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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부산 전교조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바로 알린다는 차원에서 제작한 자료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비하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어 논란을 빚고 있다. 한나라당 김기현(金起炫) 의원은 1일 "전교조 부산지부는 이달 부산에서 개최되는 2005년 APEC정상회의를 앞두고 이에 반대하는 수업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하고 교수학습과정안을 배포했다"면서 "그 중 긍정적인 효과를 설명한 자료는 단 1쪽에 불과하며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자료가 무려 30쪽에 이른다"고 밝혔다. 김 의원이 앞서 전날 국회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공개한 관련 동영상 교육자료 요약본은 부시 미 대통령을 '퍼킹'(fucking) 등 비속어를 남발하며, "(오사마 빈 라덴에게) 테러하는 XX들 다 때려잡아야 돼", "(촛불시위에 대해) 촛불든 XX들 다 테러리스트 아니야"라고 발언하는 인물로 폄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동영상은 전교조 부산지부 홈페이지 자료실에 등록된 APEC 바로알기 수업안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김 의원은 대정부 질문에서 "국회의원이 아닌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 보더라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면서 "이 내용이 교육중립성을 지키고 있다고 보느냐"며 정부의 대처 방안을 추궁했다. 이에 대해 김진표(金振杓) 교육부총리는 "편향시비와 정치적 중립성의 훼손 우려가 있어, 각 시도 교육청에 이 수업자료를 활용해 수업하지 않도록 지도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면서 "전교조에도 APEC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협조해 주고 공동수업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반월정보산업고등학교(교장 신영수)는 디자인 작품전시회를 10월 29일부터 11월 12일까지 2주간 안산청소년수련관에서 갖고 있다. 이 전시회는 그래픽디자인과 학생들의 체계적인 작품 활동을 통하여 그래픽디자인 분야의 기술을 습득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산출하며 진로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매년 열리고 있다. 올해 3회째를 맞이하는 이번 전시회에는 학생 작품 67점이 출품되어 안산관내 중학생과 시민들에게 관람 기회를 제공, 학교 홍보 및 인식 제고에 일익을 하고 있다. 한편, 이 학교는 산학연계 작품전시회를 지난 10월 27일부터 2일간 안산올림픽기념관에서 열어 전교생 및 안산시민 그리고 안산시 교육관계자들이 관람, 성황리에 마친 바 있다. 반월정산고에는 인터넷정보과, 정보처리과, 그래픽디자인과가 있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지역사회 산업인력 양성 우수실업계 고등학교로 선정되어 ERP(전사적자원관리)실 구축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산관학 협력 현장실습을 실시하고 있다. 2005년에는 컴퓨터 그래픽 분야의 지역 산업 전문 인력 육성을 위하여 6개 대학과 6개의 산업체와 연계한 산․관․학 협력 프로그램과 3개 분야의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 과정을 운영하여 정보산업사회의 능력있는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글 | 박하선/사진작가·여행칼럼니스트 캄보디아 밀림 속의 수수께끼 이 지구상 곳곳에서는 일찍이 수많은 문명들이 피어나 전성기를 누리다가 어느 틈엔가 사라지곤 했다. 그 문명들은 모두가 나름대로의 특색을 갖고 있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어떤 것들은 신비의 베일에 싸여 많은 수수께끼를 남긴 채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 대표적인 문명의 하나가 캄보디아의 밀림 속에서 피어난 '앙코르(Ankor)'다. 앙코르는 고대 크메르 왕국 앙코르 왕조시대(9∼15세기)의 유적군 소재지로 1431년 크메르 왕조의 수도가 남동 메콩강 본유역에 천도된 것을 계기로 버려져 그 존재가 잊혀져 있었으나, 현재는 캄보디아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기심으로 발견한 역사의 신비 19세기에 '앙리 무오'라는 프랑스 박물학자가 있었다. 그는 이 밀림 지대를 다니면서 나비를 채집하다가 원주민들로부터 전해오는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이 밀림의 한쪽에는 악마의 저주가 내리는 곳이 있다는 것. 그래서 조상 대대로 어느 누구도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해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소문에 호기심이 당긴 박물학자는 원주민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설득하여 그 악마의 숲을 찾아 나선다. 밀림은 그야말로 앞을 분간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악마의 저주'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공포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밀림 속에서 드디어 기기괴괴한 형태의 구조물들과 직면하게 되자 안내하던 원주민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자신 또한 두려움에 한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정말 이곳은 악마의 집인가!"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용기를 내어 온갖 나무 뿌리들과 이끼들로 뒤범벅이 된 돌들을 딛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악마의 집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다. "우아∼, 세상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앙리 무오의 눈앞에는 엄청난 사실이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밀림 사이사이로 우뚝 우뚝 솟아 있는 해묵은 거대한 돌탑들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발견을 하게 된 앙리 무오는 귀국하여 곧 바로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첨부된 사진이 없어서인지 어느 누구도 그 보고서를 믿어주지 않았다. 답답한 그는 곳곳을 다니면서 열변을 토해봤지만 모두가 허사였고 도리어 그를 정신병자 취급을 했다. 결국 그는 현지에서 얻어온 말라리아가 발병하여 병상에 누워 '앙코르! 앙코르!'만을 외치다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후 앙리 무오의 귀중한 보고서는 도서관의 자료실에 잠들어 있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관할하던 한 해군 장교의 관심을 받게 되어 그 보고서를 밑바탕으로 탐사 작업에 들어가게 되고, 1873년 드디어 크메르 제국의 영광 앙코르가 400여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비라문교와 불교 양식이 공존 앙코르는 캄보디아 프놈펜 북서쪽 약 250㎞, 주도(州都) 시엠레아프 북쪽 5㎞의 톤레사프호 북안(北岸) 근처에 있다. 유적군은 동서 약 20㎞, 남북 약 10㎞에 걸쳐 산재되어 있다. 이곳에 포함되는 수십에 이르는 유적 가운데는 특히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이 유명하다. 앙코르는 산스크리트어로 '나라', '도읍'을 뜻하는 '나가라'에서 어원이 나와, 후에 캄보디아인은 사투리로 '노코르(Nokhor)'라 부르고 이것은 다시 앙코르가 되었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 중반 경에 건립된 사원이다.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수비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 주신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앙코르톰은 톤레사프호(湖)의 북방에 위치한 유적으로 앙코르(王都) 톰(大), 즉 '대왕도'라는 뜻이다. 현존하는 유구(遺構)는 자야바르만 7세(1181∼1218?)가 왕국의 수도로서 조영한 것이다. 앙코르톰의 핵심 유물은 바이욘묘로서 앙코르와트와 함께 앙코르 문화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역사 속의 비밀을 간직한 유적 앙코르의 재발견 이후 그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 등이 세상을 놀라게 해 오면서 많은 추측을 낳고 있지만, 오늘날까지도 이 앙코르 유적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둘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이 엄청난 문명의 멸망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가장 궁금해하고 있을 뿐이다. "제국의 용사들이여!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금방이라도 벽에서 튀어나와 춤을 출 것만 같은 '압사라' 천녀들에게 물어볼까. 앙코르톰의 분위기를 꽉 잡고 있는 '바욘상'의 미소 띈 얼굴들에게 물어볼까. 그것도 아니면 저 밀림 너머로 지는 붉은 태양을 붙들고 물어볼까. 밀림 속 곳곳에서 오늘도 앙코르의 영광은 살아 숨쉬고 있다. * 앙코르의 신비한 풍경들은 새교육 11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 | 김연수/생태사진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나 보다." 미당 서정주의 시구에 나오는 소쩍새. '소쩍, 소쩍' 우는 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구슬프다. 소쩍새는 눈이 주황색이고 입 속이 핏빛처럼 붉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새가 피를 토하고 죽을 때까지 구슬프게 운다고 생각했다. 땅거미가 지면 먹이사냥 시작 올빼미과에 속하는 야행성 조류인 소쩍새(천연기념물 324호)는 우리나라에 소쩍새, 큰소쩍새 2종이 번식한다. 크기는 각각 19cm, 22cm정도로 크게 차이 나지 않으나, 큰 소쩍새는 다리에도 털이 나 있다. 소쩍새는 눈동자가 노란 빛깔이라면 큰소쩍새는 붉은 빛을 띤다. 소쩍새는 주로 곤충을 잡아먹지만 큰소쩍새는 작은 새와 쥐도 잡아먹는다. 깃털 색은 갈색형과 적색형이 있다. 북한에서는 이들을 각각 접동새, 큰접동새라고 한다. 4∼5월 우리나라에 찾아와 농가 주변 고목나무에서 번식하는 소쩍새는 3∼5개의 알을 낳는다. 암컷이 24∼25일 품으면 부화된다. 육추(育雛) 기간은 약 3∼4주 정도로 낮에 암컷은 둥지 안, 수컷은 둥지 밖 주변에서 새끼들을 보호하고 있다가 땅거미가 지면 암수가 교대로 먹이를 잡아다 준다.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어미들은 하루 밤에 약 15분 간격으로 먹이를 물고 둥지에 들어온다. 특히 초저녁에는 한 낮 동안 굶은 새끼들에게 쉴 틈 없이 먹이를 공급하다가 밤 12시가 넘은 심야가 되면 먹이를 잡아오는 간격이 길어진다.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교육 부모의 따듯한 사랑을 받아온 새끼들은 3주 째가 되면 둥지를 떠날 채비를 한다. 나무 구멍 속 깊은 곳에서 생활하던 녀석들이 수시로 구멍 밖의 세상구경을 한다. 어미가 먹이를 잡아오기 전에 머리를 구멍 밖으로 내밀고 기다리며 먹이를 먼저 받아먹으려고 형제들간의 심한 몸싸움을 한다. 이때 호기심 많거나 다소 성질이 급한 녀석이 먼저 둥지 밖으로 활강한다. 아직도 잿빛 솜털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새끼가 둥지 밖으로 뛰어 내릴 때는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인간의 잣대에서 보면 실족해 보이는 새끼를 둥지 속으로 다시 넣어주고 싶지만, 냉정한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 어미들은 강한 자식을 선호하고 강자만이 자연에서 독립할 수 있다.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시기가 되면 어미는 먹이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둥지 밖에서 먹이를 가지고 새끼들에게 둥지에서 나오도록 유인한다. 모든 맹금류가 그렇듯 새끼들이 소극적이면 먹이를 물고 둥지에 접근했다가 건네주지 않고 밖으로 나오기를 반복하면 새끼들은 하나 둘씩 밖으로 따라 나오게 된다. 둥지에서 이소(離巢)한 새끼들은 곧바로 독립생활을 하지 못한다. 둥지 밖에서 어미를 따라 다니며 단계적으로 비행연습과 먹이사냥을 배우게 된다. 천적을 피하기 위한 숨죽임 옛날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시절에는 해마다 어김없이 따라 우는 소쩍새의 울음을 듣고(실제는 봄철 짝을 찾으려고 우는 소리이다.) 함께 슬퍼했었다. 그러나 정작,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에 소쩍새가 새끼를 쳐도 순박한 농촌인심은 모르고 지나쳤다. 새끼를 낳아 기를 때는 천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으려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 야행성 맹금류가 그렇듯, 소쩍새도 역회전 할 수 있는 날개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나무에 앉고 뜰 때 날갯짓 소리조차 나질 않는다. 느티나무가 놀이터인 동네 개구쟁이들의 등살만 피해가면 소쩍새는 그렇게 조용히 농촌마을에서 번식을 끝낸다. 사라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어렵던 보릿고개 철에 슬피 울던 소쩍새들도 도시화, 산업화로 사라지고 있는 농촌과 함께 이 땅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들이 서식할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가 사라지고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농약의 과다한 살포로 그들의 먹이가 되는 곤충들이 급속한 속도로 줄고 있기 때문이다. 보릿고개가 사라진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한(恨)의 정서 속에 대표적인 상징동물이었던 소쩍새들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 주변의 환경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갓 부화한 새끼 소쩍새의 모습을 11월호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국 동북지방의 고구려 유적을 찾아서① 조현호 l 울산 옥현초 교사 고구려로, 고구려로 지난 8월말 중국 동북지방을 다녀왔습니다. 심양을 기점으로 해서 백암산성이 있는 요양, 고구려 첫 도읍지 환인, 두 번째 도읍지 집안, 한민족의 성산 백두산, 용정과 연길 등 연변지역을 둘러보았는데요, 이번 답사의 최대 성과는 바로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정신없는 사람 같으니, 그 당연한 이야기를 꼭 그곳까지 가서야 알았냐'고 핀잔을 주실지 모르지만, 저는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발자국을 남기기 전에는 확신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사회과 부도나 역사책에 있는 역사지도를 보고는 혹 '정확한 근거 없이 실제보다 좀 더 과장하여 국경선을 그어놓지 않았을까' 하는 불순한 생각을 갖는 때가 많지요. 하지만 백암산성을 시작으로 연변으로 올라갈수록 우리 땅과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우리 역사가 더 가까워졌고 고구려의 위상이 분명해졌습니다. 아울러 세 국가 국민으로 각각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민족의 현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우리 땅, 우리 유적들이 중국 땅에 있다는 이유로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는 실상을 확인하고는 분노 이전에 국력을 안타까워 해야 했습니다. 앞으로 심양과 요양, 환인, 집안, 백두산 및 연변 등 총 4회에 걸쳐 중국 동북 지방의 우리 땅, 우리 유적지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가끔씩 교과서나 문제집을 덮어두고 싶을 때,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열하일기》를 쓴 실학자 연암 박지원 선생을 따라 심양 및 요양 일대를 찾아갑니다. 우리 땅 심양 곧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에 내려다본 심양은 며칠째 내린 비로 누런 강물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심양은 요하(遼河),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 등 굵직한 강을 끼고 있습니다. 심양(瀋陽)은 ‘심수의 북쪽’을 의미합니다. 심양 시내를 관통하는 혼하의 옛 이름인 심수(瀋水)에서 ‘심(瀋)’을 따고, 물 북쪽에 마을이 있어 ‘양(陽)’을 붙인 거죠. 《열하일기》중 에는 심양 일대의 물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놓았습니다. 요하는 구려하(句驪河)라고도 하는데 요동과 요서의 경계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적에 진펄 2백여 리에 모래를 깔아 다리를 놓아서 건너갔다. 혼하는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태자하와 합하고, 다시 요수와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태자하는 요양 북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연나라 태자 단(丹)이 도망하여 이곳까지 온 것을 마침내 머리를 베어 진(晋)에 바쳤으므로 후인이 이를 가엾이 여겨서 이 물 이름을 ‘태자하’라 하였다. 소심수(小瀋水)는 혼하로 들어간다. 물 북편을 양이라 하므로 심양의 이름이 대체로 여기에서 난 것이라 한다. 연암은 또 심양을 고구려 땅이라고 말합니다. 심양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혹은 이르기를, “한(漢)이 4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이더니 원위·수·당 때 고구려에 속했다.”한다. 지금은 성경(盛京)이라 일컫는다. 중에서 인구 720만의 대도시로 동북 3성의 거점도시인 심양의 관문 심양공항에 발을 내디디니 과거 우리 땅이었음을 알려주려는 듯 곳곳에 한국 전자회사 광고가 눈에 띕니다. 마치 옛 땅을 찾은 후손들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듭니다. 경제에는 국경이 없으니 우리 브랜드가 세계 곳곳에서 통쾌한 승전보를 날렸으면 하고 염원해 봅니다. 심양에는 고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같은 거리에 탑이 네 군데 있었다는데 그 중 서탑가(西塔街) 일대는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곳입니다. 중국어를 몰라도 생활할 수 있고 보따리상들의 주무대요,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만날 수도 있는 곳입니다. 이곳이 코리아타운으로 발전하게 된 기원은 일제 강점기 국밥장사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독립지사의 아내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궁엔 치욕의 역사가 심양고궁은 이번 답사일정에서 유일하게 중국풍의 유적지입니다. 청나라 초기 20년간 수도였지요. 북경으로 천도한 후에는 황제가 동북지방을 순회할 때는 이곳에서 머물게 됩니다. 고궁 인근에는 당시 분위기를 살려 청나라 거리를 조성해 놓았는데, 우리나라도 궁궐 인근에 조선시대 거리를 만들어 보았으면 합니다. 저도 어느새 연암의 ‘실사구시’나 ‘이용후생’ 정신을 배워버렸나요? 연암 또한 고궁에 들린 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봉천부윤이 백성을 다스리고 봉천장군 부도통이 팔기(八旗)를 통할하며, 또한 승덕지현이 있는데… (중략) …장군부(將軍府) 앞에는 큰 패루(牌樓) 한 채가 서 있다. 정문인 태청문을 들어서 전전(前殿)에 이르렀다. 현판에 숭정전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3층 높은 다락이 있는데, 이름은 봉황루이다. 이층 여덟 모난 집을 대정전이라 하였고, 태청문 동쪽에는 신우궁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셨는데, 강희황제의 어필로, 소격 옹정황제의 어필로서 옥허진제라 써 붙였다.중에서 심양고궁의 내부는 동로(東路), 중로(中路), 서로(西路)로 크게 나뉩니다. 동로에는 황제와 신하들이 정무를 보던 대정전(大政殿)이 있습니다. 박지원이 ‘이층 여덟 모난 집’이라고 묘사하였듯이 팔각 2층 건물입니다. 특이한 형태의 팔각 건물은 청나라의 군사조직인 팔기병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대정전 좌우로는 팔기병을 상징하는 여덟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팔각지붕입니다. 이는 청나라의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번지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중로에는 황제가 집무를 보던 숭정전(崇政殿), 회의나 연회를 열던 봉황루(鳳凰樓), 처소인 청령궁(淸寧宮) 등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봉황루의 ‘재기동래(載氣東來)’라는 편액은 청나라가 그들의 발상지인 만주지역을 신성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외 한자와 만주어를 병행한 현판, 푸른빛의 청기와 등에서 청나라가 만주 여진족이 세운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에는 황제의 도서관이나 무대, 문소각(文遡閣) 등이 있습니다. 북경 고궁 다음으로 잘 보존된 고궁이라지만, 이곳은 청나라에 유린당한 우리 민족의 슬픔이 배인 곳이기도 합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에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명나라를 옹위하던 조선을 침략합니다. 왜란의 여파가 진정되기도 전에 호란을 맞아 조선은 1937년 1월, 결국 삼전도에서 청 태종을 큰 임금으로 인정하고야 맙니다.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친명배금을 주장하던 삼학사, 대신들의 자녀, 조선 여인들이 줄줄이 청나라로 보내집니다. 그들은 심수나루를 건너 남탑을 지나 심양성내 관소(館所)에서 머물렀습니다. 삼학사들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1645년 2월 한양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죽임을 당하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위를 잇게 되지요. 고궁에는 우리 궁궐과 닮은 것이 많은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드무(큰 가마솥처럼 생김)도 보이고, 경복궁 아미산에서 볼 수 있는 괴석도 있으며, 십장생과 유사한 그림들, 지붕 위 잡상들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반면 우리 궁궐과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숭정전 앞에는 해시계와 측우기 같은 측량도구가 놓여 있고 건축물 곳곳에는 우리 사찰에서 많이 보이는 도깨비나 만(卍)자 문양이 숨어 있습니다. 황금색으로 치장된 용상, 황룡의 화려함, 어도에 새겨진 생동감 있는 용조각 등이 황제의 궁임을 실감나게 합니다. 봉황루 뒷문 쪽에 세워진 신간(神竿)은 만주족의 토템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천혜의 요새, 백암산성 심양에서 요양에 있는 백암산성 가는 길에 백탑(白塔)이 우뚝 서 있습니다. 연암 역시 이 탑을 보고는 공교롭고 화려하며, 웅장함이 가히 요동 넓은 벌판에 알맞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관제묘를 나와 5 마장도 채 못 가서 하얀 빛깔의 탑이 뵌다. 이 탑은 모는 여덟, 층은 열 셋, 높이는 일흔 길이라 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당의 울지경덕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에 쌓은 것이다.” 한다. 그저 백탑이라 함은 우리나라 하정배들이 아무렇게나 부르기 쉽게 지은 이름이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북 셋이 높였고,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그 크기가 물들통 만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어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을 울린다. 중에서 백탑마을을 지나 심양에서 한 시간여를 달리면 백암산성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산성 일대 마을의 집들은 태자하가 자주 범람하는지 기단을 대폭 높인 일종의 2층집이 흔합니다. 벽체는 동북지방 어디를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벽돌집입니다. 연암은 청나라 여행길에 만나는 벽돌집도 예사로 보지 않았는데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이 손쉽게 만들어진다는 데 대해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네 집은 많은 흙과 나무를 필요로 하고 특히 두껍고 무거운 우리 기와의 비효율성을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산성으로 가기 위해 마을길을 들어서니 먼지투성이의 길 위에 소똥, 염소똥이 지뢰처럼 깔려 있고 백암성에서 가져온 성돌이 여러 용도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구려 유적을 이렇게 방치해 놓고도 세계문화유산 지정받을 때는 또 얼마나 보호하는 흉내를 냈던가요. 어느 민가 담장 위에서 초등학교 1학년 정도 됨직한 아이가 일행을 맞이하더니 ‘안녕하세요?’ 하며 우리말을 건넸습니다. 누군가가 가르쳐준 모양입니다. 연암은 에서 안시성은 원래 봉황성이었고 백암성은 원래 사성(蛇城)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합니다. 연암 자신 또한 들은 이야기라고 단서를 붙이고 있지만 고구려의 옛 방언에 황새와 같은 큰 새를 일러 안시(安市)라 하고 뱀을 일러 배암(白巖)이라 한 데서 그 근거를 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백암성의 위용이 드러납니다. 중국 정부는 백암산성을 현급 지정문화재, 우리로 치면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였습니다. 성 북쪽에 고려채(高麗寨)라는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음이 증명하듯 이 성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고구려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굳이 우리 역사에 기록된 백암성으로 부르지 않고 연나라와 관련시켜 연주성으로 부르거나 고구려가 당나라에 정복된 이후 백암성이 암주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여 암주성으로 부릅니다. 백암성은 고구려성으로는 잘 남아 있는 편이라지만 실상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우려가 되는 것은 인근 100여 미터 지점에 자리한 거대한 채석장입니다. 그곳에서 하루도 쉼없이 돌들을 캐내고 있어 미관상의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언제 성이 무너질지 몰라 아찔합니다. 조금 더 시선을 멀리하면 군데군데 연기를 내뿜으며 석회석을 채취하는 곳이 보입니다. 채석장에서 ‘쿵’ 하며 돌 깨는 소리와 함께 석회석 채취장에서 연기가 뿜어 올라오면 이곳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터로 바뀝니다. 그 전쟁은 지금껏 계속되어 역사왜곡이니 동북공정으로 불거져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채석장 채굴작업이 3년만 지나면 성이 다 무너져 버릴 지도 모른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방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고구려 석성의 웅자가 눈앞에서 허물어지고 있는데 중국 측에 모든 걸 맡겨야만 하는 현실이 애달프기 짝이 없네요. 백암성의 성돌은 경사진 지형에도 완벽하게 수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든든한 아랫부분에 있습니다. 높이가 10미터 정도였다고 볼 때 성의 아랫부분은 성의 견고함과 직결되므로 조금씩 성돌을 들여쌓기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들여쌓은 모서리 부분은 둥글게 다듬어 조형미 또한 뛰어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성돌이 빈틈없이 성벽을 채우고 겉은 방형이고 안은 삼각형인 성돌을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여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위 이빨쌓기식 축성법 또한 고구려성의 특징입니다. 내성(內城)에는 망대(장대. 점장대)와 우물터가 남아있습니다. 특히, 망대는 북벽의 치성과 함께 백암산성의 대표얼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노라면 고구려 장수의 우렁찬 목소리, 고구려인들의 이야깃소리, 광야를 달리는 말발굽소리가 아련하게 들립니다. 그 망대를 남겨두고 내려오려니 너무나 애잔하여 수십 번을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대와 언제 다시 만나리오……. 치성은 북벽 네 군데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성 안팎으로 겹쌓기를 하였는데 안쪽의 것은 계단용입니다. 군데군데 성돌 틈에 흰 부분이 드러나는데 찰쌓기한 흔적입니다. 성을 개축하면서 접합부에 회반죽을 써서 쌓는 축성법을 이릅니다. 이 성은 고구려 양원왕 3년(서기 547년) 가을 7월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어 축성된 지 1500년은 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전투를 치렀을 견고한 고구려 백암성은 어이없게도 당 태종에게 쉽게 넘겨집니다. 요동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이 성을 지키던 장수 손벌음(孫伐音)이 항복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손쉽게 백암성을 탈취한 당은 그 기세를 몰아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을 향해 진군하지만 패배를 맛보게 되죠. 고구려 유적을 찾는 일, 단순히 옛 땅을 그리워하는 향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찾고 백두산을 찾고 우리 민족을 찾아가는 동북3성 답삿길은 기름기에 절여진 중국음식만 먹다 한국음식을 먹는 듯한 깔끔함과 담백함입니다. 다음 호에서는 환인지역 고구려 유적을 찾아갑니다.
인천 연안 부두에서 약 50㎞ 정도 떨어져 있는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승봉도. 이곳 승봉도에는 인천주안남초(교장 김현웅) 승봉분교가 있다. 현재 승봉분교에는 6명의 학생들과 함께 지승준·주은희 부부 교사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비록 작은 섬마을 분교지만, 두 교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순수한 학생들이 하나 되어 교육열은 도시의 어느 학교 못지않다. '승봉 책벌레 시간'으로 하루 시작 승봉분교의 하루는 8시부터 시작된다. 등교시간은 8시 30분이지만, 학생들 대부분은 8시면 학교에 온다. 8시 30분부터 진행되는 '승봉 책벌레 시간' 때문이다. 각 학년별로 지정되어 있는 책들을 자유롭게 읽고, 책을 다 읽으면 교실 한 쪽에 있는 표에 스티커를 붙인다. "학교에 오면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고,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이 더 좋아요"라고 말하는 황재경 양(4학년)은 최고 학년답게 가장 많은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이런 독서 시간을 이용하는 것은 최근 논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학생들에게 글쓰기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으로, 책을 다 읽은 후엔 학교 홈페이지에 독후감을 올려놓는다. '승봉 책벌레 시간'이 끝나면 역시 전교생이 함께 영어 수업을 한다. 주된 수업 내용은 말하기. 영어 비디오를 보고, 따라하기가 진행된다. TV 화면을 보며 큰소리로 따라하기도 하고, 한 명씩 일어나서 외운 내용을 말하는 학생들의 표정이 매우 진지하다. 지 교사는 발음뿐만 아니라, 간단한 회화와 단어를 학생들에게 알려준다. 영어 수업이 끝나면 비로소 분반 수업이 시작된다. 1, 2학년 4명(학년별 2명)은 '바다 반'으로 주 교사, 3, 4학년 2명(학년별 1명)은 '하늘 반'으로 지 교사 담당이다. 9시 30분에 분반 수업이 시작되지만, 바로 교과 수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30분간 신문읽기 시간이 먼저 시작된다. 어린이 신문을 보고 학년별 수준에 맞게 지정된 신문 기사를 읽는다. 기사를 읽고, 학생과 교사는 내용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지 교사는 또래 학년이 없어서 토론 시간을 갖기 어려운 점 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신문읽기 시간을 포함했다고 밝혔다. 승봉분교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도시 학생들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이 부족해서 생각하는 폭이 좁고 학생간 학업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이 점을 보충하기 위한 수업인 것이다. 수준별 수업이 가능한 교과수업 8시에 시작된 수업은 10시부터 본격적인 교과수업으로 이어진다. 2개 학년씩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 준비가 힘들기도 하지만, 학생들에 맞는 수준별 수업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수업을 해서인지 아이들도 수업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진지하다. 3년 전 낙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승봉도 생활을 시작했다는 지 교사는 "다른 교육을 경험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영향이 가장 크고, 그래서 더 열심히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점심시간엔 학생들이 마을의 한 집으로 함께 간다. 따로 급식 시설을 갖출 수 없어 한 집에서 맡아서 급식을 해결한다. 승봉도는 민박이 주 생업이기 때문에 어느 집에서도 급식이 가능하다. 1년을 주기로 마을에서 번갈아 가며 급식을 맡는다. 어머니가 해주는 밥 그대로라 승봉분교에서는 부실 급식, 식중독이라는 말은 아예 없다. 오후 수업은 교과 수업과 함께 특기·적성교육이 이뤄진다. 특기·적성교육은 컴퓨터와 한자. 6명의 학생들이 자판 연습부터 인터넷까지 컴퓨터에 열중이다. 아직은 일부 개인 컴퓨터를 학교에 갖다 두고 하지만, 그래도 각자의 컴퓨터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한자 공부는 급수 시험 준비에 한창이다. 한자 급수 시험을 보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한번 시험을 보려면 뭍으로 나가는 1박 2일의 여행이 되지만, '한자 열풍'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모두 열심히 공부한다. 다양한 경험을 위한 체험 학습 승봉분교 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곳 학생들이 도시 학생들에 비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험에 의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 교사는 학생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올해 분교장을 맡으면서 매달 1회 체험 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 4월부터 부천 지역 박물관 답사, 경제 캠프, 서울 지역 현장체험 등을 실시했다. 학생 수가 적어 간단해 보이는 활동이지만, 교통편, 숙식, 안전 문제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특히 대부분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경비가 문제다. 그래서 틈나는 데로 각종 기업체와 단체에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실제로 지난 6월에는 한 기업체의 도움으로 서울 지역 현장체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주 교사는 "올해 초 처음 부임했을 때 아이들이 육교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고생은 되지만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난다"고 말했다. 이 학교 교사에게 있어 또 다른 어려운 점은 바로 학부모들의 관심. 여느 학부형들과 마찬가지로 승봉분교의 학부모들도 높은 교육열을 갖고 있다. 지 교사는 "아주 사소한 일들도 바로 알려지기 때문에 수업 준비에 있어 철저할 수밖에 없다"며 "우리 승봉분교는 학교생활뿐만 아니라 사생활에 있어서도 이미 학부모에 의한 교원평가제를 실시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며 웃음을 보였다. 이러한 두 교사의 노력으로 인해 섬마을 주민들은 현재의 승봉분교에 매우 만족해했다. 이 학교 최찬우 군(1학년)의 어머니인 남정임 씨는 "선생님이 새로 오신 이후에 어려움 속에서도 체험학습을 하고, 또 경비 절감을 위해서도 노력해 주는 학교"라며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학교 소식을 바로바로 알려주고,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과 함께 해주는 선생님들이 고맙다"고 말한다. 승봉분교 식구들은 모두 한 가족 지 교사 부부는 섬마을 근무의 장점으로 수업 준비를 보다 철저히 할 수 있다는 것과 학생들 개인 사정을 훤히 알기 때문에 개인별 지도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학년에 관계없이 흥미 있는 수업은 함께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꼽았다. 섬이라는 지역 특성을 살려 바닷가 수업이나 자연 환경 수업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지 교사는 "아이들이 마치 한 가족 같습니다. 또 학교가 놀이터이다 보니까 아이들도 선생님을 어려워하기보다는 아주 친근하게 대한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부모이기도 한 지 교사는 "자녀 교육문제를 생각하면 섬 생활이 걱정스런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이곳 학생들이 졸업 후에 섬 출신이지만, 정말 잘한다는 소리를 듣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정부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낙도에 대한 관심을 많이 보여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엄성용 esy@kfta.or.kr
이순세 / 서울시교육위원, 호원대 초빙교수 모든 일을 수행함에 있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큰 차이가 난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일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이 같아 질 수는 없다. 교육은 헌신이어야 한다. 교육은 사랑이며 배려이고 온화함이며 따뜻함이어야 한다. 마치 이른 봄에 대지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따사로운 햇볕 같아야 한다. 불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 가족들과 친척들은 그 사람의 전신에 독이 퍼지기 전에 독화살을 뽑으려고 한 시라도 급히 의사를 부르려고 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왜 쏘았는지, 화살은 무슨 재료로 만들어졌고, 깃털은 어느 것을 사용했는지 먼저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독화살을 당장 뽑지 못하게 한다. 논쟁이 계속되는 사이 화살 맞은 사람은 전신에 독이 퍼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연일 교육문제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공교육 붕괴, 사교육비 과다, 조기 해외유학 등이 사회 문제화 되고 있다. 교육문제를 이야기하면 국민 모두 교육일가견을 갖고 교육전문가가 되어 갑론을박 다양한 정책과 제안을 쏟아낸다. 요즈음 흔들리는 교육정책 때문에 교육수혜자로 가장 존중받아야 할 학생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고통을 호소하고 있건만 정작 이들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데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왜 쏘았는지 원인 규명에만 갑론을박하는 정책 당국과 고상한 이익단체들의 다양한 주장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 21세기 선진사회를 이끌어갈 주역들을 방치할 경우 우리의 미래 사회가 어떻게 전개될지 심히 걱정스럽다. 이러한 상태를 방치한다면 교육경쟁력 저하를 초래하여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고 1인당 GDP 2만 달러 소득의 선진국 진입의 꿈도 좌초되고 말 것이다. 교육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며 국가경쟁력을 배양하는 기반이다. 부존자원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가 오늘날 세계 11위권의 교역국 대열에 진입하고 반도체, 조선, 자동차 수출 왕국이 된 것도 지난 50여 년 동안 학생, 학부모, 교원 모두가 하나 되어 교육이 전념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기술혁신을 통한 신제품 개발을 통한 수출만이 살길인 21세기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에서 교육의 공헌도는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도 수많은 교육정책을 쏟아냈지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땜질 식 처방으로 대처하여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기여하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평균 6개월 단명장관으로 7번이나 교육부장관이 바뀌었으며 참여정부 출범 이후 교육혁신위원회 출범과 획기적인 교육정책을 천명하는 등 우리교육의 많은 변화․발전이 기대되었으나 참여정부 국정운영의 반환점이 지난 현재까지 소리만 요란했지 성과가 가시화 되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 교육전문가가 교육부장관직을 맡아도 산적한 교육문제 해결이 어려운데 교육비전문가인 경제전문가가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데 따른 많은 문제와 시행착오가 전개될 수밖에 없다. 과연 무자격증 의사가 독화살을 빼내고 올바르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교육개혁과 지식문화 강국’ 실현을 교육정책의 비전으로 내건 참여 정부 2년 반 동안 학교교육 내실화, 대학교육혁신, 교육복지확대, e-러닝 활성화, 인적자원 개발․관리, 조직 혁신 등 야심 찬 다양한 정책을 제시했지만 소리만 요란했지 어느 것 하나 아직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정권 교체에 상관없이 교육개혁을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세계최고의 국가경쟁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고 수준의 노동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모든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향상시키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클린턴 정부에서 ‘미국교육법 Goals2000’을 제정하고 ‘아래로부터의 교육개혁의 자원’이라는 원칙을 제시하여 연방 정부의 역할을 부여하고 그 후 부시 정부에서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으로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우리도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은 정권에 따라 단절되는 교육정책이 아닌 연속성을 지닌 장․단기 교육정책이 수립․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과 국정 운영이 가능하도록 철저한 검증을 거쳐 교육부장관을 임명하고 임기를 보장하며 운신의 폭을 넓혀 주어야 할 것이다. 몸에 박힌 독화살을 뽑아내는 것이 가장 선결되어야 하듯이 정책 추진의 우선순위를 결정해 가는데 혼선을 주어서는 안 된다. 특히 다양한 변수가 얽혀있는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일에서 학생, 학부모, 교원, 교원단체, 학부모단체, 정부가 각각 남의 탓만 하고 책임 공방으로 세월을 보낼 수는 없다. 그 동안 우리들은 독화살 보다 더 무서운 독설을 남을 향해 쏘아대지 않았던가? 이러다가 결국 독화살을 뽑아내고 치료해야 할 의사(교원)까지 죽일까 염려된다.
안윤환 / 경북 예천 용문초 교감 국가 사회 발전은 그 구성원인 국민 모두가 자기가 맡은 직장에서 성실히 일할 때 배가될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지금 태어난 아이들과 국가 구성원 모두가 유능한 국민이 되도록 교육법을 제정하여 다양한 교육제도로 국민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학교 교육에서 직업교육이 강조되고 있는데, 초․중등 교육에서는 일반적인 직업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대학교육에서는 학생 각자의 선택에 의한 실질적인 직업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교육부에서는 국가 전반적인 산업 발전 계획에 맞추어 대학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다양한 고등교육 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전공 분야로 쉽사리 취업하지 못하여 마땅한 직업에 종사하지 못한 관계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장 교육의 부실이니 교육정책의 잘못이니 하는 많은 문제점이 자주 보도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하지만 화이트칼라니, 블루칼라라고 하여 사실상 선호하는 직업과 꺼리는 직업이 갈라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각자의 능력이나 취향에 따라서 선호도에 차이가 조금씩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리는 3D(Difficult, Dangerous, Dirty) 직종은 요즈음 같은 구직난 속에서도, 불법 체류자인 외국인 근로자에 의존하는 등 오히려 구인난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알려졌다. 모든 산업의 근간인 기간산업(2차 산업)과 중소기업들이 경영하는 직종은 거의 3D 직종에 해당되는 것들이 많다. IT 직종이나 서비스 직종(3차 산업)은 근무 환경이나 보수 면에서 3D 직종과는 큰 차이가 있음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국가 사회적으로 3D 직종 근무여건 개선을 위한 많은 지원이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못한 재정 사정상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 직종을 포기하고는 모든 국가 사회 활동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뿐 아니라 이 3D 직종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어야 전체적인 국가 균형 발전의 탄탄한 초석이 다져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이들 직종 경영자나 근무하는 종업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기만을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면 이들 3D 직종에도 성실하게 근무하게 할 사명감이 일어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얻게 될까? 아마 교육이 잘 이루어지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과거에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뒷날 더 크게 성공하는 일이 많다고들 얘기 해 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교육적인 뒷받침이 얼마나 충실히 이루어지느냐가 장차 학생들 성공의 잣대가 된다는 얘기가 더 많이 들린다. 이에 따른 과도한 자식 사랑과 자기 자식 교육만을 위한 이기심이 불러온 강남 부동산 문제 등 오히려 많은 사회적인 혼란이 야기되기도 한다.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곤란한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즐거움, 모든 위험 상황에 대한 철저한 점검과 준비로 무사히 그 일을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 불결하고 악취속의 힘든 괴로움을 견디고 많은 사람에게 깨끗한 환경을 제공했을 때의 만족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충실한 교육이 이뤄진다면 불만스러운 3D 직종에도 기꺼이 종사하는 사람들이 차츰 많아 질 것이다. 현재 이루지고 있는 초등학교 학생지도에는 10개 교과과정 외에 학교행사, 특활, 재량활동 시간이 편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특기․적성 교육, 보충․심화 학습 운영 등 과다한 시간 배정과 주5일제 수업 실시 등 꽉 짜인 교육과정 운영 일정에서 이러한 직업교육이 충실히 이루어지기는 무척 어렵다. 직업교육과 관련한 별도의 교육과정이 편성되어 있지 않고, 단지 관련 교과 단원 지도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담임교사의 교육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재 초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실질적인 학년 교육과정 운영은 모든 교과 운영에서 담임교사가 거의 전적으로 재량운영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장 교사들의 관심 여하에 따라 충실한 직업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요즈음 교육현장에서 강조되는 건전한 인성교육이 잘 이루어진다면 모든 학생들에게 올바른 직업관도 저절로 정착될 것이라고 믿는다. 과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사회로부터 유교사상에 의거한 올바른 인륜 도리를 스스로 익혀 모두가 몸에 배어 습관화 되었다. 그렇지만 요즈음 우리 사회는 미숙한 민주제도 정착과 함께 모두를 위하는 책임과 의무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우선하는 잘못된 자유와 권리의 주장으로 많은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자기 쪽 욕심만 주장하는 노사문제, 더 심각해지는 빈부 격차문제, 오직 집권에만 집착하는 정치권의 대화와 타협의 부재 등 현 우리 사회의 제반 난제들이 어릴 때부터 건전한 인성이 제대로 길러지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타인 우선 배려보다, 쉽고 편한 것을 좋아하고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이기적인 사고 풍조가 3D 직업을 기피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올바른 직업관을 교육하는 문제도 결국은 건전한 인성지도로 귀결된다. 건전한 인성지도는 힘들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꾸준히 계속하는 체험활동 등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학생들의 건전한 인격 형성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꾸준한 실천을 통하여 저절로 몸에 배어 습관화 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원들의 꾸준한 인내와 긍정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학교교육 뿐 아니라 자녀를 둔 가정과 지역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필요로 한다. 현실적으로 미흡한 교육 여건인데도 모든 잘못된 교육 결과는 교육 담당자인 교원들에게 돌아오고 있다. 앞으로 국가 경제 발전이 지속되면 교원들의 처우도 그만큼 더 개선되리란 기대를 하며, 장차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될 현재 학생들의 충실한 교육을 위해 우리 교원 모두는 사명감을 갖고 더욱 성실히 근무해야 할 것이다.
신아연 / 호주칼럼니스트 매점의 주 점심메뉴는 감자튀김과 피자 몇 년 전, 필자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다른 학부형들과 함께 학교에서 몇 차례 매점 자원 봉사를 한 일이 있다. 한국의 급식 도우미와 비슷한 일이었는데, 매점 문을 여는 아침 9시부터 하교시간인 오후 3시까지 학생들의 점심과 간식을 준비하면서 당시에는 잘 모르고 있었던 호주 학생들의 식습관을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호주 초등학교의 매점은 기본적으로 우리처럼 쉬는 시간 아무 때나 와서 먹고 싶은 것을 살 수 있게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 간식과 점심은 미리 주문을 받아 필요한 숫자만큼 준비를 해두고, 몇 가지 군것질 거리만 쉬는 시간 틈틈이 팔기 때문에 우리의 급식체계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도시락을 집에서 가져오지 않고 매점에서 그날 간식과 점심을 해결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점심 메뉴를 골라 음식이 담겨져 나올 봉투 겉면에 학년과 반, 이름, 주문 음식 명을 쓰고 거스름돈이 필요 없는 정확한 음식값을 넣어서 학급별로 비치된 음식 주문 상자에 넣어야 한다. 그러면 학급의 당번이 주문 봉투를 모두 수거하여 9시 무렵에 매점으로 가져가면 그 날의 봉사 어머니들이 주문 수량에 맞추어 함께 점심을 준비한 후 점심시간이 시작됨과 동시에 다시 당번이 찾아다가 급우들에게 점심을 나누어주는 식으로 꾸려진다. 호주 어린이들이 매점에서 사먹는 주 점심 메뉴는 얇게 빚은 후 딱딱하게 구워 만든 밀가루 껍질에 쇠고기 간 것을 소스와 버무려 걸쭉하게 채워 넣은 미트파이와 시루떡처럼 켜켜이 밀가루 반죽을 쌓고 그 사이에 고기를 채워 넣은 라자냐, 감자튀김, 피자, 햄샌드위치 등이 대부분이다. 이들 점심거리는 외부 거래처에서 냉동상태로 들여와 오븐이나 전자렌지로 데운 후 학생들에게 공급되는데, 일을 거들면서 보니 고기에 포함되어 있는 지방함량이 상당하고 간식거리도 지나치게 단 것들이 많아 음식을 준비하면서 꺼림칙했던 기억이 난다. 이따금 자원 봉사 어머니들이 직접 조리를 할 때도 있었지만 이윤이 목적이 아닌, 오직 제 자식들한테 먹일 음식이란 생각에 고기나 햄, 치즈 따위를 듬뿍듬뿍 얹는 통에 아이들의 건강을 오히려 망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 지경이었다. 식습관 체질 바꾸는 장기프로젝트 추진 우리 아이들이 다닌 학교 뿐 아니라 호주의 학교 매점들은 대부분 기름진 점심 메뉴를 비롯해 케이크와 초콜릿, 젤리, 아이스크림 등 단 것 위주의 간식을 판매하기 때문에 아침을 거르고 학교에 온 아이들은 오후 서너시 경 집에 돌아갈 때까지 고지방에 고당도, 고칼로리 식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아이들의 식습관이 학교에 들어가는 7. 8세경부터 야채나 과일은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지방과 당분에 치우친 쪽으로 길들여지게 되면서 어릴 때부터 체중과다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굳어지고 있다. 사실 호주 어린이들의 비만 정도는 심각하다. 현재 2세 이상 18세 미만 아동과 청소년 4명 가운데 1명이 비만이거나 과체중 상태이며, 앞으로 20년 후면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2명 중 1명이 정상체중을 웃돌 것이라는 의학계의 보도가 속속 나오고 있다. 어린이 비만은 성인 비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데다 비만 아동들은 이미 성인형 당뇨병이나 심장질환, 고혈압 등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고 우울증과 수면장애, 심지어 생식장애까지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동 비만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아동비만에 대한 경고와 우려가 전에 없이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하면서 어린이들의 식습관을 바꾸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에 개선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즉 아이들이 단 것과 기름진 것을 덜 먹도록 할 수만 있다면 반강제적으로 제한을 하는 한편 점차로 저지방 야채 위주의 식단을 좋아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식습관과 체질을 바꿔놓는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에 의견일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학교 매점 메뉴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에 집중되고 있다. 개별 가정의 식탁에서보다 집단 급식형태의 메뉴가 달라진다면 그만큼 효과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의 매점 메뉴에서부터 학생들의 입맛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면 일반식당에서도 비슷한 음식을 주문하게 되고 자연히 집에서도 유사한 조리법을 따르게 된다는 계산이다. 결국 어릴 때 길들여진 입맛대로 성인기의 식습관이 결정되기 때문에 세대가 바뀌면서 호주인들의 음식선호도 또한 궁극적으로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장기 계획이다. 호주 정부는 현재의 비만 세대를 정상 체중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5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각오로 천리 길의 첫 걸음을 내딛기로 한 것이다. 정부는 최근 세부안의 첫 작업으로 총 1억160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 어린이비만 바로잡기 4개년 계획에 돌입했다. 'Healthy, Active Australia(건강하고 활기찬 호주, HAA)'라는 슬로건 하에 학교매점의 고지방, 고칼로리 위주의 식단을 야채와 과일, 단백질을 중심으로 한 건강식단으로 전환시키기로 한 것이다. "아동비만 못 잡으면 국가의 미래 없다" 1억1600만 달러의 예산은 전국 초중고 매점의 조리설비 개선비용으로 우선 지급됐다. 기존의 고기와 튀김 위주의 조리설비를 건강식단에 맞게 개선하기 위해 야채나 과일 등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한 냉장고 구입이나 새 메뉴 게시판 마련 비용으로 지원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오는 2006년 6월까지 학교 매점에서 감자튀김과 미트 파이 등 고지방식과 케이크를 비롯한 단 것을 제한하고 야채와 과일 위주로 식단을 편성할 것을 강력히 권장하는 한편, 탄산음료 자판기 설치도 규제할 방침이다. 지금까지 각급 학교 매점은 자율적으로 운영되어 왔지만 학생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이제는 정부가 적극 간섭을 하겠다고 거듭 밝히며 협조를 구하고 있다. 아동비만을 잡지 못하면 국가의 미래도 없다는 정부의 의지 하에 물적, 심적 지원이 집중되고 있는 호주학교의 '매점 음식 개혁', 앞으로 4년 후의 중간 평가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다.
최종근 / 경제학 박사, 전 미 유타주립대 교환교수 1970년 8월 어느 날 하와이에 있는 동서문화센터의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동일한 목적으로 초청되어 같은 방을 쓰게 되어있는 한 교육자가 나보다 며칠 늦게 동경에서 도착했다. 짐을 방안에 들어놓은 뒤 곧바로 화장실을 다녀온 그는 짐을 정돈하는 것은 제쳐둔 채 건너편 침대위에 앉아 무엇인가 손에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면서 혼자 무엇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젊은 세대들의 역사인식 안타까워 슬쩍 쳐다보는 순간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다소 당황한 듯이 정색을 하면서 무의식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틀어놓았다. “미국과는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붙어야 하는데 아직은 안(되겠군…)”하면서 끝을 흐렸다. 그가 화장실에서 가지고 온 것은 화장지 조각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화장지의 질이 일본 것보다 월등하게 좋은 것을 발견하고 놀랐든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그의 태도와 관심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동경교육대학을 나와 마지막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던 교육계의 엘리트이었다. 지난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기(長崎)에서 각각 거행되었던 원자탄 투하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일본 총리와 수많은 국민들은 과연 침략전쟁을 사죄하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세계평화만을 기원했었을까?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두 기념식을 보면서 35년 전 하와이에서 만난 그 일본 교육자의 일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미 군사대국이며 단지 형식과 제도상의 뒷받침을 위한 수순만을 밟고 있을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지난날 침략을 받았던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5년 전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해 10월 1일 중국 유학생 전원이 결석해서 저녁에 대표학생을 불러 연유를 물어 봤더니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오늘은 우리나라 건국기념일이라 중국 유학생 전원이 별도 장소에 모여 국기를 게양하고 기념식을 거행한 후 식사도 같이 하고 학교는 전원이 쉬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국가의식이 확고한데 놀라서 어떻게 그와 같은 행사를 주선했느냐고 캐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에서는 소학교부터 ‘애국교육’이 철저해서 애국심과 국가의식은 확고합니다” 이것이 바로 얼마 전 중국에서 반일운동이 확산되었을 때, 일본 외무장관이 거론한 이른바 ‘반일교육(反日敎育)’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유학생 가운데는 태극기를 갖고 있는 학생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광복절이나 3․1절에 기념식을 생각하는 학생은 물론 없었으며, ‘명성황후 시해사건’도 알지 못하는 학생이 많았다. 일본이 ‘방재(防災)의 날’로 정해두고 전국적인 행사를 하는 9월 1일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물어봐도 알고 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젊은 세대들의 역사인식을 보고 우리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잘못되어왔던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양국간의 외교문제화 된지 오래며 특히 최근에는 그 왜곡의 정도가 심해져 그 저의를 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우리국민의 감정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끈질긴 시위가 계속되는가 하면 또한 일본의 일부 지각 있는 양심세력과 연대하여 왜곡된 교과서 채택을 저지하는데 안간 힘을 쏟고 있다고 보도되기도 한다. 지난 8월 3일에는 서울시가 일본의 왜곡된 역사교과서 채택 저지를 위해 산하 전 공무원들로부터 성금 1억3200만원을 모아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측에 전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 역사 정립 기획단’에서는 왜곡된 교과서 채택을 반대하는 광고를 일본 내의 신문에 게재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여의케 진전되지 않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국민들은 착잡한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독도문제, 역사교과서의 왜곡문제, 식민통치동안에 저지른 각종 잔악행위에 대한 사과 등의 일련의 문제는 일본의 인접국과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역사인식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라 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요구에 무반응인 일본정부 정치인들과 유력인사들은 일본을 직접 방문해서 관계 인사들을 만나 우리의 입장을 전달․설득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소위 ‘일본의 양심세력’과 협력해서 왜곡된 교과서 채택을 저지시키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안타깝기까지 한 우리의 일련의 대응에 대해 일본정부는 냉담한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에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가, 지쳐서 이제는 우리의 처지가 측은하게까지 느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다보니 우리도 스스로의 입장을 재정리하고 지금까지의 자괴(自愧)마저 느끼게 하는 대응방식을 반성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본으로부터 해방 된지 60년, 부끄럽고 어설펐던 한일협정이 체결 된지 40년이 지난 오늘날 한일양국의 현황과 현재의 위상을 대비해보는 것은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지금 우리가 취하고 있는 대응을 반성해보는데 좋은 지침이 된다고 본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의 약 2.7배, 인구도 약 2.7배, 국민총생산은 약 6.8배이다. 그리고 경제규모면에서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인 반면, 우리는 11위에 끝이며, 한국 대만 홍콩과 싱가포르를 합해도 일본 경제규모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친다고 한다. 그리고 공작기계 분야에서는 이미 독일과 미국을 앞질러 세계를 제패(制覇)한지 오래며 적어도 제조업에서는 세계에서 1위임을 자랑하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보다 기술면에서 앞서거나 우수한 분야가 많다고 한다. 특히 우리 산업계에서는 전자산업분야 등에서는 일본과 제휴해가는 것이 우리에게 큰 득(得)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자부하고 있는 것을 몇 가지 더 나열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1949년에서 시작된 노벨상 수상자는 12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과학 분야가 9명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들의 과학기술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외국원조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언어학자들은 지난날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한자를 배웠으나 현대에 와서는 자기들이 만든 과학용어 등이 양국으로 역수출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세계의 저명한 서적을 거의 모두 자기나라 말로 번역해서 읽는 나라는 서구선진국을 제외하고는 일본이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라고 하며, 심지어 일부 영어교육학자는 이제부터는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전학생에게 외국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다. 우리의 대일 경제교류 실태가 어떠한지 살펴보면, 무역통계가 체계화된 1960년부터 2004년 7월까지 대일무역적자 규모는 2100억 달러 이상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기술무역적자 가운데 전기전자가 48.4%, 기계류가 13.7%로 첨단산업의 수입의존도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2003년도의 일본으로부터의 총수입액 363억1300만 달러 가운데 원자재가 34.9%, 자본재 55.8%, 소비재는 불과 7.4%로 기록되고 있다. 이 통계에 따르면 기술 분야에서 우리 산업이 얼마나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 산업이 자본재와 기술면에서 일본에 너무 예속되어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초대 수상이었던 리콴유(李光耀)는 1970년 미국 하와이의 동서문화센터 케네디극장에서 행한 ‘The East Meets the West'란 제목하의 디링함 강연(Dillingham Lecture)에서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일본만이 서양과 대결한 국가였으며 지금도 서양과 대등한 위치를 유지하는 아시아에서 단 하나의 나라라고 극구 찬양해서 미국사람들의 주목을 받은바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같은 싱가포르의 학자인 키쇼어 마흐부마니(Kishore Mahbubani)가 “아시아는 일본에게 크게 감사한다는 감사장을 보낼 필요가 있다. … 그리고 넷째번의 호랑이인 남한은 일본에 의해 고무‧분발된 것이다”란 논지의 글을 타임(Time) 아시아판 최신호에 실어 화제가 되고 있다. 오만해져가고 있는 일본의 일부 세력이 이와 같은 기사를 잘못 이해하고 다시 더 우쭐해질까 걱정되기도 한다. 일본과 독일 두 패전국이 다른 이유 일본과 같은 패전국인 독일은 피해국에게 철저히 배상하고 사죄도 하고 있는데, 일본은 왜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1급 전범(戰犯)이 합사(合祀)된 야스쿠니 신사(神社)를 총리까지 참배하며,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심지어는 피해국들의 근대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괴변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이 두 패전국을 이렇게 다르게 행동하도록 하고 있는가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침략전쟁 전과 후에 있어서 독일과 그의 교전국 간의 경제적인 차이와, 일본과 그의 침략을 당한 나라와의 경제적인 대비는 일본의 오만을 설명하는 한 가지 가닥을 제공해 줄지 모른다. 독일은 교전국이었던 영국, 불란서보다 한때 후진국이여서 독일 상류계급은 자녀들을 파리대학에 유학시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왔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종전 후인 현재도 1인당 국민소득에서 큰 차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비해 침략 전에는 근대화뿐만 아니라 생활수준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며, 종전 후인 지금에는 그 격차가 많이 벌어진 상태에 있다. 따라서 혹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말하는 못사는 이웃을 업신여기는 오만한 태도를, 일본도 우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로는 독일과 일본의 문화적인 차이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일본의 ‘수치의 문화’가 기독교 문화인 ‘죄의 문화’보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작게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수치의 문화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를 의식하여 행동하는 반면, 죄의 문화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할 필요 없이 개인이 지은 죄를 직접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기 양심의 보다 강력한 가책을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지난날 우리를 어떻게 봤으며 또한 지금은 어떻게 보고 있기에,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역사교과서마저 왜곡해서 자기 민족을 미화하려는 역사관으로 2세들을 교육시키려 하는 것인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지난날 우리를 침탈(侵奪)했던 일본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했던가를 뒤돌아보는 것은 그들의 우리에 대한 오늘날의 태도와 진심을 가늠해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 탄압과정, 1923년 9월 1일에 있었던 ‘관동지진 조선인 대학살사건’ 등을 보면 우리민족을 짐승보다 더 못하게 취급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죄의 응보(應報)에 대해 일본과 독일이 각각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려고 화제의 책을 낸 이안 부루마(Ian Buruma)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본 병사들은 중국인이나 조선인과 같은 ‘열등(劣等) 민족'을 학살하는 것은 천황(天皇)의 뜻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충성의 표시라고 믿었다” 치욕의 역사 후손들이 깊이 새겨야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일본에게 사죄하라 또는 배상하라는 등을 외친다는 것은, 우리가 마치 사죄와 배상을 구걸하고 귀찮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다른 외국사람들 눈에 혹시나 그렇게 비추어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차라리 그 힘과 정력을 국력신장에 기울려 일본을 이기는 일에 매진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지난날의 씻을 수 없는 치욕과 형언할 수 없는 혹독한 폭정으로 고통 받은 우리, 침략했던 자가 지금도 지난날에 대한 사죄도 없이 아직도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인 발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 착잡한 심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아직도 옛날처럼 내심 우리를 멸시하고 있다면, 그들로부터 얻는 형식적인 사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첫째는 우리 스스로가 일본의 학정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일간의 역사인식 분쟁의 해결방법으로서 자기 민족중심 역사인식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탈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볼 때 이상적인 논리에 불과함에 틀림없다. 따라서 가해자이면서 반성도 없이 역사왜곡을 시도하기 시작한 일본에게 이와 같은 이상론을 거론 해봤자 별 소용이 없음은 분명하다. 피해자인 우리는 우선 우리 자신의 바른 역사인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국권찬탈과 학정과 잔악한 탄압에 관한 철저한 국민교육이 먼저이고 다음이 친일진상규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민의 역사의식이 바로서야 친일진상규명의 효력과 진정한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국민들의 의식수준으로서는 친일진상규명의 목적마저 흐리게 되고 말 염려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둘째 일은 국력을 증강시키고 문화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사죄도 않을뿐더러 능글능글하게 역사왜곡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오만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우리보다 월등한 강자로서 엄연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가 이를 근원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특단(特段)의 노력도 없이, 다만 규탄(糾彈)의 구호만 외치는 것은 공허(空虛)한 몸부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과 같은 빠른 근대화와 경제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즉 우리의 국력이 지금의 수준보다도 더 낮았더라면 그들이 과연 우리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와 같은 가정(假定) 속에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 할 셋째 일은, 지난 약 1세기 동안의 우리와 일본과의 불행했던 관계를 재조명하는 일은,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 일방적으로 그것도 너무 부끄러울 정도로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지금도 그들의 오만과 멸시의 구실을 줄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드릴 각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이 역사적인 엄연한 사실을 가르치는 것을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우겨댄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치욕의 역사적 사실을 빠짐없이 국민교육을 통해 널리 후손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계속되는 반일시위에서 나타난 국민의 분노를 국력의 증강과 문화수준의 향상으로 승화(昇華)시켜 다시는 우리를 능멸할 수 없는 나라로 발전시켜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차원 높은 대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의 추진은 현 지도층의 역사적인 임무이자 그들의 지혜와 능력을 시험해 보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PAGE BREAK] 일본과 독일 두 패전국이 다른 이유 일본과 같은 패전국인 독일은 피해국에게 철저히 배상하고 사죄도 하고 있는데, 일본은 왜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1급 전범(戰犯)이 합사(合祀)된 야스쿠니 신사(神社)를 총리까지 참배하며,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심지어는 피해국들의 근대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괴변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이 두 패전국을 이렇게 다르게 행동하도록 하고 있는가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침략전쟁 전과 후에 있어서 독일과 그의 교전국 간의 경제적인 차이와, 일본과 그의 침략을 당한 나라와의 경제적인 대비는 일본의 오만을 설명하는 한 가지 가닥을 제공해 줄지 모른다. 독일은 교전국이었던 영국, 불란서보다 한때 후진국이여서 독일 상류계급은 자녀들을 파리대학에 유학시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왔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종전 후인 현재도 1인당 국민소득에서 큰 차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비해 침략 전에는 근대화뿐만 아니라 생활수준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며, 종전 후인 지금에는 그 격차가 많이 벌어진 상태에 있다. 따라서 혹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말하는 못사는 이웃을 업신여기는 오만한 태도를, 일본도 우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로는 독일과 일본의 문화적인 차이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일본의 ‘수치의 문화’가 기독교 문화인 ‘죄의 문화’보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작게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수치의 문화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를 의식하여 행동하는 반면, 죄의 문화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할 필요 없이 개인이 지은 죄를 직접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기 양심의 보다 강력한 가책을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지난날 우리를 어떻게 봤으며 또한 지금은 어떻게 보고 있기에,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역사교과서마저 왜곡해서 자기 민족을 미화하려는 역사관으로 2세들을 교육시키려 하는 것인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지난날 우리를 침탈(侵奪)했던 일본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했던가를 뒤돌아보는 것은 그들의 우리에 대한 오늘날의 태도와 진심을 가늠해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 탄압과정, 1923년 9월 1일에 있었던 ‘관동지진 조선인 대학살사건’ 등을 보면 우리민족을 짐승보다 더 못하게 취급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죄의 응보(應報)에 대해 일본과 독일이 각각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려고 화제의 책을 낸 이안 부루마(Ian Buruma)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본 병사들은 중국인이나 조선인과 같은 ‘열등(劣等) 민족'을 학살하는 것은 천황(天皇)의 뜻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충성의 표시라고 믿었다” 치욕의 역사 후손들이 깊이 새겨야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일본에게 사죄하라 또는 배상하라는 등을 외친다는 것은, 우리가 마치 사죄와 배상을 구걸하고 귀찮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다른 외국사람들 눈에 혹시나 그렇게 비추어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차라리 그 힘과 정력을 국력신장에 기울려 일본을 이기는 일에 매진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지난날의 씻을 수 없는 치욕과 형언할 수 없는 혹독한 폭정으로 고통 받은 우리, 침략했던 자가 지금도 지난날에 대한 사죄도 없이 아직도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인 발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 착잡한 심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아직도 옛날처럼 내심 우리를 멸시하고 있다면, 그들로부터 얻는 형식적인 사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첫째는 우리 스스로가 일본의 학정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일간의 역사인식 분쟁의 해결방법으로서 자기 민족중심 역사인식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탈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볼 때 이상적인 논리에 불과함에 틀림없다. 따라서 가해자이면서 반성도 없이 역사왜곡을 시도하기 시작한 일본에게 이와 같은 이상론을 거론 해봤자 별 소용이 없음은 분명하다. 피해자인 우리는 우선 우리 자신의 바른 역사인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국권찬탈과 학정과 잔악한 탄압에 관한 철저한 국민교육이 먼저이고 다음이 친일진상규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민의 역사의식이 바로서야 친일진상규명의 효력과 진정한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국민들의 의식수준으로서는 친일진상규명의 목적마저 흐리게 되고 말 염려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둘째 일은 국력을 증강시키고 문화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사죄도 않을뿐더러 능글능글하게 역사왜곡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오만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우리보다 월등한 강자로서 엄연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가 이를 근원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특단(特段)의 노력도 없이, 다만 규탄(糾彈)의 구호만 외치는 것은 공허(空虛)한 몸부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과 같은 빠른 근대화와 경제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즉 우리의 국력이 지금의 수준보다도 더 낮았더라면 그들이 과연 우리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와 같은 가정(假定) 속에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 할 셋째 일은, 지난 약 1세기 동안의 우리와 일본과의 불행했던 관계를 재조명하는 일은,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 일방적으로 그것도 너무 부끄러울 정도로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지금도 그들의 오만과 멸시의 구실을 줄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드릴 각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이 역사적인 엄연한 사실을 가르치는 것을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우겨댄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치욕의 역사적 사실을 빠짐없이 국민교육을 통해 널리 후손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계속되는 반일시위에서 나타난 국민의 분노를 국력의 증강과 문화수준의 향상으로 승화(昇華)시켜 다시는 우리를 능멸할 수 없는 나라로 발전시켜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차원 높은 대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의 추진은 현 지도층의 역사적인 임무이자 그들의 지혜와 능력을 시험해 보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