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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황석근(한국교총 대변인) 교육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과정(political process)의 일부분이다. 교육정책이 결정되기 위해서는 행정부 내에서 기본계획이 작성되고 여당과의 당정협의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국회라는 정치적 논의과정을 거쳐 확정·집행된다. 이 과정에서 교육전문가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기보다는 개혁 실적에 급급한 정부의 영향력에 의존하거나 교육적 논리보다 시장경제 논리 혹은 특정 집단의 압력에 의해 교육정책이 왜곡되는 사례를 숱하게 보아 왔다. 교원의 정치활동은 정부와 정치권의 교육정책 실적과 향후 방향에 대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표적 참여방식인 선거를 통하여 평가함으로써 잘못된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대해 책임을 묻고 나아가 무분별한 정책의 남발 방지와 안정된 교육정책을 구현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 단순히 교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시민으로서의 기본권까지 제한하는 것은 지나친 규제이다. 더구나 교육전문가인 교원이 정당이나 후보의 교육정책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하고 이를 발표하여 국민들에게 알리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민주시민사회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교원의 정치적 기본권은 노동기본권보다 훨씬 앞서 보장하고 있다. 교원노조까지 허용할 정도로 개방된 정부·여당이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유독 경직된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예컨대 교원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였을 경우 오히려 선거에서 불리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고려 때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전체 교원의 87% 이상이 정치활동을 지지하고 있다.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학교 내에서 교원의 편향된 교육을 금지하는 것이지 학교 밖에서 개인 자격의 정치활동까지 제한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 역대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교육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헌법의 기본정신인 것이다. 학교의 정치장화에 따른 학습권 침해 우려는 학교 내에서의 정치활동을 엄격히 규제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또 교사는 정해진 교육과정 내에서 수업을 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편향된 수업에 대해서도 우려할 필요가 없다. 만약 정치적으로 편향된 수업을 하는 교사가 있다면 행정적인 지도 혹은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는 방안을 강구하여 제재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정치기본권을 제한하는 논리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활동의 제한은 위헌의 소지를 안고 있으며 특히 대학교원에게 정당가입이나 참정권을 허용하면서도 초·중등교원만 제한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위배된다. 외국의 경우에도 정치적 기본권은 노동 기본권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OECD의 가입국가 중 교원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의 대표적 교원단체인 NEA는 1972년도에 정치활동위원회(PAC)를 출범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교사의 자발적인 기금 모금뿐만 아니라 캠페인, 경매 및 경품판매, 우표 판매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기금도 모금한다.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지하였으며 1990년대에 미국 하원의원의 75%가 NEA의 지원을 받은 후보자가 당선되었다. 미국의 교원노조인 AFT도 정치교육위원회(COPE)를 통하여 다양한 기금모금과 정치 지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단의 정치오염을 걱정하는 국민은 별로 없다. 영국교원노동조합은 우호적인 의원들의 명단을 작성, 지지 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입법과정에서 조합의 의사를 반영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최대 교원조직인 국민교육연맹(FEN)의 경우 소속 교원의 80%가 사회당에 가입되어 있다. [PAGE BREAK]교원단체의 정치활동은 시민사회의 도래에 따라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시민단체의 활성화와 전문화 그리고 특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4.13 총선 당시 시민단체의 활동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시민단체의 전문성이었다. 즉, 시민단체가 민주성의 원리는 앞세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분야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교육전문가 그룹인 교원단체가 정치활동에 참여할 경우 시민단체 활동의 전문성을 제고할 수 있고 이는 곧 시민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교원의 정치활동보장은 국제적인 추세나 국민으로서의 기본권 신장, 그리고 책임 있는 교육정책의 구현을 위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교총은 이미 사회각계 인사로 ‘정치활동위원회’를 구성해 정치활동을 위한 관련법률의 개정, 향후 정치활동 일정 등을 확정함으로써 정치활동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이고 있다. 이는 교원단체의 정치활동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당할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 것이다. 교원의 정치활동은 교육전문가인 교원이 훌륭한 정책을 개발한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교육정책의 질적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정부와 여당은 교원단체의 정치활동을 맹목적으로 억압할 것이 아니라 적법한 활동을 통하여 정치와 교육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구축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홍득표(인하대 교수, 정치학) 정치활동의 유형은 시민단체 참여, 정치집회 참여, 선거운동이나 정당가입, 공직자와 접촉, 정치토론, 청원, 항의, 시위, 투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반시민에게는 이와 같은 정치활동에 대한 제한이 없다. 하지만 초·중등교원은 선거운동 참여와 정당가입 그리고 교육위원 출마 등에 대한 피선거권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초·중등교원의 정치의식 수준이나 전문적인 소양을 고려할 때 개인의 정치활동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이유와 명분은 설득력이 약하다. 개인의 정치활동 참여 보장이 선진국에서는 공직자에게까지 무제한적으로 확대된 상황에서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교원을 제한하는 것은 정치학적·법리적·시민적 차원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일반시민과 마찬가지로 교원 개인의 정치활동 참여를 완벽하게 허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원단체가 교원들의 이익집단으로서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 교육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하여 교육현실과 부합되는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원의 신분과 권익에 직접 관련된 정책이 이해 당사자인 교원의 의사가 무시된 가운데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데 대하여 교원들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교원단체가 전문적인 이익대표체계로서 집단행동이나 집단적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필수 요건이다. 교육현실과 동떨어진 조령모개식 교육개혁이 강행되고 교권이 짓밟히고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교원의 권익과 관련된 정책결정 과정에 이익집단으로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원단체가 순수한 이익집단 활동의 범위를 벗어나서 선거 때 집단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후보의 지지·반대·낙선 운동을 하거나, 선거정보의 제공도 교육 이외의 정치전반으로 확대하는 것, 그리고 정치 세력화되어 정치현장에 뛰어드는 것 등의 정치활동은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첫째, 교원 개인은 물론 단체의 제한 없는 정치활동이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한 원인의 하나로 법치주의의 실종과 법 경시 풍조를 꼽는 상황에서 교원단체의 활동은 일반 시민운동단체와 달리 합법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할 것이다. 교원의 정치적 기본권 확대 주장의 시대적·법리적 당위성을 충분하게 인정하지만 학생들에게 법과 질서의 중요성을 교육하는 선생님들의 접근방식은 달라야 할 것이다. 둘째, 교원단체가 정치 집단화되어 소모적인 정쟁에 휘말린다면 교육환경이 정치에 오염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국민불신이 대단한 상황에서 선생님조차 진흙탕 싸움에 끼어든다면 교육에 전념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선생님들이 선거 때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게 줄을 댄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며, 역으로 정치권은 교원단체를 선거에 이용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의 손길을 뻗칠 것이다. 또한 줄을 잘못 섰다가 만의 하나 정치적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이 온다면 정치경험이 전무한 선생님들은 이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PAGE BREAK]셋째,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할 것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교원단체 회원이 혹시라도 편향된 시각에서 당파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자율적 판단능력이 부족한 초·중등학생 교육에 문제가 될 수 있다. 학교는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의 편향적인 학습현장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의 시장이 되어야 한다. 학부모들은 교육에 대한 정치적 압력과 권력으로부터 교육의 독립도 절실하게 원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교원의 정치적 중립, 교육의 무당파성, 그리고 교육의 정치에의 불간섭 등도 바라고 있다. 넷째, 교원단체간 그리고 교원 상호간에 편가르기 등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선생님들의 이미지가 손상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교육정책에 대한 노선이 상이한 교원단체간 특정 정당이나 후보의 지지 또는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 충돌 가능성이 있다. 교원 단체끼리 싸우면 학부모들은 불안해 할 것이며, 선생님들을 불신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또한 수만 혹은 수십만 회원의 다양한 정치적 선호와 소속단체의 정치노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자칫하면 교원단체간 그리고 회원 상호간 반목과 대립의 골이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들의 이익집단인 교원단체는 일반시민 운동 단체와 다른 성격이길 국민은 원하고 있다. 그 활동방법과 전략도 차별화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적인 과제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전국교원노조, 한국교원노조 등 모든 교원단체가 교원 개인의 정당가입, 선거운동 참여, 피선거권 확대 등 정치적 기본권을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데 있다. 그 문제만 해결되면 교원단체의 정치활동 공간은 자연적으로 넓어 질 수 있을 것이며, 단계적·점진적으로 정치활동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정유성(서강대 교수, 교육학) 학교와 가족제도 세월 따라 변해 세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변하고 있다. 오늘날처럼 빠르게 달라지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놀라운 변화에 신기해 하다가도 그 엄청난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휘청거리게 된다. 밖의 세상이 변하는 만큼 우리 생각이나 마음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우리는 늘 무언가 비빌 언덕을 찾고 또 버팀목을 구하곤 한다. 하도 정신없는 세상변화가 어지러운 나머지 어디든 안정된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안온하게 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가깝고 익숙한 자리를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안으로는 가족이요, 밖으로는 학교다. 언제나 밖에서 지친 나를 품어주고 보살펴 주는 가족, 그리고 언제 봐도 똑같은 눈에 익은 교실환경에다 지루하긴 하지만 몸에 익은 시간표에 따른 일상이 진행되는 학교. 그러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가족이고 학교는 언제부터고 늘 그렇게 있고 앞으로도 내내 그렇게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상 속에 가족이고 학교고 늘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 아니 역사를 살펴봐도 가족과 학교만큼 변화무쌍한 제도는 없다. 사람은 사람 사이, 곧 인간(人間)에서만 사람답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인간다운 사회생활, 곧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보살피고 돌보고 이끌어 주어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 그 첫 자리가 가족이고, 그 활동의 첫 내용이 곧 교육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이 핵가족을 이루고 산 것도 아니오, 학교에서만 교육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부중심의 가족은 최근의 일이고 아주 옛날에는 그저 무리를 이루고 사는 집단생활부터 했다. 그러다가 농경사회가 정착되면서 대가족의 형태를 띤 가족유형이 나타나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왔고 이른바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 과정에서 현대사회의 가족유형으로 오늘날과 같은 부부와 자녀중심의 핵가족이 나타난 것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그저 집단 안에서 너, 나할 것 없이 모두 교육을 했고 삶 한복판에서 삶 전반에 걸쳐서 교육을 받았다. 그것이 학교라는 틀에 맞추어 제도화된 것은 불과 몇 천년 전의 일이며 그 때에도 학교는 겨우 몇몇 사람, 곧 지배계층만을 위한 기관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면서 가족과 지역사회의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생활교육을 받았을 뿐이다. 오늘날과 같은 대중화된, 국가 중심의 공교육 체제에 따른 학교가 생긴 것은 산업화와 근대적인 민족국가 형성의 과정에서 질 높은 노동력과 의무를 다하는 국민을 양성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게다가 핵가족화와 더불어 옛날처럼 삶 속에서 교육을 할 수 없게 된 점도 작용하여 생활 속의 교육을 떼어 학교라는 틀과 제도에 맡긴 것이다. 학교중심 아닌 학교만능 교육관 이렇게 만들어진 산업화 시대의 가족과 학교는 나름대로 그 기능과 역할을 나누어 맡았다. 가족은 편안하고 안온한 쉼터이면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삶터, 그러면서 동시에 정서적으로 강한 유대를 갖는 가족 구성원들이 인간관계를 배우고 익히는 겪음터였다. 특히 가족은 비교적 수직적인 인간관계의 축, 곧 아버지 중심의 가족문화를 이루고 자라나는 세대의 사회생활의 준비라는 일차적인 사회화의 장소가 되어준 것이다. 반면에 학교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족에 이어서 흔히 말하는 이차적인 사회화, 곧 본격적인 사회생활의 준비를 해주는 기관이었다. [PAGE BREAK]개인마다의 특성과 개성을 찾아주고 그에 따라 사람들을 사회가 필요한 곳 적재적소에 알맞게 배분해 주는 일을 한 것이다. 때로는 우리 사회처럼 후발 산업국으로 근대화를 서둘러 하게 된 경우 마치 대규모 공장처럼 경제성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길러내는 역할도 맡고, 빠른 사회변화에 적응시키는 훈련기능도 맡았다. 가족과 학교의 분업은 현대사회를 떠받치는 두 축이었고 그것이 잘 이루어진 사회는 근대화에 성공하여 국민 대다수가 현대사회의 풍요와 복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비교적 뒤늦게 시작한 산업화를 압축적으로 진행한 우리 사회도 이 단계에서는 적잖이 과장된 가족과 학교의 분업으로 문제는 많지만 겉보기에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근대화를 꾀해 왔다. 다만, 흔히 그렇듯이 이런 과장된 분업과정에서 다양한 교육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학교중심 아니 학교만능의 교육관을 낳은 것이 문제였다. 정작 학교나 가족의 교육적 의미나 질보다는 학교 자체, 그리고 그 성과만 따지는 잘못된 교육관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졸속한 산업화와 압축적 근대화의 가장 심각한 폐해로 우리 사회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걸림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 바로 최근 우리 사회를 거듭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사람의 위기다. IMF 위기 이래로 경제나 사회 전반에 갖은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지만 결국 그 핵심은 사람이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세상은 또 한번 크게 변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뿐더러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탓에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사람의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사회의 앞날을 열어가려면 그 사람부터 제대로 살펴야 한다. 그 앞뒤를 따져보면 이렇다. 요즈음 일고 있는 세계화나 정보화와 같은 거센 변화의 조짐, 아니 문명전환의 물결에 즈음하여 이러한 가족과 학교라는 우리가 가장 익숙한 제도는 또 한 번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이제 자고 일어나면 새로워질 만큼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이런 격변의 시기 아니 문명전환의 시기에는 그저 저 밖의 환경이나 물건들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사람의 관계조차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가족문화다. 핵가족조차 분열되고 해체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관계 속에 있는 사람 자체도 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 곁의 자라나는 세대, 청소년들이 그렇다. 변화에 응답할 준비가 안된 학교 자라나는 세대인 청소년들은 어른세대에 비해 전혀 다르고 새로운 사람들이다. 사고방식이나 감수성뿐 아니라, 삶의 방식과 느낌, 버릇, 기호조차 어른들과는 딴판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인 미래의 주인공이다. 예전 우리 자랄 적처럼 어른들이 나름대로 예측 가능한 미래를 위해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겠다고 충고하거나 강요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컴퓨터 능력과 같은 미래사회의 핵심적인 역량에서는 이미 어른들을 앞지르고 있고 어른 세대의 상상을 뛰어넘은 미지의 시공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제 삶과 앞날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른들은 가족 안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이들의 새로움과 다름을 감당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며 그저 자신들의 뜻과 생각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탓만 한다. 이들은 벌써부터 어른들의 기존의 가치나 제도에 웃자라 버렸고 어른들이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문화를 스스로 만들고 또 누리고 있는데 말이다. [PAGE BREAK]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가족과 학교의 역할과 기능, 곧 교육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가족문화의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앞으로는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 가족의 교육적 역할과 기능은 점점 더 약화될 것이다. 반면에 학교의 교육적 역할과 기능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 학교교육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수가 없다. 우리는 대개 교육, 특히 학교교육을 기존의 가치체계나 지식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수하는 보수적인 역할과 기능에 치중하여 강조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문명전환의 시기에는 그보다는 앞날의 새로운 삶의 틀을 준비하는 역할과 기능이 더욱 중요하다. 불행하게도 우리 학교교육은 전혀 이러한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며 그 준비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한편으로는 산업화 시대, 소품종 대량생산의 방식에 맞게 획일적이고 경직된 학교교육이 유지되고 있다. 다른 한편 학력주의 풍토 탓에 여전히 극한 경쟁의 교육이 판을 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두 시대착오적인 학교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시대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요구하고 다양성과 개성을 촉구하는데, 학교는 그 요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또한 학교는 이제 더 이상 학습의 중심도 아니오, 교육의 독점적인 장소도 아니다. 예전에는 학교가 학습의 중심일 뿐 아니라, 지역사회 지식의 중심이었고 교사는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벌써 오래 전에 이러한 학교의 위상은 달라졌다. 하다못해 학습기능으로 보더라도 편협한 입시위주의 학습으로만 본다면 학원에 그 주도권을 넘긴지 오래고 새로 등장한 컴퓨터에 학생들의 관심을 빼앗기고 있다. 지식정보사회에서는 학교뿐 아니라 다양한 학습의 채널이 열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의미에서 영국에서 나온 어느 보고서에는 학습중심으로서의 전통적인 학교는 30년 안에 없어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비단 학습뿐 아니라 위에 이야기한 자라나는 세대인 청소년들이 제 삶을 살아가기 어려운 곳이 바로 우리 학교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청소년이란 없다. 그저 학생만 있을 뿐이다. 이 땅에서는 ‘1318’이라는 중요한 삶의 시기에 제 나이 또래의 제대로 된 삶을 사는 청소년이 발 부칠 곳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학교 밖의 문제 청소년, 학교를 벗어난 일탈 청소년이 있을 뿐이다. 우리 자라나는 세대는 어른들이 만들고 사회가 시키는 학습을 강요당하는 학생신분에 묶여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학교에 갇혀 있다. 0교시부터 보충수업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다. 학교의 일상은 지루하고 답답하고 또 폭력적이다. 눈에 보이는 왕따나 체벌뿐 아니라 학력사회 전반의 경쟁주의에 찌들은 구조적 폭력 탓이다. 학교는 삶과 체험의 장소가 돼야 지금, 여기 우리 학교는 청소년들의 삶이 없다. 삶이 없는 학교는 즐겁지 않다. 즐겁기는커녕 지겹고 힘들고 짜증난다. 열악한 학교환경에서 획일적이고 경직된 수업문화에 이르기까지 어디고 즐거울만한 구석이 없다. 그러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학교생활이 고단하고 힘겨울 뿐이다. 오죽하면 학교붕괴니 교실붕괴 같은 말들이 생겨나겠는가? 하다못해 이를 견디지 못한 아이들은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하나씩 둘씩 학교를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학교는 이렇게 아이들에게 ‘혐오시설’이 되어가고 있다. [PAGE BREAK]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 학교가 생기면서 학교란 본디 삶의 자리이며, 즐겁고 신나는 곳이었다. 또 누가 뭐라 해도 학교는 마땅히 즐거운 곳이어야 한다. 학교란 미래를 준비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을 살고, 누리고, 즐기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억지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학교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학교가 삶과 체험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배움터뿐 아니라, 삶터, 겪음터로 학교가 탈바꿈 해야한다. 그래야만 사람을 만나, 사귀고, 서로 바뀌며 살아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학교는 놀이터, 싸움터가 되어야 한다. 머리뿐 아니라 가슴과 손발을 써서 실컷 놀고, 또 다름을 알고 배우며 서로 다투고 함께 사는 방식을 익히는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학교에나 즐거움은 찾아들 것이다. 지금 당장 학교를 한꺼번에 이런 장소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필요성뿐 아니라 가능성은 아주 커지고 있다. 먼저 학교가 답답하고 지루한 학습의 장으로, 공부하는 자리로만 머물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앞서도 이야기한대로 그 학습과 공부는 이미 다른 통로가 많아졌다. 학교가 벌써 빼앗긴, 그런데 여전히 고수하려는 학습의 장으로서의 시대착오적인 독점을 포기하고 새롭게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배움터 뿐 아니라 삶과 겪음의 터전으로 말이다. 또 다른 한편 학생이 아니라 청소년인 자라나는 세대는 언제라도 이런 삶과 겪음을 학교 안에서 펼치고 누릴만한 풍부한 바탕을 갖추고 있다. 상업화되고 대중화된 문화뿐 아니라 이들이 만들고 있는 다양하고 힘있는 삶의 문화들이 그것이다. 이것을 학교에 받아들이고 교실로 들여오기만 하면 된다. 지금이라도 교실 한 구석, 수업 한 자락, 학교 한 공간에 이러한 가능성이 실현될 틈새만 만들면 된다. 이 틈새를 통해 학교 안에 즐거움이 생기고 머물 수 있도록, 또 자리잡히도록 차츰차츰 학교의 틀이며, 교실생활의 얼개며, 교육과정의 축을 바꿔 가면 된다. 그 자리는 그렇다고 멀리 볼 것도 없이, 갖은 걸림돌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학교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또 만들어내려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김혁진(‘즐거운 학교’전문위원) 우리는 청소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가? 요즈음의 청소년 세대를 가리켜 흔히들 N세대 또는 디지털 세대라고 부른다. X세대 이후 청소년 세대를 지칭하는 용어는 일종의 부호로 바뀌었다. 질풍노도의 시대니 주변인이니 하는 용어는 이제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 된 것 같다. 청소년문화를 가리켜 저항문화, 부분문화, 하위문화니 하는 설명들도 이제는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의 정답 표시를 위해 자신들을 가리키는 과거의 단어들을 외우면서 청소년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요즈음의 청소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TV 광고를 보라는 말이 있다. 광고란 상품을 팔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마케팅 방법의 하나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매우 엄청난 비용을 쓰고 있고 이 비용은 결국 상품값으로 소비자들이 지불하게 된다. 그러나 원가 상승으로 물건 판매가 감소할 수 있음에도 왜 기업들은 광고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가? 특히 이른바 N세대 마케팅이라 불리듯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광고에 열정을 쏟고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업은 이윤이 목표이다. 광고비 이상으로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N세대 마케팅의 성공 여부가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생존 여부를 판가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청소년들의 의식과 가치관, 그리고 그 문화를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기업이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기업들이 스스로 그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무조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환경과 사고 방식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 얼마 전에 나왔었던 한 과자 광고는 모델 얼굴과 몇 가지의 숫자를 마치 무의미한 것처럼 나열하였다. 그러나 그 숫자들은 핸드폰의 번호를 이용하여 과자의 이름을 나타내는 문자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고의 대상은 누구인가? 이 숫자를 알아들을 수 있는 청소년집단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또는 그 밖의 현장에서 단지 청소년들을 만난다는 것만으로 청소년세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것이 가능할지 생각해보게 한다. 청소년들의 속마음과 문화를 정확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른바 새로운 세대의 특징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정리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점점 더 이렇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일에 대해서도 어른들이 생각하고 있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만 그 공통점은 어른들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과 관련하여 과거에는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이제는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어진다는 지적을 한다. 이들은 이제 자신이 판단하여 좋은 것인가 아니면 싫은 것인가에 더 큰 의미를 둔다고 한다. 평범함에 대한 거부는 ‘무난함’이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어른들과 달리 분명한 표현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공부와 논다는 것도 이제는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모범생이고 얌전하며 착해서잘 놀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은 이미 사회에서도 통용되지 못한다. [PAGE BREAK]시키는 일에만 소처럼 충실한 사람은 지식정보사회에서 반드시 실패하는 사람이며 그래서 기업에서는 공부만 잘하는 소극적 인재보다는 다양한 재주를 가진 개방적인 인재를 찾고 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는 아이들이 인기를 얻게 된다. 공부와 논다는 것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건널 수 없는 강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사례가 청소년세대를 대표하는 특징의 전부는 아니다. 더군다나 모든 청소년들이 이러할 것이다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한 때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청소년상에 대한 강조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자기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학교 밖을 벗어나면 성공할 것 같은 신화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에 만족을 못하고 스스로 학교를 떠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육당국에서조차 대안학교나 대안교육을 위한 정책을 거론하는 것이 어찌보면 학교 교육에 열정을 가진 교사들을 씁쓸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청소년들이 다 그럴 수는 없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특별한 재주가 있는 아이들이 전체와 비교한다면 얼마나 되겠는가? 오히려 또는 이상을 차지할 보통의 아이들에게 더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다.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찾고 그 재능을 키울 기회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어떠한 유형에 속하든지 우리 사회와 어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이 청소년들은 이른 바 지식정보사회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라는 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인재상에 대한 제안을 보면 새로움에 대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창의력과 인성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한다. 산업사회 속에서 태어나 자란 어른들이 나면서부터 TV를 보고 컴퓨터와 인터넷, 무선통신망을 통한 사이버 세계의 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사회는 붕어빵과 같은 인재보다는 독특한 생각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인재를 찾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문화의 시대이다. 어른들에게는 그 실체가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어른들의 고정관념과 상관없이 청소년 세대의 문화는 변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도 생각보다 빨리 변해간다는 것이다. 청소년세대에 대한 문화적인 접근은 학교의 교육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야 교과서를 매개로 한 평면적인 교육이 아니라 삶 중심의 입체적인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학생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학교 울타리로 보호를 받고 있는 갇힌 세상은 아니다.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가 교육내용으로 들어와야 학교 교육의 내용도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10년간 아니 20년간 유지되어오던 학습 내용도 앞으로는 1년도 지속되기 어려울 수 있다. 변하는 아이들을 앞서 가지는 못해도 가까이 뒤따라갈 정도는 되어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청소년들의 문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과연 어른들은 얼마나 아이들을 이해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청소년의 문화를 위한 토양으로서 사회적 환경이 가진 의의나 한계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어른들의 이중구조의 모순 변해가는 청소년들과 비교하여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생각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잠재된 시각이 있다. 그것은 보호와 통제의 대상으로서 청소년들이다.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는 때는 1년에 두 차례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연말연시와 5월이다. 12월과 1월에 각 지역에 걸리는 현수막(대체로 경찰서에 걸려 있는)에서는 ‘연말연시 청소년을 선도 격려합시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이 말은 보기에는 어른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 반면에는 연말연시에 방황하는 청소년을 선도 또는 단속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PAGE BREAK]5월이 청소년기본법에 의한 청소년의 달이기는 하지만 실제는 어린이의 달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외에는 학교 폭력, 화재사고와 같이 문제가 발생할 때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물론 어느 때나 온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입시와 관련된 상황은 예외로 해야 할 것이다. 학교 성적과 입시에 대한 관심을 제외한다면 청소년들이 관심을 얻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특히나 학교 밖에서 청소년들이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갖고 건전하게 살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방향에 모두가 동의는 하지만 정책적인 지원은 항상 후순위로 밀려난다. 특히 사회적 환경은 청소년을 위한 건전한 환경이 필요하다고 동의하는 것과는 역방향으로 흘러간다. 학교 앞의 러브호텔 문제로 한 때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학교 앞은 그래도 집단적인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학부모 입장에서 당장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유흥문화는 무조건 청소년들이 접근만 못하면 상관없다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단지 학교만은 아니다라는 점은 다시 강조되어야 한다. 물론 지금 여러 가지 한계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최선의 교육적 환경을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청소년들이 삶을 살아가는 학교 밖은 최악의 교육적 환경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19세 미만에게 술과 담배 판매를 금지하기 위해서는 술을 파는 구역이 구분되어야 한다. 주택가와 유흥가와 교육시설이 한 데 어울려 있는 환경 속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선도 보호해야겠다는 어른들과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중구조 속에서 청소년들은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의 솔직한 생각은 학교를 든든한 울타리로 생각하고 청소년들을 울타리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해야 안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학교 밖으로 나오고 싶은 청소년들의 욕구는 통제와 금지 속에서 점점 커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구조 속에서 학교의 영향력은 점차 더 감소하고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자유를 추구하였다. 여기에 사교육 의존과 같은 다양한 상황과 맞물려 학교 교육에 대한 불신과 함께 학교위기 현상도 초래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정작 학교 밖으로 나온다고 하여도 지금은 그저 막연하게 내몰리고 있다. 청소년들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사회전체가 교육의 장이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에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학생 선도 보호대책, 청소년 성매매 대책, 출입제한 지역 대책과 같은 소극적 정책만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다. 실상은 어른들의 상업적 욕구에 따른 환경이 통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된 환경 속에서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건전한 성장을 원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건전한 문화가 없다는 지적은 어른들의 걱정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청소년들에 대한 질책이 될 수도 있다. 좀더 심하게 비유하자면 왜 너희는 좀 더 착하게 살지 못하냐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과연 그러할 자격이 어른들에게 있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가지 말아야 할 곳은 많지만 언제라도 가라고 추천할 만한 공간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유해환경 문제에 발목을 잡혀 있을 때는 아니다. 물론 금지해야 할 것은 사회적이든지 정책적이든지 확실한 대처가 필요하다. 건전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 제한된 공간 울타리와 통제, 금지를 통해 청소년에게 건전하게 자랄 것을 요구하는 것, 더 나아가 창의적 인재가 되어달라고 강요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관점이 요구된다. 변화하는 청소년 세대의 문화가 보다 생산적이고 창의적이며 다양화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경쟁의 시대, 지식정보사회, 21세기 문화시대를 말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인재 양성을 위한 거창한 구호와 계획이 실생활 속에서는 기본적인 토양도 갖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PAGE BREAK] 놀이문화, 삶의 탈출구에서 창의력의 원천으로 그렇다면 사회적 환경이 청소년들의 건전한 성장을 넘어서서 창의력 개발의 토양으로까지 확대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우선은 학교가 가지고 있는 부담이 감소될 필요가 있다. 학교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우다 보니 학교 밖에서 경험해야 할 활동의 기회가 제한되어 왔다. 결국 학교에서 모든 것을 다해줄 수 없음에도 우리는 학교에만 책임을 물어왔다. 문제는 너무 많은 교육내용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 내용들이 정작 21세기에 필요한 지식인지조차 의문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한 보도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영어교육 방식이 라틴어식 교육이어서 비실용적 영어 교육이 되었다고 한다. 라틴어는 누구와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언어이다. 실생활에서는 죽은 언어이다. 그저 외우고 단어와 문법을 익혀 이해할 수 있으면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나 중등학교뿐만 아니라 대학교육조차 사회에서 필요한 능력 개발은 비실용적이어서 기업은 매년 막대한 비용을 지불한다고 한다. 물론 실용적인 지식과 기능만 가치가 있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그 바탕이 되는 인문학적인 지식이나 기초 과학이 없다면 그 발전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이제는 21세기의 교육내용이 살아 있는 교육이 되기 위한 방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용과 방법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 즉 교육적 차원에서도 이제 청소년들의 놀이문화에 대한 관심이 달라져야 한다. 놀이문화를 통한 체험활동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체험활동 경험은 단지 학교 학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청소년들의 사회적 능력 개발과 성장에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된다. 학교 안에서도 그리고 학교 밖에서도 다양한 문화체험 활동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물론 많은 어른들의 걱정은 아이들이 유해한 환경에 빠지고 불량하게 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제대로 놀 수 있는 좋은 사례도 볼 수 없었고 또 그러한 활동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도 어릴 때부터 갖지 못하였다. 놀이란 보다 폭 넓게 보면 생활 자체가 된다. 창의적 인재를 요구하는 21세기 교육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창의적이고 자발적이며 좋아서 하는 활동의 경험이 필요하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매니아, 골드칼라라고도 부르며 앞으로의 사회를 주도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지적해왔다. 청소년들에게 놀이문화란 단순히 건전하고 착하게 시간을 보내는 활동이 아니다. 놀이를 통한 체험활동이란 누가 시켜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경험, 창조적인 경험을 갖게 한다. 청소년들에게 논다는 것은 다양성과 창조성의 경험이다. 청소년을 위한 놀이공간, 문화공간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의 수량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청소년시설의 수는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다. 문제는 전용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시설조차 수익구조 중심으로 내몰리고 있고 다른 문화 복지 공간도 말할 것 없는 실정이다. 이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정책적인 이중구조의 문제이다. 단순히 청소년시설만 있으면 청소년놀이 공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의 놀이문화, 그리고 놀이공간이란 일정한 틀에 얽매이는 것도 아니고 건물 공간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경험이 중요하다. 실패도 있을 수 있다. 어른들은 일정한 틀과 공간에 청소년을 가두어 놓지 않으려는 자세부터 가질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스스로 건전한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스스로 문화적 경험을 만들어 가면서 주입식에 의한 창의성이 아닌 놀면서 스스로 체득하는 진정한 창의력의 터를 제공해야 한다. 학교 교육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도 학교 밖에서의 청소년의 놀이활동과 자율문화는 필요한 일이다. 사회의 다양한 기관들이 학교와 함께 청소년들의 자율적인 문화 공간을 제공하는 노력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지승희(한국청소년상담원 상담교수) 들어가며 『내 마음을 읽어주세요』라는 제목의 상담사례집이 있었다. 아이들은 어떤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는 것일까? 부모의 손에 이끌려 상담원을 찾은 아이들 중에는 학교에 대한 흥미가 없어져서 또는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생활에 부적응한 아이들이 많이 있다. 어머니가 아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한마디도 안하고 앉아 있다가 상담을 해보겠느냐는 물음에도 고개만 좌우로 흔드는 아이들도 있다. 한동안 요즘 아이들은 무슨 질문을 해도 “그냥” “몰라요” 같은 단답형밖에는 못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었다. 말을 하는 대신 그들은 행동을 한다.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거나 가출을 한다. 청소년 비행은 우울증의 표현이라고도 한다. 말은 안 하면서도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는 것이 청소년기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보인다. 이러한 아이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학교이다. 이런 학교에서 청소년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들과 만날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아이들의 모습 1. 수업시간이 지루한 아이들 2001년 한국청소년상담원에서 전국의 청소년 1275명에게 실시한 ‘수업중 수면 실태조사’ 결과는 청소년의 학교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전체의 18.6%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1시간 이상 엎드려서 잔다고 하였고 자는 이유는 몸이 피곤해서, 수업이 재미없어서, 수업을 이해하기 어려워서라고 하였다. 수업중에 자는 시간이 긴 학생들일수록 부모와의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교사와의 관계, 수업 내용과 수업방법에 대해서도 불만족하였다. 또한 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과 교사 몇 명에 대한 면접조사 결과, 수업중에 잠을 자는 이유는 학생의 경우 과목 및 교사 요인(싫어하는 과목,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과목, 목소리가 작은 선생님 등), 방과 후 활동으로 인한 피로, 학업 수행의 어려움,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생각 없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응답한 반면, 교사들은 좀 더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방과 후 활동으로 인한 수면 부족, 흥미 부족, 미래에 대한 계획과 희망의 부재, 기초 부족과 같은 학업의 어려움, 학교 부적응 등의 이유와 학교 분위기가 느슨해진 것, 사이버 문화 등 감각적 정보와 재미를 추구하는 문화에 비해 변화하지 않는 학교 문화 등을 이유로 지적하였다. 이상의 결과를 보면 청소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가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소규모 학급운영으로 인성교육까지 책임진다는 보습학원들보다도 열악한 곳처럼 보인다. 사정이 이러하니 보습학원의 강사가 시험이 끝날 때마다 전화를 해주는 것은 관심이요, 학교의 교사가 전화를 거는 것은 아이가 문제나 통보하는 가슴 철렁한 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부모와 학교, 그리고 교육제도가 손발이 안 맞아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우리 아이들은 교실에서 무력하게 잠자고 있다. [PAGE BREAK] 2.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들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해요.” 한 어머니가 울먹이고 있다. 험한 세상에서 여자 혼자 몸으로 아이 키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 어렵게 키운 그 아이가 학교엘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이유는? 폭력이다. 욱하는 성격을 참지 못하고 반 친구를 쳤는데 코뼈가 주저앉았다. 꾸짖는 선생님 앞에서 분을 참느라 주먹을 불끈 쥔 것이 처벌의 수위를 높였고 아이는 스스로 자퇴를 선언했다. 아침에 출근하는 어머니는 밤새 친구들과 놀다 깊은 잠에 빠져있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애쓰다 지쳐버렸다. 아이를 폭력범 취급하는 교사와 학교에 대해서는 섭섭하고 힘이 없어 무시당하는 것 같아 서럽기까지 하다. 결국 아이는 자퇴했고 어머니는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수용해주는 만큼 묵은 감정들이 해결되면서 아이는 검정고시를 거쳐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훈육과 처벌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아이를 학교로 돌아오게 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으로 수용되는 경험이었다. 학교 밖은 얼마나 유혹이 많은가. 아르바이트를 하면 용돈은 충분히 벌 수 있다. 옷, 화장품, 술, 담 등등. 필요한 것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구할 수 있으니 인정받지 못하고 지루하기만 한 학교에 있는 것보다 빨리 나와 돈을 벌어 즐겁게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 처벌은 두렵지 않다. 3. 교사에 대한 기대가 있는 아이들 학교에서 아이가 맞았다. 가해자는 학교 폭력의 주범. 이전에도 여러 아이들이 맞았다. 어머니는 학교에 가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가해 학생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학교에서는 문제가 확산되어 외부로 알려질까 우려하여 조용히 덮어줄 것을 종용하였다. 내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잘못을 해도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피해자가 나올 것이 아닌가, 학교에서 이런 것을 가르쳐서야 되겠는가? 어머니는 분노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황당하게도 남들은 알아서 피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못했느냐는 것이었다. 그 전부터 여러 가지 비상식적인 경험을 했던 아이는 학교가 싫다고 했고, 부모는 머리를 싸매고 며칠을 고심한 끝에 아이가 원하는 대로 유학을 보내기로 했다. 외국에 나가 살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고지식한 어머니는 아이를 혼자 보내놓고 밤마다 아이가 보고 싶어 운단다. 단 한 명이라도 상식이 통하는 선생님이 있었다면,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이의 말을 생각하면서. 극단일 것이다. 한 쪽 이야기만 들었으니 오해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의 마지막 말, “단 한 명이라도 상식이 통하는 선생님이 있었다면…”이라는 말이 귀에서 맴돈다. 상식이 통하는 학교, 이야기할 수 있는 선생님에 대한 기대를 마지막까지 갖고 있었을 그 아이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사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나 대우가 어떠하든 아이들은 교사가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상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온갖 냉소적인 호칭을 사용하면서도 교사에 대한 아이들의 기대는 이처럼 큰 것이다. 아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1. 청소년기의 아이들을 이해해주자 에릭슨(Erikson)에 의하면 사람은 8단계의 발달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각 시기마다 수행되어야 할 독특한 발달과업이 있다. 그 8단계 중에서 청소년기의 발달과업은 자아정체감 형성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등등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분명한 정체감을 형성하느냐, 아니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정체감 혼미에 빠지느냐 하는 위기를 겪게 되는 시기인 것이다. [PAGE BREAK]정체감 형성 과정은 자신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같다. 다양한 상황과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 역할들을 시도해 보고, 아동기까지 어른들에 의해 주입되었던 가치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된다. 확실하지 않다는 것, 미지의 것을 탐색하는 과정은 불안과 두려움을 수반한다. 그래서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예민할 수밖에 없다. 가장 알 수 없고 낯선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안한가 말이다. 더욱 나쁜 것은 나 혼자만 이렇게 힘들고 낯설고 두려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청소년에게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기 안의 많은 모순들과 불안정한 정서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그들의 혼란에 귀기울이고 수용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학교에는 아이들을 잘 이해하는 선생님들이 있어야 한다.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들을 이야기해도 좋을까, 야단이나 맞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선생님을 찾을 때 그들의 그런 불안까지 공감하면서 편안하게 자신을 열고 탐색하게 해주는 이해심 많은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다. 생후 1년 된 아기와 어머니의 관계를 일정기간 관찰 연구한 아인스워스(Ainsworth)는 아이와 안정된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어머니는 그렇지 않은 어머니에 비해 아이의 요구에 민감하였고 적절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2차 성징의 발현을 비롯한 신체적 변화와 그로 인한 정서의 변화를 겪게 된다. 청소년이 처해 있는 독특한 발달단계와 과업들에 대해 잘 이해한다면 그들의 변화에 민감하고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2. 상담자적인 마음을 갖자 교사의 주 업무는 교과지도와 생활지도이다. 각자 담당한 교과목의 전문가로서 지식을 전수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으며, 갈수록 심각해지는 청소년 문제와 급속한 사회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학교 상담에 대한 요구도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상담이 학교현장에 도입된 195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학교 상담실 운영 형태를 보면 상담의 전문성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단기간의 상담교육을 받고 교도교사로 임명된 교사가 주로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고 현재는 진로상담교사로 명칭이 바뀐 상담교사와 담임교사 혹은 교과 담당 교사가 면담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또한 단기교육을 받은 학교 상담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집단상담과 개인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 상담교사나 자원봉사자들은 단기교육이라도 받지만 대다수 교과담당 교사들은 상담이나 생활지도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교과지도 능력이 뛰어난 교사라고 해서 상담도 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상담은 문제 행동을 처벌하고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갖고 있는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보다 전문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은 상담의 전문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교과지도를 위해 시간을 들이고 연수를 받는 것처럼 상담이나 생활지도를 위해서도 전문적인 교육과정이나 연수과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모든 교사가 전문적인 상담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담교육과 연수를 받음으로써 상담자적인 태도와 마음을 갖춰야 할 것이다. 이미 청소년 문제가 발생한 뒤에 조치하는 것은 늦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으며 문제 예방에 있어 학교의 역할이 중요함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모든 교사가 아이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을 들으려는 마음과 적절한 기술을 갖고 있다면 청소년의 문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을 것이며 필요한 경우 전문적인 도움을 받도록 기관이나 시설에 의뢰할 수 있을 것이다. [PAGE BREAK]3. 가족, 지역사회와 협력하자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학교와 가정과 사회가 협력해야 한다. 한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청소년들을 잘 키우는 일은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학교는 아이들이 가정에서 배워야 할 기본적인 것조차 익히지 못한 채 학교에 오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가정에서는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다고 불만이다. 이리저리 책임을 돌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가정과 학교가 연계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 어머니는 학교에서는 예의바르고 서글서글한 아들이 어느 날부터 부모에게 반항하고 형제들과 싸우기 시작했는데, 이런 아이의 문제를 교사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행여라도 담임교사가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되면 오히려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사실 그 아이를 잘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좋은 점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학교의 교사였을지도 모른다. 독립과 의존의 갈등을 겪으면서 자기를 형성해 가는 청소년기에는 부모보다 교사의 역할이 더 크고 중요하다. 독립과 의존을 반복하며 시험할 때, 독립을 지지하고 격려해 주며 의존하게 해주고 다시 독립을 시도할 힘을 북돋아주는 사람이 교사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협력해야 할 대상에는 (상담전문교사가 있다면) 학교의 상담교사나 외부의 전문 상담자도 포함된다. 교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전문 상담자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담임교사는 마치 부모와 같이 반 아이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반 아이가 상담교사를 찾아가는 것을 섭섭해하거나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담임교사의 학급경영 능력이나 생활지도 능력의 부족으로 인식될 거라는 두려움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상담교사와 담임교사가 분리되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아이의 입장과 상관없이 내 아이는 내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담임교사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오히려 좀 더 깊은 상담이 필요한 아이를 학교상담실이나 외부의 전문상담기관에 적절하게 의뢰(refer)할 수 있는 것이 담임교사의 능력이라 하겠다. 나오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 학교이다. 그렇다면 학교는 꽃밭이어야 한다. 수백송이의 꽃이 어우러져 피어있는 아름다운 화단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학교에는 시들시들 자고 있거나 자의 반 타의 반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이들이 있다. 이들을 깨우고 학교 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훈육과 처벌이 아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발견하여 그것을 꽃피우게 하려면 사랑의 눈으로 그것을 발견해 주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가정, 학교, 지역사회, 그 어느 곳이건 단 한 명이라도 그 역할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학교는 그리고 교사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 상처를 회복시키기도 하는 존재이다. 한 사람 교사에 의해 아이의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들기도 하나, 이해하고 수용하며 귀기울여 주는 한 사람 교사에 의해 극적인 변화와 성장이 가능한 곳이 학교인 것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학교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우러져 피어나는 것이다. 모든 교사가 한 아이 한 아이의 개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려는 상담자의 마음과 태도를 갖고 있는 학교, 그리고 학교와 가정, 지역사회가 함께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여주 잘 아는 사람들도 남한강변 습지는 몰라 논은 아이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논에는 수생식물, 풀꽃, 곤충, 양서류들이 어울어져 사는 생태계의 창고 같은 곳이다. 물고기와 물벌레(수서곤충)며 연체동물도 논에서 부화하여 살아간다. 또 그들을 노리는 조류들도 논을 떠나 따로 놀지 않는다. 논뜰을 지나면 자갈과 모래로 덮힌 드넓은 둔치의 대초원이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남한강 본류가 돌아나가고 앞쪽으로는 장마철이면 이따금 섬이 되는 섬숲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모래와 자갈밭을 덮은 대초원이 펼쳐져 있다. 이곳 초원의 식생은 갈대와 물억새 같은 습생식물과 띠와 사초 같은 건생식물들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온통 자갈과 모래뿐이어서 식물들이 살아가기에는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장마철에는 건생식물들이 골탕을 먹고,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습생식물들이 견디기 어렵다. 달맞이꽃·망초·개여뀌·도꼬마리·땅빈대·강아지풀 등과 같은 귀화식물들도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다. 강가 주변으로는 십자화과 식물들이 눈에 많이 띈다. 황새냉이, 꽃다지, 개갓냉이, 나도냉이, 속속이풀이 모두 십자화과 식물이다. 봄이 무르익으면 깨알처럼 작은 꽃들이 자지러지게 핀다. 자갈밭 가운데 얕은 습지가 있다. 마치 길다란 수영장을 연상케 해준다. 어른들의 무릎을 조금 넘는 알맞은 깊이는 여름철 아이들이 물장구치고 놀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이 습지는 장마가 끝난 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강물이 낮은 데로 모여서 된 것이다. 하지만 물이 맑고 찬 것을 보면 지하에서 꾸준히 샘이 솟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웬만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천혜의 습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갈과 모래가 깔려 있어서 수질도 1급수에 가깝다. 넓은 연못 모양을 한 습지에는 다양한 수서생물들이 살고 있다. 게아재비, 각다귀유충, 강도래유충. 날도래유충, 물방개, 물자라, 물장군, 소금쟁이, 장구애비, 잠자리 유충, 하루살이유충 등을 비롯해 민물새우, 옆새우, 다슬기, 물달팽이, 플라나리아, 달팽이, 가재, 거머리, 재첩, 말조개 등이 관찰된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이름 모를 생명체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이것들은 이곳 생태계 피라밋의 든든한 기단 역할을 해주고 있다.[PAGE BREAK]‘수달’ 찾아와 후식하듯 물고기 사냥 강변의 초원에는 엉겅퀴, 찔레, 지칭개, 애기똥풀꽃 등이 모래언덕을 눈맛 좋게 덮고 있다. 길섶 풀밭에 피어난 엉겅퀴에 은점선표범나비 한 마리가 정신없이 꿀을 빨고 있다. 작은은점선표범나비는 주로 낮은 구릉에 살며,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에서 관찰된다. 주로 국화과 식물을 좋아하는데, 야산 숲 속과 밭둑에 지천으로 깔린 쑥부쟁이, 벌개미취, 왕고들빼기, 털쇠서나물, 망초, 개망초, 민들레, 엉겅퀴, 구절초 등이 모두 국화과 식물들이다. 강변으로 나가면, 모래톱을 끼고 남한강 푸른 물이 산 그림자를 싣고 유장하게 흐르고 있다. 강에는 군데군데 큰 자갈 여울이 넓게 깔려 있다. 여울은 경사가 있어서 산소공급이 활발하다. 건너편 산그림자 드리운 곳에는 흰뺨검둥오리와 원앙들이 탁족(濯足)을 하고 강 한가운데는 농병아리와 쇠물닭 한 쌍이 자맥질을 하고 있다. 모래톱에는 백로와 왜가리들이 바짓가랭이를 걷고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물고기를 쫓고 있다. 둔치 초원과 습지 주변, 그리고 인근 농경지에는 참개구리에서부터 청개구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개구리들이 거의 다 모여서 산다. 강을 끼고 내려가다 보면 넓은 둔치 들녁 사이에 또 다른 습지가 자리하고 있다. 아까와는 달리 어른 두 길이 넘는 깊이를 보면 이 습지가 오래 전에 골재채취로 생긴 것임을 말해준다. 몇몇 낚시꾼들이 낚시를 드리워놓고 낮잠에 푹 빠져 있다. 망태기 안에 몇 마리의 민물고기들이 들어있다. 계절과 지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이 지역 습지에서 관찰되는 물고기들은 누치에서 잉어에 이르기까지 남한강에서 관찰되는 물고기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장마철이면 곧잘 남한강 본류와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덩치가 작은 것들이 주로 산다는 점이다. 외래종인 떡붕어, 배스, 파랑볼우럭(블루길)도 몇 곳의 습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수달이 가끔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발자국이 남한강 본류로 이어져 있는 걸로 보면 이따금 습지를 찾아와 후식하듯 물고기들을 사냥하고 가는 게 분명하다.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이 지역에 수달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만큼 자연생태가 튼실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누가 알까 두렵다. 온통 갈대와 물억새 … 꽃창포 몇 포기도 습지 주변은 온통 인적 드문 갈대밭과 물억새밭이다. 습지가 맑은 수질과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이들의 공이 크다. 또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생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이 습지엔 새들이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많다. 떠벌이 개개비가 잠든 낚시꾼 등 뒤 갈대밭 속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다. 개개비는 마른 풀잎을 물어다 갈대 줄기에다 칭칭 감듯이 둥지를 짓는다. 이웃한 습지 뒤로는 야산이 내려와 있고 습지 가장자리로 갯버들을 비롯해 부들, 갈대, 줄, 방동사니, 달뿌리풀 등이 자리해 있다. 군계일학처럼 꽃창포 몇 포기가 화사하게도 피었다. 갈대와 물억새와 온갖 귀화식물들이 무섭게 뒤덮고 있는 이 허허벌판도 홍수가 내려오면 물에 잠기고 야산 같은 구릉지대만 섬이 되어 둥둥 뜬다. 서양민들레는 유럽에서 건너온 것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시도때도 없이 피고 진다. 꽃이 크고 잎이 갈라진 상태가 날카롭다. 심하게 뒤로 젖혀지는 것도 우리 토종 민들레와는 다르다. 우리꽃 지칭개는 국화과 식물로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쉴새 없이 피고 진다. 부전나비 한 마리가 꽃에 앉아 미동도 없이 낮잠을 즐기고 있다. [PAGE BREAK]둔치와 이어진 야산 숲속에는 찔레꽃이 허무하게 지고 있다. 그 뒤로 까치수영이 버스칸의 여학생들 수다처럼 하얗게 피어있다. 까치수영은 약간 습한 풀밭에 나는 여러해살이 풀꽃이다. 패랭이꽃, 좁쌀꽃, 물봉선, 돌양지꽃, 솔붓꽃, 쇠뜨기, 원추리 등도 그 주위로 어울려 피어 있다. 목본류로는 인동, 산딸기, 쉬땅나무, 쪽동백, 개다래, 으아리, 사위질빵 등이 군데군데 무리를 짓고 있다. 초원 가운데 숨어 있는 습지의 물이 맑고 찬 것을 보면 지하에서 끊임없이 샘물이 솟구치고 있어서 갈수기에도 일정한 수량을 보여준다. 위기에 처한 동물에 아지트 같은 습지 습지는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에겐 고향처럼 되돌아가서 숨을 고를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아지트 같은 곳이다. 또 생태계 복원의 공간적 기회를 제공해주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생물종의 출현을 가능케 해준다. 어느 습지에나 흰뺨검둥오리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텃새인 흰뺨검둥오리는 물오리이면서도 야산 숲 속에다 알을 낳는다. 이따금 관찰되는 원앙도 숲속 나무둥지 속에다 알을 낳는다. 꼬마물떼새와 할미새도 이곳 습지의 조류 가족이다. 여름철새인 이들은 모래나 자갈바닥에다 알을 낳는다. 꼬마물떼새는 하얀 목테두리와 노란 눈테두리가 환상적으로 예쁘다. 알이 자갈무늬를 띠고 있어서 쉽게 발견되지는 않지만 어미새가 의태를 보이면 그 부근엔 반드시 보금자리가 있다. 의태란 적이 나타나면 어미새가 부상당한 시늉을 하면서 적의 눈길을 딴 데로 돌리는 행동을 말한다. 물가 모래밭엔 물을 마시러 왔다 간 고라니 발자국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야산과 인접해 있어서 족제비, 멧토끼, 들쥐, 청솔모 등등 여러 종류의 포유류들이 야산과 초원을 오가고 있다. 하천의 둔치 상태를 보면 그 하천의 생태적 상황을 진단할 수 있다. 둔치에 동식물들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면 그 강도 함께 건강하다. 더욱이 여주 지역처럼 생명의 오아시스 같은 둔치습지까지 거느린 강이라면 더욱 말할 것이 없다.
경제교육의 첫걸음은 ‘돈’부터 알기 돈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생활 속에서 건전한 소비습관과 경제관념을 가르쳐야 하는 시대이다. 가정에서의 소비 생활, 금전 관리, 정리 정돈 등에 대한 습관과 태도는 성인이 되어 감당해야 할 직업 및 경제 활동의 성공적인 삶을 위한 필수요소이므로 공부 못지 않게 중요하다. 경제교육은 학생들이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써야 할 곳에 잘 쓰는 습관이 중요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고 사회생활을 하라는 의미가 있다. 체험을 통한 경제교육의 장소로 화폐박물관은 더없이 좋은 곳.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조폐공사에 있는 이 박물관은 1988년에 설립된 이래 연중 14만여 명이 찾을 정도로 관람객이 많다. 뛰어난 조형미와 우아한 건축미를 갖춘 박물관 앞마당의 압사기(screw press)와 코인트리(coin tree) 조형물은 이곳이 화폐 역사의 메카임을 잘 말해준다. 3개의 전시실에는 우리 나라 화폐제조 역사와 국내외 화폐의 사료와 연혁, 전시물인 주화류, 지폐류, 우표류, 메달류, 압인기 등 10만여 점에 이르는 화폐 관련 자료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동전·지폐 등 화폐의 역사 더듬기 제1전시실 중앙부에는 조선시대 금화, 은화, 적(赤)동화를 찍어내던 압인기가 크게 자리잡고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오른편으로 조선시대 후기 주전소에서 주물사(鑄物沙)에 의한 방법으로 엽전을 만들던 모습을 축소 모형으로 재현한 것이 있다. 거푸집에 쇳물을 붓고, 풀무질하고, 완성된 엽전을 정리하고, 무집의 엽전을 떼어내는 등의 모습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의 많은 시간을 빼앗는다. 화폐 이전의 물품화폐인 패화와 어폐에다가 고대의 금속화폐인 포전, 도전, 진 반양화 등을 구경하고, 그리스 화폐와 로마 화폐 등도 볼 수 있다. 특히, 우리 나라 최초의 화폐인 고려 성종 때의 건원중보(乾元重寶)를 비롯해 조선 고종 때의 대동은전(大東銀錢)과 대원군이 경복궁 증축을 목적으로 발행한 당백전(當百錢) 등 교과서에 나오는 주화를 직접 확인할 수도 있다. 주화제조공정을 눈으로 보면서 설명까지 받을 수 있게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제2전시실에는 은행권과 제지제품, 그리고 인쇄기계와 초지기계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구한말 우리 나라에서 임시로 사용한 일본 제일은행권을 비롯해 최근의 한국은행권과 은행권 제조공정을 볼 수 있다. 부모님과 함께 왔다는 경남 창원 반송 초등학교 김단홍, 단비 자매는 체험기록장에 깨알같은 글씨로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적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돈이잖아요. [PAGE BREAK]아이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말로만 깨우치기보다는 직접 관찰하고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는 이들의 아버지는 “화폐 제조 과정이 이렇게 복잡한 줄 몰랐다. 이제부터는 돈을 깨끗이 쓰도록 가르치고 용돈기록장을 기록하여 돈을 제대로 쓸 수 있게 지도할 생각”이라고 했다. 제3전시실에는 국내외 우표와 훈장, 메달 등 조폐공사에서 제조한 제품과, 진귀한 외국 화폐 및 100여 개 나라의 현용 화폐들이 전시되어 있다. 멀티 슬라이드를 통하여 화폐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영상실도 마련되어 있다. 스마트 키즈의 첫걸음을 이곳에서 “돈의 제조과정을 직접 봄으로써 돈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작은 돈도 귀중하게 여기는 태도를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고 최한규 박물관 홍보부 과장은 말하며 “박물관 견학에 앞서 화폐에 관한 상식을 미리 정리해서 공부하고 오는 것이 관람시에 효과적일 수 있다”고 했다. 예컨대 화폐박물관 홈페이지(www.komsep.com/museum/)에서 전시물을 미리 읽고 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란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돈’의 소중함을 깨침으로써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건전한 생활인으로 자리잡도록 하는 경제교육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스마트 머니, 스마트 키즈’란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제생활 관련 책이 있듯이 돈 쓸 줄 아는 아이, 즉 스마트 키즈(smart kids)를 키우는 첫걸음을 화폐박물관에서 내딛어보자.
교수-학습 과정에서 말하기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말하기는 수업활동의 기본이고 자기표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학창시절 아는 것도 쑥스러워 발표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틀린 답이지만 자신 있게 말해 칭찬과 격려를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전 전민초등학교 이화숙 교사(46)는 말하기가 아이들의 수업태도와 학교생활, 나아가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큰 영향을 준다고 판단해 말하기 교육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올해로 교직생활 24년째인 이 교사는 자신이 개발한 체계적인 말하기 교육 프로그램을 갖고 아이들을 지도한다. ‘말하기·듣기 기본 훈련 다지기’→‘소집단 토의를 통한 말하기 지도’→‘다양한 활동을 통한 말하기 지도’가 기본적인 큰 틀이다. 자기소개 시간에 이름도 제대로 못 대는 아이, 선생님이 설명할 때 딴전 부리는 아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쉬는 시간에는 세상이 떠나갈 듯 떠들다가도 수업시간에는 한 마디 못하는 아이 등등. 이런 아이들이 이 교사와 함께 몇 개월 생활하면 눈에 띄게 달라진다. 학기초에는 ‘말하기·듣기 기본 훈련 다지기’부터 시작된다. 고개를 들고 친구들을 보면서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는 훈련을 시킨다. 말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용건(요지)부터 말한 다음 뒷받침할 만한 이유와 까닭을 차례대로 말하게 한다. 이 교사가 만든 ‘목소리 볼륨표’와 ‘목소리 척도자’가 이용된다. 볼륨표는 소리를 5단계(1-둘이서, 2-소집단에서, 3-쉬는 시간에, 4-모든 사람 앞에서, 5-교정에서)로 나눠 때와 장소에 따라 적당한 소리를 내도록 한 것이고 척도자는 목소리의 대소를 인식시키기 위해 4단계(1-너무작다, 2-좀더 크게, 3-합격, 4-너무크다)로 음량만 재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의 음량을 합격점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이 같은 기본 훈련 다지기가 끝나는 5월쯤이면 아이들은 말하기에 어느 정도 자신을 갖고 발표시에는 “∼겠습니다. ∼합니다.” 등 제법 체계를 갖춘다. [PAGE BREAK]‘소집단 토의를 통한 말하기 지도’의 시작은 등교 즉시 짝과 마주 앉아 아침 인사말을 볼륨표 1단계의 소리로 주고받는 것부터다. 3, 4월 수업시작 10분전에 1분단부터 순서대로 나와 서로 마주 보고 짝과 인사말을 하게 한다. 5월부터는 짝에게 들은 이야기에 자기의 생각도 넣어 전체 앞에서 말하게 한다. 인사말 단계를 지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을 잘 듣고 반 전체 친구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어 발표력을 향상시킨다. 월별로 짝을 바꾸어 모든 친구들과 골고루 말하게 한다. 이러한 짝과 말하기 단계가 훈련되면 모둠끼리의 소집단 토의활동, 소집단 토의활동을 전체가 집중해 보게 하는 활동, 무조건 발표하는 단계 등으로 수준을 높여간다. ‘다양한 활동을 통한 말하기 지도’는 그 동안의 훈련으로 자신감을 얻은 어린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는 ‘주말 지낸 이야기’를 하게 하고 친구들은 서로 칭찬해준다. 막대인형, 탈 등 소도구를 이용하여 1인2역의 역할극을 하게 함으로써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 수준 높은 언어구사력을 키워준다. 이 단계에서는 미리 제시한 학습과제를 가정에서 조사한 뒤 수업시간에 발표하게 함으로써 말하기 능력을 크게 향상시키게 된다. 어린이들은 일단 등교하면 하루한번 이상 누구나 자신감을 갖고 발표를 해야 한다. “효과적인 수업이 되려면 학생들이 발표를 많이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 교사는 “자기 이름도 말하지 못하던 어린이가 손을 들고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말하기 훈련을 통한 발표력 신장은 모든 교과학습의 기본이고 인성교육의 시작”이라며 “앞으로 더 체계적이고 일반화하기 쉬운 프로그램을 개발, 다른 선생님들과 공유할 기회를 갖게 되면 좋겠다”고 밝혔다.
한시기구로 출범한 비대위를 상설기구로 전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대위는 정년환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구입니다. 지난해 9월 비대위가 출범할 당시는 11월 국회에서 교육공무원법 개정안 통과를 목표로 설정하고 그때까지 한시적으로 활동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육위와 법사위까지 통과한 법안이 한나라당의 입장 선회로 국회에 계류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가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며 현재도 국회 본회의 통과를 남겨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활동을 연장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대위가 상설기구로 전환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한시기구로서 활동을 연장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기구의 명칭이나 조직의 변화는 없는 것입니까? “기구의 명칭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출범 당시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므로 조직을 현실에 맞게 효율적으로 재조정할 예정입니다. 초기에는 논리 개발 업무, 교육자 대회 동원 업무, 정치권·교직단체·정부를 상대로 한 대외활동 업무 등 크게 3개 부문으로 구분하고 수도권, 그 중에서도 주로 서울의 교원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방으로의 연락은 교직단체나 교장회 조직을 통한 전달 방법 등을 택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전달 속도가 늦고 확인 절차가 간접적으로 이루어져 확실성이 결여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대위 자체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각 단체의 도움을 받아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인사로 전국 네트워크 조직을 구축하여 정년 원상회복의 불 길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계획입니다. 예산관계도 있고 하여 현 단계에서는 서울의 조직을 축소하고 시·도별로 3명씩(초·중·고 각 1명) 구성하여 지방 45명을 포함한 70명 정도의 조직으로 다시 시작하고자 합니다.” 비대위는 그동안 어떤 활동을 펼쳤습니까? “비록 3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2001년 9월 25일 처음으로 발기인 대회가 있었습니다. 출범은 남암순 한국초등교장협의회장을 비롯, 14개 전국 교장회의 대표들로 시작되었으나 그 후 정범모 한림대 석좌교수, 김종서 서울대 명예교수, 김상준 전 서울시 교육감, 정원식 전 국무총리 등 32명의 교육계 원로와 중진들의 적극적 지원을 얻으면서 폭넓게 동참세력을 확대하였습니다. 비대위는 지도위원 21명, 실무위원 21명 등 봉사할 뜻을 가진 교장 교감 교사 42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보다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동원기획 1·2·3부, 대외활동 1·2·3부 및 자료수집개발부로 조직되어 업무를 분담하였고 5차에 걸친 확대회의를 통해 활동상황을 점검, 논의해왔습니다. 비대위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한 주요 활동은 대내적으로 정년환원의 필요성을 확산시키고 흩어져있던 교원의 목소리를 결집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교총과 손잡고 지난해 11월 10일 여의도에서 전국 교육자 대회를 추진하고 교원 동원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전국의 단위학교에 연락망을 구축하여 비대위의 활동을 알리고 교육자대회 참여를 독려하였으며 성금을 모금하여 정년환원이라는 목표 아래 교원들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PAGE BREAK] 또한 대외적으로는 대 정치권 활동을 통해 각 정당 관계자들에게 정년환원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설득하여 법안의 국회상임위 통과를 가능케 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언론을 통해서도 정년환원의 필요성을 알리는 글을 수 차례 게재한 바 있습니다. 물론 경험과 여건, 시간의 부족 등으로 뜻한 바를 충분히 이루지 못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는 힘을 모아 최선을 다했 습니다. 우리 교육역사상 이처럼 교단 내부에서 결집된 목소리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교원정년 연장 내지 환원이라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어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말씀입니까? “최종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정년 1년연장을 골자로 하는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이 교육위와 법사위까지 통과한 것은 법안 처리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으로 이는 16대 국회 회기까지 유효한 것입니다. 내외적으로 여건이 성숙되면 다시금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활동할 것입니다. 이것 말고도 교단 내부의 목소리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교단에서는 위에서 밀어붙이는 일에 대하여 속으로만 중얼거렸을 뿐 현장의 실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부적절하거나 무리한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정직한 피드백을 하지 못하고 소화 안 되는 것들까지 꾸역꾸역 집어넣어 왔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 교육의 소화불량과 질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원들이 지닌 무던함과 성실성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바람직한 덕목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아픈 것을 아프다고 하지 못하고 오히려 병을 키워간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 비대위는 그런 태도를 지양하고 건강한 교육의 미래를 위하여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표현할 것은 표현하여 사회 전체가 교육현실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함께 발전적 방향을 모색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비대위의 활동을 통해 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나라당이 소위 '국민의 여론'에 밀려 연장안을 처리하지 않았는데 국민의 여론이라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한 중대한 교육문제를 여론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는 여론이라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문제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교육의 중요한 문제들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들은 여론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마는 나라살림을 책임진 사람들이 멀리 내다보고 바람직한 비전을 제시하며 국민들을 이끌어갈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정년환원에 대해 마치 정년을 앞둔 교장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간 정부의 여론조작은 교육개혁에서조차 밀리면 끝장이라는 집권당의 강박관념에서 나온 자기생존의 논리였을 뿐입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얄팍한 당리당략에 매달려 소신을 바꾸는 한나라당의 줏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여론이 교원들의 정년환원에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작금의 교육붕괴와 교육이민이라는 현실을 놓고 볼 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교육이 황폐화된 데는 교원을 개혁 대상으로 몰아붙이고 단순한 경제논리로 교원정년을 3년이나 단축시켜버린 정부의 잘못된 교육정책이 한 몫을 했던 것입니다. 정년단축을 강행한 결과는 오히려 교원의 사기저하, 연금기금의 악화, 정부와 교원간의 신뢰 상실, 그리고 심각한 교원부족 대란을 초래했을 뿐이며 이미 실패한 정책임이 자명해진 상황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주어진 과제는 하루 빨리 교육을 바로 세워 교원들이 신명나게 교육에 전념하고 학부모들은 안심하고 학교를 신뢰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PAGE BREAK]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너진 교권을 확립하고 교원들에게 자존심을 되찾아주어야 하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교원의 정년환원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홍보와 이해의 부족이 일부 국민들에게 정년환원을 부정적으로 보게 한 원인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교육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논의가 이어진다면 여론도 교원의 입장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 기대합니다.” 비대위 활동 중 어려웠던 일은 무엇입니까? 교원들의 참여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많은 격려와 성원에 비한다면 어려움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굳이 어려움을 든다면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비대위 활동을 교장들의 집단이기주의로 보는 안팎의 차가운 시선이었습니다. 지금의 학교 체제가 과연 교장과 교사의 대립 구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교원 정년환원이 과연 교장들의 기득권만 유지해 주고 일반 교사들에게는 아무런 득도 없는 조치입니까? 굳이 득의 다과(多寡)를 따진다면 교장들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교원들의 자존심 회복이라는 거시적 입장에서 보면 결국 오십보백보가 아니겠습니까? 제 스스로 양심의 거리낌이 없으니 크게 구애받지는 않았습니다. 둘째는 실무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전국적인 네트워크의 미비로 일선 학교에 대한 자료 송부나 그들의 의견 수합 등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교원들의 참여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은 적절치 못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교원들이 우리들의 일에 동조했다고 판단합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5만여 명의 교원들을 동원해 교육자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게 하였고 정년 원상회복 관련 서명지에는 2000여 학교에서 약 7만5000명의 교원 중 5만6000여 명이 지지서명을 함으로써 74.6%라는 높은 지지율을 보였습니다. 여론이란 누가 어떤 의도에서 조사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는 표본조사에 의한 여론의 확인이 아니라 교사들이 직접 서명한 교사들의 서명지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정부의 정년단축은 왜 잘못된 것이고 정년단축의 폐혜는 무엇입니까? “정부의 정년단축은 교원들에게 특히 노·장층 교원들에게 피맺힌 한을 머금게 한 처사였습니다. 정부의 처사는 이렇습니다. 힘있고 단결력 있는 젊은 교사들에게는 전교조 합법화란 당근을 주어서 소극적이고 형식적인 반대 성명만을 내게 하면서 현 정부는 무난하게 정년단축을 단행했습니다. 참으로 한스러웠습니다. 교원의 생존권에 영구히 영향을 미칠 정년단축은 금융위기 중에 별다른 논의도 없이 방송, 신문 등의 언론을 총동원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고령교원들의 부패와 무능, 파렴치함을 들추면서 퇴출의 명분을 1년 이상 쌓아 가는 중에 교원의 사기는 천길만길 아래로 실추되었고 이러한 결과 학교 현장은 교실붕괴, 국민은 교육도피이민 등의 현상이 만연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년단축이 왜 잘못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상세한 답변을 비대위에서 개발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교원 및 학교 교육에서의 문제점으로 교원 사기저하와 교단침체 가속화로 인한 학교 교육의 붕괴를 촉진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경제논리에 입각하여 교원정년을 단축함으로써 교원들의 의욕을 떨어뜨려 1998년 8월에서 2001년 2월까지 무려 5만명 이상의 교원이 일시에 정년·명예퇴직으로 교단을 떠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PAGE BREAK]둘째는 교원수급상의 문제점으로서 퇴직자 급증으로 인한 교원 부족사태가 유발되었고 교육의 질적 저하와 공교육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점입니다. 정부가 교원 정년단축을 추진할 당시 고령교원 1인을 퇴출시키면 신규교원 2.59명을 채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1:1 충원도 하지 못하여 교육의 질 저하를 초래했습니다. 초등학교의 경우 지난 2001년도 1학기에 3020명을 기간제교사로 임용하여 교원부족을 땜질하였습니다. 실제로 1998년에서 1999년 사이에 퇴직한 초등교원 2만2000여명 중 33.6%에 해당 하는 7400여명이 기간제교사로 복귀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셋째, 경제논리에 입각한 교원정년단축 효과의 허구성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초 정부가 주장한 교원정년단축에 따른 경제효과는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시에 교원이 대량 퇴직함에 따라 공무원연금 운용의 어려움이 가중되었으며 명예퇴직금의 일시지급에 따라 시·도교육청의 부채가 급증하였습니다. 게다가 명퇴교원의 기간제교사 채용에 따른 보수의 2중 지급으로 인하여 정부가 당초 내세웠던 교원정년단축에 따른 경제효과는 전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년환원의 당위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선 교단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교원의 구조조정은 연령이란 하나의 잣대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60세가 넘어도 교단에 설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이 있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50세 이전의 교사 중에도 부적격자는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초·중등 교육공무원은 직무의 전문성과 특수성에 비추어 법관이나 대학교수와 같이 정년을 65세로 하여 축적된 경력을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학습지도에 능통한 교사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경륜으로 인성교육을 담당할 교사가 조화롭게 공동체를 이룩해야만 학교교육이 바로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타 직종에 비해 근무 여건과 보수 체제가 열악한 가운데서도 그 동안 65세 정년이 우수교원 확보를 위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같은 교육공무원인 대학교수의 정년은 65세입니다. 초·중등 교원과 대학 교원간의 불평등 해소와 교원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정년 원상회복은 반드시 이뤄져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정년단축 과정상의 절차와 방법과 논리가 교육본질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IMF 체제하의 경제논리와 상황논리였으므로 그 동안 경제적 효과도 이루지 못했음이 입증되고 상황도 바뀌었으므로 그 정책도 달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원정년 연장 내지 환원과 관련, 일반 국민과 정치권 등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우리 교육을 살리는 일은 누가 혼자 알아서 할 일이 아니라 교원, 정부, 학부모 모두가 지혜를 모아 함께 협력해야 할 일입니다. 교단이 초라해졌다고 교사들이 떠나가고 교육이 붕괴되었다고 학생들이 떠나버리면 교육은 더욱 악순환에 빠져들 뿐입니다. 교육의 질이 교원들의 수준 이상일 수 없습니다. 부디 교원들의 상실된 자존심과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국민들이 관심과 이해를 가져주시길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정치권에서 우리 나라 교육의 미래를 위해 교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당리당략을 넘어선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해줄 것을 당부합니다. 교육에는 교육의 논리가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정치나 경제논리로 매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원들로 하여금 의욕과 사명을 가지고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뒷받침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용환(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교수) 지금 우리는 우리 나라에서 개최되는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16강에 들기 위해 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노력하고 있다. 축구에서 16강에 들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데, 작년도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에서 우리 나라는 독일, 일본을 제치고 종합 우승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O,L 대회에서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무려 13번이나 종합 우승을 하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가? 기능올림픽 우승의 주역은 바로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들이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들은 지난 50년 동안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산업 현장에서 땀흘려 일해 온 발전의 원동력이요 주역이었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 나갔던 많은 실업고 졸업생들이 실망하여 자리를 옮기거나 대학 진학으로 방향을 바꾸려고 하였다. 막상 대학을 진학하려고 하나 실업고 졸업생들에게는 대학의 문이 너무나 높고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실업고에서 배운 실용적인 내용은 대학 진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취업을 하여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대학 진학에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실업고 사정을 간파한 중학교 졸업생들은 자연히 실업고를 기피하게 되었고, 급기야 실업고 교육은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산업 기능 인력 양성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실업고 학생은 우리 나라 전체 학생의 약 40%를 점하고 있다. 실업고 교육을 살리지 않고서는 우리 나라 교육의 정상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산업의 지속적인 발전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는 지금 너무 첨단화하고 있거나 인문 중심의 교육으로 흐르고 있다. 첨단 분야만 귀중하고 나머지 분야는 등한시되는 감을 떨칠 수가 없다. 물론 국가 발전을 위하여 첨단 기술 분야의 발전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첨단 분야의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을 생산해낼 수 있는 분야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첨단 분야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실업고 졸업생들이 취업하는 곳은 첨단 분야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실업고 출신들은 우리 나라 산업을 지지하고 있는 분야의 핵심 기능 인력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업고를 살려야 한다. 작년도에 결정된 실업고 출신들이 동일계 대학에 진학할 경우 대학 정원의 3% 범위 안에서 정원외 특별 전형을 통해 입학할 수 있게 한 조치와 대학수학능력 시험에 직업 계열을 신설한 것은 실업고 교육의 진흥을 위한 한줄기 밝은 빛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기간 동안 실업고의 염원이었던 이러한 제도적인 기틀이 마련된 셈이다. 이 제도를 잘 살려서 우리 나라 실업교육의 진흥을 가져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선 대학이 실업고 출신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문호를 넓혀야 한다. 혹자는 실업고 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낮아서 문제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는 그 동안 제도가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결코 실업을 배웠기 때문은 아니다. 과거에 실업고 졸업생들에 대한 동일계 진학 제도가 있었을 때에는 수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실업고로 진학하였고, 그들은 지금 사회의 각계 각 분야에서 지도자로, 핵심 기능 인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제도를 시행하게 되면 앞으로 실업고에 우수한 학생이 올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재학하고 있는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배려를 하여 성공적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협조하여야 한다. 그래서 모처럼 마련한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실시되어 실업교육이 다시 진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실업고는 대학과 산업 현장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학생 양성을 위하여 노력을 배가하여야 한다. 그래서 학생, 학부모, 산업체, 교사 등 실업교육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실업교육이 되도록 해야 한다. 실업고의 실업교육이 진흥될 때, 우리 나라의 지속적인 산업 발전도 함께 약속될 수 있을 것이다.
강인수(수원대 교육대학원장) 1. 머리말 성교육 활동에서 교사의 흥미중심으로 성인수준의 표현방법이나 시청각 교재를 활용하는 것은 학생 교육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성교육 효과를 저해하고 학생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교사의 행위에 대해 교사는 어떠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되는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의 결정문 사례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 원색적 표현으로 성교육을 한 행위 가. 문제와 사건 20년의 경력을 가진 초등학교 교사가 사회과 시간에 학교장의 결재 없이 교과를 임의로 변경하여 반 아동들에게 교육과정 수준을 넘어선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미성숙한 어린이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의 집단 민원을 야기시키고 이 사건이 TV와 신문에 보도되어 교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킴은 물론 전교직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학교교육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키는 등의 사유로 국가공무원법 제56조의 성실의무와 제63조의 품위유지의무 위반으로 해임처분을 받은 사건에서 징계를 받은 교사가 재심위에 재심을 신청하였다. 학부모의 진정 내용과 당해 교사의 주장, 재심위의 판단에서 보면 방학중 실시되는 ‘교원 성교육 및 성상담에 대한 일반 연수’에서 성교육 및 성상담 전문가 자격증을 취득한 교사는 현재의 아동들에게는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교육보다는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교육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지도방법에 따라 교육한다는 생각으로 지나친 표현을 하게 되었다. 즉, 아동들에게 “인터넷에는 O양의 비디오도 있는데 오늘 하루는 용서해 줄 테니 보고 감상문을 써와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심위가 조사한 기록을 보면 그 교사가 아동들에게 인터넷을 통하여 성에 관한 초기화면을 검색하는 장면을 알려주었고 음란 사이트의 화면을 예를 들어 설명한 사실이 있다고 본인이 진술한 바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담임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학생들은 교사가 남자어린이의 성기를 만지는 등의 행위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그 교사는 부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교사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재심위의 결정을 살펴보기로 한다.[PAGE BREAK]나. 교원징계재심위원회의 결정 (1) 원색적인 표현에 대한 책임 재심위는 학부모의 진정 내용과 해당 교사의 주장, 사건을 조사한 기록 등을 종합하여 교사가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반 아동들에게 성교육을 실시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비록 그 교사가 성교육에 대하여 “현재의 아동들에 대해서는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교육보다는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교육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교사가 실시한 성교육 내용들은 마치 포르노의 설명과 같은 것으로서 초등학교 5학년 아동들에게 적합한 교육적 수준의 성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 교과를 임의 변경한 책임 성교육은 학교 교육활동 전반에 걸쳐 다루어지는 것으로서 교사의 판단하에 해당과목과 관련되는 성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할 것인 바, 교과와 청구인이 실시한 성교육과의 관련여부는 차치하고 학교장의 승낙 없이 교과시간표에 없는 성교육을 실시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징계사유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3) 결정 이 교사는 사회과 시간에 성교육을 실시하면서 미성숙한 어린이들에게 성인끼리도 차마 할 수 없는 원색적이고 난잡한 표현을 사용하여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왜곡된 교육을 실시하였고 이로 인하여 학부모 282명의 집단 민원이 발생함으로써 이 사실이 TV와 신문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도되어 교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킴은 물론 전교직원과 학교교육의 명예까지 실추시키는 등 이 교사의 행위는 국가공무원법 제56조(성실의무) 및 제63조(품위유지의무)의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해임처분을 한 원 처분이 상당하다고 하여, 이 교사의 재심청구를 기각하였다(교원징계재심위원회 99-171 해임처분취소청구, 결정문집 제10지1, 2000, pp.55-58). 3. 성적 수치심을 주고 체벌을 한 행위 가. 문제와 사건 경력 11년이 된 고교 교사가 수업시간에 여학생들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언행을 하였고 학생들에게 교육적 한계를 벗어난 체벌을 하여 국가공무원법 제63조의 품위유지의무를 위반하였다 하여 감봉2월 처분을 받고 이를 취소해달라고 재심을 청구한 사건이 있다. 재심위의 판단에 따라 사건 내용을 보면 성희롱 문제와 학생체벌 관련 사건이다. 청구인은 수업시간중에 “나는 많은 못난 점이 있지만 변강쇠다”라고 하거나 배가 고프다고 하는 학생에게 “열달 동안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해 주겠다” “야한 비디오를 나의 지도하에 보자” “리비도는 성욕이니 성욕강화훈련을 해야 한다” “남자 앞에서 춥다고 하는 것은 안아 달라고 하는 것이다” 등의 말을 하였고 여학생과 함께 이마를 비빈 행위, 수업중 눈싸움을 하는 행위, 치마를 입고 있는 여학생의 허리를 잡고 씨름을 하는 행위, 수업중 학생들의 눈을 감게 한 후 칠판 쪽으로 돌아서서 웃옷과 바지를 추스려 입는 행위를 하였으며 이것은 본인도 시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종아리를 때린답시고 종아리를 만진다는 학생들의 주장이나, 성기에 대한 욕설을 조사해 오라는 행위, 앞단추가 풀어졌을 때 학생에게 잠가달라는 행위, 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쓰다듬은 행위, 학생의 가슴에 명찰을 달아 주거나 꺼내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주장과 달리 본인이 부인하고 있으나, 많은 학생들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고 학생들이 성적 수치심과 성희롱을 받았다는 진술하고 있어서 사실로 보여진다고 재심위는 판단하였다. [PAGE BREAK]또 수업중 학생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내가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느냐”고 질문하여 손을 든 학생에게 2∼5차례 구타한 사실, 자기에게 학생들이 ‘싸이코’라고 말한 학생의 이름을 쪽지에 적도록 하여 밝혀낸 뒤 그 학생들의 엉덩이를 빗자루로 5회 정도 구타한 사실 등 여러 차례 정당하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학생들의 머리를 구타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문제가 제기되어 결국 감봉 2월의 징계를 받게 되고 이 징계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였는데 이에 대한 재심위의 결정을 보기로 한다. 나. 결정요지 (1) 성희롱 관련 청구인은 자신이 한 말과 행위는 농담으로 했거나 열심히 공부하면 교과담임으로 적극적으로 밀어 주겠다고 무심코 한 말이고, 수업진행의 도움과 친밀도를 높이기 위하여 하였다고 주장하나, 이러한 행위는 감수성이 예민한 여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사로서 교육적 목적이나 친밀감의 표시의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며 정상적인 교과지도라고 보이지 아니하는 한편, 어떠한 교육환경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성희롱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보여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 학생체벌과 관련 이 교사의 행동에 대해 본인은 교육적 필요에 의해, 교권을 보호하기 위해 학생체벌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교사의 학생에 대한 체벌이 징계권의 행사로서 정당행위에 해당하려면 그 체벌이 교육상의 필요가 있고 다른 교육적 수단으로는 교정이 불가능하여 부득이한 경우에 한 하는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그와 같은 경우에도 그 체벌의 방법과 정도에는 사회관념상 비난받지 아니할 객관적 타당성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할 것이다( 대법원 1988.1.12 판결, 87다카2240 참조).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그 교사는 자신이 학생들이 대응하자 단순히 ‘때리는 것과 때리지 않는 것과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학생들의 엉덩이와 머리를 체벌하였고 그 체벌에 대하여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하며 격한 감정에서 다시 체벌한 것을 볼 때, 그 교사의 체벌이 교육상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른 교육적 수단으로는 교정이 불가능하여 부득이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체벌이 방법과 정도에 있어서 사회관념상 비난받지 아니할 객관적 타당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3) 결정 이 사건에서 재심위는 당해 교사가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사표가 되고 학생들을 인격적 감화에 의하여 바람직하게 교육하여야 할 직무상의 의무가 있음에도 이러한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국가공무원법 제63조(품위유지의무)를 위반하였다고 한 원래의 감봉2월의 징계처분을 상당하다고 인정하여 재심신청을 기각하였다(교원징계재심위 결정 2000-79 감봉2월처분 취소청구, 재심위 결정문집 제10집, 2000. pp.93-97). 4. 맺는 말 위의 두 사건은 교육활동에서 성교육이라는 명분으로 한 교사의 원색적이고 직선적인 표현에 대한 것과 학생에 대한 체벌의 정도에 대한 교육적 판단과 법적 책임이 다루어진 것이다. 성교육 활동에서는 무엇보다 학생들의 연령, 성장발달 수준, 교육활동의 상황에 따라 적당한 수준의 교육 내용과 방법을 선택하여야 한다. 이러한 수준과 필요에 적합하지 않고 교사의 흥미중심으로 성인수준의 표현방법이나 시청각 교재를 활용하는 것은 학생 교육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성교육 효과를 저해하고 학생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교사에게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체벌의 경우 교사의 체벌이 교육상 필요성이 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다른 교육적 수단으로는 교정이 불가능하여 부득이한 경우에 교육적 판단에 따라 그 행위의 내용과 학생의 연령, 신체적 조건, 교육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특히 그 방법과 정도가 사회관념상 비난받지 아니할 객관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사들은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