스쿨의 학생들은 공부하는 이유가 대학에 있지 않습니다. 배움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에 있어 선택지를 주고,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라우어 박사는 “소규모학교는 학생의 시험 성적 뿐 아니라 학생과의 협력 여부도 교사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규모학교 교사의 높은 업무강도에 대한 우려에 대해 그는 “사람들은 진정한 차이를 만들고 있다고 느낄 때 힘든 일도 무리 없이 해낸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질을 제고한다”고 강조했다. 그라우어 스쿨 교사들은 각각 3개 교과를 담당해 업무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임교사 35명 중 수년간 학교를 그만둔 사람은 없었다. 그라우어 스쿨은 아웃사이드 매거진에서 미국 전역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100대 일하기 좋은 직장’에서 10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라우어 박사는 마지막으로 “대규모학교에서도 소규모학교의 장점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대규모학교 학생을 200명이나 300명씩 나누면 된다. 각각의 그룹에 특별한 테마와 졸업요건을 부여하라. 학교 건물이 3층짜리라면 각 층을 ‘학교 안의 학교’로 만들라. 대규모 학습공동체의 일부분에 불과할지라도 작은 학습공동체는 더 안전하고 유대감이 충만하며 혁신적이고 행복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매동초의 2014년 현재 전체 학생 수는 263명이다. 총 14학급(특수학급 1학급 포함)당 평균 학생 수는 18.7명이다. 학교알리미에 공시된 전국 초등학교 평균 학급당 학생 수 22.8명에 비해 아주 적은 숫자다. 또한 1학년(3학급)을 제외한 전 학년은 두 학급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 교직원 수도 45명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학교에 비해 상당히 작은 규모로 운영되고 있다. “학급당 학생 수가 적은 것은 굉장한 장점입니다. 교사 수가 적은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교사의 마인드가 바뀌면 오히려 더 가족처럼 뭉치기 쉽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이를 잘 살릴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김휘경 교장은 소규모학교가 갖는 장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전했다. 모두가 가족 같은 지역·학부모·학교 공동체 매동초는 소규모학교의 장점을 살리되 어려운 부분은 외부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그 중에서도 특수학급 학생들을 포함한 전교생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여하는 국악동아리 활동은 매동초의 자랑으로 꼽힌다. 1·2학년은 택견이나 소고를, 3~6학년은 가야금, 판소리 등 국악 관련 8개 종목 중 희망하는 분야를 정해 한 해 총 20시간 동안 배운다. 갈고 닦은 실력은 가을 발표회 때 학부모와 외부손님을 초청해 선보인다. 작년에는 문화예술교육 영역 우수학교로 선정돼 교육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국악동아리 운영에는 종로구청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종로구 문화교육지원사업에 채택돼 꾸려나갈 수 있었다. 교사 수가 적은 탓에 외부의 지원 없이는 프로그램 운영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매동초에서는 학부모 공동체의 역할도 크게 두드러진다. 다른 학교에 비해 ‘아버지회’의 활약이 크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매년 근로자의 날에 학교 뒤 인왕산에서 개최되는 ‘매동 산행대회’에서 아버지들은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진다. 매동초 아이들이 1년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인 ‘매동캠프’ 또한 아버지들이 주축이 돼 이끌어 온 프로그램이다. 학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1박 2일 동안 캠핑을 하는데, 세부 프로그램 중 ‘담력훈련’ 때는 아버지들이 직접 귀신 분장을 하고 교실에 숨어 아이들을 맞이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도 몹시 즐거워하는 행사다. 어머니들 또한 학교가 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예절교육을 담당하는 명예교사로 활동 중이다. 매동초는 2012년에 인성교육의 일환으로 예절실을 설치했다. 어머니들은 전통예절 교육기관인 예지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아이들에게 직접 한복 입는 법, 절하는 법, 차 대접하는 법 등의 예절을 가르친다. 첫 해에 6시간 운영하던 것을 반응이 좋아 현재는 10시간으로 늘렸다. 어머니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전통예절 교재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열성을 기울이고 있다. 학부모들의 참여도가 높은 이유는 학생 수가 적은 만큼 모두가 ‘내 아이’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는 덕분이다. 그 결과 ‘2013년 학부모 학교 참여 우수학교 교육감 표창’도 받았다. 엄마들의 입소문 타고 도심 속 소규모학교로 자리매김 김 교장은 프로그램 운영에 지역사회, 학부모 공동체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결국 교사들의 노력이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외부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것은 교사들입니다. 학생들을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하죠.” 지역, 학부모, 학교 모두 아이들에게 내실 있는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역시 소규모학교만의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국적으로 초등학교 입학생 수가 줄어드는 추세다. 게다가 매동초 근처 지역 재개발로 인해 학생 수가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매동초의 학생 수는 작년에 비해 16명이 늘었다. 매동초의 노력이 엄마들의 ‘입소문’을 탄 결과다. 매동초는 공립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 사이에서 “사립학교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성이 높다. 그만큼 교육의 질이 높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모든 일의 목적으로 두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여름방학 동안에는 특별프로그램으로 영어, 과학, 체육 교과 무료강좌를 하루 두 시간씩 운영했다. 강사비는 종로구청 지원을 받았다. 기존에 운영하던 수익자 부담의 방과후학교 프로그램까지 포함하면 방학 동안에도 하루 4시간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또한 매동초에서는 방학식, 개학식에도 급식을 제공한다. 소수일지라도 학교에서 밥을 주지 않으면 굶을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위해서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매동초에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같은 소규모학교라고 해도 개별 학교가 처한 상황은 다 다릅니다. 도시와 농촌의 환경이 다르고 학교마다 지역·계층적 특성과 문화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를 면밀히 고려해야 합니다. 단순히 타학교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해서는 효과가 없어요. 각각의 여건을 최대한 활용해서 적합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효과적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김 교장의 소규모학교 운영 철학이자 매동초가 작지만 내실 있는 학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진보 교육감 등장과 함께 교원 인사정책도 커다란 변화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코드인사는 물론 기존의 관행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파격이 예상되고 있다. 실제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은 취임하자마자 교육청 인사라인을 예고 없이 전격 교체하는 ‘결단’을 보였다. 인사 혁신을 통해 조직의 판을 새롭게 짜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다. 취임하자마자 인사장학관, 총무과장 등 인사팀 줄줄이 교체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7월 총무과장과 인사팀장을 교체한 데 이어 초·중등 인사담당 장학관마저 갈아치웠다. 이들은 인사발령이 나는 당일 아침 교체 통보를 받았을 만큼 철저히 배제됐다. 경기도교육청도 도교육청 총무과장을 산하기관 사이버안전센터장으로, 교원인사과장은 양평교육지원청 장학관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서울과 경기교육청의 이 같은 움직임은 과감한 체질 개선을 통해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교육 가치를 실현한다는 전략에 따른 것이다. 우선 서울시교육청의 인사 정책은 장학관(사)과 연구관(사)등 교육전문직 체제 개편에 방점을 두고 있다. 최근 공개된 조희연 교육감 인수위 백서에 따르면 평교사를 장학관에 임용하고 전문직 시험에 합격하지 않아도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인정되면 한시적으로 장학(연구)사에 임용할 수 있도록 했다. 주로 혁신학교와 학생인권, 학교 밖 청소년 업무 등에 한시 장학사를 배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초등은 교장자격증이 없어도 교감을 장학관에 임용하는 길을 텄다. 초등교원인사관리원칙을 변경, 교감도 장학관에 임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초등 교감의 장학관 임용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평교사의 장학관 임용에 대해서도 현행법에서 허용하고 있는 만큼 문제 될 게 없다”고 덧붙였다. 평교사 출신 장학관 임용 등 교육전문직 조직 전면 개편 추진 전문직 임용 시험 방식도 평교사들의 진출이 용이하도록 변경될 전망이다. 1차 전형에 사용되고 있는 교직실무 서술형 평가를 폐지하고 대신 교육에 대한 비전과 교육철학을 파악하는 실질적 논술과 구술면접, 집단토론 등을 강화하기로 했다. 특히 전문직 임용 때 현장 실태조사를 중시, 전전임교 소속 교원까지 최대 다수를 대상으로 실시하며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동료 교원들의 의견과 여론을 비중 있게 반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교장 승진방식도 대폭 개편된다. 서열보다는 능력에 중점을 둔다는 이유로 승진 대상자 3배수 내에서 교장을 임용하기로 했다. 이 방안은 신설학교와 소규모학교, 특별지원대상학교(하위 10% 정도), 혁신학교들을 대상으로 하게 된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제한적으로 교장 임용대상자 폭을 3배수로 확대하는 것은 법적인 무리가 없다”고 밝혔다. 교감 근무성적 평정에 학교 교직원 전원의 평가 결과를 반영토록 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외에 교장 자격연수 대상자를 축소하고 교감 연수 과정에 인성, 업무수행 능력 등을 실제로 평가하는 과정을 마련하기로 했다. 초등 교감 평정 때 청소년단체 활동 가산점은 폐지가 추진된다. 현장 무시한 인사정책 남발… 교총, ‘무소불위 전횡 말라’ 경고 경기도교육청은 이재정 교육감 취임에 맞춰 ‘초중등 교육전문직원 교원 전직 내신서 제출’이라는 공문을 대상자 131명 전체에게 보내 한차례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교육정책 추진 및 컨설팅 장학업무의 효율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교육청 주변에서는 특정인들을 장학 및 연구의 핵심 보직에 앉히기 위한 수순으로 판단하고 있다. 도교육청이 이처럼 교장을 지낸 장학관 및 연구관급 간부 모두에게 교장 전직희망서를 내라고 한 것은 교육청 개청 이래 처음 있는 일. 경기교육계에서는 교육감이 친정체제 구축을 위해 인사권을 남용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교총 등 보수교육계는 일부 교육감들이 보여준 인사 행태에 강한 유감의 뜻을 밝히는 등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안양옥 교총회장은 지난 8월 7일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을 만난 자리에서 “이 교육감 취임 이후 제기된 파격적 승진제도 때문에 교장 등 일선 교원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서 “평교사가 갑자기 교장이 되는 것은 학교현장에 주는 부담이 크다”면서 “지금은 교장들이 자율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족쇄부터 풀어주는 것이 급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동석 교총 대변인은 “안정성과 전문성을 담보해야 할 전문직에 대한 무분별한 인사 조치는 결국 직선교육감에게 충성과 눈치보기를 강요하는 행위”라며 “무소불위의 인사 전횡이 계속될 경우 법적 검토를 통해 강력히 대응해 나가겠다”고 경고했다.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상임대표 안양옥)이 교총회관에서 창립 2주년 기념식 및 세미나를 개최한 지난 7월 24일은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희생자를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엄숙한 분위기로 치러진 기념식에서 안양옥 상임대표는 “세월호 참사는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고 정신적 가치를 가벼이 여긴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며 “인성이 진정한 실력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전했다. 기념식장에 모인 참석자들은 ‘인성교육 실천을 위한 인실련 단체의 다짐’을 함께 낭독하며 인성교육이 우리 사회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실천의지를 되새겼다. 이어진 세미나의 핵심은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과 문화를 토대로 한 ‘한국적’ 인성 정립의 방안 모색이었다. ‘인성과 문화의 공공성’을 주제로 발표에 나선 정원섭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학생들이 스스로 목적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며,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사회적 협력을 통해 공공의 과제에 참여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협력의 문화, 즉 문화의 공공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동현 한국기초교양연구원 원장은 ‘인성교육, 인문진흥의 목적이자 문화융성의 지반’ 주제발표에서 “융합, 통섭의 가치에 주목하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이 도덕적 자질을 충분히 갖춰 공동체를 영속할 수 있을 때 문화융성을 이룰 수 있다”며 덕성 함양을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선 강용철 경희여자중학교 교사는 ‘가족 자서전 쓰기’, ‘화날 때 7초세기’ 등 인성교육의 구체적 실천 방법을 제시하며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숨을 돌리고 정서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세미나는 인성교육에 대한 현장 전문가들의 풍부한 경험과 제언을 나누며 한참을 이어졌다. 본지는 정원섭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과 손동현 한국기초교양연구원 원장의 주제발표를 요약해 싣는다. (박지윤 기자) 인성교육의 길, 인문학에서 찾는다 곧 사멸될 것 같았던 인문학이 언제 위기였냐는 듯 ‘열풍’이 불고 있다. 언어· 문학· 역사· 철학, 즉 문사철(文史哲)로 불리는 인문학은 우리 삶의 본질이며, 사람이 참된 삶을 살기 위한 철학이다. 자기개발서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알려준다면 인문학은 자기성찰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 주고 동시에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지혜를 준다. 우리가 인성교육을 생각하며 인문학을 떠올리는 이유이다. 글 _ 정원섭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요사이 ‘인성(人性)’이란 말이 유난히 회자된다. 인성이란 글자 그대로 풀어보자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이것은 동서고금의 참으로 난해한 철학적 과제였으며 또한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수 없을지 모르는 인류의 숙제다. 동서고금의 많은 현자들은 인간의 가장 근본이 되는 특성을 ‘슬기로움’에서 찾았다. ‘슬기’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성은 다시 두 가지 유형, 수단적 이성과 목적적 이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인간의 근본적 특성, ‘슬기로움’ 수단적 이성이란 어떤 주어진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가령 서울에서 목포를 간다고 치자. 우리는 열차, 자가용, 비행기, 버스 등 교통편 중 소요 시간이나 비용 등을 고려하여 어떤 결정을 할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문제 해결 능력이다. 그런데 이런 수단적 합리성은 그 목적 자체가 정당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수단적 이성이 그 자체로 방치될 경우 위선이나 이기심, 심지어는 범죄를 정당화하는데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률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편법 행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불법 행위마저도 뻔뻔스럽게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법과 도덕을 준수하는 척 하는 위선적 교지(狡智)가 탁월한 경우처럼 말이다. 따라서 인성교육을 위해서는 목적 자체의 정당성을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합목적적 이성이 긴요한 것이다. 합목적적 이성이란 현재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자체가 타당한가에 대해 검토하는 능력을 말한다. 다르게 말한다면 이것은 목적 설정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목포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교통편으로 목포를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왜 목포에 가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 자체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이성이다. 이처럼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자 하는 능력이 인간을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즉,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과 다른 점은 주어진 문제를 그대로 수용한 채 그 해결 방법을 재빨리 찾아내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목적 자체를 근본적으로 검토하여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는 자율적 행위 능력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목적을 정하는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만일 목적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될까? 따라서 인성교육이란 스스로 좋은 목적을 추구하도록 함으로써 ‘좋은 사람’으로 교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義)와 화이부동(和而不同), 인성교육의 최우선 과제 인간은 또한 사회적 존재이다. 성악설을 주장하며 ‘예’를 중심으로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교적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순자의 글을 인용해보자. 사람의 힘은 소만 못하고 달리기는 말만 못한데, 그런데도 소와 말은 사람의 부림을 당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은 사회를 형성할 수 있지만(郡), 저들은 사회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분(分,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분(分)이 가능한가? 바로 의(義)가 있기 때문이다.(『荀子』,「王制」편) 사람만이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언명에서 보듯 동서고금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이렇게 사회를 형성하고 서로 협력함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인문 활동, 곧 문화를 형성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바로 분(分),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을 선천적 능력에 따라서 크게 ‘생산을 하는 사람들,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 등 셋으로 나누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구분은 ‘평등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거북하다. 하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해보자. 사회란 서로 다른 인간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남성 혹은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자녀를 낳을 수 없기에 더 이상 지속할 수조차 없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협력할 때 생존이 가능하며 이런 협력이 왕성해질 때 비로소 문화가 융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 인성교육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점이라는 것을 웅변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은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일 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 자체를 번영하도록 하는 지름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융합 활동들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 고등학교 교육현장의 경우 문과와 이과 간의 구분 자체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전공별로 세분화된 대학의 경우 융합적 교육이 가능하도록 교양교육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융합, 즉 이질성의 포용을 아무 원칙 없이 시도할 경우 사회는 발전이 아니라 무질서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순자의 말씀을 인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의(義)에 근거할 때 좋은 사회와 좋은 문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만일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리하여 사회적 부조리가 만연하면 할수록 불의에 대한 유혹 앞에서 우리의 인성은 왜곡당하고 질식당하고 말 것이다. 문화의 공공성과 의(義) ‘인문(人文)’이란 ‘인류의 문화’를 뜻한다는 점에서 ‘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문이라는 표현은 인간성(humanity)이나 문명(civilization) 뿐만 아니라 문화(culture)까지 모두 포괄한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Culture)’의 어원이다. Culture는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때문에 인문은 자연에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때로는 개인적으로, 때로는 공동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요즈음 눈을 조금만 돌려 보면 ‘인문’ 혹은 ‘인문학’이라는 말이 온통 범람하고 있다. 흔히 인문학이라고 하면 문(文)·사(史)·철(哲), 즉 문학, 역사, 철학을 말한다. 그러나 동양에서 문사철(文史哲)은 학문 활동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으로서 인간의 다양한 활동 및 그 결과를 총체적으로 일컫는다. 그렇다면 인문, 즉 문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순자의 말씀처럼 정의(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의의 핵심은 공공성이다. 공(公)과 사(私)의 구별은 동서고금의 오랜 역사 속에서 고민되어 온 주제이다. 서양의 경우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한 후 이를 매우 배타적으로 대립시켜 왔다. 이들은 사적 영역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공적 영역을 왜소화시켰으며, 개인주의를 사회 구성의 중요한 전제로 수용하면서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사적 이해관계를 훼손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고대 희랍인들의 ‘자유’는 근대인들의 ‘소극적 자유’, 즉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간섭받지 않는 자유와는 전혀 다르다. 고대인들에게 자유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스스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폴리스라는 공동체가 사라질 경우 노예로 전락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 희랍에서는 공동체 전체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 과정에는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두고 천치(天痴)라고 하였으며, 소피스트들은 정치 과정, 즉 아테네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원칙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체로 외국인들이었기 때문에 아테네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는 순간 생명 자체를 부지할 수 없기에 아테네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협력 통한 문화적 공공성 신장 [자세한 내용은 월간새교육에 있습니다.] '있어야 할 가치' 성찰하는 '지성교육' 강화를… 동서를 막론하고 아주 고전적인 교육이념인 인성교육을 왜 새삼스럽게 다시 논의하자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류가 새롭게 맞이한 시·공간적 경계가 허물어진 ‘디지털 문명 시대’에서 이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인간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도덕성’ 뿐이라는 절실함 때문일 것이다. 글 _ 손동현 한국교양기초교육원 원장 인간은 자연적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자연적 삶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생존조차 할 수 없는 특이한 자연적 존재다. 이 점이 인간 존재의 이중성이요, 인간적 ‘딜레마’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정 인간의 인간다움은 바로 이 ‘자연성 극복’에 있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곧 문화요 문명이다. 따라서 문화적·문명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인간다움’이란 단순한 ‘사실로서의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이를 극복함으로써 실현해야 할 ‘가치로서의 인간 이상’이다. 우리가 ‘인성교육’을 논할 때 ‘인성(人性)’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 이상으로서의 인간다움, 즉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다. 따라서 인성교육이란 자라나는 세대로 하여금 각자의 개인적-공동체적 삶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골고루 길러주는 교육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인성교육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동서를 막론하고 아주 고전적인 교육이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새삼스럽게 인성교육에 대한 논의를 되풀이하자는 것일까? 정보시대의 문화사회적 상황 인류는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문명의 전환을 맞고 있으며, 이 전환의 진원(震源)은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은 ‘지능 강화의 정보기술(IT)’과 ‘감각의 확장인 커뮤니케이션기술(CT)’을 ‘정보통신기술(ICT)’이라는 하나의 기술로 융합한 데에 그 위력이 있다. 이러한 융합된 디지털 기술의 혁혁한 성과는 이른바 ‘유비쿼터스 커뮤니케이션(Ubiquitous Communication)’의 실현과 가상현실(Virtual Realty)의 출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 기술융합이 가져온 전대미문의 혁명적 성과는 사유와 지각의 융합 및 호환(互換)을 비생명적 물리적 공간 속에서 실현시키고 있으며, 인간의 의사소통 또는 정보교환 활동에서 자연세계의 시·공간적 제약을 최소화시키거나 무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혁명적 요인이 인간 문명생활에 가져다 준 근본적 변화는 무엇일까? 첫째, 디지털 기술은 사유 대상을 감각 대상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선형적(線形的)’ 사유를 위한 긴장(緊張)을 피하고 ‘모자이크적’ 지각의 이완(弛緩)을 즐기게 한다. (마셜 맥루언(김성기/이한우 역), 미디어의 이해, 민음사 2002 참조) 그 결과 논리적 합리적 사고를 기피하고 감각적 지각을 선호하는 문화생활이 널리 확산되었다. 둘째,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는 디지털 기술은 거리(距離)의 소멸과 시간의 증발을 가져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욕구충족 과정의 순차성과 단계성을 뛰어 넘어 동시적·총체적 욕구충족을 기대하고 추구하게 만들었다. 기술의 융·복합과 이에 기초한 산업의 융·복합 현상은 이러한 욕구 및 욕구충족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취해진 현상이다. 셋째, 디지털 기술은 공동체의 삶을 ‘유목화’시킨다. 사회조직은 거대하고 강고한 고정적 피라미드형 체계에서 작고 유연한 유동적 네트워크로 변화했다. 사회조직의 성격 역시 폐쇄적 독자성은 와해되었고 개방적 관계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사회적 활동 영역의 경계가 흐려지는 사회 조직의 ‘탈중심화’, ‘탈영토화’가 진행되었다. 동시에 개인 간의 인격적 관계는 피상화되고 공동체적 유대도 약화된다. 개인의 고립화 현상이 심화되고 계층도 다원화, 분산화된다. 이것이 곧 삶의 ‘유목화’ 현상이다. (쥘르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역), 『앙티 외디푸스』, 민음사 2000 참조) 이 유목화 현상이 가장 넓은 영역에서, 최대 규모로 전개된 것이 곧 ‘세계화’다. 이러한 문화·사회적 상황에서는 ‘문맥이 없는’, ‘기원(起源)이 소실(消失)된’, 파편화된 정보들이 범람하여 우리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성도 결핍되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추구하는 정서적 요구도 피상적인 감각적 쾌락의 추구에 자리를 내주기 쉽다. 또한 높은 층위에 자리 잡고 있는 숭고한 가치를 의욕(意慾)하고 이를 달성하려는 실천의지도 약화되고 만다. 인성교육에 대한 새삼스런 요구 오늘 한국에서 진지한 교육종사자들이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상이 아닐까? 우리가 새삼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이유는 문명의 전환기적 상황이 우리에게 그것을 긴절(緊切)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초·중·고 각 학교 급별로 수준과 차원은 다르겠지만, 그 기본 오리엔테이션은 다 함께 바뀌어야 한다. 첫째, 통찰력을 길러줘야 한다. 정보사회에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요문제는 대체로 여러 지식분야에 걸쳐 있는 복합적인 문제다. 이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이 없으면 부분에 관한 전문지식도 무력해지기 쉽다. 따라서 문제연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통찰력은 세분화된 여러 가지 자료를 하나의 틀 안에서 종합하는 능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융복합 교육이 절실해진 배경이 이것이다. 둘째, 다양한 양식의 정서교육이 복원되어야 한다. 심미적 감수성도 길러줘야 하고, 사랑의 숭고함도 각성케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인 것을 합리적 사유와 양립시키고 함께 수용할 수 있는 인격의 폭을 넓혀주는 교육이 복원되어야 한다. 즉 이성과 감성을 배타적으로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양자를 함께 수용하여 넘나드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셋째, ‘유목화’되는 공동체를 견뎌낼 만한 도덕적 힘을 길러줘야 한다. 디지털 기술은 시공간적 제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제도적·물리적 제약을 통해 시행됐던 도덕적 통제를 일거에 무력화시켰다. 이제 도덕성은 더더욱 각 주체의 내면적 자율성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동체적 삶’이라는 인간 삶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소멸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아와 타아를 연결시키는 도덕성의 토대는 ‘공동체 해체’ 더 나아가 ‘인간성 와해’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인성교육은 지성과 정서와 덕성 함양이 골고루 이뤄져야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가장 절실한 것은 역시 덕성 함양일 것이다. 인성교육의 필요조건, 도덕적 토대를 갖는 공동체 정신 함양 지식 전달에 역점을 두어왔던 학교교육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자세한 내용은 월간새교육에 있습니다.]
또 교육과정이 개정되고 있다. 이번엔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개정작업이 추진 중이다. 개정을 지켜보면서 무언가 시원한 느낌은 없다. 개정 방향이 그리 잘못되지도 않았고, 내용도 그리 나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무언가 개운치 않다. 문·이과 통합형 개정의 배경과 필요성은 이해할 수 있다. 과목의 내용과 학습량을 감축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 개운하지 않은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새로운 일에 착수할 때에는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비전을 제시하기에 앞서 철저한 자기반성과 주변 환경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교육과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이전 교육과정이 얼마나 정착되어 가고 있는지’, ‘이전 교육과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등 이전 교육과정에 대한 반성이 충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후 개정 교육과정이 ‘학생에게 어려움을 주지는 않는가’, ‘학교가 받을 충격은 생각해 보았는가’, ‘선생님에 대한 배려는 있었는가’ 더 고민해야 한다. 교육의 주체를 배제한 채 여론몰이를 통해 몰아세우지는 않았는지, 소수의 사람에 의해 개정작업이 추진되지는 않는지에 대한 경계도 필요하다.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개정 방향의 문제 현재의 교육과정이 완성된 교육과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급하게 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를 하면서도 의도하는 성과를 가져올 쉬운 방법은 있다. 대학입시제도의 변화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교육과정개정은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개정되어야 한다. 2009 개정 교육과정은 철저하게 대학입시에 밀린 교육과정으로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정부는 한 술 더 떠서 사교육 없는 학교의 전폭적 지원, EBS 중심의 교육 등으로 학교교육과정의 입시 종속화를 부채질하기도 하였다. 이런 면에서 교육과정개정은 대학입시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져야 바로 잡힌다는 것은 학교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족한 부분은 시간을 두고 준비하면 된다. 교육과정이 개정되거나 새로운 정책이 나올 때마다 학교현장에서는 다음 정권에서 또 바뀔 것인데 그리 신경 쓸 필요 있냐는 말을 하곤 한다. 현 정권은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교육과정을 개정하지만 다음 정권은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작업에 착수하고, 착수하기 무섭게 발표를 한다. 스스로 얼마가지 않을 것을 알기 에 하루라도 빨리 교육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서두르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그리고 통합이나 융합이 꼭 유·초·중등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도 있어야 한다. 교육과정의 개정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의 대부분은 대학교수이고 이분들은 늘 유·초·중등교육의 변화만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가장 손대기 쉽고 말을 잘 듣는 유·초·중등의 교육과정만 수시로 개정하고 있는 것은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세계적인 대학평가에서 우리의 대학은 힘을 쓰지 못하고 순위가 뒤쳐지는지, 대학졸업 후 기업에서 신입사원 교육에 왜 6000만 원이라는 돈을 투자해야 하는지 (한국경영자총협회조사/우리나라기업355기업/2013년 신입사원교육 및 훈련) 반성해야 한다. 이는 중등교육의 문제라기보다는 대학교육에도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개정 전개상의 문제 2015 개정 교육과정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듯 보이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PART VIEW]첫째, 교육과정개정연구위원회를 중심으로 개정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기간이 촉박하여 충분한 토의가 진행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2009 개정 교육과정에도 참여했던 분이 이번 개정작업에도 관여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뒤집는 발표를 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물론 잘못이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할 수도 있지만 개정될 때마다 자신이 개입하여 만든 교육과정을 아무런 자기반성 없이 수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개정안의 내용을 공청회에서조차 떳떳하게 공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개정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미 짜놓은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목소리 큰 몇 사람의 주장에 이끌려가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둘째, 총론과 각론의 연구팀이 연구 결과나 입장을 상호공유하면서 연구를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나, 짧은 기간에 충분한 상호공유가 이루어졌을지 미지수이며 어찌보면 이미 제시된 안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셋째, 개정과 관련하여 다양한 요구조사와 의견수렴을 진행할 계획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2009 개정 교육과정 공청회 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요식행위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포럼도 얼마나 반영이 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든다. 왜냐하면 말하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정작 들을 사람들은 자리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과 교육과정에서의 내용·학습량 감축의 상관관계 학습량의 적정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교육과정개정 연구팀의 연구방향 중점사항에서도 나와 있듯이 공통교육과정과 선택교육과정을 어느 선에서 적정화할 것인가이다. 이 문제는 충분한 기간을 두고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충분히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되 각 과목별 이기주의가 자리 잡지 않도록 하는 방안은 꼭 필요하다. 자신의 교과가 개정되는 교육과정이나 대학입시에서 축소되기를 바라는 선생님은 없을 뿐 아니라 개정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관련학회나 교수의 의견이 반영되다보면 결국 또 더하기방향으로 진행되기 쉽기 때문이다. 나누고 분화시키는 것은 쉬워도 합치고 없애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관건은 대학입시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의 선행에 있다. 과목 이기주의를 벗어나 이과 학생을 위한 통합사회와 문과 학생들을 위한 통합과학을 개발하고 새로운 자격연수를 받은 사람이 가르치도록 하는 방안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격연수과정을 개설할 때 교육과정 준비에 만전을 기했으면 한다. 이전 공통사회와 공통과학의 부전공 연수와 같이 필요 없는 연수과정이라는 현장교사들의 지적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학생 스스로 탐구하고 문제를 풀어가는 활동 중심의 교육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를 지도할 수 있는 역량 또한 시간을 두고 갖추어가야 한다. 일부지역에서는 학생 중심의 학습이 정착되어가고 있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아직은 부족하다고 볼 때, 이에 대한 연수도 고려되어야 하며 교육부 차원이 아닌 교사차원에서 이를 수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이를 정착시킬 수 있는 환경조성도 필요하다.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에는 좀 더 충분한 검토를 한 후 모든 교과 내용을 현재 수준보다 상당 부분 줄이는 작업이 선행되었으면 한다. 충분한 연구와 준비를 한 후 국·영·수 중심의 현행교육과정도 새롭게 정리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범교과학습도 예외는 아니어서 7차 교육과정개정 이후에는 개정될 때마다 내용이 보태져 지금은 무려 39개의 학습주제를 가지고 있다. 범교과학습이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반드시 일정시수를 확보하라는 공문이 시행되고 있어 학교의 자율적인 교육과정 운영에 심각한 어려움을 주고 있기도 하다. 체육과 관련한 시수를 맞추기 위해 중학교에서 창의적체험활동 중 동아리활동이 유명무실해졌다는 사실은 대표적 왜곡사례이기도하다. 통합융합교육과정을 무리하게 중등교육에 적용하려고 하는 무모함은 다시 한 번 고려해야 한다. 융합교육과정은 학교의 자율에 맡겨 필요한 경우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좀 더 심화된 융합교육이 이루어지는 것도 바람직하다. 중등교육에서는 창의적인 사고와 바람직한 인성을 기르는 기초기본교육이 충실히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학교의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일부 교과나 창의적체험활동에서 다루어 졌으면 한다. 대학은 중등교육이 잘못되어 문제가 있다고 하고 기업은 고등교육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전반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보아야하지 않을까. 늘 문제가 있을 때마다 만만한 유·초·중등교육만 손을 대는 일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일선 학교에서 수학학습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다. 학생들은 수학공부에 대한 심적 부담과 스트레스를, 부모들은 자녀의 수학점수에 대한 걱정을 토로한다. 수학교사들은 학생들의 사고력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다고 우려하며 수학교육 관련학자들은 학생들의 수학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가 세계 꼴찌라고 한탄한다. ‘수학포기자(수포자)’가 양산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현재의 수학과 교육과정에 있다. 현재 적용되는 2009 개정교육과정에서 수학 교육과정은 학문적 측면의 완결성을 충분히 구비했다고 볼 수 있지만 학생 개인에 대한 적합성과 시대·사회적인 요구를 반영하는 데에는 미흡한 측면이 많다. 단적인 예로 아이들은 수학을 왜 배우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성인들은 인생에서 중고교 시절에 배웠던 수학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수학점수가 당락을 좌우하는 대학입시도 ‘수포자’ 양산에 한 몫 한다. 선택교육과정은 수능시험 범위 때문에 수학에서는 모두 필수과목이 됐다. 대학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수학과목 전체를 이수해야 하고 그 결과를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다. 한술 더 떠 대학은 논술고사라는 명목으로 고교과정을 벗어난 대학수학 전공과목 내용을 출제해 상위권 진학 학생들에게는 대학수학 과목까지 공부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수학수업의 파행은 모든 일선 학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고3 인문계 교실의 경우 80% 이상이 수학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수학교사가 혼자 수업하고 대다수 아이들은 먼 산 불구경하는 형국이다. 이는 교육이 아니다. 대학진학만을 위한 수학을 억지로 가르치며 정작 아이들에게 필요한 수학교육을 하지 못한 채, 아이들 인생의 골든타임을 낭비하고 있다. ‘2021년 문·이과 통합형 수능’을 목표로 국가교육과정이 개정된다고 한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자기주도적이면서도 의사소통능력을 갖춘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 추진되는 이번 개정 방향은 기존 교육과정에 얽매여 급하게 고쳐온 과거방식에서 획기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학생 개인의 필요와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학생들에 대한 적응실험을 충분히 거쳐야 하되 무엇보다도 일선 학교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수렴해 ‘수학포기자 없는 교육과정’이 만들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1. 수학과 교육과정의 내용을 줄여야 하는가 수학교과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마다 학생들의 학습량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교육내용을 줄이고 있다. 그러나 실제 학습량이 줄지는 않는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수학과 교육과정 내용보다 심화된 내용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고를 비롯한 특목고 학생들처럼 수학적으로 심화내용까지 배울 학생들에게는 좀 더 수준 높은 교육내용까지 제공할 필요가 있으나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공통으로 배울 교육 내용의 양은 줄일 필요가 있다. 2. 수학과 교육과정의 내용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수학교과 교육과정 내용은 학생들이 타 교과를 학습하는 데 필요로 하는 개념을 중심으로 새로 조직해야 한다. 수학이 타 교과를 공부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시켜 수학의 실용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현장에서 “수학은 왜 배우나요?”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교육내용과 학습량에 대한 단순한 수치적 경감이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학교급과 지역에 따라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국가는 학습내용에 대한 최소의 기본만을 제시하고 그 이상은 진로와 진학에 맞는 교육과정 재구성을 허용할 수 있는 입체적 방안이 필요하다. 수학을 좋아하던 초등학생도 고등학교에 가면 ‘수포자’가 되고 마는 작금의 문제 상황을 타개하는 방안으로 오병승은 “문과든 이과든 가지치기를 했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는 비례배분 정도까지 공부하고 중학교 가면 2차방정식, 피타고라스 정리 정도를, 고등학교에 가면 해석 기하학과 미적분 정도를, 대학에 가면 함수론 정도까지 배우면 수학적 소양을 키울 수 있다” (한국수학교육학회뉴스레터통권151호 22쪽)고 제시하였다. 스토리텔링은 생활 수학으로 실제 있는 상황을 찾아 수학공부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군더더기가 생겨 지적 노이즈가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다. 수학교육을 할 때 초기에는 노이즈를 없애고 점점 가면서 노이즈를 넣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저학년부터 노이즈를 무리하게 넣으면 학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3. 수학과 교육과정 내용을 어디까지 평가할 것인가 필수핵심요소를 중심으로 재편한 교육내용만을 중심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수학교과는 위계가 있는 과목이다 보니 초·중·고로 연결된 교과지식의 학습결손이 누적되면 선행지식을 다시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에 학습내용이 많아서 진도 나가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중학교에서 배우는 삼각형의 성질을 알아야만 고1-수1에서 점과 좌표라는 단원의 개념을 공부할 수 있다. 그런데 중학교에서 삼각형의 성질을 학습했을지라도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학생이 많지 않다 보니 고등학교에서 그 개념을 다시 설명하게 되기에 시간이 부족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고등학교교육과정 개념을 학습하는 데 시간적 제약이 생겨 학생들 측면에서는 완전 학습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4. 수학과 교과목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수학교과내용을 이름으로 하는 교과목으로 변경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산술, 방정식, 미적분, 확률, 통계, 부등식, 지수, 로그, 행렬, 대수 등의 과목명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이 수학Ⅰ, 수학Ⅱ 등의 명칭을 쓴다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직접 읽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고 현장의 수학교사들조차 괜스레 내용만 이리저리 옮겨놓았다는 인식으로 교육과정의 필요성을 불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방정식, 미적분 등의 교과목 명을 사용한다면 해당 개념만 다루는 교과이기에 그 교육내용을 축소시킬 수 있다. 수학Ⅰ, 수학Ⅱ…의 교과목명을 사용하면 시수에 맞는 교육내용을 선정하여야 하기에 여러 가지 수학개념을 복합적으로 짜깁기할 수밖에 없다. 5. 수학과 교육과정 내용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문·이과 공통 수학교과 내용은 앞에서 제시한 타 교과에 주로 사용된 수학의 개념을 중심으로 제시하고, 이를 평가범위로 한다. 심화내용으로는 주제별 교과, 예를 들어 미적분, 확률, 통계, 수열, 초월함수 등을 개설해 좀 더 심화학습을 하려는 학생들이 선택적으로 공부하고 평가는 대학에서 학과별로 가산점을 주거나 구술면접 시에 활용하도록 한다. 선택과목까지 수능 등에서 평가를 하게 되면 현재와 같은 억지 수학교과목의 개설로 인하여 수학포기자의 증가 양상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용성과 유용성을 중시한 수학교육과정개정 필요[PART VIEW] 수학적 소양을 가진 학생을 ‘얼마나’ 양성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시기이다. 상위 20% 양성을 목표로 할 것인가, 상위 80% 양성을 목표로 할 것인가? 전자를 목표로 한다면 수학교육 내용을 나머지 80% 학생들을 위한 내용으로 변화시킬 수밖에 없고, 후자를 목표로 한다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로 하는 수학적 소양의 개념을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새롭게 도입될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에서 다양한 과목 개설과 융·복합적 사고력 함양교육이 내실 있게 이루어지려면 수학의 실용성과 유용성 측면을 바탕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고 학생들의 무관심과 수학기피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실생활과 관련된 수학교과교육을 실현할 수 있도록 국가는 최소의 교육내용만 제시하고 진로 및 진학에 맞는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여야 한다. 교육현장의 현실적인 교육과정인 입시문제를 도외시한 교육과정은 공염불에 불과하기에 이 또한 고려해야 한다. 분명히 교육과정과 학습량의 상관관계는 입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실생활에 관련된 삶의 의미를 반영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능시험은 인문계·자연계로 구분하려 하지 말고 진로와 대학수업능력에 필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개편하여야 한다. 공통과목에 대한 수능은 수학적 사고력을 통한 인간 삶의 기본 역량을 요구하는 것으로 구성하여야 하고, 선택과목은 공통수능과목에서 제외해 대학이 고교교육과정의 내용과 성적을 바탕으로 종합적으로 판단하거나 면접·구술시험으로 대체하게 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억지로 공부할 필요성은 적어지고 희망진로에 따라 학생들이 선택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고교교육과정이 학생의 성장과 배움, 진로진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긍정적 기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수학교과내용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 교육은 사회가 요구하는 형태의 인재를 만들기 위해 변화해왔다. ‘이해찬 1세대’라 불리는 83년생들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교육부의 약속과 함께 공부 대신 특기를 찾아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였지만, 이 실험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회에선 전문화된 인력들의 협업연구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교육에선 효율적인 전문가를 양성하고 학생들의 학습량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필요한 과목만 선택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선택과목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학교에선 한 두 과목만 평가에 반영하는 입시전형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처럼 몇 개의 선택과목만 대학입시에 반영되는 시스템은 현재와 같은 교실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최근엔 인문학적 상상력, 사회 현상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과학기술 창조능력을 두루 갖춘 미래 인재육성의 기반 구축을 위해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좋은 의도로 보면 융합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교실수업의 붕괴에 따른 처방이 현장에서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구과목의 점수비율이 높고 그 중 일부만 선택하여 대학 입시에 반영하며, 사회·과학탐구 과목 중에서도 과목을 선택하여 일부 과목만 입시에 반영함으로써 학교에서 진행되는 수업의 절반 이상이 ‘쓸 데 없는 과목’ 취급을 받는 게 현실이다. 물론 학생들이 수능에 적용되지 않는 과목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을 교사와 학교의 무능력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효율적 삶이 강조되고, 학벌중심의 사회구조가 뿌리 깊은 오늘날, 입시와 관련되지 않은 과목에 열정을 쏟을 학생들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행 교육시스템에서 문·이과 통합이 필요한 이유 융합을 하려는 이유는 창의적인 사고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창의적인 사고는 좋은 지식구조를 가질 때 가능하다. 학생 선택형 교육과정은 전문화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식이 한쪽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좋은 지식구조를 갖기 어렵다. 문·이과 통합을 통해 다양한 교과를 배움으로 균형잡힌 지식구조를 갖고 탐구활동 및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지식을 연결하는 과정을 배워간다면 사회에 필요한 창의성을 갖춘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도 10학년까지 문·이과가 통합되어 있는 형태로 수업을 받고 있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국·영·수·과·사·예체능·창의적체험활동 등을 고루 수업한 학생들은 핵심공통 소양 함양이 충분히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과의 위계상 대학교에서 필요하고 사회에서 사용될 지식은 고등학교 2, 3학년 때 배우는 사회·과학 선택과목들에 많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학생들은 아직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장래희망 및 직업의 결정에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되돌리지 못할 만큼 많은 것들을 선택하는 작업이 고등학교 1학년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도 해결하기 위해서 꼭 문·이과 통합은 필요하다. 현재 기획되는 문·이과 통합 방법에 대한 의견 1) 도구 과목에 많은 시수 배정 문·이과 통합이 되기 전부터 우리나라 교육은 도구과목에 너무 많은 시수가 배정되어 있었다. 국어, 영어, 수학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과목을 학습하기 위한 도구과목은 10학년까지 이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회, 과학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식을 학습하는 방법 또한 중요한 과목이다. 과학은 필수적으로 실험이 함께 하여야 할 것이며, 사회 역시 실험실습 및 토론과정이 꼭 필요한 과목이다. 현재 수업이 이뤄지는 것처럼 지식 전달 위주의 수업은 학생들의 창의성과 융합적인 사고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 사회, 과학의 시수가 늘어나 좋은 지식구조를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가르칠 수 있는 시간과 지식간의 연계가 공고히 될 수 있는 토론 및 실험시간이 보장되어야만 문·이과 통합을 통한 전인적이고 창의적인 인재양성의 목적에 맞게 될 것이다. 2) 새로운 융합형 교과서 제작에 관하여 현재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는 융합형 과학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과학 교과서는 현재의 과학과 연계성을 갖지 않으며 내용 또한 생소하여 아마 1명의 교사가 가르치기 힘들 것이다. 더욱이 1개의 단원에도 여러 과목이 혼합되어 있는 개념이 있어, 현행 대학교 커리큘럼에서 공부한 과학교사는 학생들에게 수업하기 매우 힘든 구조로 되어있다. 이로 인해 과학 교과서는 탐구능력과 실험을 통한 내용 파악이 되지 않은 채 사실을 안내하는 정도로만 구성되어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번 과학교과서는 융합과 최신 과학에 지나치게 초점을 두는 바람에 처음 공청회 당시에는 시험도 4지선다형이 아닌 서술형 또는 O, X 형태의 문제를 출제하도록 안내할 만큼 체계적이지 못했다. 또한 밀어붙이기식의 정책이 시행되어 파행을 겪고 있기도 하다. 융합교육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학생들에게 지식을 섞어서 주는 것이다. 현재 과학수업을 받는 학생들 가운데 과학 교과서에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교과가 융합되어 있다고 받아들이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그냥 하나의 과학이라고 느끼며, 이것저것 섞여있는 덕분에 과학이 한없이 어려워졌다는 평가를 많이 내리고 있다. 비빔밥을 하나의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외국인에게 비빔밥을 매번 같은 나물을 넣고 고추장에 비벼준다면 외국인은 비빔밥의 참뜻을 알 수 있을까? 외국인은 비빔밥이 자신의 기호에 맞게 나물을 선택하고 고추장을 넣어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융합도 마찬가지이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란 나물을 잘 선택하여 머릿속에서 융합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융합이지, 교과서를 구성하는 교수들의 머리에서 융합된 내용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과학일 뿐 융합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가 아니라 생각한다. 단지 현재 나와 있는 교과서들은 이과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구성되어 있는 것이므로 과목 간 연계성이 높아 융합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부분만 골라 재구성하는 작업은 필요할 것이다. [PART VIEW] 3) 융합은 어디서? 교과서도 바꾸지 못하고 사회, 과학 시수만 늘어나면 현행 교육과정과 차이가 없다. 융합은 어디서 해야 할까? 창의적체험활동 시간이나 동아리 활동, 다양한 탐구활동 시간에 교과 공부가 아닌 현재까지 자신의 지식을 융합하여 프로젝트를 통한 결과물을 도출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과학고에서 오랜 시간 학생들을 가르치며 일반 인문계 학생들과 과학고 학생들이 대학에서 성취도가 다른 이유가 무엇일지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 사실 과학고에서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과학은 과학 II 교과서 내용보다 조금 더 깊은 정도이며 이는 대학교에서 한 번 더 배우기 때문에 지식의 차이는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과학고 학생들은 수능을 위한 문제풀이식 교육이 아닌 탐구활동을 통한 결과도출에 역점을 둔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고, 다양한 실험과 동아리 활동으로 탐구활동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과학, 사회 시수가 많이 늘어 수업시간에 탐구활동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시수가 부족하다면 창의적체험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시간에 깊이 있는 탐구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창의적으로 지식을 재구성하는 연습은 좋은 지식구조 형성에 효과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공자는 말은 어눌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는 사람을 선호했다. 때문에 말이 어눌하다는 의미를 가진 ‘눌언(訥言)’이란 단어는 꼭 나쁜 뜻만은 아니었고 오히려 칭찬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공자가 무조건 과묵한데다 일만 부지런히 하는 사람을 선호했던 것은 아니다. 비록 말수는 적고 어눌하더라도 요긴한 말은 해야만 했는데, 그 말의 내용이 사리에 적중하는 것을 높이 쳤다. 그렇다면 공자가 『논어』에서 언급한 ‘言必有中(말을 하면 반드시 사리에 적중한다)’은 어떤 뜻이었을까? 그건 우선 군더더기 없는 말을 의미할 것이다. 내용과 무관한 장식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전달하려는 취지만을 간결하게 제시하는 담백한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적중한다는 표현에는 과녁의 중심을 꿰뚫는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다. 상대방이 마음속에 그려놓은 과녁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말, 그것은 듣는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 사태의 핵심을 들춰 그 아래편에 감춰진 문제를 속 시원히 해명하는 말일 것이다. 결국 상대 마음의 중심을 관통하는 간결한 말이란 상대가 처한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그럼에도 그 상황을 이리저리 에둘러 향유할 의도가 배제된 진실한 애정을 전제한다. 상대가 직면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말은 의미 없이 겉돌거나 장식적인 인사치레에 머물 것이요, 상대의 상황을 간파했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 상황을 은연중 즐기려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설화(舌禍)를 부르게 된다. 【원문】 蔡伯喈曰, “喜怒在,心, 言出於口, 不可不愼.” 『明心寶鑑』「正己篇」 【번역문】 채백개가 말했다. “기쁨과 노여움이 마음 안에 있다면 말을 입 밖에 낼 때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백개는 후한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채옹(蔡邕)의 자(子)다. 그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대표적 간웅인 동탁 밑에서 관료 생활을 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명사이자 후한 말기의 난세 속에 온갖 세파를 겪어낸 생존의 달인이기도 했다. 간신과 간웅이 난무하던 당시는 말 한마디까지 신중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채옹은 조정에서 말을 일삼는 관료로서 특히 언어에 민감해야 했다. 어떤 전략이 필요했을까? 난세엔 아예 말을 않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아니, 난세가 아니더라도 말은 오해의 원천이므로 말수를 줄이는 게 항상 유리하다. 그러나 말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하므로 가급적 지혜롭게 말을 해야 했을 터다. 채옹은 말이 낳을 설화를 줄이기 위해 특히 자신의 마음에 희로애락 같은 격한 감정이 생길 때 하는 말을 신중히 했다. 가장 안전한 말은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지 않도록 간결하게 정돈된 말이겠지만 그런 말에는 영양가가 없다. 그런 식으로는 큰일을 못한다. 따라서 말은 간결하지만 상대 마음을 적중시켜야 한다. 상대가 처한 상황, 상대의 욕망, 그리고 상대의 의도까지를 고려해야만 적중시키는 말을 할 수 있다. 가장 낮게는 아첨의 말에서부터 높게는 은미한 직간에 이르기까지 적중시키는 말은 적어도 말하는 자를 해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런 적중능력이 혼미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말하는 자의 개인적 감정이 개입하는 순간이다.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은 말하는 자의 냉정을 잃게 하고 말을 과장되거나 비뚤어지게 만든다. 무엇보다 말하는 자의 과잉된 감정은 상대방 마음에 그려진 과녁보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과녁을 맞히도록 부추긴다. 마음속에 묵혀뒀던 오랜 분노, 상대의 불행에 고소해하는 이기적 희열 등의 감정은 마침내 말실수를 부르고 자신을 누군가의 과녁이 되도록 만들 것이다. 상대방 입장에 집중하며 말해야 하는 삶은 몹시 피곤하며 자신의 속 깊은 감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 즐겁다. 그래서 술자리에선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비난이 난무하곤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정이 특별히 과열되는 순간만큼은 혀를 질끈 물고 언행에 조심할 일이다. 난세의 생존자 채옹마저도 동탁이 죽었을 때 슬픔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가 정적의 모함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 자신을 발탁해준 동탁의 은혜에 대한 일말의 유감 때문이었을 테지만 통제되지 않은 감정이 무방비로 노출되자마자 그토록 신중했던 채옹마저 죽음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는 동물의 삶이란 참으로 고되고도 고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