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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전쟁 규슈 답사 마지막은 조선도공 이야기입니다. 주지하시다시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 땅으로 많이 잡혀갔습니다. 왜 수많은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을까요? 마침 그때 일본에서는 다도(茶道)가 한창 유행했습니다. 16세기 후반 센노리큐라는 사람이 일본의 차문화를 다도로 발전시켰던 것이죠.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제대로 된 찻잔 하나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인기 절정이었습니다. 특히,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조선의 찻사발은 평범한듯하면서도 오묘한 멋으로 인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습니다. 도자기는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영주들에게도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자기를 팔아 이익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도공들을 잡아가는 데 더더욱 혈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도공들을 집단적으로 거주시키며 감사와 함께 파격적인 대우까지도 보장하면서까지 하이테크 기술의 응집인 도자기를 만들도록 했던 것이죠. 7년여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의 도자기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던 반면, 일본은 조선도공들로 인해 도자기산업이 싹트게 되었고 이후 국제적 정세를 잘 이용하여 중국을 대신하여 유럽에까지 수출함으로써 일본 도자기의 명성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7년여의 전쟁을 일컬어 ‘도자기전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규슈 곳곳에도 조선도공들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오늘은 사가현의 대표적인 조선도공이었던 이삼평과 가고시마현의 대표적인 조선도공이었던 심당길의 궤적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삼평에 대한 논란 사가현 아리타나 이마리 마을에 들어서면 길거리에서 쉽게 도자기를 볼 수 있습니다. 도자기를 만들고 판매하는 가게는 물론이고 다리 위 난간도 도자기로 꾸며 두었습니다. 이렇게 사가현이 도자기의 고장이 된 데는 이삼평의 공이 크다 하겠습니다.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의 시조[陶祖]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알려진 자료는 극히 미미합니다. 이삼평이라는 이름부터가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그의 성이 원래부터 이씨 성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조선도공의 대표자로 예우하는 차원에서 조선 왕실의 성을 따 이씨 성을 붙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출신지를 놓고도 이견이 있습니다. 잠깐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삼평 관련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포로로 끌려간 기술자들 중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상도에서 끌려간 후 일본 규슈에 정착하게 된 도공 이삼평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6학년 1학기 사회과탐구 60쪽 살펴본 바와 같이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이삼평의 출신지를 경상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출병 때 일본에 온 충청도 금강(金江) 출신의 삼평’이라는 일본 측 기록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금강을 김해로 추정하는 시각에서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금강을 금강(錦江)의 착오로 추측하고 그의 출신지를 충청도로 보는 경향이 더 우세합니다. 아리타와 공주에 각각 세워진 이삼평 기념비문에는 모두 충청도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삼평과 관련한 논란은 또 있습니다. 일본으로 ‘강제적으로 끌려갔느냐’, ‘자발적으로 넘어갔느냐’는 문구 때문입니다. 논란이 되는 문구를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리타에 있는 이삼평기념비로 오르는 계단 옆에 안내된 문구입니다. 2005년 이삼평공헌장위원회 명의로 세웠습니다. 아리타도자기의 시조인 이삼평공은 조선국(현재의 대한민국) 충청도 금강 출신으로 전해지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했을 때 나베시마군에 붙잡혀 길 안내 등의 협력을 명령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삼평공은 사가번의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귀국할 때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 그 후 귀화하여 출신지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을 가나가에(金江)라고 지었다… 다음은 공주 동학사 가는 길 박정자삼거리에 조성된 이삼평기념비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지난 1990년에 세워진 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 명의의 안내문입니다. 이삼평공은 임진정유의 난에 일본에 건너가 여러 도공들과 역경을 같이한 끝에 1616년 규슈 아리타 이즈미산에서 도석의 활용으로 일본 최초의 백자기 생산에 성공하여 일본자기산업 융성의 원조가 되었고… 공주 이삼평기념비의 안내문 앞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하나 더 서 있습니다. 지난 2001년 각 단체 명의로 세워둔 것입니다. …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두 군데 비문 일부분에 역사적 왜곡이 있다는 점이다… (중략)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 근 십만 명에 이르는 도예공, 부녀자, 농민들을 강제로 끌어갔다. 이삼평님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렇듯 이삼평에 대한 시각은 그의 위상에 맞게 다양한 시각으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일본 도자기의 시조라고 칭송받는 조선도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리타 도조 이삼평비에서 아리타에는 이즈미 광산, 도산신사, 도조이삼평비, 이삼평의 묘와 그가 도자기를 만들었던 텐구다니 요터, 아리타역사민속자료관, 큐슈 도자기 문화관, 또 다른 조선도공이었던 백파선의 묘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삼평은 1616년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를 이즈미 광산에서 처음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못 구해 이리저리 찾아 헤맨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일본에서 백자가 만들어지는 전환기가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지요. 처음에는 거대한 산이었다지만 현재는 흙을 파헤친 흔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웃한 산으로 동굴을 파헤치듯 백토를 찾아간 흔적이 역력합니다. 아직도 고급도자기를 만들 때는 이곳의 흙을 아직도 활용하고 있다고 하네요. 아리타역사민속자료관에 가면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이 보급했던 오름가마 모형이나 도자기의 원료, 아리타 도자기의 변천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가마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었습니다. 도산신사는 도조 이삼평을 도자기의 신으로 모신 곳입니다. 철길을 건너 신사로 오르는 입구에는 이삼평과 함께 응신천황, 그를 잡아간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배향되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도리이나 고마이누 모두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마이누는 신사 양쪽에 서 있는 개를 말합니다. 도산신사에서 만난 이삼평의 14대 후손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신사에 모셔진 분이 이삼평”이라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 백제왕족을 모신 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인물을 신으로 모신 곳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신사 뒷길로 5분 정도 오르면 도산 정상에 이삼평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삼평기념비에 서면 아리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첩첩산중 좁은 골짜기를 뚫고 곳곳에 도자기를 만드는 공방이 들어서 있습니다.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더라면 이런 오지에 저렇게 빼곡하게 집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요? 매년 도자기축제를 할 때면 몇 ㎞에 이를 만큼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하는데…. 14대 후손의 말대로 이삼평은 죽어서도 아리타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치 남해 다랭이 마을처럼 다닥다닥 지붕을 붙이고 들어선 발밑의 도자기마을이 모두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의 노력이 아니었던들 불가능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삼평가가 계속해서 도공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도예가의 맥이 끊어졌다가 13대부터 다시 도예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현재 14대 역시 도자기를 만들고 있고 우리나라 이천에서 1년 정도 도자기 공부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서 그 이후 계속 도예가문으로 지속될는지는 의문입니다. 14대 역시 그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듯했습니다. 심당길과 심수관 규슈 최남단의 가고시마현에는 심수관이 있습니다. 심수관이라는 이름은 세습명입니다. 그러니까 정유재란 당시 초대 심당길이 시마즈 영주의 군대에 의해 남원에서 잡혀 가고시마에 도착한 이래 줄곧 도자기를 만들어 오다가 12대부터 심수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현재는 15대 심수관이 가업을 잇고 있습니다. 처음 남원성에서 잡혀온 조선인들은 모두 16개 성씨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는 본능적으로 가마를 만들고 그곳에서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는데 일본사람들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이 살던 고향 산천과 너무 닮은 곳에서 정착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일본사람들도 살지 않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이들이 정착했을 때는 일본의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워서 시마즈 영주가 이지메 당하는 조선도공들을 안중에 둘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정세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영주가 나서서 심당길 일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이 도자기 제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겠노라고 직접 챙겼습니다. 자신의 직접적인 보호 아래 도자기를 만들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영주의 이러한 주문에도 이들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고 합니다. 첫째 이유는 고향을 닮은 산천을 떠나기 싫었고, 둘째 이유는 가고시마에 같이 온 조선인 중에서 일본인의 앞잡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영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조선인자치를 허용했다고 합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조선말을 그대로 쓰고 8월 15일 추석날이 되면 한복을 차려입고 단군왕검을 모시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조선말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데 걸상을 ‘앉을 통’이라 하고, 막대기를 ‘찔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밖에 ‘가마’ ‘바닥’이라는 말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심당길을 시작으로 대를 이어 400년이 넘게 도자기를 계속 만들어온 이 가문은 제12대 심수관에 이르러 각종 세계 도자기 대회에서 큰 상을 받게 되면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심수관도예촌 안에 있는 전시관에는 초대 심당길부터 15대까지 심당길 가문의 역사가 한눈에 펼쳐집니다. 특히, 12대 심수관의 작품이 많이 보이지요. 도예촌에 들어서면 입구에 조선 갓이 내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심당길이 썼던 망건 조각을 가보로 아주 귀하게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오름가마를 보면 우리나라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고향을 잊지 않고, 조선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며 400년 넘게 조상이 물려준 성을 그대로 쓰고 조상이 물려준 물건을 아끼고 조상이 했던 일을 계속 지켜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 또한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00여 년 전 일본에 정착한 이삼평과 심당길. 그들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이 있었기에 일본은 세계적인 도자기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도공들을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고려청자, 청화백자, 백자와 같이 찬란했던 우리네 도자기산업은 내외부적으로 수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겨 다시금 새로운 도자기역사의 한 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에 참가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니면 9월 강진청자문화제도 괜찮을 듯합니다만….
“재택 장애아도 찾는 함·울·터 만들고 싶다” 유치원 특수반, 온돌 시설을 갖춘 장애 아동을 위한 생활체험적응실, 특수교육 종일반, 특수교육 보조원 지원, 장애아동을 위한 방과 후 교실…. 장애아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솔깃할 만한 조건을 갖춘 학교가 있다. 경기도내 최고의 장애아 학습시설을 갖춘 남양주 진건초(교장 박명숙)가 바로 그곳. 진건초가 통합교육의 산실이 된 것은 특수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온 이 학교 황승택 교감의 노력이 있었다. “아이를 위한 마음은 어떤 교사나 같습니다” “일반 교사라고 특수교육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 똑같이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죠.” 황 교감이 특수교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86년도에 3년 동안 특수학급을 맡으면서. “전공분야도 아니어서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들에게 ‘졌다’고 손을 들었죠. 장애아동은 자기 나름의 목표가 있어서 시도해보지 않고 ‘이거 이상은 못해요’라고 선을 긋죠. 그런 아이들을 달래서 한발 더 나아가게 해야 하는데 저는 아이들과의 기 싸움에서 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헌신적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황 교감은 2005년 3월 진건초에 부임하면서 그때 아쉬웠던 일들을 실천해나갔다. 학교 뒤쪽에 있던 특수반을 양지바른 본관 1층 교실로 이전했고, 교실 두 개를 터서 장애학생들이 편리하도록 온돌을 설치했으며 화장실을 교실 안으로 들여왔다. 또 교실 중앙에 교사의 자리를 배치해 아이들을 더 잘 보살필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나 둘씩 생각했던 바를 행동에 옮기면서 장애아동들만을 위한 치료·놀이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지난 4월 13일 개관한 생활적응 체험실 ‘함·울·터’는 황 교감이 1년여의 노력 끝에 이루어 낸 것이다. ‘함께 어울려 희망을 가꾸는 터전’라는 이름도 직접 지었다.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자신 있게 살아가는 사회가 되는데 학교가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함·울·터는 구리·남양주 교육청이 8600만원의 예산을 지원해 설립됐다. 장애학생들에게 다양한 치료교육과 생활적응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인공 암벽 타기, 전면의 거울을 이용한 신체 놀이, 음악·미술 치료를 통한 감각 표현, 이불개기, 빨래 등의 일상 생활체험, 의생활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 진건초의 장애아동은 모두 16명(저학년 8명, 고학년 8명). 평소에는 각 학급에서 다른 일반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주지 교과 시간에 특수학급에서 수업 받거나 함·울·터에서 생활한다. 특수교사 - 담임 간의 긴밀한 협의가 중요해 일반 교사인 황 교감의 눈에 비친 통합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처음 학교의 시스템을 보니 장애학생들이 원적학급에서 한 달 동안 적응 교육을 받더라고요. 특수학급 교사는 아이를 보내면 그만이고, 원적학급 교사는 갑자기 맡게 된 아이 때문에 당황하고, 아이는 한 달 동안 불편한 원적학급에서 기가 다 죽죠. 선생님들께 물었습니다.‘선생님이 먼저 아이에게 적응하는 게 맞는 순서 아닌가요?’하고요.” ''함·울·터''에서 신체놀이를 하고 있는 학생들.그는 장애 아동의 누적자료를 만들게 했다. 이 아이의 증상은 무엇이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학습적으로는 어떤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등을 상세히 적은 자료다. 진건초에서 이 자료는 통합·원적학급 교사는 물론이고 장애아동을 돕는 ‘또래 도우미’ 학생까지 숙지해야 하는 내용이다. 그런 후 자료를 토대로 특수학급에 원적학급 교사와 특수학급 교사가 모여 회의를 열게 했다. “누적자료를 만듦으로써 교사가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게 됐고, 특수교사와의 협의를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죠. 그러다 보니 더 긴밀한 협의가 이루어지고, 아이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이 밖에도 진건초 장애아동들은 누구나 컵스카웃, 걸스카웃, 해양소년단, 우주소년단 등의 청소년 단체에 가입해 이들과 함께 다양한 사회 활동을 체험하고 있다. “처음에는 담당 선생님, 학생과 학부모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소년단체의 본래 목적이 봉사와 나눔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 아니냐고 열심히 설득했습니다. 지금은 장애·비장애 학생들이 다 함께 운동회를 할 정도로 인식이 많이 개선됐습니다.” 황 교감은 앞으로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다. “학교도 못다닐 만큼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인근의 학생들도 함·울·터를 체험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 학생들도 함·울·터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학교, 친구들을 체험했으면 해요.”
BC 490년. 아테네의 밀티아데스는 아테네 북방의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 1만과 플라테이아군 1천을 이끌고 2만 5천여 페르시아군에 맞섰다. 페르시아의 기병이 주력군과 떨어져 있음을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측면을 공격한 후 포위하는 데 성공했으나 결국은 참담한 패배로 마라톤전을 끝냈다. BC 480년. 아테네해군은 8일 전 아테네를 정복하고 약탈한 페르시아군과 살라미스 해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역시 대패했고, 그로 인해 최초의 동양과 서양의 전쟁으로 운위(云謂)되기도 하는 페르시아전쟁도 10여 년 만에 막을 내렸다. 물론 사실은 그 반대였다. 그리스는 마라톤전과 살라미스해전을 값진 승리로 장식했다. 하지만 만약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에 패했더라면 고대 그리스의 역사, 아니 서양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서양문화의 뿌리, 고대 그리스 1820년대에 그리스인들이 400여 년에 이르는 오스만 제국(현 터키)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일으켰을 때 영국 시인 셸리는 “우리의 법률, 우리의 문학, 우리의 종교, 우리의 예술, 그 모든 것의 뿌리는 그리스에 있다. 그리스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직까지도 야만인과 우상숭배자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문화가 중국권 동양문화의 토대였다면 고대 그리스문화는 문자 그대로 서양문화의 뿌리였다. 영어 ‘music(음악)’과 ‘museum(박물관)’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Muse(뮤즈 : 제우스의 딸로서 시·음악·무용 등을 관장한 아홉 여신 중의 하나)에서, ‘January(1월)’가 Janus(야누스 : 두 얼굴을 가진 문의 수호신)에서 파생됐고 ‘uranium(우라늄)’이 Urania(우라니아 : 천문학을 관장하는 여신), ‘gas(가스)’가 Chaos(카오스)에서 유래한 것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징하는 철학, 호메로스의 서사시, 아이스킬루스와 소포클레스 등의 비극,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학,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제우스·아폴로·포세이돈·니케 신전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신전들, 비너스·니케·엘긴 마블스 조각들 등 이 모두가 후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BC 490년의 마라톤전과 480년의 살라미스해전에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가 패했을 경우 그 모든 것들이 존재했을까? 그 무렵 이란에서 발흥한 페르시아는 소아시아까지 진출했다. 페르시아의 서진(西進)은 영토 확장은 물론 지중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지중해는 오늘날도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지중해를 장악하는 세력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마라톤 신화 탄생시킨 마라톤전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가던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지중해 연안)의 그리스계(系) 폴리스들을 짓밟았고 BC 492년에 결국 발칸 반도에 침공했다. 하지만 태풍이 페르시아의 그리스 정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기원전 490년에 두 번째 원정을 단행했다. 페르시아는 에게 해를 건너 유베아 섬을 거점으로 삼고 한때 아테네를 통치했던 반역자 히피아스의 안내를 받으며 아티카 반도로 달려들었다. 아테네의 밀티아데스는 민회를 설득해 마라톤 평원에서 자웅을 겨루기로 했다. 9월 12일 마라톤 평원에 진을 친 아테네는 1만 명의 중무장 보병과 폴리테이아의 원군 1천명 등 1만 1천 명으로 2만 5천의 페르시아군을 맞아 사력을 다해 싸웠다. 대담하고 용의주도한 밀티아데스를 비롯한 10명의 장군이 그리스군을 지휘했다. 12일 새벽에 페르시아 주력군에 기병이 없음을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양 날개를 보강한 다음 적을 그리스군의 중심부로 밀어붙였고 결국은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당해 맹공을 받던 1만 5천 페르시아군은 급기야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아테네·폴리테이아군은 문자 그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역사학의 할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테네군은 192명이 전사한데 반해 페르시아측은 6400명이나 전사했다. 다리우스는 군대를 철수시켰고 더불어 2차 페르시아전쟁도 막을 내렸다. 마라톤전의 신화는 그로서 끝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때 전령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2.195㎞를 한숨에 달려 “기뻐하시오. 우리가 이겼소!”라고 말한 다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라톤전을 앞두고 페이디피데스가 원군요청서를 들고 스파르타까지 240㎞를 이틀 만에 달려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어쨌든 아테네인들은 마라톤전의 승리와 그 전령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의 올림픽경기에 ‘마라톤 경주’를 포함시켰다. 마라톤 경주는 근대 올림픽에도 채택되어 대미를 장식하는 꽃이 되었다. 아테네 해군, 그리스를 지켜내다 그러나 그리스 세계의 비극은 종결되지 않았다. 다리우스를 이어 페르시아의 황제가 된 크세르크세스가 36만여 대군-헤로도토스에 따르면 5백만이 넘었다-을 동원해 수륙양면으로 침공했다(BC 480). 200여 개의 폴리스(polis)로 구성된 그리스 세계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처지였다. 10년 전의 마라톤전 때까지도 뭉치지 못했던(당시 종교적 축제 중이던 스파르타는 축제도 축제지만 아테네가 승리해 그리스 세계의 패자가 되는 것도, 페르시아가 이겨 스파르타를 포함한 전체 그리스를 지배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어 아테네의 원군요청 수용을 주저했고 그 사이 아테네는 고군분투해 승리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힘을 합쳐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네만이 아니라 전체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상전은 그리스연합군의 완패로 끝났다. 스파르타의 팔랑크스(密集步兵)가 주력군이던 그리스연합군은 기원전 480년 8월 스파르타 국왕 레오니다스의 지휘 하에 테살리아 남쪽 테르모필레에서 적군과 혈전을 벌였다. 7천여 그리스연합군은 6일 동안 분투하며 버텼으나 결국 참패했다. 레오니다스와 그를 옹위하던 1천여 전사는 최후의 1인까지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서 말하라. 여기 누워있는 우리 스파르타인들은 적의 칼에 쓰러져 여기 잠들었노라고.” 후일 그곳에 세워진 비석의 한 구절이다. 해전은 아테네 몫이었다. 스파르타가 보수적 농업국이며 육군국이었다면 아테네는 개방적 교역국이며 해군국이었다. 지상전에 완패했으므로 아테네가 맡은 해전만이 그리스세계의 남은 한 가닥 희망이었다. “나무벽 안으로 피신하라”는 신탁(神託)을 쫓아 해전에 운명을 걸자고 주장한 인물은 테미스토클레스였다. 페르시아의 대형 겔리선 800여 척을 370여 척의 소형 3단 노(擄)겔리선으로 대적해야 했던 그는 큰 배에 유리한 대해를 피해 좁고 물살이 빠른 살라미스 해협으로 적선을 유인했다. 그리스의 운명이 걸린 기원전 480년 9월 29일. 소형이라 기동력에서 앞선 아테네해군은 11시간에 걸친 해전에서 완승했다. 아테네의 소규모 함선들이 단단한 뱃머리로 페르시아함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파괴하고 수병들은 적선에 뛰어올라 장창을 휘둘렀다. 페르시아는 300여 척의 전선을 잃은 데다 나머지 전선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아테네는 40여 척을 잃었을 뿐이었다. 12척으로 133척의 왜적을 좁고 물살이 빠른 울돌목으로 유인해 대승한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비교된다. 그리스연합군은 이어 벌어진 육전에서도 테르모필레에서의 패전을 되갚았다. 당시 페르시아육군은 테살리아의 동북부에서 아테네 부근의 플라테이아로 옮겨와 있었다. 스파르타군을 포함한 그리스연합군은 페르시아와 그 동맹국 테베의 군대를 꺾었다. 그때 테베 등 그리스의 일부 폴리스는 대국 페르시아에 붙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때 10만의 그리스연합군이 페르시아군과 싸웠는데, 아테네의 보병이 페르시아군을 패퇴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쟁 승리 후 찬란한 문명 꽃피워 살라미스해전에 이어 플라테이아에서도 패한 크세르크세스는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고, 10여 년에 걸친 페르시아전쟁도 끝났다. 전쟁을 주도한 아테네는 전후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크게 발전했다.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의 도전을 일축하고 지중해 제해권을 확고히 장악했으므로 아테네를 비롯한 폴리스들의 지중해 해상활동은 더욱 왕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후 최대의 번영기를 맞이한 아테네에서는 민주제가 확립되고 파르테논 신전이 재건되는 등 활기가 넘쳐흘렀다. 철학을 비롯한 학문과 예술이 만개한 것도 페르시아전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페르시아전쟁 50여 년 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전쟁 이후에, 즉 페르시아전 후의 번영기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 세계가 몰락의 길에 들어섰을 무렵에 활동했지만 말이다. 페르시아전 후의 번영기 아테네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그때 아테네를 ‘그리스의 학교’라고 자랑했지만, 그리스 고전문화를 주도적으로 창조한 것도 아테네였다. 그리스 세계는 페르시아전쟁 후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해 결성한 델로스 동맹(BC 478)-아테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맹국의 동맹 탈퇴를 불허하고 동맹회비를 마음대로 사용하는가 하면 자국의 화폐를 동맹국 공용의 화폐로 만들고 동맹국들의 재판권마저 장악하는 등 동맹국들 위에 군림했는데, 사가들은 그것을 아테네의 제국화(帝國化)로 규정한다-과 스파르타가 주도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분열해 대립하다 결국 30년에 걸친 내전인 펠로폰네소스전쟁(BC 431~404)으로 무너지고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에게 병합되었다(BC 339). 그리고 20세에 마케도니아의 통치자가 된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그리스 세계를 괴롭힌 페르시아에 대한 응징이기도 한 동방원정에 나서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이르는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역사를 이룩하였다. 야만적 후진지역에서 벗어나 페리클레스의 말대로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학교였다. 아테네와 더불어 패권을 겨루던 군국체제의 스파르타는 그리스 고전문화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지만 민주체제의 아테네는 빛나는 고전문화를 창조했다. 그리스 문화하면 아테네고 아테네하면 그리스 문화를 생각하지 않는가. 하지만 마라톤전이나 살라미스해전에서 패했더라면 그리스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전쟁을 그리스인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전쟁으로 평했지만 패했을 경우 아테네는 자유를 자랑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기는커녕 생존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헬레니즘세계-로마’로 이어지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역사는 물론 고대 이후의 지중해 세계 역사도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은 세계사의 주역이 아니라 셸리의 말처럼 야만적 후진지역으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20년 이상 교육재정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문민정부 때 교육개혁위원회 전문위원으로서 교육재원 GNP 5% 확보과정에 참여한 일이며, 다른 하나는 국민의 정부 때 ‘교육재정 GNP 6% 확보를 위한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여 2000년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을 이끌어낸 일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마음속에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교육재원 확충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해왔지만 앞으로도 교육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교육재원 규모의 변화를 보면, 교육재원 GNP 5% 확보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1996년 이후 교육재원이 대폭 확충되었고,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1998년에 크게 삭감되었다가, 2000년 1월의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으로 2001년부터 다시 큰 폭으로 교육재원이 확충되었다. 2001년만 해도 2000년보다 무려 3조원 이상의 교육재원이 순증되었다. 교원정년 단축 때 발행했던 지방채의 상환과 7·20 교육여건 개선사업 추진, 중학교 의무교육 완성 등으로 교육재원의 수요도 늘었고, 2004년 이후 내국세 수입 감소로 교부금 증가율이 둔화되었고 교육세 결손이 누적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교육재원의 증가액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다. 최근 모 일간신문에서 ‘학교는 가난하다’는 특집기사를 연재한 후, 이어서 스쿨업그레이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기사를 읽으면서 ‘설마 이런 학교가 아직도 있겠는가, 아마도 기자가 특수한 몇몇 학교를 편견을 가지고 취재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가 본 후 마음이 달라졌다. 그 학교는 1993년에 ‘학교시설 현대화 시범학교’로 개교했던 학교였다. 불과 14년이 지났지만 학교 곳곳이 노후화되어 있음을 보고 20년 이상 지난 학교들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게 되었다. 학교에 정수기가 없어서 아이들이 매일매일 먹을 물을 집에서 가지고 간다. 학급에 그 흔한 청소기조차 없어서 교실 곳곳에 먼지 덩어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모노륨이 깔려 있는 교실 바닥은 얼룩으로 더럽혀진 채로 방치되어 있고, 책걸상은 긁히고 모서리가 닳아진 채로 놓여 있어서 도저히 21세기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학교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학교환경의 낙후성에 대한 문제와는 별도로 교육재원이 확충되어도 학교교육은 변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자주 듣는다. 학급당 인원이 60명에서 30명으로 감축되었어도 교사들의 교육방법은 별로 바뀌지 않았으며, 중등학교 교사들의 주당 수업시수가 24시간에서 18시간 내지 20시간으로 줄었어도 수업의 질이 높아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재원 확충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필자에게는 매우 당혹스런 비판임에 틀림없다. 교육재원은 계속 늘어나도 학교는 여전히 가난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육재원 규모와 학교교육의 질은 무관한 것인가?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아낼 시간적 여유는 아직 없었다. 다만, 교육재원 확충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여전히 가난하고, 교육은 변하지 않는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재원이 증액될 경우 증액분이 학교운영비에 반영되기보다는 교육청 차원의 목적사업비에 우선 반영되기 때문인 듯하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목적경비 비율을 낮추기 위해 이를 시·도교육청 평가지표에 반영하고 있지만 좀처럼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목적사업 대신 권장사업 등의 명목으로 학교운영비를 목적경비화시키는 관행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교육재원 증액으로 사업이 늘어나면 행정직원이 늘어나고 행정직원이 늘어나면 다시 사업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둘째, 학교예산 편성과정에서 교수·학습활동 예산에 대한 우선 순위가 뒤지기 때문이다. 가시적 효과가 적은 교수·학습활동에 예산을 많이 배정할 경우 사업성 예산이 줄어들어 달가워하지 않는 풍토가 아직 학교에 남아 있고, 교수·학습활동 예산이 많아져 예산 집행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바라지 않는 교사들도 있는 듯하다. 학교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연간 초등학생 1인당 학습준비물 예산은 5천원에서 1만 원 정도다. 학습준비물 예산이 교수·학습활동을 위한 예산의 전부는 아니지만, 학습준비물 예산 규모와 교수·학습활동의 범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교육재원이 아무리 늘어도 교수·학습활동을 위한 예산이 늘지 않으니 교육의 질이 높아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학교예산편성 관행이 바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청에서든 학교에서든 예산을 편성할 때 교육청이나 학교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예산에 반영된 사업이나 활동이 교육청과 학교의 존재 목적에 얼마나 부합되는지 한 번 더 고민해본다면 학교교육은 보다 빨리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교육재원의 확충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보다 당당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인간문화재 판소리 명창으로 유명했던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1907~1974)옹의 일화이다. 그가 만년에 병고와 외로움으로 시달릴 때, 몇몇 제자들이 찾아와 스승의 형편을 어렵사리 보살폈다. 그런데 지난 날 김연수 선생의 총애를 크게 입어 출세한 제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스승의 어려움과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찾아오기는커녕 도대체 안부 인사 한번 없었다. 주변에서 그 제자의 그릇됨을 탓하며, 선생에게 그를 불러 한번 호되게 나무랄 것을 재촉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동초 선생이 하셨다는 말씀이 걸작이다. “내 그 녀석을 불러 욕을 바가지로 해 주려다가, (혹시라도 내 욕을 듣고 뉘우쳐서) 그 놈 사람 될까 싶어서 그만 두었네.” 이쯤 되면 욕의 기술과 품격이 경지를 넘어선다. 직접 욕설을 건네지 않았으면서도, 훨씬 더 짜릿한 울림을 전한다. 판소리 명인다운 말의 경륜이 묻어 있다. 말[言語]이 주인을 제대로 만나, 그 장면에 마땅한 의미의 울림을 기막히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김연수 선생의 욕이 짜릿한 설득력과 지적 운치를 획득하고 있는 것은 그가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미 욕 자체로부터 저만치 벗어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수준의 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인상을 긁어대면서 거세고 할퀴고 질펀하게 내뱉는다고 해서 일품의 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욕이야말로 잘해서 본전이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욕은, 궁극에는 욕한 자신이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팔 걷고 거센 욕설로 해 붙일 때는, 내 입에서 나온 욕이 일견 상대를 향해서 통렬하게 날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욕이 고스란히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독하고 독한 욕설로 악다구니처럼 몰아붙여 상대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희열에 가득 찬 승리감을 맛보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내 안에서 나오는 스스로의 쓴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가장 고약한 것은 자식 야단치면서 감정에 휘둘려 욕설을 퍼붓는 경우이다. “아! 나는 고작 이런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욕으로 얼룩지는 싸움에는 절대로 이기는 사람이 없다. 물론 얻는 것도 없다. ‘상처뿐인 영광’이라도 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오욕뿐인 상처’를 면하기 어렵다. 옆에서 구경하는 제삼자의 자리에서 보면 이 점은 더 명료해진다. 백이면 백, 다음과 같은 모욕적 평가를 피해 가지 못한다. “에이! 그 사람 욕하는 것 보니 못 쓰겠더라.” “두 놈 모두 다 똑같다 똑같아!” 그러고 보니 욕이란 망가지는 과정의 시발점을 제공한다. 흉하게 망가지지 않으려는 생각을 한다면, 욕에도 품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욕쟁이할머니들의 경우(특색 있고 맛있는 음식으로 식당을 하시며, 손님들에게 질박한 욕을 잘해서 유명해진 할머니들)에도 그 나름의 욕 철학은 있다는데,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될성부른 놈들에게만 욕을 한다’고 한다. 욕은 어디서 생겨나오는 것일까. 전혀 다듬지 않고 길들이지 않은 인간 본성의 언어가 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욕은 보기에 따라서는 질박(質朴)함의 매력을 준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張吉山)’에 나오는 그 푸짐하고도 조야함 그대로인 욕들은 원초적 자연으로서의 인간 본성을 읽게 해 준다. 교육이니 교양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으로부터 문화적 가공을 전혀 받지 아니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 문학적 의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리얼리즘 문학예술의 영역이고, 막상 구체적 교실에서 구체적 학생을 교육시키는 장면에서는 욕이 미화될 수 없다. 욕을 몰아내어야 한다. 욕은 분명 사람의 나쁜 본성과 결부된 것이고, 사람의 나쁜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바로 교육이기 때문이다. 욕은 원시적 욕구와 깊은 상관을 가진다. 욕구의 좌절이 욕을 부른다. 나는 만약 ‘욕의 나라’가 있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나라는 ‘교육의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욕의 사용은 문맹률과도 높은 관계를 갖고 있다. 문자(쓰기) 문화가 취약한 곳에 욕설이 기승을 부린다. 또 욕은 부정적인 면에서 가정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긍정적인 면에서 학교교육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교육적으로 상당한 진화를 해 온 셈이다. 치유 상담 전문가인 정태기 교수는 말한다. 사람의 모든 내적 상처의 근원과 불행의식 속에는 언젠가 그 사람을 할퀴고 갔던 누군가의 욕설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자랐던 50년 전 섬마을 가난한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어른이나 아이나 일상의 생활언어 자체가 거의 욕이었다고 말한다. 5학년 때, 의식 있는 젊은 선생님이 오셔서 일체의 욕설을 금지하는 강력한 지도를 하셨단다. 늘 생활언어처럼 사용하던 욕을 하지 말라니, 그 욕 안하기가 얼마나 불편하고 낯설었는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욕을 일체 쓰지 말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주고받는 말을 무조건 영어로 하라는 것처럼 어렵고 힘들고 낯설었습니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50여 년 전, 우리 농어촌 아이들이 겪는 언어생활의 평균적 모습이 이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아이들의 언어생활에서도 욕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정태기 교수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교육이 역할을 해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교육의 진화를 엿볼 수 있는 여실한 대목이다. 또 그만큼 우리 교육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욕하는 사회’를 조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욕먹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이다. ‘욕이 배따고 들어오나’하는 사회 심리의 풍조가 바로 그것이다. 스트레스 안 받고 살겠다는 전략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왠지 ‘자존(自尊)’의 가치를 스스로 팽개치는 것 같아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심리에는 ‘욕먹어도 돈만 많이 벌면 됐지’하는 천박한 물질 만능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까짓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 우리 모두 함께 천박해지자는 뻔뻔스러움이 끼어들어 있는 것이다. 철판같이 두꺼운 뻔뻔스러움이라 제법 강할 것 같지만, 의외로 약하다. 돈이 부리는 대로 온갖 망가지는 곤욕을 다 겪으면서도 막상 본인만 그것을 모르니 불쌍하기까지 하다. 근자 청소년의 욕 습관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영화를 꼽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영화에 조직 폭력을 다룬 영화가 약 10여 년 이상 일정한 흐름을 형성했는데, 그 중에는 학교와 조폭의 결합을 다룬 것들이 적지 않았다. 영화에서 욕들은 충동적 기제를 극대화 한다. 그리고 감정 배설의 도구로 쓰인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나쁜 본성’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욕은 모방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또 쉽게 상투적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지혜가 필요하다. 욕은 폭력이기 때문이다. 아니 욕은 폭력 이상이기 때문이다.
한국미의 특질에 대한 이해를 위해 폭넓게 다루어지는 대상은 바로 우리 멋의 세계이다. 우리의 멋은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무용 등 모든 예술 분야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멋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의 전통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 장점이나 특징을 제대로 느끼고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문제는 전통이나 한국적인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등을 모방하여 열심히 만드는 것이나 단청, 전통문양, 색동옷 등을 그리는 것이 곧 한국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미의 미학적 개념 규정한 혜곡 최준우 한국적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한국미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양식이 깊이 우러나는 것으로서 한국인다운 체취가 짙게 표현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유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한국미의 정체성(正體性)과 전통성을 일깨워 줘야 한다. 이러한 우리 아름다움을 연구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학문을 배운 미술사학자이며 미학자였던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1944)과 그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 미술사에 뜻을 두고 평생을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외길 인생을 살았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배흘림 기둥에 서서〉 저자)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일본 강점기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젊은 시절부터 조선예술에 남다른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노년까지 부단히 노력하며 조선미술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다. 고유섭과 야나기 무네요시는 같은 시대 사람으로 한국미술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도 동일대상을 두고 이해하는 미적 관점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를테면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공예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연구했는데 그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조선인에 대한 감상적인 동정론으로 한국미의 특질을 ‘비애의 미’로 판단했다. 그러나 고유섭은 우리 고유의 미의식을 탐구하기 위해 야나기 무네요시의 정신사적 미술사학에 관한 이론은 수용하고 적용하면서 조선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다만 유종열의 이론인 식민지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의 미를 비애의 미로 판단한 이론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최순우는 고유섭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지만 우리 문화의 특색과 장점을 현장체험 위주로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함 없이 미학적 개념들을 정리하고 또 그 개념들을 통해 한국미적 특질을 규명했다. 최순우의 학문이 우리 곁에 정답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한국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이려니와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쓴 필치와 아름다움의 특질을 분명하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태도에 가장 알맞은 형질미 한국미적 특질로는 백색의 아름다움, 곡선의 아름다움, 해학적 아름다움, 추상의 아름다움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미의 특질을 형성하는 배경에는 지리적 환경이나 역사적 환경 등 여러 요소가 있겠으나 우선 순리의 아름다움을 형성하는 요소로 자연환경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총면적의 75% 이상이 산악지대지만 산의 형상은 그다지 높지 않고 둥글며 평안하다. 이러한 아름다운 산과 맑은 하늘, 구비구비 이어지는 산과 조화를 이루는 강, 비옥한 농토 등 아름다운 강산을 지닌 자연환경은 한국인의 자연에 대한 애호나 순응성을 기르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담담하면서도 욕심 없는 선천적 성정을 지니게 했고, 그러한 성정은 곧 한국미의 특질을 만드는 근간이 되었다. 즉, 없으면 없는 대로의 재료, 있으면 있는 대로의 솜씨로 자연 속에 순응하는 순리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순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최순우는 ‘억지가 없는 아름다운 사물의 이치나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 아름다움’ 또는 ‘자연환경이나 자연의 태도에 가장 알맞은 형질미를 가늠할 줄 아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이것은 과분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했다. 또한 고유섭은 ‘무관심성’을 자연에 대한 순응의 논리로 입증했다. 이를테면 ‘무관심성’이란 건축의 경우 목재의 모양이나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적 굴곡을 그대로 사용하여 목재 본형을 그대로 양식에 구성해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옥의 추녀를 형성할 때 기교를 부리거나 계획적으로 깎아내지 않고 자연 그대로 구부러지면 구부러진 대로 굴곡이 있는 목재를 그대로 얹어 만들어내는 일, 자연 속에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잡아 자연과 건축을 일심동체로 만드는 일, 자연의 형질을 변화시키지 않고 생긴 모양대로 터전을 일구었던 논두렁 밭두렁의 모양 등은 원래 재료가 갖고 있는 자연성이나 자연환경과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무관심성’은 자연에 순응하는 섭리로 변화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람들처럼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모든 생활 성정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미술제작에 대한 순리적 자세는 작품의 착상이나 제작의 기발함에 무리함 없이 재료의 속성을 존중할 줄 알며 작품이 놓일 환경에 자연스럽게 순종하는 마음의 자세에서 이뤄진 것이다. 세계인에게 조화미 인정받은 ‘화성’ 한국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이나 외경(畏敬)은 주로 한국의 건축에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순리의 아름다움이란 건축이 이루는 조형미가 주위 환경과 얼마나 알맞고 적절한 조화를 갖느냐에 그 척도를 삼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건축은 경상북도 내동면 토함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석굴암과 불국사 굴원, 창덕궁 비원(秘院)의 부용당(芙蓉堂), 수원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나 화홍문(華虹門),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남강 촉석루(矗石樓)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의 건축은 인공의 자연스러움이 자연의 풍광을 도운 좋은 예들로서 자연에 관한 공경과 조심스러움까지 느낄 수 있는 표징(標徵)이기도 하다. 원래 한국 사람들은 집 한 채를 짓더라도 자연과 하나가 되게 세울 줄 아는 형안(炯眼)을 지닌 민족이었다. 조그만 정자 한 채는 물론 큰 누대(樓臺)나 주택에 이르기까지 뒷산의 높이와 앞, 뒷벌의 넓이 그리고 거기에 알맞은 지붕의 높이와 크기 등 자연과 인위의 조화미에 대한 특별한 안목으로 멋진 조형미를 나타냈던 것이다. 요사이는 집을 지으려면 대개 자연의 지형을 마구 헐어내고 깎고 돋우고 해서 자연 풍광을 훼손하고 학대하는 일이 예사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과거의 우리 민족은 결코 자연을 훼손하거나 거역하는 무모한 짓은 삼가는 슬기로움과 인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이 자연과 하나된 것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을 둘러보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성곽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건축물이 있다. 7개의 수문 아래로 옥수가 흘러내리고 수문 위에 놓인 다리 위에는 누각과 성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는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옥수의 흐름과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는 성곽의 기묘한 조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화성의 화려함은 화홍문과 어울린 방화수류정에 이르러 극치를 이룬다. 덤벙주초의 조형성 대표하는 농월정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한국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진주의 촉석루와 의암(義巖)은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품에 안고 자리 잡고 있으면서 자연과 충성이 하나되게 한 논개의 충절이 돋보이는 곳이다. 남강 속에 묻힌 의암과 그 강을 굽어보며 도도하게 벼랑 끝에 우뚝 솟은 촉석루는 자연과 하나가 된 건축물로서 천년 고도를 지킨 그 위상이 가히 으뜸이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보아도 야트막한 언덕이나 작고 낮은 시냇물 그리고 궁원(宮苑)을 돌아볼 수 있는 오솔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조화시킨 순리의 아름다움으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외에도 생긴 그대로의 절벽을 손상시키지 않고 바위 둔덕 위에 높고 낮은 자연 암석들을 적당히 의지해서 주초(柱礎)로 삼고, 꼭 필요한 곳에만 자연석을 옮겨 놓아 주초의 수를 채워 기둥의 길이를 여기에 맞추어 길게 또는 짧게 마름질한 ‘덤벙주초’는 실로 우리 민족이 분수에 맞추어 표현한 순리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자연 미감이라 할 수 있다. 경남 함양의 농월정(弄月亭)은 덤벙주초의 조형성을 잘 느낄 수 있는 대표적 누각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는 수려한 경관을 이룬 화림동 계곡이 덕유산 자락까지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5개의 정자가 그림같이 지어져 있는데, 특히 농월정은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옛날 우리 선조들의 풍류사상이 깃든 곳으로 함양을 찾은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필히 거쳐 간 곳이기도 하다. 맑은 물이 급한 굴곡을 이루는 곳에 커다랗고 평평한 바위, 즉 반석들이 편안함을 주며 자리 잡고 있다. 반석 위를 흐르는 물이 달빛을 받아 금물결을 이루는 이곳에 높고 낮은 반석을 있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세운 농월정은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화림동 계곡에 멋있는 정자가 많은 것은 예전부터 이곳에 자연을 사랑하는 선비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또 하나 이 계곡의 거연정도 주위 경관이 아름답고 흐르는 계곡물과 우거진 숲, 가설해 놓은 구름다리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 아름다운 풍광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게 하는 곳으로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게 한다.
해발 700m에 자리 잡은 산지습지 산허리에 걸린 구름이 자신의 몸 일부를 쉼 없이 나누어 만든 곳이 밀양의 재약산 사자평의 산들늪이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이곳에는 아홉 군데에서 샘물이 솟아올라 드넓은 산들늪을 적시고 흐르다가 작은 하천을 이루어 다양한 생물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표충사 경내의 영정((靈井)약수도 이곳의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솟아오른 것이다. 산 위의 넓은 들판에 있는 늪이라는 의미를 가진 산들늪. 영남 알프스의 한 봉우리인 재약산 수미봉(1108m)의 동남쪽에 위치한 대평원인 사자평의 일부분이다. 해발 700~800m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은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에 속한다. 영남 알프스는 밀양시, 청도군, 울주군의 3개 시·군에 모여 있는 해발 1000m 이상인 가지산, 운문산, 재약산, 신불산, 취서산, 고헌산, 간월산의 7개 산군을 말하는데 험한 산세와 아름다운 풍광이 유럽의 알프스에 버금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들늪은 2006년 고산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는데, 전체면적은 0.58㎢(약 18만평)이다.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고 생태적으로 우수한 자연경관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탄층이 발달된 습지에 진퍼리새와 오리나무군락이 잘 발달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멸종위기 종 2급인 삵과 복주머니난, 큰방울새난 등 보호가치가 높은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곳은 몇 개의 높디높은 폭포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700m의 산지습지인데도 버들치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 주로 좁은 산간 계류에 서식하는 버들치는 깨끗한 1급수의 물에서만 사는 지표종으로 갑각류, 곤충류, 식물의 종자 등을 먹으며 행동이 활발한 것이 특징이다. 산들늪 가는 길은 표충사의 홍제교에서 시작된다. 표충사를 기점으로 좌로는 옥류동천, 우로는 금강동천이 흘러 밀양강의 한 지류인 시전천을 이룬다. 표충사 오른쪽에 위치한 옥류동천의 물길을 따라 2시간 정도 오르면 늪을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다. 안개 낀 옥류동천을 오르는 길은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처럼 신비하고 운치가 있다. 안개가 걷히면서 산새들이 지저귀고 가느다란 햇살이 나무들 사이로 쏟아지면 영산의 신비를 더욱 느끼게 한다. 안개가 밀려가는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면 거친 숨결이 쏟아져 나오지만 계곡의 물소리가 음악이 되어 더욱 힘이 나게 한다. 특히 등산 중간에 만나는 홍룡폭포와 층층폭포의 모습은 막힌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 바라보는 홍룡폭포는 살아 움직이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이제 앉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오를 때, 굉음을 내고 쏟아지는 층층폭포를 만나게 된다. 늪에서 길을 떠난 물방울들이 작은 시냇물을 이루다가 층층폭포에서 하늘로 몸을 흩날려 햇살의 기운을 얻은 다음 광채를 발하는 옥구슬이 되는 모습은 장관이다. 층층폭포를 지나면 임도(林道)가 나오고 이 길을 10분 정도 걸어가면 사자평의 산동초 고사리분교터를 만나게 된다. 낮은 지대의 하천 조건 갖고 있어 1997년까지 이곳에서 몇몇 사람들이 등산객에게 민박을 치며 생계를 이어갔으나 식수원 보호를 위해 마을을 철거하면서 학교 역시 마을의 운명과 함께 사라지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마을 터에서부터 4.1㎢(125만평)의 사자평이 시작된다. 사자평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에는 1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넓은 평지의 군데군데에 억새밭이 펼쳐지고 푸른 하늘과 배경된 분지가 가슴을 더욱 넓어지게 한다. 마을 터에서 수미봉으로 난 임도를 500m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산들늪으로 들어서게 된다. 길의 일부가 계곡물에 의해 유실됐지만, 작전도로를 따라 경작지로 사용되던 억새밭에는 잣나무와 소나무가 늘어서 있고, 이곳에서 700m를 지나 오른쪽 샛길로 빠져들면 잘 보존된 늪의 중심부로 들어서게 된다. 질퍽한 길을 걸어 진퍼리새군락을 지나면 작은 실개천이 나타나는데, 이곳을 건너면 지금은 늪의 모습을 거의 회복한 계단식으로 조성된 휴경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늪의 중심부로서 봄이면 솜방망이가 여름이면 꽃창포를 비롯한 여러 습지식물들이 꽃을 피우는 곳으로 오리나무군락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의 중간으로는 원동계곡으로 넘어가는 등산로가 있어 오리나무에 매달린 깃발들이 온 몸을 흔들며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작은 실개천의 바닥은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져 있고, 달뿌리풀과 갈대 및 갯버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어 이곳이 700m의 고지대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실개천에 버들치가 무리지어 헤엄치고 가끔씩 미꾸라지가 흙탕물을 일으키며 지나간다. 예전에는 메기 종류인 미유기가 살았다고 하니, 낮은 지대의 하천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저 생명체의 높은 적응력에 감탄을 내 뱉을 수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사자평에 오르는 길은 표충사를 기점으로 여러 갈래인데, 사자봉을 거쳐 가는 길, 수미봉을 거쳐 가는 길, 그리고 울주군과 양산의 원동계곡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다. 또 재약산에는 산들늪 뿐만 아니라 향로봉의 북동쪽 능선부에 칡밭늪이 위치하지만 접근이 어렵다. 늪의 중요성 더하는 다양한 동·식물 사자평의 아름다움은 전국에서 가장 넓다고 하는 억새밭에 있다. 봄이면 칼처럼 생긴 잎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여름이면 초록색 융단을 펼치다가 가을이면 은빛의 물결을 온 산에 뿌려 놓는다. 특히 겨울에 억새의 몸통에 내려앉은 서리는 태양빛을 받으면 영롱하게 빛나 떠나간 억새의 종자를 그리워하는 눈물처럼 보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강한 힘을 발휘해 나약하면서도 강한 힘을 내는 우리네 삶과 비슷하게 보여 더욱 정이 간다.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는 그 자체가 음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이 왔는가’하고 노래한다. 어떤 사람들은 억새를 갈대라고도 한다. 옛날부터 대금을 만들 때, 갈대나 억새의 줄기 속에 붙어있는 흰색의 얇은 속껍질로 대금의 취구와 지공 사이에 있는 청공에 붙여 소리를 더욱 맑고 청아하게 하는 떨림판인 청을 만들었다. 이때 청을 만드는 재료는 산에서 나는 갈대, 즉 억새와 늪에서 나는 갈대로 구분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청은 늪지에서 나는 갈대로 만들었다. 가무를 즐긴 우리 민족은 주위의 자연물을 이용하여 피리를 만들었는데, 버들피리, 보리피리, 갈대피리, 나뭇잎피리 등이 있다. 억새와 갈대는 생김새가 유사하고 이것으로 만든 피리를 갈대피리라고 하다 보니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억새와 갈대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억새가 하늘거리는 산들늪에는 많은 동·식물들이 살고 있다. 주요하게 나타나는 식물군락은 진퍼리새, 삿갓사초, 진퍼리새-오리나무, 삿갓사초-오리나무군락 등이고, 습원의 특징은 저층습원의 특징이 일부 나타나는 중층습원이다. 희귀식물에는 야생보호대상식물 제15호인 천마와 푸른천마, 제42호인 왕제비꽃, 자난초, 복주머니난, 흰제비란, 잠자리란, 닭의난초, 큰방울새란, 방울새란, 등칡, 개회향, 뻐꾹나리, 꽃창포 등이 있다. 그리고 습지식물로는 진퍼리새, 삿갓사초, 동자꽃, 물고추풀, 좀고추풀, 왕비늘사초, 숫잔대, 도깨비사초, 노루오줌, 큰앵초, 쥐오줌풀, 쥐오줌풀, 방울고랭이, 송이고랭이, 솜방망이 등이 있다. 어류로는 버들치가 많은 개체수로 나타났고, 양서류로는 계곡산개구리, 산개구리, 무당개구리, 도롱뇽 등이 서식한다. 특히 계곡산개구리는 집단으로 서식하여 늪의 중요성을 한층 더하고 있다. 파충류에는 멸종위기 보호야생동물인 까치살모사를 비롯하여 대륙유혈목이, 장지뱀, 줄장지뱀, 쇠살모사 등이 발견됐다. 조류는 천연기념물 제323호인 황조롱이와 제327호인 원앙을 비롯하여 물까마귀, 쏙독새, 어치, 멧비둘기, 꿩, 까마귀 등이 나타났고, 곤충에는 베치레잠자리를 포함하여 200여 종류가 발견됐다. 일제가 남긴 상처 갖고 있는 재약산 재약산은 밀양시 단장면과 산내면, 울주군의 상북면의 경계에 솟은 산으로 산세가 수려하여, 〈밀양지〉에 따르면 ‘삼남금강’, ‘한반도의 영산’으로 불린다고 한다. 수미봉을 중심으로 동쪽을 옥류동천, 서쪽을 금강서천, 중앙을 사자황평으로 나누고 있다. 동계인 옥류동천은 울창한 수림과 기암절벽으로 흐르는 계류가 ‘구슬 같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무지개가 영롱하게 생기는 2층으로 이루어진 층층폭포, 꽃이 만발한 계곡에 쏟아져 내리는 용의 모습을 한 홍룡폭포, 학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 학암폭포 등의 절경이 있다. 서계인 금강서천은 옥류동천과 쌍벽을 이루는데, 금강폭포, 금강대, 내원계류가 절경이며, 사자봉의 북서쪽 사면에는 가마볼폭포, 호박소와 구연폭포를 포함하는 천연기념물 제224호인 얼음골이 위치한다. 사자황평은 사자평으로 불리는 곳으로 사자봉과 수미봉의 동남쪽에 넓게 펼쳐진 수목지대와 억새밭을 말한다. 재약산의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한센씨병에 걸러 전국의 명산과 약수를 찾아 두루 헤매다 표충사에 이르러 영정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 그때부터 이 절의 북동쪽에 솟아오른 봉우리를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약초들이 가득 자라는 재약산 수미봉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필봉과 사자봉(천황산)이, 오른쪽으로 관음봉과 문수봉 및 향로봉(약무덤) 등의 연봉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다. 재약산과 천황산은 서로 이름이 혼용되어 불린다. 원래의 명칭은 천황산의 주봉이 사자봉(1189.2m)이고 재약산의 주봉은 수미봉이다. 수미(須彌)는 가장 높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아있다는 상상의 산을 의미한다. 숫자만으로 따지는 인간의 눈에는 사자봉이 재약산의 중심봉우리지만, 부처님의 눈에는 표충사를 배산하고 있는 수미봉이 재약산의 중심인 것이다. 그러나 천황산은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최근에 우리 이름 되찾기 일환으로 천황산 사자봉을 재약산이라 부르면서 혼란이 나타났다. 예전처럼 표충사를 감싸는 산 전체를 재약산으로 하고, 원래의 봉우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면 쉽게 해결될 텐데 아쉽다. 그 뿐만 아니라 일제의 흔적은 산들늪을 포함하는 사자평에도 남아 있는데, 사자평의 더 넓은 분지에 스키장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낸 흔적이 지금의 거대한 억새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선조는 표충사와 전국의 4개 사찰에 스님의 제일 높은 자리인 도총섭을 내렸는데, 일제는 영남을 넷으로 나눈 다음 표충사를 통도사의 말사로 만들고 그 정기를 훼손하였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망가진 재약산, 민족정기를 보존하는 차원에서 원래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정확하게 홍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의 변화 고스란히 간직해 산들늪은 한 생태사진작가가 헬기를 타고 영남 알프스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카메라에 담아 발견됐다. 평소 산지늪에 관심이 많았기에 전문가에 의뢰했고 그들의 현지답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단지 산의 일부분이었던 늪에 2001년 말 산들늪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를 계기로 다음해에는 산들늪 가까이에 칡밭늪이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 오랜 시간의 변화를 몸으로 보여주는 산들늪은 늪에 얽힌 이야기도 많지만, 늪 주변에서 생활해온 우리네 소박한 삶의 이야기도 많이 전하고 있다. 산들늪을 에워싸고 있는 울주군의 원동계곡, 얼음골계곡, 표충사계곡의 자연미는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깊은 산의 골짜기마다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문화유적들이 널려 있다. 표충사는 신라 태종무열왕 1년(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829년에 영정사로 이름을 바꾸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그 뒤에 폐사되었다가 1839년에 사당 3칸을 신축하여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한 사명·서산·기허대사의 진영과 위패를 무안면 표충사에서 옮겨오면서 절 이름을 영정사에서 표충사로 고쳐 불렀다. 그래서 표충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사당과 서원을 겸비한 사찰이 되었고,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 보물 제467호인 삼층석탑, 사명대사 유물 200여 종과 각종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얼음골은 여름에 얼음이 얼고, 겨울에는 더운 김이 오르는 신비한 곳이다. 3000평의 너덜지대에서 6월 중순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해 더워질수록 얼음이 더 많아지다가 삼복에 최대가 된다. 반대로 겨울에는 바위틈에 얼음 대신 김이 올라오고 계곡을 흐르는 물도 얼지 않는 곳으로 천연기념물 제224호로 지정됐는데 이는 단열냉각에 의해 나타난 자연현상이다. 또 얼음골에는 호박소라는 못이 있는데 폭포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돌을 움푹하게 만들어 절구 모양으로 만들었고, 이무기가 글을 읽고 용이 되어 호박소에 잠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처럼 귀중한 유산을 품고 있는 산들늪이 요즘 몸살을 앓고 있다. 과거에 개간되어 경작지로 이용했던 곳이 복원되지 않았고, 산들늪에 쇠사슬을 채우고 있는 임도는 더욱더 늪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특별히 사냥과 산악 종주 목적으로 운행되는 오프로드 차량에 의한 습원의 파괴는 더욱 심각하다. 그나마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다행한 일이나, 복원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될지 많은 고민을 해야 되는 시점이다.
여느 날 아침보다 한 시간이 더 지나도 하인이 오지 않았다. 타고르는 시간이 갈수로 점점 화가 났다. 그는 하인에게 줄 여러 가지 벌을 생각했다. 세 시간이 지나자 타고르는 벌에 대해서는 그 이상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여러 말 않고 해고시켜서 내쫓기로 마음먹었다. 한낮이 되자 마침내 하인이 나타났다. 하인은 말 한마디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했다. 타고르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다 그만 두고 나가!” 하인은 그제야 뒤돌아서서 마지막 인사를 올린 후 “정말 죄송합니다. 어젯밤 제 딸년이 죽었습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캘커타의 르네상스 연 타고르가 타고르는 하인의 말을 듣고 경솔했던 자신을 크게 책망했다. 부끄러워 하인을 볼 수 없었다. 이 충격적인 일이 있은 후 타고르는 어떠한 경우라도 상대방의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는 남을 탓하거나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동양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도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가 하인에게 화를 낸 이 일화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하는 에피소드이다. 타고르 가문은 우리나라 경주 최부잣집이나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같이 엄청난 재력을 가진 양반계급의 부자였다. 타고르가는 인도의 명문가였지만 종교적 요인으로 브라만 계급에서 추방당했다가 타고르의 할아버지가 캘커타의 대부호가 되면서 가문의 명예를 되찾았다. 타고르의 할아버지 드와르카나드는 자선 활동뿐만 아니라 캘커타 국립도서관과 캘커타주립대학을 세웠으며 캘커타 최초의 병원과 의과대학 설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 현재 이 대학은 인도 의학교육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바로 시인 타고르의 아버지인 데벤드라나드 타고르이다. 데벤드라나드는 종교 개혁가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사업수완을 이어받아 사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후원자 역할도 물려받았다. 그의 대저택에는 늘 시인과 학자, 종교개혁가, 철학자, 무용가 등 예술인, 화가와 천재들이 몰려들었다. 음악가들이 초대되어 연주회도 끊이지 않았다. 즉, 타고르의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도 캘커타의 르네상스를 연 후원자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업수완과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 등을 배우고 자란 타고르는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가, 문학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존경받는 부자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300여 년 동안 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을 도왔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15세기에서 18세기 초반까지 300여 년 동안 피렌체를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예술인들을 지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열었던 것이다. 타고르가는 바로 인도의 메디치가라고 할 수 있다. ‘왕따’가 근대교육의 기틀 만들어 타고르가를 보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명문가들처럼 3대에 걸친 노력과 헌신으로 명문가로 발돋움 했고 그 중심에는 사회에 대한 기여와 함께 남다른 자녀교육의 열정이 있었다. 어린 시절 타고르는 학교에 대해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갖게 되었다. 타고르는 7살이 되기도 전에 당시 명문가들이 그렇듯이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를 했다. 학교에 입학한 타고르는 얼마 안 돼 선생님에게 그만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선생님은 늘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적이었고, 학생들을 편애하거나 불공평하게 대했다. 타고르는 유년시절 학교교육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14살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타고르는 17살에 영국에 유학을 갔지만 거기서도 적응을 하지 못했다. 타고르는 단 한 개의 졸업장도 따지 못했다. 이는 타고르가 평생 교육문제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타고르의 학교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이 오히려 인도 국민들에게는 약이 되어 인도 근대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초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왕따’를 당했던 타고르를 동양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 것은 아버지의 지혜 덕분이었다. 먼저 타고르를 키운 것은 학교가 아니라 집이었다. 학교교육을 그만 둔 타고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당시 캘커타의 문화예술인들을 초청해 거의 매일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철학, 과학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한쪽에서는 인도의 전통 음악이 연주되었다. 타고르가의 응접실은 어린 타고르에게 ‘살아있는 학교’ 그 자체였다. 또한 타고르는 집에서 독서를 통해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과 사상을 흡수했다. 집은 타고르에게 더할 나위 없는 산교육의 장소였다. 음악가이자 사상가, 수학가인 형들(타고르는 14남매 중 막내)의 도움도 컸다. 타고르 아버지의 이러한 자녀교육으로 형제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재능을 폈다. 형제들은 각자 화가와 시인 또는 음악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타고르의 큰형은 시인이자 음악가, 철학자, 수학자이면서 사상가로 타고르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둘째 형은 인도 고등문관(고시)을 통과한 최초의 주인공으로 산스크리트 학자였다. 다섯째 형은 음악가이자 시인, 극작가, 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다섯째 누나는 음악가이자 작가로서 벵골 최초의 여류 소설가였다. 우연인지 몰라도 막내 가운데 위대한 인물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퇴계 이황은 8남매 중 막내였고, 톨스토이는 4남 1녀 가운데 4남으로 태어났다. 공자는 이복형제가 10남매 있었고 아들을 원한 아버지가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해 낳았다. 공자 역시 막내인 셈이다. 세계적인 가족기업인 발렌베리 그룹을 일군 안드레 발렌베리도 막내였다. 300년 가까이 음악명문가를 이룬 바하는 8남매의 막내다. 이는 막내의 경우 성장기를 통해 형들로부터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에서 자란 타고르는 동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한 시집 〈키탄잘리〉를 비롯해 소설, 단편, 희곡, 평론, 전기,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책을 냈다. 또 뮤지컬을 비롯해 2000여 곡의 음악뿐만 아니라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가도 작곡했다. 그림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 수채화 3000여 점을 남겼다. 성공의 원동력 된 히말라야 여행 어린 시절 어린 타고르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사건은 아버지와 떠난 4개월 동안의 히말라야 여행이었다. 타고르는 11살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타고르 부자가 처음 도착한 곳은 샨티니케탄으로 후일에 타고르의 대안학교가 세워져 세계적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먼저 아들에게 대자연의 한가운데서 우주의 신비와 무한한 상상력을 맛보게 했다. 아버지는 이미 샨티니케탄에 땅을 사둔 상태였다. 타고르가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캘커타에서 약 100마일 정도 떨어진 샨티니케탄의 친구집을 가다 광대한 평원을 접했다. 그는 그만 그 광경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는 결국 그 땅을 친구로부터 사들였다. 요즘처럼 단순히 땅 투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 집을 짓고 ‘평화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미래에 타고르 가문이 학교를 세운 교육도시 샨티니케탄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첫 여행지로 타고르를 데리고 샨티니케탄에 들른 것은 아들을 위해 미리 계산된 여정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아버지는 그 여행지에서 타고르에게 산스크리트어나 영어로 된 문학작품을 가지고 가서 읽게 했다. 그리고 밤하늘에 찬란한 별들이 빛나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우주의 신비로움 등 천문학을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여행지에서 타고르에게 특별한 체험을 하게 했다.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상인집안의 후예답게 돈에 대한 책임감을 길러주기 위해 여행경비를 관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돈지갑을 맡기고 매일 지출을 적게 하면서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경제교육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상업으로 거부가 된 가문답게 어릴 때부터 돈 관리 교육을 철저하게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실전경험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타고르 부자는 히말라야로 가는 도중에 시크교도의 성지에도 오래 머물렀다. 인도는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발상지이다. 또 힌두교와 이슬람의 신비사상을 접목한 시크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다양한 종교로 인해 종교 간 갈등이 심한 인도에서는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와 존중심이 중요하다. 다른 신을 존중하는 것은 갈등을 해결하는 중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가였던 타고르의 부친은 아들에게 시크교의 황금사원을 참배하고 때로는 신도들의 모임에 참석해 찬송가를 불렀다. 이는 후일 타고르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아이에게 종교에 대한 포용성을 갖게 해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게 하는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 중에도 계속된 자녀교육 집을 떠나 한 달간 여행을 한 타고르 부자는 4월 초봄에 히말라야에 도착해 3개월을 보냈다. 해발 2000m 고지의 산장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온통 히말라야 삼나무로 울창했고, 소년에게는 처음 보는 꽃들로 가득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곳에는 흰 눈에 덮인 히말라야 봉우리의 신비스런 모습이 눈앞에 다가왔다. 11살 소년은 대자연의 신비로움에 매료돼 절로 경탄의 감정이 일렁거렸다. 소년 타고르는 히말라야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에 빠졌고,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여행의 목적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소년은 대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호흡하게 하면서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 공부하게 했다. 대자연속에서 뛰놀게 하면서도 교만이나 나태함,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자녀교육에 나선 것이다. 타고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정신을 차린 후에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원전 1000년 전에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우파니샤드〉를 읽었다. 아버지가 낭송하면 소년은 이를 들으면서 음률을 듣게 했다. 이어 태양이 떠오를 때쯤 아버지와 아들은 히말라야의 정기를 호흡하면서 아침 산책에 나섰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 영어를 가르치고 히말라야의 눈을 녹인 찬물에 목욕을 하게 했다. 오후에도 수업을 진행하며 마냥 놀게 하지 않았다. 히말라야의 대자연으로 여행을 가서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교육방침대로 아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요즘 자녀들과 함께 세계일주 여행에 나서는 일부 부모들의 경우 여행 그 자체만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년이나 6개월 혹은 한 달 등 기간을 잡아 해외여행을 하더라도 타고르의 아버지와 같이 대자연속에서 모험을 체험하게 하면서도 정해진 계획이나 원칙에 따라 공부하는 여행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여행이나 모험의 경험만 강조하다보면 단순한 여행으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무리한 일정으로 심신이 지쳐 제대로 여행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와 함께 한 대자연속에서 머문 4개월 동안의 모험여행은 소년 타고르에게는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 특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타고르에게 아버지는 최고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학교에서 배워야 했던 모든 것들을 짧은 4개월간의 여행기간에 배울 수 있었다. 캘커타에 돌아온 소년 타고르는 더 이상 4개월 전의 철없는 소년이 아니었다. 요즘도 도보로 전국 산하를 누비면서 극기여행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방학에는 초등학생 대상의 도보체험도 있다. 이러한 여행을 다녀오면 아이들이 훌쩍 자란 것을 볼 수 있다. 인내심과 책임감이 강해질 뿐만 아니라 단체 활동에서 오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심도 높일 수 있다. 아이들은 여행을 하면서 온몸으로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 단계 성숙한 아이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한 타고르의 여행은 훗날 그를 시인이자 사상가, 교육가로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됐다.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신뢰, 대자연에서 호흡한 경이로움, 아버지로부터 흡수한 지식에의 열정, 종교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배려 등은 모두 이 여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타고르는 훗날 회상했다. 100년 전 대안교육 시작한 교육가 타고르의 아버지는 여행지에서 타고르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연과 호흡하게 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히말라야 산장에서조차 영어수업을 직접 할 정도로 자녀교육에 원칙과 목적을 가지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녀교육으로 타고르 가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타고르라는 큰 인물을 배출했다. 그리고 타고르는 인도에 근대교육을 뿌리내리게 하면서 시인뿐만 아니라 교육가로도 큰 명성을 얻게 됐다. 현재 캘커타의 중심부에 있는 타고르의 저택은 대학교로 변모했다. 또 샨티니케탄은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대안교육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타고르는 샨티니케탄에 우리나라의 ‘간디학교’와 같은 대안학교를 이미 100여 년 전에 세워 자연 속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그는 1901년 그곳에 학교를 세우고 그의 다섯 자녀를 비롯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21년에 비슈바바라티대학교로 확대되어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연구하는 대학으로 발전했다. 특히 이곳에서 두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타고르가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빈곤 문제로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1998년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또 세계적인 영화감독, 예술가들이 이곳 출신들이다. 오늘날 교육이 단순히 획일적인 인간보다 창의적인 인간을 원한다고 볼 때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배우며 상상력을 키우는 샨티니케탄은 그 어느 곳보다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아이들은 규제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 더 궁합이 맞다. 억압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분위기에서 더 성숙하는 것이다. 자녀교육은 성적이 아니라 ‘원칙’이 중요하다. 아이에게 상상력을 키워주면서 지식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 원칙만 있다면 아이가 입시나 성적 지옥에서 벗어나 독서와 다양한 산 체험을 통해 재능을 키울 수 있다. 아이들의 성적이 뒤처져 고민에 빠져있는 부모라면 한번쯤 노벨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한 타고르의 샨티니케탄을 떠올려보자. 그곳에 해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끝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르 드블레는 어머니와 자녀 간의 친밀한 관계를 ‘신비적인 관계’라고 표현했다.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가 서먹서먹하다면 타고르처럼 아빠와 자녀만의 여행이나 등산을 떠나보자. 부자유친과 함께 아이에 대한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대책 없는 후버 가족의 로드무비 후버 가족은 자타가 공인하는 인생 낙오자들이다. 한 번도 성공다운 성공을 맛보지 못했으면서 ‘9단계 성공비법’을 강의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끊임없이 성공을 강요하는 아버지, 마약문제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채 손자에게 하루라도 젊었을 때 더 많은 섹스를 권유하는 괴짜 할아버지, 최고의 지성을 자칭하면서도 제자인 대학원생 연인에게 버림받아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는 게이 삼촌, 격무에 시달리며 이런 가족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지친 엄마, 이 모든 가족들이 끔찍하게 싫어 공군사관학교에 갈 때까지 침묵을 맹세한 오빠,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인대회에 나갈 꿈에 부푼 올챙이배를 가진 막내 올리브가 바로 후버 패밀리다. 세상에 가족만큼 사랑과 증오라는 극단적인 감정이 뒤엉켜 있는 집단이 또 어디에 있을까? 누구보다 많은 시·공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친밀함을 이유로 서로 간의 다름이라는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끊임없는 강요와 간섭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족관계는 사람에 따라 차가운 익명의 사회보다 참기 힘든 고통이 되기도 한다. 평안한 안식처로서의 가정이 지옥이 되어버린 것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서로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게 하는 분주한 일상, 치열한 경쟁사회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체에 직면한 후버 가족의 모습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위기의 가족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서로 얼굴조차 마주치기 싫어하는 이들은 그러나 ‘미스 리틀 선샤인’을 뽑는 미인대회에 출전하게 된 올리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고, 이후 대책 없는 가족들의 좌충우돌 로드무비가 펼쳐진다. 서로의 깊은 생채기들을 만나다 영화는 짓궂게도 가족 간의 위기 해결을 위해 이들을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는 극약처방을 선택한다. 올리브를 위해 마지못해 떠난 여행의 와중에 게이 삼촌은 초라한 모습으로 경쟁 학자와 함께 있는 헤어진 연인을 만나게 되고, 오빠 드웨인은 자신이 색맹이어서 비행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또 성공비법을 책으로 출판할 꿈에 부풀었던 아버지는 계약에 실패하고 만다. 게다가 미니버스의 클러치는 고장 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회장소를 코앞에 두고 할아버지는 마약 과용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이렇듯 좁은 미니버스 안에서 며칠의 시간을 같이 지내며, 가족들은 그간 일상의 적당한 거리감 속에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서로의 깊은 생채기들과 대면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보다 깊은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게 마련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 위험에는 관계를 위해서 시간이나 물질과 같은 유형적인 어떤 것은 물론 자신의 연약함이나 상처, 자존심 등을 내주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포함된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에게 다가선다고 해서 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에게 깊은 애정으로 끊임없이 다가서려 하는 엄마의 노력은 외면당하기 일쑤이며, 침묵에 빠진 조카를 도우려는 삼촌의 따뜻한 마음은 ‘너나 잘 하세요’라는 핀잔으로 머쓱해지곤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시도는 올리브의 아빠가 즐겨 사용하는 ‘립 서비스’에 머무는 말뿐인 관계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열린 만남의 관계를 자라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양을 조성한다. 좌절의 순간 함께하며 희망 찾아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미스 리틀 선샤인’ 선발대회 장소에서 후버 가족은 자신들이 상상했던 동네 장기자랑 정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대회장의 분위기와 아이들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화려한 의상, 어른 못지않은 진한 화장 그리고 깜짝 놀랄 만한 장기로 무장한 채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는 어린이 미인대회 현장의 풍경은 성공을 향한 어른들의 생존경쟁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가족 안에서 볼록 나온 귀여운 올챙이배를 지닌 귀엽기 짝이 없던 올리브의 모습은 반짝거리듯 치장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볼 때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이미 실패와 좌절의 순간을 맛볼 만큼 맛본 가족들은 공개적인 모욕과 망신을 당할 것이 빤한 올리브의 출전을 막으려 애쓴다. 하지만 선택은 올리브의 몫이었고, 결국 막내는 무대에 나가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엉성한 스트립쇼 안무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에 기겁한 대회 관계자들은 올리브를 무대에서 끌어내리려 하고, 이를 막기 위해 엉겁결에 무대 위로 뛰어올라간 온 가족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춤을 추고 있는 올리브의 모습을 보며 함께 ‘막춤’을 춘다. 대회장은 이내 난장판으로 변하고 온 가족이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짧은 며칠간의 고통스런 여행을 통해 후버 가족은 점차 깨달아가고 있었다. 진정한 가족이란 성공의 순간에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가장 밑바닥 그 좌절의 순간에 오히려 더욱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행 내내 후버 가족을 괴롭혔던, 클러치가 고장 난 미니버스는 이런 깨달음을 가능하게 했던 일등 공신이다. 비용과 시간문제로 도저히 차를 수리할 수 없었던 가족은 결국 기어를 바꿀 수 있을 때까지 차를 함께 밀기로 결정한다. 혼자서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는 미니버스의 모습은 낙오자 인생을 살아가는 후버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상징한다. 유일한 희망은 함께 땀을 흘리며 앞을 향해 버스를 미는 것이다. ‘소유’ 아닌 ‘존재’ 자체가 행복 이윽고 버스는 움직이고 다시 한 번 재기를 향한 힘찬 질주는 시작된다. 물론 버스는 머지않아 다시 멈출 것이다. 하지만 버스를 같이 밀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 힘이 바로 어린 올리브가 무대 위에서 실패의 구렁텅이로 내동댕이쳐질 그 순간에, 망신을 무릅쓰고 모든 가족이 그녀와 함께 있기를 선택하게 한 능력의 비결이다. 비록 미인대회의 낙오자이자 인생의 낙오자들로 이루어진 가족이었지만, 막내의 황당한 춤을 따라 망신당하기를 작정하고 함께 몸을 흔들며 춤추고 즐거워하는 이 대책 없는 가족들의 단란한 한때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세상에 오직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하고 그 승패라는 것이 사회적인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는 리차드의 믿음처럼 현실은 더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는 주류적인 인생만을 긍정하고 칭찬한다. 하지만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서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삶의 진정한 행복을 이루는 원천이 된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러나 평범하기에 다들 외면한 채 살아가는 생의 진실을 한 삼류가족의 실패기로 풀어낸다. 가족들이 한데 뭉쳐 모진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을 쟁취한다는 식의 대개의 주류 가족영화와 달리, 미인대회의 꼴찌라는 명백한 실패로 드러난 결말을 도리어 역설적인 성공의 장으로 여겨지게 만든 ‘비주류’적인 구성은 영화가 마지막까지 현실감을 잃지 않게 하는 매력적인 설정이다. 영화정보 제 목 : 미스 리틀 선샤인 (Little Miss Sunshine) 감 독 : 조나단 데이톤, 발레리 페리스 출 연 : 그렉 키니어, 토니 콜레트, 알란 아킨 관람등급 : 15세 관람가 제작연도 : 2006년
Q1. 현재 임신 5개월인 여교사입니다. 육아휴직을 신청하려고 하는데 가능한지와 출산휴가는 언제쯤 사용할 수 있을까요? 또 육아휴직기간이 전보내신을 위한 현임교 근무연수에 포함되는지요? A1. 「교원휴가업무처리요령」에 의하면 육아휴직은 임신·출산·자녀 양육을 사유로 신청할 수 있으나 임신 중에 심한 입덧이나 부작용 또는 안정이 필요한 경우 일반 병가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출산휴가(90일)는 산모의 건강을 고려해 출산일 또는 출산예정일 이후 45일 이상이 확보돼야 하므로 출산예정일 45일 전부터는 언제라도 육아휴직원을 제출하고 출산휴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출산휴가 기간은 보수(시간 외 근무수당 등 특정수당 제외)가 정상 지급되며, 경력에도 100% 포함됩니다. 이처럼 여직원이 임신 또는 출산하게 된 경우 모두 육아휴직 신청이 가능합니다. 한편 출산휴가는 전보내신을 위한 현임교 근무연수에 포함되지만 육아휴직은 실제로 교육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됩니다. 또 「교육공무원법」 제44조 제1항에 의거 육아휴직은 본인이 원하는 경우 인사권자는 휴직을 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신청하면 반드시 최초 1년은 사용 가능할 것입니다. Q2. 쌍둥이 출산으로 인한 육아휴직 연장 여부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A2. 육아휴직의 기간을 경력(근속기간)에 산입하는 경우 1자녀에 대해 최초 1년만 인정합니다. 따라서 쌍둥이의 경우 각각의 자녀에 대해 1년씩 휴직을 해야 2년간의 휴직을 모두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즉, 쌍둥이의 경우 첫째 자녀의 휴직을 먼저 실시하고 둘째 자녀가 만 1세가 되기 전에 첫째 자녀에 대한 휴직은 복직하고 둘째 자녀에 대해 휴직해야 각각의 자녀에 대한 휴직 기간 중 최초 1년 이내의 기간(최장 2년)이 경력으로 인정됩니다.
“편수, 온반, 감자농마국수…직접 만들어요” 휴전선 인접 지역인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 6·25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의 점령지였으며 전쟁 후 남한에 편입된 대표적 군사지역이다. 현재는 3개 연대 1만여 명의 군인이 상주하고 있다. 금강산 여행, 개성 공단 가동,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간의 화해 분위기 조성으로 북한에 대한 경각심이 많이 사라졌지만 곳곳에 보이는 군부대 탓인지 천도리엔 아직도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화해와 안보, 균형 맞추는 교육 그러나 천도리 서하초등학교(교장 장일범) 학생들은 경직된 모습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밝고 활기찼다. 장 교장은 “2005년부터 2년간 통일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돼 우리 고장에 대한 특성과 북한 주민들의 실생활을 이해하고, 군인들과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접적지역이라는 특성상 통일·안보교육을 매년 실시했지만, 시범학교 운영으로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통일교육의 기틀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서하초는 시범학교를 운영하면서 교육과정과 연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인근 군부대와 지역 주민이 함께하는 행사를 마련해 큰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통일교육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화해와 안보의 균형을 맞추는 것. 남북 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다고는 하지만 지난 해 발생한 북한의 핵 실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언제든지 긴장 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서하초는 인근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군부대를 방문하고, 금강산 체험을 하는 등 현장체험학습에 신경을 썼다. 특히 철의 삼각지, 제4땅굴 및 을지 전망대, 군부대 병영체험, 향로봉 전적지 탐방, GOP 견학 등 테마 중심의 체험으로 전쟁의 비참함을 간접 체험하고 분단의 현실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금강산 체험학습에 참가했던 이 학교 졸업생 양소연(14)양은 “북한을 방문하면서 신기하기도 했지만 남측과 북측의 출입사무소가 나눠져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며 “하루빨리 통일이 돼 남북한이 반갑게 만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방문소감을 밝혔다. 또 통일 골든벨 퀴즈 대회, 향로봉 등반 문예대회, 통일 독서 대회, 북한 음식 만들기, 새터민 강사 초청 강연회 등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평화 통일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과 이해를 높였다. 북한에 대한 이해 높인 음식 경연대회 이 중에서도 가장 높은 효과를 본 것은 북한 음식 만들기 경연대회다. 대회 전에 그 음식이 발달하게 된 지역 환경 조건, 역사적 배경, 문화 환경 등을 교육과정과 연계해 자연스럽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학생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학부모, 지역 주민이 시식을 하고 평가를 함으로써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함께 통일교육을 받은 대회였다. 또한 새터민 강사 초청 강연회에도 지역 주민들을 초청해 함께 북한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서화초를 방문한 통일교육원 김희봉 사무관은 “서화초 학생들의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과 지식 그리고 통일교육 결과물들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며 “어린 세대의 통일의식이 점점 엷어지고 있는 어려운 시기에 서화초의 교육사례는 학교 통일교육의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서화초는 시범학교 운영을 마치면서 〈분단을 넘어 통일로 - 인제군 남북관련 자료를 중심으로〉를 발간했다. 시간이 지나 인제 지역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고 지리적으로도 지형이 변해 과거의 흔적이 사라져 자료집을 만들었고 통일교육원의 검수도 받았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자료집은 6·25 한국전쟁을 전후한 인제군의 생활상과 현재 인제군의 안보시설 및 전적지를 소개하고 있다. 자료집은 서화초 교사들이 직접 지역주민의 증언을 녹취·기록하고 한국전쟁 당시 전쟁 사료를 모아 완성했고 강원지역 초등학교 및 인제군 각급 기관에 배포돼 중요한 지역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자료집 발간을 주도한 신문수 교무부장은 “수업과 병행해 자료집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교직원들이 사명감을 갖고 노력한 끝에 완성할 수 있었다”며 “우리 고장의 사라져가는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뜻 깊은 자료로 많은 곳에서 활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밝고 여유 있는 학교로 변신해 서화초가 시범학교를 운영하면서 거둔 성과는 무엇보다 학생들의 얼굴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전교생의 60% 이상의 군인자녀로 전·출입이 잦고 원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워 늘 불안한 표정이었던 것. 그러나 통일교육을 통해 지역 환경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 북한도 한민족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면서 한결 여유가 생겼다. 또 인근 부대의 사병과 함께한 ‘통일기원 서화축제 한마당 운동회’와 교대, 유학생 출신의 사병들이 강사로 나선 영어 교실 등으로 군인들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졌다. 전국에서 모인 군인 자녀들이 거쳐 가는 학교가 아닌 계속 다니고 싶은 학교로 변모한 것이다. 207명 전교생의 이름은 물론 가정환경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는 장 교장은 “지난 해에 전학 간 아이들이 홈페이지에 우리 학교를 그리워하는 글을 올리는 것을 보면 뿌듯하다”며 “서화초를 다녔던 학생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향 같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서화초는 올해도 통일관련 문예행사와 체험활동을 계속할 예정이다. 특히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각종 통일교육 관련 자료를 공유하는 통일교육 홈페이지 활용에 힘쓰고 있다. 장 교장은 “공간 문제로 그동안 마련한 자료를 전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하루 빨리 공간을 마련해 지역주민과 학교 방문객들이 통일과 관련한 자료들을 볼 수 있도록 해 통일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엄성용 esy@kfta.or.kr
문제1 다음은 개념 변화의 과정과 조건에 대한 구성주의 입장이다. 이를 참고하여 구성주의 학습에서 전제하는 지식의 성격(지식관)을 설명하고, 그 관점에 의거하여 전통적인 교실 수업이 안고 있는 문제점 및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교사의 역할을 논하시오. 1) 학습자는 자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개념이 사고와 행동에 있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한 그 개념을 바꾸지 않는다. 2) 새로운 개념이 학습자에게 감지 또는 이해되기 어려울 때에는 개념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3) 새로운 개념이 학습자에게 참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그럴듯하게 느껴질 때 개념변화가 시작된다. 4) 학습자는 새로운 개념이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도구로서 가능성이 느껴질 때 새로운 개념구성에 적극적으로 전념하게 된다. 1. 序論 시대가 변하면 교육내용과 방법도 변하기 마련이다. 창의성과 다양성이 중시되는 지식정보화 사회는 창의력과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강조하는 구성주의 패러다임이 교육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교육은 아동을 수동적인 학습자로 간주하고 교사가 제공하는 교육내용만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학생(아동)에게 형성되어 있는 선 개념이나 발달수준은 고려하지 않는다. 오직 교사가 중심이 되어 아동에게 지식과 기능 등을 무조건적으로 주입시킴에 따라 학생들의 창의성이나 자기주도적 문제해결능력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2. 本論 구성주의에서 전제하는 지식은 절대적으로 존재하기보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변한다고 본다. 따라서 학생들이 습득한 지식(知識)이란 자신의 개념이나 이미지 등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고, 학습(學習)이란 개인의 인지작용이나 타인의 도움을 바탕으로 한 경험의 재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효과적인 교수(敎授)를 위해서는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학습자의 특성인 발달단계, 선행경험, 선개념 등을 고려하여 근접발달 영역의 범위 내에서 적절한 인지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과제나 실생활의 다양한 경험을 학습기회로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의미를 형성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실수업은 학생의 선개념이나 경험을 중시하기보다는 여전히 지식 전수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교육내용 조직이나 교수방법 및 평가 등에 있어 학생들이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 교사 중심의 획일적 전달 교육은 모든 학생에게 적합한 교육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는 우선 학습자가 중심이 되어 지식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실제 상황 하에서의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협력학습이나 다양한 문제 상황 하에서의 상황학습이나 문제기반학습, 웹기반학습, 토의나 토론학습, 협동학습은 창의적 문제해결력이나 자기주도적 학습력을 향상시킬 것이다. 끝으로 실제 상황 하에서의 학습 과정과 결과를 관찰법이나 포트폴리오 등 다양한 평가방법에 의해 평가해 줌으로써 학생들의 성취동기가 강화될 것이다. 3. 結論 ‘새 술은 새 포대에 담는다’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지식과 관점들을 요구된다. 구성주의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학교교육과 교사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에 의한 주입된 지식은 의미 있는 지식이 될 수 없고 문제해결에 이르기 어려운 만큼 교사는 시대에 적합한 지식관을 인식하고 학생 스스로의 탐구와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구성주의 학습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 참고자료 구성주의 1. 구성주의의 배경과 의미 가. 배경 1) 정보화 사회는 지식과 정보가 자원이 되는 사회로서 변화, 불확실성, 다원주의,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 창의성 등으로 특징화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의 도래와 함께 교사 중심의 교육으로부터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지배적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시도되고 있다. 2) 수동적인 학습자 대신 적극적인 학습자의 역할, 지식전달자로서의 교사 대신 학습자의 학습을 도와주는 조언자나 촉매자로서의 역할, 탈상황적 지식의 습득에서 특정상황에 기반을 둔 지식의 습득, 그리고 비현실적인 지식의 습득대신 실제성을 지닌 지식의 습득이라는 대안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나. 의미 구성주의는 지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인식론(認識論)의 한 유형으로서 17세기 이후 20세기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대한 인식과 실천 양식을 지배해 왔던 객관주의 혹은 합리주의 인식론에 대한 대안적 이론체제이다. 2. 객관적 인식론과 구성주의(상대적 인식론) 가. 절대적·객관적 인식론 1)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 인식론자들은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 세계를 가정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는 그 자체의 질서와 법칙이 내재되어 있는 독립적인 자기 폐쇄적 세계이다. 2) 인식이란 엄밀한 관찰과 사유를 통하여 그 객관적 세계를 아무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표상 혹은 반영하는 행위이다. 3) 인간은 합리적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 실재세계를 반영 혹은 표상을 통해 과학적·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4) 따라서 객관적 실재가 오차 없이 정확하게 우리의 마음에 반영될 때 그것은 참된 지식이요, 진리가 되며 대상을 인식하는 자아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나. 상대적 인식론(구성주의) 1) 구성주의는 이러한 객관주의의 절대적·객관적 인식론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2) 인간은 누구나 특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사회의 특수한 상황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3) 각 개인은 그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제반 사회적 경험의 영향에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인식을 더해 삶을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구성해 나가게 되는데 그 결과 생성된 것이 지식이다. 4) 그러므로 지식은 완성되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보편적이거나 총체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생성과 재구성의 과정에 있으며, 특수하고 제한적인 것이다. 5) 따라서 구성주의의 최종목표는 절대적 진리나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고 이해하는 데 본인에게 의미 있고 적합하고 타당한 것이면 그것을 진리요 지식이라고 보고, 이런 지식과 진리를 구성해 나가는 것과 그 과정이 목표가 된다. 3. 구성주의 교육의 두 유형 학자들은 사회적 요인이 개인의 인지적 발달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 역할, 범위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따라 구성주의를 구분한다. 인지적 구성주의는 지식의 형성 과정에서 각 개인의 인지적 작용을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보고, 사회적 구성주의는 개인이 참여하고 속해 있는 사회·문화·역사적 상황을 주요한 요인으로 보는 입장이다. 가. 인지적 구성주의 1) 기본입장 가) 인간은 객관적 세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적 현실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이 지니고 있는 지식은 그가 삶을 사는 동안에 개별적으로 경험한 것이며 또한 구성의 산물인 것이다. 나) 지식의 구성과정에서 개인의 인지적 경험과 작용을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한다. 다) 인지적 구성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들로는 Piaget, von Glaserfeld, Fonst, Cobb 등이 있다. 이 인지적 구성주의는 특히 Piaget의 발달심리학에 그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2) Piaget의 인지발달이론 가) 인지구조(認知構造) - 인간에게 서로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네 개의 인지구조가 있는데, 각 인지구조는 대체로 연령의 증가와 더불어 순서적으로 나타나며 역행하지 않는다. 나) 발달(發達)의 의미 - 낮은 하위의 인지구조에서 형식성이 높은 상위의 인지구조로 변환되는 것을 발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형식성이 보다 보편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형식이 낮은 단계로 퇴행되지 않게 된다. 다) 발달의 개인차(個人差) - 모든 인간에게 보편성을 지니는 인지구조가 있으나 개인에게 있어서 발달의 정도와 속도는 상이하다. 라) 발달의 요소(要素) ① Piaget는 동화(assimilation), 조절(accommodation), 평형(equilibration)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② 동화(同化)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새로운 것을 조화시킴으로써 그것을 이해하는 것을 말하며, ③ 조절(調節)이란 새로운 사태가 기존의 인지구조에 맞지 않을 때 기존의 인지구조를 새로운 사태에 맞게 변형하는 것을 말한다. ④ 평형(平衡)이란 동화와 조절을 통하여 균형을 이루는 과정이다. 3) 인지적 구성주의자의 지식 인지적 구성주의자들은 지식을 객관적 실재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개인의 인지활동의 결과라고 본다. 즉,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각 개인의 발달과정의 틀 안에서 동화와 조절이라는 인지적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4) 인지적 구성주의자들의 학습 가) Piaget의 학습의 의미 - 동화와 조절을 거쳐 평형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바로 학습이며, 지식의 형성이다. 즉, 학습은 새로운 상황에서 기존의 인지적 평형상태가 와해되어 인지적 혼란이 야기되고, 다시 인지적 평형상태로 복귀해 나가는 과정이며, 인지적 평형상태로 복귀한 결과가 바로 지식인 것이다. 나) Fosnot의 학습 - 학습은 항상 동화의 단계에서 시작되며, 동화적 구조에 부적합한 자극이 왔을 때는 깊은 사고를 통해 조절과 사고의 추상화라는 단계를 거쳐 가는데 이 과정이 학습이라는 것이다. 5) 인지적 구성주의자들의 교수 방식 교수(敎授)란 학습자가 인지적 혼란 상태를 극복하고 인지적 평형상태로 복귀해 나가는 과정을 돕는 일련의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 사회적 구성주의 1) 대두 배경 가) 인지적 구성주의가 지식 구성의 근원을 인간 개개인의 주관적 경험에서 찾으면서 결과적으로 그 개인이 놓여 있는 사회적 상황 또는 맥락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나) 구성주의라는 기본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인지적 구성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난 것이 바로 사회적 구성주의라고 볼 수 있다. 2) 사회적 인지주의의 기본입장 가) 사회적 구성주의는 개인이 참여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역사적 상황을 지식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본다. 즉, 각 개인이 구성하는 현실과 지식은 특정한 사회 공동체 속에서 타인들과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합의된 혹은 공동체적으로 인정되거나 용인된 산물이라는 것이다. 나)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인지의 발달(發達) 혹은 지식이란 사회적 상호작용이 개인적으로 내면화되어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다) 대표하는 학자들로는 Vygotsky, Rorty, Rogoff, Bruffee, Lave, Cole, Cunningham, Wertsch 등이 있다. 3) Vygotsky의 사회발달이론 가) 인간의 특징 - Vygotsky는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를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 그 속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나) 상호작용의 수단(언어나 글) - 상호작용 과정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신의 유의미적인 행동을 다른 구성원에게 전달할 수 있는데, 그 매개체로서 언어나 글과 같은 기호(記號)들이 요구된다. 다) 기호체계의 내면화 - 기호체계는 인류 역사의 과정과 사회 형태 및 그 사회의 문화적 발달 수준의 변화 과정과 더불어 성립하고 발전한다. 또한 사회, 문화적으로 발생된 기호 체계의 내면화는 각 개인의 행동의 변화와 발달 형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개개인의 발달 혹은 변화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와 문화에 기초한다. 라) 사회적 교류의 역할 - Vygotsky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각 개인의 인식 발달에 있어서 사회적 교류가 매우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마) 학습과 내면화 - 지식의 구성 혹은 학습이 처음에는 사회적 수준에서 개인 상호 간에 나타나고, 그 다음으로 개인적 수준에서 개인 내부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식의 구성이나 학습이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개인적 영역으로 전환되는 이 과정을 일컬어 그는 내면화(internalization)라고 하였다. 바) 근접발달 영역 - 인지발달의 가능성은 근접발달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이라는 특정한 기간에 한정되어 있으며, 근접발달영역의 완전한 발달은 사회적 교류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사) 스케폴딩(scaffolding) - 학습은 그 영역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지닌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경우 학습자 개인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나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학습을 도와주는 사람은 경우에 따라 부모나 교사 혹은 동료학생일 수도 있다. 아) 교수·학습 방식 - 학습자의 학습을 돕는 방식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안내나 조언 혹은 협력의 방식이다. 따라서 학습자가 모든 문제해결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안내자, 조언자로서의 관여 정도를 점진적으로 줄여가고, 결국에는 관여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